박(朴)씨는 김(金)씨ㆍ가(李)씨와 함께 우리나라 3대성의 하나로 인구는 약 4백만 명이다. 이 중 밀양(밀성)박씨(密陽(密城)朴氏)가 차지하는 비율은 70~80%로 박(朴)씨의 주류를 형성한다. 그만큼 파도 많고 자손도 많다. 그러나 ‘밀박(密朴)’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모든 박(朴)씨는 신라(新羅) 첫 임금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에 얽힌 전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신라(新羅)가 형성되기 이전에 부족사회인 사로육촌(斯盧六村)이 있었다. 하루는 촌장(村長)들이 알천(閼川)(경주(慶州)지방의 하천)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君長)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 때 갑자기 나정(蘿井)의 숲 사이에 서기(瑞氣)가 뻗치고 용마(龍馬) 한 필이 크게 우는 것이었다. 기이하게 여겨 그 곳으로 몰려가 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알 같기도 하고 박(표(瓢))같기도 한 포태(胞胎)가 있다. 깨보았더니 준수하게 잘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나왔다. 그래서 성(姓)을 ‘박(朴)’이라고 하고 빛(혁(赫))나게 누리(세(世))에 선(거(居))다 해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했다. 나이 13세 되던 해 육촌(六村)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니 신라(新羅)의 출발. 이 같은 건국신화는 고대 사회에서 흔히 있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서라벌 옛 사람들의 소박한 이상을 읽게 된다. ‘맑은 누리’. 밝고 바르고 평화로운 낙토(樂土)의 꿈은 그대로 우리 겨레의 꿈이었고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그 같은 민족 이상의 표상인 셈이었다. 그가 6촌 가운데 힘센 어느 족장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하늘나라에서 온 ‘어린 왕자’였다는 점은 더욱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후 신라(新羅) 56대 ‘천년왕조’는 박(朴)씨와 석(昔)씨, 김(金)씨 등 3성(姓)에 의해 계승되어 왔다. 이 중 박(朴)씨는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정점으로 2대 남해(南解), 3대 유리(儒理), 5대 파사(婆娑), 6대 지마(祗摩), 7대 일성(逸聖), 8대 아달라(阿達羅), 53대 신덕왕(神德王), 54대 경명왕(景明王), 55대 경애왕(景哀王) 등 모두 열 사람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시조는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아홉 아들 중 첫째인 밀성(密城)대군 언침(彦忱)이라고 족보는 전한다. 경명왕(景明王)은 그의 아들 9명 중 8명을 계림(鷄林) 8도(道)(신라 전국)에 봉군했는데 ‘밀박(密朴)’의 본관인 밀양(密陽)(옛 이름=밀성(密城))은 언침(彦忱)이 봉 받은 고을 이름이다.
본관지 연혁
밀양군(密陽郡)은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땅으로 가야국(伽倻國)의 판도(版圖)에 들어갔다가 신라 법흥왕 때 추화군(推火郡)이 되었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 때는 밀주(密州)로 고쳤으며, 현종 때는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를 두었다. 충렬왕 때에는 군인(郡人) 조천(趙仟) 등의 반란으로 강등하여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삼아 계림(鷄林)에 속하게 하고 후에 밀성현(密城縣)으로 고쳤다. 충렬왕 11년에 군으로 승격했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현(縣)으로 내렸고, 공양왕 때는 부(府)로 승격하였다. 이조 태조 때에 다시 밀성군으로 고쳤다가 후에 부로 승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태종 때에 다시 군으로 되었으며, 후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가 1895년 (고종 32년)에 군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박(朴)ㆍ김(金)ㆍ당(唐)ㆍ대(大)ㆍ변(卞)ㆍ손(孫)ㆍ가(異)ㆍ조(趙)씨 등이 있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많은 분파로 나뉘어지고 세거지도 광범위하여 전체를 추적하기가 곤란하여 중조(中祖) 박언침(朴彦忱)의 8세손 박언부(朴彦孚)의 후손과 박언인(朴彦仁)의 후손을 중심으로 추적하였다. ‘무오보(戊午譜)’에 의하면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 박언부(朴彦孚)를 1세로 하는 후손 중 부원군파(府院君派)는 경북 밀양군(密陽郡)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9세 박희(朴暿)의 대를 전후해서 대구(大邱)에 터를 잡았고 10세 박등(朴簦)의 대 이후로 달성군(達城郡)에, 17세 이후로는 고령군(高靈郡)ㆍ김해군(金海郡) 등지에 세거한 것 같다. 일부는 9세 박해(朴晐)의 대 이후로 경산군(慶山郡)에 이거했으며 12세 박영손(朴英孫)의 대에는 영천군(永川郡)에 시거(始居)하였다. 19세 이후로는 경주(慶州)ㆍ울산(蔚山)ㆍ칠곡(漆谷)ㆍ의성(義城) 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또한 ‘경신보(庚申譜)’에 의하면 박언부의 9세손 박현(朴鉉)을 1세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는 박현(朴鉉)의 대부터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일부가 3세 박사경(朴思敬)의 대 이후로 고양군(高陽郡)에 옮겨간 것 같다. 5세 박지생(朴祗生)의 후손은 8세 박핵(朴核)의 대에 영주군(榮州郡)에, 박감(朴椷)의 대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이거하였다. 10세 박희충(朴希忠)의 대 이후로는 연백군(延白郡)에 터를 잡은 것 같으며 12세 이후로는 완주군(完州郡)ㆍ고창군(高敞郡)ㆍ청도군(淸道郡)ㆍ해주(海州)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5세 박강생(朴剛生)의 후손은 7세 박대손(朴大孫)의 대 이후로 평남 중화군(中和郡)에, 박원충(朴元忠)의 대 이후로 연천군(漣川郡)에, 박원의(朴元懿)의 대 이후로 김제군(金堤郡)에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8세 박천태(朴千泰)의 대 이후로는 광주군(廣州郡)에, 박건(朴楗)의 대 이후로는 양주군(楊州郡)에, 박억령(朴億齡)의 대 이후로는 용인군(龍仁郡)에, 박순령(朴舜齡)의 대 이후에는 경주(慶州)에 터를 잡은 것 같다. 8세 박세분(朴世芬)의 대에는 원주(原州)에 시거(始居)하였고 박세부(朴世氵莩 )의 자손은 진도(珍島)ㆍ해남(海南)에 세거하였다. 박계정(朴繼貞)의 대에는 안동(安東)에 옮겨갔으며, 박윤정(朴允貞)의 대 이후로는 전주(全州)에서 터를 잡았다. 9세를 전후해서는 고흥(高興)ㆍ청풍(淸風)ㆍ양구(楊口)ㆍ논산(論山)ㆍ함평(咸平)ㆍ연천(漣川)ㆍ파주(坡州)ㆍ김제(金堤)ㆍ옥구(沃溝)ㆍ풍기(豊基)ㆍ협천(陜川)ㆍ영천(永川)ㆍ공주(公州)ㆍ영월군(寧越郡) 등지에 이거하였다. 10세 박훈(朴薰)의 대에는 청원(淸原)에 터를 잡았고 박분(朴芬)은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상주(尙州)로 옮겨갔으며 박길(朴吉)은 임진왜란 때 영광(靈光)에 이거하였다. 11세 이후에는 삼척(三陟)ㆍ춘천(春川)ㆍ옥천(沃川)ㆍ홍성(洪城)ㆍ예산(禮山)ㆍ연기(燕岐)ㆍ남원(南原)ㆍ익산(益山)ㆍ임실(任實)ㆍ곡성(谷城)ㆍ영광(靈光)ㆍ강진(康津)ㆍ함양(咸陽)ㆍ밀양(密陽)ㆍ문경(聞慶)ㆍ봉화(奉化)ㆍ경산(慶山)ㆍ울산(蔚山)ㆍ안동(安東)ㆍ예천(醴泉)ㆍ창녕(昌寧)ㆍ하동군(河東郡)ㆍ제주(濟州), 함남 안변(安邊)ㆍ홍원군(洪原郡) 등지로 옮겨간 것 같다. 5세 박눌생(朴訥生)의 자손은 전주(全州)에서 세거하였다. 8세 박논문(朴論問)의 대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부안(扶安)에 은거, 터를 잡았으며, 일부는 9세 박운달(朴雲達)의 대 이후로 경산군(慶山郡)에, 박원창(朴元昌)의 대 이후로는 무안(務安)에 세거한 것 같다. 5세 박신생(朴信生)의 후손은 선산(善山)ㆍ풍덕(豊德) 등지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이며, 박지온(朴之溫)의 손자 박인우(朴麟祐)는 고려 멸망 후 예산(豫算)에 은거하며 터를 잡았으며, 일부가 9세 이후 무장군(茂長郡)에 옮겨갔다. 5세 박양생(朴陽生)도 고려 멸망 후 은거하며 옹진군(甕津郡)에 터를 잡았으며, 5세 박인우(朴仁禹)의 대 이후에는 선천군(宣川郡)에 세거하였다. 한편 ‘갑자보(甲子譜)’에 의하면 충정공파(忠靖公派)는 파조(派祖)인 박숭문(朴崇文)의 대부터 청주(淸州)에서 세거하였고 6세의 대를 전후해서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강원도 이양(裏陽)ㆍ삼척(三陟)ㆍ평창군(平昌郡), 충북 청원(淸原)ㆍ괴산(槐山)ㆍ중원군(中原郡), 충남 논산(論山)ㆍ홍성(洪城)ㆍ서산(瑞山)ㆍ서천군(舒川郡), 전북 임실(任實)ㆍ남원(南原)ㆍ순창(淳昌)ㆍ부안(扶安)ㆍ김제(金堤)ㆍ옥구(沃溝)ㆍ익산(益山)ㆍ장수군(長水郡), 전남 고흥(高興)ㆍ곡성(谷城)ㆍ광양(光陽)ㆍ승주(昇州)ㆍ보성(寶城)ㆍ해남(海南)ㆍ완도(莞島)ㆍ순천(順天)ㆍ나주(羅州)ㆍ함평군(咸平郡), 경북 경주(慶州)ㆍ월성(月城)ㆍ예천(醴泉)ㆍ봉화군(奉化郡), 경남 의령(宜寧)ㆍ창원(昌原)ㆍ함안(咸安)ㆍ하동(河東)ㆍ산청(山淸)ㆍ협천군(陜川郡) 등지에 터를 잡고 대대로 세거하였다. ‘기미보(己未譜)’에 의하면 박언인(朴彦仁)의 후손 중 복야공파(僕射公派)는 박혁거세를 1세로 하여 45세 박필장(朴必章)의 대 이후로 진주(晉州)ㆍ진양(晉陽)에서 세거하였고, 일부가 53세 박영필(朴榮弼)ㆍ박영상(朴榮祥)ㆍ박영식(朴榮植)의 대 이후에 여주(驪州)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45세 박동무(朴東茂)의 자손은 56세 박대생(朴大生)의 대 이후로 경북 달성군(達城郡)에 터를 잡았고 박동수(朴東秀)의 후손은 일부가 48세 박이항(朴爾沆)의 대 이후로 성주군(星州郡)에, 일부는 50세 박암부(朴巖孚)의 대 이후로 달성군(達城郡)에 세거한 것 같다. 58세 박지운(朴之運)의 대 이후로는 칠곡군(漆谷郡)에 이거한 듯 하다. 한편 43세 박원?(朴元禾華 )의 대에는 함남 함흥(咸興)에 터를 잡았고, 후손들이 신흥군(新興郡)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일부가 52세 박서창(朴瑞昌)의 대 이후로 정평군(定平郡)에 옮겨갔고 일부는 55세 박시연(朴時淵)의 대 이후로 홍원군(洪原郡)에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45세 박연(朴堧)ㆍ박흥생(朴興生)의 후손은 충북 영동군(永同郡)에 세거하며, 일부가 46세 박중우(朴仲愚)의 대 이후로 익산(益山)에, 47세 박양(朴壤)의 대에 남해(南海)에, 박운(朴芸)의 대에는 당진(唐津)에 박중양(朴重陽)의 대에는 협천(陜川)에 터를 잡았다. 48세 이후로는 순창(淳昌)ㆍ완주(完州)ㆍ정읍(井邑)ㆍ남원(南原)ㆍ곡성(谷城)ㆍ광주(光州)ㆍ금릉(金陵)ㆍ울산(蔚山)ㆍ상주(尙州)ㆍ창원(昌原)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전국 각지에 세거하고 있었다. 특히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탄현면(炭縣面), 옹진군(甕津郡) 용연면(龍淵面), 광주군(廣州郡) 일원, 강원도 인제(麟蹄)ㆍ삼척(三陟)ㆍ회양(淮陽)ㆍ홍천(洪川)ㆍ평강군(平康郡)일원, 충북 청원(淸原)ㆍ옥천(沃川)ㆍ영동군(永同郡)일원, 충남 연기(燕岐)ㆍ예산군(禮山郡), 전북 임실(任實)ㆍ남원(南原)ㆍ고창군(高敞郡)일원, 전남 광양(光陽)ㆍ고흥(高興)ㆍ보성(寶城)ㆍ화순(和順)ㆍ해남(海南)ㆍ영광군(靈光郡), 진도군(珍島郡), 의신면(義新面)ㆍ조도면(鳥島面)ㆍ임준면(臨准面)일원, 경북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경산군(慶山郡) 진량면(珍良面), 청도군(淸道郡) 금천면(錦川面)ㆍ이서면(伊西面),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선산군(善山郡) 구미읍(龜尾邑), 문경군(聞慶郡) 가은읍(加恩邑), 봉화군(奉化郡)ㆍ영천군(永川郡)ㆍ금릉군(金陵郡)ㆍ상주군(尙州郡)ㆍ대구(大邱)일원, 경남 진주(晉州)ㆍ진양(疹恙)ㆍ의령(宜寧)ㆍ함안(咸安)ㆍ창녕(昌寧)ㆍ밀양(密陽)ㆍ울주(蔚州)ㆍ김해(金海)ㆍ의창(義昌)ㆍ통영(統營)ㆍ남해(南海)ㆍ함양(咸陽)ㆍ거창군(居昌郡), 충무(忠武)일원, 제주도 일원, 황해도 해주(海州), 평남 양덕(陽德)ㆍ성천(成川)ㆍ평원군(平原郡), 평북 의주(義州)ㆍ정주군(定州郡), 구성군(龜城郡) 사기면(沙器面), 함남 영흥군(永興郡) 억기면(憶岐面), 안변군(安邊郡) 신모면(新茅面), 북청군(北靑郡) 후창면(厚昌面), 신흥군(新興郡) 원평면(元平面)ㆍ서고천면(西古川面)ㆍ영고면(永高面)일원, 함북 길주군(吉州郡) 산면(山面) 등지에 1백여 가구 이상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충북 청원군(淸原郡) 강외면(江外面) 연제리(蓮堤里)는 1980년 당시 입향조(入鄕祖)인 박훈(朴薰)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박훈(朴薰)은 성종조 교리(校理)를 지낸 박증영(朴增榮)의 아들로 중종조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인물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북 성주(星州)ㆍ의주(義州) 등에서 15년간 귀양살이를 한 후 어머니가 은신한 청원(淸原)을 찾아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시며 터를 잡았으니, 지금의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서문을 쓴 ‘눌강유필(訥江遺筆)에는 박훈(朴薰)이 유배지에서 어머니께 보낸 서신이 그대로 남아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큰 아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忱)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경명왕(景明王)은 우리나라 박(朴)씨의 시조인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으로 아버지 신덕왕(神德王)의 뒤를 이어 신라 제 54대 왕으로 917~923년까지 7년간 제위하였고, 동생인 위응(魏膺)에게 왕위(王位)를 물려주었다. 여러 박(朴)씨 족보와 ‘범박이천년사(汎朴二千年史)’에 의하면 경명왕(景明王)에게는 아홉 아들이 있었다.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막내 아들 교순(交舜)을 제외한 여덟 아들, 즉 언침(彦忱), 언성(彦成), 언신(彦信), 언립(彦立), 언창(彦昌), 언화(彦華), 언지(彦智), 언의(彦儀)를 각각 밀성대군(密城大君), 고양대군(高陽大君), 속함대군(速咸大君), 죽성대군(竹城大君), 사벌대군(沙伐大君), 완산대군(完山大君), 강남대군(江南大君), 월성대군(月城大君)에 분봉(分封)하였고, 각 대군(大君)의 후손들이 분봉(分封)받은 연고를 따라 각 박(朴)씨의 본관(本貫)으로 삼았다고 한다. 박언침(朴彦忱)의 후손인 밀양박씨(密陽朴氏)를 비롯하여 고령박씨(高靈朴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죽산박씨(竹山朴氏), 상주박씨(尙州朴氏), 전주박씨(全州朴氏), 순천박씨(順天朴氏), 경주박씨(慶州朴氏)가 모두 경명왕(景明王)의 후손인 셈이다. 그런데 ‘박씨선원세보(朴氏璿源世譜)’에 의하면 밀양박씨(密陽朴氏)에서 10여개 본관으로 분적(分籍)되었다. 박언침(朴彦忱)의 10세손 박항(朴恒)을 시조로 하는 영암박씨(靈岩朴氏)와 12세손 朴元義를 시조로 하는 태안박씨(泰安朴氏) 외에, 진원박씨(珍原朴氏), 운성박씨(雲城朴氏), 진주박씨(晉州朴氏), 귀산박씨(龜山朴氏), 나주박씨(羅州朴氏), 창원박씨(昌原朴氏), 문의박씨(文義朴氏), 여주박씨(驪州朴氏) 등이 분적(分籍)되었다. 이렇게 후대에 분적(分籍)되는 것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고령박씨(高靈朴氏), 함양박씨(咸陽朴氏)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므로, 경명왕(景明王)과 그 여덟 아들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러 박(朴)씨의 시조가 되는 8대군(大君)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다. 8대군(大君)의 유리왕자설(儒理王子說), 또는 경애왕자설(景哀王子說)이 그것이다. 박(朴)씨 족보에 실?‘팔대군변(八大君辨)(증(證))’에 의하면, 유리왕자설(儒理王子說)은 유리왕(儒理王) 당시 신라의 강역이 8대군(大君)이 분봉(分封)받은 지역을 포함하지 못했거나, 군현명호(郡縣名號)의 연혁이 맞지 않으므로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또 경애왕자설(景哀王子說)은 경애왕(景哀王)당시 견훤(甄萱), 왕건(王建)의 확장으로 신라의 국경이 위축되고 있었고 왕(王)까지 피살당하는 상황에서 분봉(分封)할 경황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8대군(大君)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이 분명하다고 하며, 충정공파(忠靖公派)의 ‘갑자보(甲子譜)’에 실린 ‘경명왕본기(景明王本紀)’ 항목에는 경명왕(景明王) 원년(元年)(917)에 8대군(大君)을 분봉(分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명왕(景明王)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이미 후백제, 태봉(경명왕(景明王) 2년 이후는 고려)과 신라가 각축하는 후삼국시대에 들어와 있었다. 두 나라에 의해 수세에 몰린 신라는 지금의 경상도 일대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방의 군현은 계속 후백제나 고려로 항복해가고 있었다. 사직을 보존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어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경명왕(景明王)이 자신의 왕자들을 죽성(竹城)(죽산(竹山)), 완산(完山)(전주(全州)), 강남(江南)(순천(順天)) 등지에 분봉(分封)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완산(完山)은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였던 곳이다.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왕(王)의 아들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어느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완산(完山)같은 지역에 분봉(分封)받은 왕자가 그 곳을 본관으로 삼고 그 후손들이 세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후대에 자손들이 세거지로 삼았을 가능성은 고려할 수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우리나라에서 김해김씨(金海金氏) 다음으로 자손이 번성한 성씨다. 그에 따라서 시조 박언침(朴彦忱) 이후 자손들의 분파도 많다. 박(朴)씨의 분파는 8세조인 박언부(朴彦孚), 박언상(朴彦祥), 박언인(朴彦仁), 박양언(朴良彦), 박천익(朴天翊), 박을재(朴乙材)를 파조(派祖)로 하여 일단 분파되었고 그 후손에서 다시 몇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박언부(朴彦孚)의 후손이 밀성부원군파(密城府院君派)이며, 그 후손 중에서 10세조 박원(朴元)의 후손이 사문진사공파(四門進士公派), 13세조 박척(朴陟)의 후손이 충헌공파(忠憲公派), 15세조 박중미(朴中美)의 후손이 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6세조 박현(朴鉉)의 후손이 규정공파(糾正公派)이다.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박언상(朴彦祥)의 후손이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이고 박언인의 후손이 밀성군파(密城君派), 박양언(朴良彦)의 후손이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박양언의 후손인 13세조 박원광(朴元光)의 후손이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다. 그리고 박천익(朴天翊)의 후손이 판도판각공파(判圖判閣公派)로, 朴乙材의 후손이 좌윤공파(左尹公派)로 나누어졌는데, 박을재의 후손이며 고려 말 조선 초의 유명한 무장인 15세조 박위(朴葳)의 후손이 다시 정국공파(靖國公派)로 나누어졌다. 이상에서 언급된 파(派)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대표적인 12개 분파이고, 그 아래대로 내려오면서 더욱 많은 분파로 세분(細分)되었다. 이러한 후손들 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성한 것은 규정공파(糾正公派)라고 한다. 그런데 밀양박씨(密陽朴氏)의 각 파보(派譜)를 보면 12개 파의 파조(派祖)들의 세계(世系)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8세조로 언급된 박양언(朴良彦), 박천익(朴天翊), 박을재(朴乙材)의 경우가 그것이다. 규정공파(糾正公派)의 ‘경신보(庚申譜)’손록(孫錄)에는 8세조 박언부(朴彦孚)보다 3대 아래인 11세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복야공파(僕射公派) ‘기미보(己未譜)’손록(孫錄)에는 박언부(朴彦孚)과 같은 대에 기록되어 있다. 충정공파(忠靖公派)의 ‘갑자보(甲子譜)’에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견해가 반영되어 최근에 간행된 책에서도 박양언(朴良彦) 등이 박언부(朴彦孚)와 같은 대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박양언(朴良彦), 박천익(朴天翊), 박을재(朴乙材) 등의 선대에 대한 기록도 일치하지 않는다. ‘경신보(庚申譜)’와 ‘갑자보(甲子譜)’ 세계표(世系表)에는 상대(上代) 4대(代)가 미상으로 되어있고 단지 朴彦孚의 5대조인 박란(朴瀾)의 후손으로만 되어 있는 반면 ‘기미보(己未譜)’에는 박언부(朴彦孚)의 아버지인 박찬행(朴讚行)아래 대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어떤 파보(派譜)에서는 그 상대(上代) 4대(代)의 휘(諱)를 밝힌 곳도 있어서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족세(族勢)의 번성만큼이나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인물도 많았다. 고려 말 중서령(中書令)에까지 올랐던 박중미(朴中美)나 이성계(李成桂)집권의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공신에 책록된 박위(朴葳)가 대표적이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만 2백 61명을 배출하였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안동김씨(安東金氏), 파평윤씨(坡平尹氏) 등에 이어 성씨별로는 8번째라 하겠다. 그러나 상신(相臣)은 광해군조에 영의정 한 명만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서는 권력의 핵심부에 참여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벌족(閥族)이라고 할 수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시조 박언침(朴彦忱)의 아들 박욱(朴郁)은 고려 태조조에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을 지냈다고 한다. 고려 태조공신은 ‘삼한벽상(三韓壁上)’을 칭하는데, 여기에는 ‘삼한벽공(三韓壁控)’으로 되어있고, 고려조에 대장군(大將軍) 앞에 ‘도(都)’를 붙이는 경우가 없다. 세계(世系)가 오래되어 기록의 착오가 있지 않았는가 한다. 그의 아들인 박란(朴瀾)은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였다 한다. 4세조인 박영정(朴永貞)은 한림학사(翰林學士)ㆍ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내고, 5세조 박기세(朴基世)는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다. 박시주(朴施做)는 보문각시제(寶文閣侍制)를 지내고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박찬행(朴讚行)은 정당문학(政堂文學), 검교태부(檢校太傅)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밀성부원군파(密城府院君派)의 파조(派祖)인 8세조 박언부(朴彦孚)는 문종조에 등과(登科)하고 최충(崔冲)과 함께 태사중서령(太師中署令)이 되었다.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ㆍ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렀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언상(朴彦祥)은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지냈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진 박언인(朴彦仁)은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참여하였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ㆍ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박양언(朴良彦)은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다. 박천익(朴天翊)은 판도판각(判圖判閣), 박을재(朴乙材)는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9세조 효신(孝臣)은 등제(登第) 후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에 이르렀다.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었다. 박의신(朴義臣)은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었다. 박의신(朴義臣)은 박효신(朴孝臣)의 동생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기록된 인물이다.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의 리(吏)였는데 열심히 공푸하여 등제(登第)하였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박의신(朴義臣)은 원래 이족(吏族)이었고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면향(免鄕)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족보에는 박언부(朴彦孚)도 밀양(密陽)의 리(吏)출신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박찬행(朴讚行)과 증조부 박시주(朴施做)는 각각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고 하므로 이미 중앙정부의 사족(士族)이 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박의신(朴義臣)이 언제 다시 이직(吏職)에 종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박양신(朴良臣)은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지냈고 박직량(朴直良)은 문림랑(文林郞)의 품계에 올랐으며, 박장(朴璋)은 판병부낭장(判兵部郎將)을 지냈다. 10세조 박공필(朴公弼)은 대장군(大將軍)ㆍ도첨사(都僉事)ㆍ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정벌할 때 함께 토평(討平)에 참여하여 진국공신(鎭國功臣)에 봉해졌다 한다. 중조인 박원(朴元)은 박의신(朴義臣)의 아들이며 사문진사(四門進士)였고, 박윤(朴允)은 소부소감(少府少監)을 지냈다. 박공필(朴公弼)의 아들인 박육경(朴育慶)은 대장군(大將軍)ㆍ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박육화(朴育和)는 의종조에 급사중(給事中)ㆍ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박원(朴元)의 아들인 박교연(朴皎然)은 아버지와 같이 사문진사(四門進士)였고, 박호연(朴浩然)은 예빈성승동정(禮賓省丞同正)을 지냈다. 박효연(朴皛然)은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명종조(明宗朝)에 등과하여 한림학사, 보문각학사를 지냈다. 중조인 박척(朴陟)은 충선왕 때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공을 세우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박원광(朴元光)은 영동정(令同正)이었고, 박중미(朴中美)는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 중서령(中書令)에 오르고 공민왕(恭愍王) 때 안유(安裕), 이방실(李芳實),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한 공으로 보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輔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박위(朴葳)는 고려 말 이성계파와 손을 잡고 회군공신에 참여한 인물이다. 우달적(于達赤)으로 등용,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올라 왜적(倭敵)을 격퇴하고 1388년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후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戰艦) 1백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 적선 3백여 척을 태워 크게 이겼다. 후에 판자혜貫?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올라 충의군(忠義君)에 봉(封)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 김종연(金宗衍)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풍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赦免)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었다. 규정공(糾正公) 박현(朴鉉)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지내고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로써 세간(世間)의 칭송(稱誦)을 박았으며 도학(道學)과 문장 또한 뛰어났다. 박침(朴忱)은 공민왕 때 문과에 올라 전의판사(典儀判事)가 되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을어가 은거하였다. 박의(朴義)는 충렬왕(忠烈王)의 총신(寵臣)으로 장군(將軍),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우부승지(右副承旨)ㆍ좌복야(左僕射)ㆍ부지밀직(副知密直) 등을 역임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러 밀양군(密陽君)에 봉해졌다. 규정공(糾正公)의 후손으로 고려 말 조선 초에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로 박강생(朴剛生), 박심문(朴審問)부자가 있다. 박강생(朴剛生)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 조선조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 등을 역임한 당대의 문장가였고, 그의 아들 박심문(朴審問)은 단종(端宗)초에 성삼문(成三問) ed과 함께 단종(端宗)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사전에 탄로나자 음독자결로 충절을 지킨 절신이다. 박의중(朴宜中)은 판밀직사(判密直事) 박인간(朴仁幹)의 조카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장원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조선 개국 후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고 검교참찬(檢校參贊)이 되었는데,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의 손자 박거겸(朴居謙)은 세종(世宗) 때 무과에 장원, 성종(成宗) 때까지 5대를 섬기며 도총관(都摠管),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그는 활을 잘 쏘아 당대에 손꼽히는 명궁(名弓)이었다. 박중손(朴仲孫)은 박강생(朴剛生)의 손자로 세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世祖))을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等)이 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封)해졌다. 그 후 공조(工曹)ㆍ이조(吏曹)ㆍ형조(刑措)ㆍ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오르고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박건(朴楗)은 단종 원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세조 원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호조(戶曹)ㆍ병조참판(兵曹參判) 드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1년 좌찬성(左贊成)으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다. 뒤에 성희안(成希顔) 등과 함께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等)이 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封)해졌는데, 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후손 중에서 조선 전기의 인물로는 박연(朴堧)이 유명하다. 그는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新羅)의 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음악가)으로 꼽힌다. 그는 어려서부터 항상 가슴에 손을 대어 박자 맞추는 모양을 하고 휘파람을 불어 곡조를 연습했다 한다.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世宗)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音樂)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당시 조율(調律)이 불완전한 악기(樂器)의 정리와 음보찬집(音譜撰集)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편경(編磬) 12장을 제작하는 등 궁전 음악의 미비된 것을 대폭 변경 수정했다. 14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을 둘러싼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그의 셋째 아들 박수우(朴秀愚)가 안평대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자 가문은 멸족의 위기에 처해진다. 그러나 3조(朝)에 기여한 그의 공이 참작돼 화를 면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돌아가 피리를 불며 피리소리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당시 그가 귀향하는 광경을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는 박연(朴堧)을 전송하러 강변까지 나온 다정한 친지들과 배 안에서 조그만 주연이 벌어졌는데 팔순 고령의 박연(朴堧)은 행낭에서 피리를 꺼내 그림같이 가로 비끼었다. 어려서부터 피리의 신동(神童)이라고 불리던 그는 팔순의 고령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청아하고 애절한 가락을 한마당 연주했다. 손을 들어 보내기만 하여도 가슴 아픈데, 가는 이가 스스로 슬픈 이별곡을 흐느끼는 게 아닌가. 뭇 사람들이 넋을 잃고 추연?감회에 젖어 일어설 줄을 몰랐다…“ 박연(朴堧)의 악인(樂人)다운 풍모를 실감할 수 있는 글이다. 박열(朴說)은 중종(中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ㆍ대사헌(大司憲)ㆍ우찬성(右贊成) 등을 역임, 청백리에 올랐다. 박충원(朴忠元)은 명종 21년 이퇴계(李退溪)의 후임으로 홍문관대제학을 지내는 영예를 누렸다. 선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했으며 ‘낙촌박선생유고(駱村朴先生遺稿)’가 전한다. 그의 아들 박계현(朴啓賢)은 명종 때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들었고, 선조 때 대사헌으로 동서(東西) 당쟁의 완화에 힘썼다. 뒤에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편저 ‘밀산세고(密山世稿)’가 전한다. 이 무렵 그의 종제(從弟)인 박숭원(朴崇元)도 대사헌(大司憲)ㆍ관찰사(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하여 크게 현달하였는데, 임진왜란 때는 왕을 호종(扈從),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박영(朴英)은 중종조의 무신으로 학문에도 뛰어나 많은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그는 무예에 뛰어나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했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장차 정치가 어지러울 것을 내다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낙향 정붕(鄭鵬)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으나 다시 사직했다. 그는 무신(武臣)이었으나 “말 타고 칼 쓰는 일은 용맹한 사나이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글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君子)가 되겠느냐”며 학문에도 힘을 쏟아 ‘문무전재(文武全才)’라 일컬어졌다. 천문ㆍ지리ㆍ산수에도 통달했으며 특히 의학에 정통하여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등의 의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박종남(朴宗男), 박영신(朴榮臣) 부자는 선조조에 돋보이는 무신(武臣)들이다. 박종남(朴宗男)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지내고 선조 16년 북변(北邊)에 침입하는 여진 추장 이탕개(泥湯介)를 격퇴, 두만강 건너 야인(野人)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절형장군(折衡將軍)에 승진했다. 임진왜란 때는 춘천방어사로 왜군의 북진을 막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연해(沿海) 5읍(邑)의 군병을 장악, 해전(海戰)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아들 박영신(朴榮臣)은 선조 38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올랐다. 1614년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 하자 이를 반대했다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오위장(五衛將), 풍산부사(豊山府使)를 지냈으며 그 후 이괄(李适)의 난(亂)을 진압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그는 끝내 이괄(李适) 일당에 협조를 거부, 참살당했다. 박승종(朴承宗)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문중에서 조선조에 유일하게 상상(上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선조 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병조정랑(兵曹正郞)을 거쳐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부제학(副提學), 병조판서(兵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1618년 (광해군 10년) 우의정겸도체찰사(右議政兼都體察使)가 되고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의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에 책봉, 왕실의 인척이 되어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인목대비의 폐모론에는 반대하였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光海君)이 물러나자 손녀를 광해군(光海君)의 며느리로 삼아 가문의 권세를 누렸다는 사실을 자책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조 후기의 인물로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으로 유명한 박제가(朴齊家)가 있다.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實學)을 연구했으며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시문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78년(정조(正祖) 2년) 사은사(謝恩使)의 수행원으로 청(淸)나라에 들어가 이조원(李調元) 등 청(淸)나라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을 토대로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했고, 다음 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검서관(奎章閣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書籍)을 편찬했다. 1794년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하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영평현감(永平縣監)을 지냈다. 그는 북학의(北學議)에서 생활기구의 개선, 농기구 및 농사의 개량, 부패한 과거제도의 쇄신, 산업의 장려, 상공업 및 해외무역장려 등 정치ㆍ경제ㆍ사회제도의 전반적인 모순을 개혁하려는 사회개혁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중국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서양의 선교사 같은 사람을 초빙해야 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그들로부터 천문ㆍ역학ㆍ채광(採鑛)ㆍ조선(造船)ㆍ무기제조ㆍ벽돌제조 등을 배우게 하면 국가에 크게 유익하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방안은 조선조 후기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세도정치에로 나아가고 있던 집권관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제가(朴齊家)는 정조가 죽고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 유배당했다. 2년 후 유배에 풀려나서는 은거, 세상에서 그 소식을 알지 못한다. 박세화(朴世和), 박병하(朴炳夏), 박성묵(朴性黙), 박영철(朴永哲) 등은 구한말, 한일합병 후의 민족항쟁기에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다. 박세화(朴世和)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자결했다. 박병하(朴炳夏)는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외국의 노예가 되느니 깨끗이 죽는 길을 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사이다. 박성묵(朴性黙)은 고종 32년(1895) 경희백(慶希伯)과 함께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고 다음 해 횡성수호장(橫城守護將)이 되었다. 1914년 만주(滿洲)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죽었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공로훈장(大韓民國功勞勳章)이 수여되었다. 박영철(朴永哲)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 후 적(賊)을 꾸짖는 ‘시(詩)’를 지어 전국(全國)에 철포(撤布)하다 구속되어 모진 매를 맞고 풀려 나왔으나 곧 죽었다.
항렬표(行列表)
규정공파(糾正公派)
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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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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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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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字)
노(魯) 성(性) 병(炳)
재(在) 신(信) 규(圭)
용(鏞) 상(商) 종(鍾)
호(浩) 수(洙) 순(淳)
인(仁) 주(柱) 상(相)
열(烈) 용(容) 희(熙)
중(重) 시(時) 준(俊)
호(鎬) 흠(欽) 구(九)
해(海) 윤(潤) 한(漢)
식(式) 근(根) 권(權)
연(然) 헌(憲) 응(應)
요(堯) 균(均) 배(培)
밀성부원군파(密城府院君派)
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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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자(字)
희(熙) 걸(杰)
규(奎) 기(基)
용(鏞) 선(善)
수(洙) 흡(洽)
병(棅) 기(棋)
돈(燉) 엽(燁)
중(重) 남(南)
호(鎬) 용(鎔)
낙(洛) 영(泳)
동(東) 주(柱)
병(炳) 현(炫)
헌(憲) 석(錫)
판도판각공파(判圖判閣公派)
세(世)
29
30
31
32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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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7
38
39
40
자(字)
한(漢)
빈(彬)
병(炳)
규(圭)
용(鎔)
영(泳)
동(東)
희(熙)
재(在)
호(鎬)
태(泰)
근(根)
밀성군파(密城君派)
세(世)
27
28
29
30
31
32
33
34
35
자(字)
선(善) 준(濬)
영(泳) 주(柱)
근(根) 연(然)
유(裕) 종(種)
희(喜) 용(鏞)
상(常) 해(海)
연(淵) 식(植)
화(和) 사(思)
병(炳) 성(城)
밀원부원군파(密源府院君派)
세(世)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자(字)
원(源) 순(淳)
병(秉) 인(仁)
섭(燮) 열(烈)
성(聖) 요(堯)
호(鎬) 탁(鐸)
윤(潤) 해(海)
동(東) 목(穆)
우(愚) 돈(燉)
주(周) 희(喜)
용(鏞) 일(鎰)
만(滿) 락(洛)
박혁거세와 박씨
박혁거세는 신라 초대 왕이며 우리나라 모든 박씨의 시조다.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이며 비(妃)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 박혁거세의 출생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 개의 마을에 6부 촌장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 것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 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 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같은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 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 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 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 되고 알영을 왕비로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 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신라 5대)과 일성왕(신라 7대)에서 갈라진다.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관했다.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다.
일성왕계는 박혁거세의 25대손인 경명왕(신라 54대)과 경애왕(신라 55대) 대에서 다시 갈라진다.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9개 파로 나누어진다.
-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 밀양, 반남, 진원박씨 등/
-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 고령박씨/
-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 함양, 삼척박씨 등/
-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 죽산, 음성, 고성박씨/
-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 상주, 충주박씨/
-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 전주, 무안박씨/
-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 순천, 춘천박씨 등/
- 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 경주박씨의 8대군파/
-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 울산박씨로 분파/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밀성대군파가 주류를 이룬다. 박씨 인구의 70∼80%가 밀양박씨이다. 밀양박씨의 시조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홉 아들 중 첫째인 밀성대군 박언침이다.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현대 인물은 박충훈 부총리, 박종화 소설가, 박순천 정치인, 박두병 기업인, 박경원 장관, 박대선 목사, 박흥식 기업인, 박동진 국악인 등이 있다.
한편 박씨 성의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시조 또는 중시조가 밝혀진 것은 70본 내외이다. 그 중 주요 본관은 밀양(密陽)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상주(尙州) ·창원(昌原) ·음성(陰城) ·영해(寧海) ·영암(靈巖) ·진원(珍原) ·고성(固城) ·울산(蔚山) ·운봉(雲峰) ·춘천(春川) ·비안(比安) ·강릉(江陵) ·월성(月城) ·태인(泰仁) ·면천(沔川) ·삼척(三陟) ·문의(文義) ·장성(長城) 등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으며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의 56대 세계(世系)는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의 세계는 박혁거세의 증손인 파사왕(婆娑王)과 일성왕(逸聖王) 대(代)에서 갈라졌다.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 ·면천 ·강릉 등으로 분파 관적(貫籍)했고, 비안 ·우봉(牛峰) ·이산(尼山) ·해주(海州) 등도 파사왕의 후손이다.
일성왕계는 그의 26세손인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 대에서 다시 갈라졌다.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반남 ·진원박씨 등),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박씨),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삼척박씨 등),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음성·고성박씨),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충주박씨),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무안박씨),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춘천박씨 등),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박씨)의 8대군파와,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밀양박씨는 규정공파를 비롯 문하시중공파, 도평의사공파, 좌복야공파, 밀직부사공파, 판도공파, 좌윤공파, 사문진사공파, 충헌공파, 영동정공파, 밀직부원군파, 정국공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규정공파(糾正公派)가 가장 번성했다. 특히 박언침의 8세손 박언부의 후손과 박언인의 후손이 가문을 크게 빛냈다. 규정공파의 파조 박현(朴鉉)은 박언침의 9세손이다.
박현은 고려 때 사헌부 규정을 지냈으며, 옥천의 원덕사에 제향되었다. 수교충절록에서는 "고려 태사대사공신 청백리 규정공 박현은 문성공 안유, 문헌공 최충 등과 한 몸이다“라고 그를 극찬하고 있다.
규정공파는 조선조에서 모두 26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우리나라 모든 박씨 가운데 가장 번창한 문중이다. 박씨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규정공의 후손이며 31개 소파가 있다.
규정공의 후손으로 고려 말 조선 초 인물은 박강생, 박심문 부자가 있다. 박강생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 조선조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 등을 역임한 당대의 문장가였다. 그의 아들 박심문은 단종 초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사전에 탄로 나자 음독자결로 충절을 지켰다.
전남 장흥군 장흥면 사안리 연화봉 남쪽 기슭의 세덕사(世德祠)는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문중사우이다. 이 사우는 원래 전라북도 임실 유림들이 규정공 박현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865년(고종2) 임실 중주원(中州院)에 창건했다. 그러나 창건된 후 3년 만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후에 이곳에 다시 세워졌다. 규정공 박현을 비롯한 10위(位)의 위폐가 있다
밀성대군과 밀양박씨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라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 중 밀성대군 박언침이 중시조다. 단일 본관으로 김해김씨 다음으로 두 번째 많은 성씨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지만 2백61명을 배출했다.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8세손 언부(문하시중공파), 8세손 언상(도평의사공파), 8세손 언인(좌복야공파), 8세손 언양(밀직부사공파), 8세손 천익(판도공파), 8세손 을재(좌윤공파) 등 크게 6파로 나누어진다. 그 뒤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종파인 8세손 언부는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은산파>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의 후손에서는 맏아들 원(元)의 계통과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 우왕 때 대사성과 밀직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다. 문종 때 경흥부사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다.
고려 공민왕 때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이다.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성리학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다. 후손들 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성한 파가 바로 박현의 ▲규정공파다.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다. 그의 아들 침은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박위는 고려 말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 경상도 도순문사로 있을 때는 대마도에서 적선 3백여 척을 부수는 등 공을 세웠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은 평안도사를 역임했다. 그의 종손 신규(信圭)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 때 응천군에 봉해진 중손(仲孫)은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되었다. 그의 맏아들 남은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다.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찬성공 신생(信生)의 현손 영(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 천문, 지리, 의술 등에 능통했다. 무예에도 뛰어나 용맹을 떨쳤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忠元)은 명종 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했다. 그 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선조 때 우찬성, 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은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한 계현(啓賢)이다.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밀양박씨의 후손 중에서 조선 전기의 인물로는 박연이 유명하다. 그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음악가)으로 꼽힌다.
박연은 어려서부터 항상 가슴에 손을 대어 박자 맞추는 모양을 하고 휘파람을 불어 곡조를 연습했다.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의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편경 12장을 제작하는 등 미비한 궁전 음악을 크게 고쳤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중추원부사 등을 거쳐 예문관대학제학에 오른다. 세조 때 그의 셋째 아들 박수우가 안평대군과 가깝다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가문이 멸족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3명의 왕을 거치면서 기여한 그의 공이 참작돼 화를 면한다. 대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돌아가 피리소리에 묻혀 여생을 보낸다. 어려서부터 피리의 신동으로 불리던 그는 당시 8순 고령인데도 청아하고 애절한 가락을 한마당 연주하고 이별을 고한다.
조선조 후기의 인물이며 북학파의 일원으로 유명한 박제가도 밀양박씨의 인물이다.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시문 4대가의 한 사람이다. 1778년(정조2년)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청나라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북학의”를 저술한다. 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그는 생활기구의 개선, 농기구 및 농사의 개량, 부패한 과거제도의 쇄신, 산업의 장려, 상공업 및 해외무역 장려 등 정치, 경제, 사회제도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박제가는 정조가 죽고 신유사옥 때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 유배당한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렸으나 은거하는 바람에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 경북 군위군 우보면 모산동,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이서면 일원 경기도 옹진군 용연면 오산리, 경북 문경군 가은읍 수예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집성촌이다.
2000년 현재 3,031,478명이 있다. 주요파는 ▲문하시중공파 ▲도평의사공파 ▲좌복사공파 ▲밀직부사공파 ▲판도공파 ▲좌윤공파 ▲사문진사공파 ▲충헌공파 ▲영동정공파 ▲밀직부원군파 ▲정국공파 ▲규정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