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연대 미상, 1452(문종 2년)년 사망. 조선 시대 전기의 의관으 로서 의학과 의술에 뛰어났으며, 특히 부인병 치료에 능했다. 세종 5 년 중국에 가서 우리 나라 고유의 약재인 향약(鄕藥) 62종의 성분을 분석해 왔으며, 세종 13년에는 전의감의 정(正)으로서 유효통, 박윤 덕 등과 함께 。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여 식물의 이름을 한글로 표 기하여 널리 이용할 수 있게 했다.
1433년(세종 15)에 。향약집성방。의 편찬을 완료했는데, 이 책은 。향약제생집성방。을 기본으로 하여 중국 의서와 국내 의서를 모두 편람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당시 최고(最高)의 향약방 서적이다. 이 듬해에는 산부인과 의서인 。태산요록。을 편찬했는데, 이것은 태교 (胎敎)와 영아 보호의 기술을 논한 것이다. 그의 의술을 계승시키기 위해 나이 어리고 총명한 자를 뽑아 의학을 교습시켰다.
1445년에는 첨지 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 해에 완성된 。의방유취 。의 편찬에 감수자로 참여하여 3년만에 완성시켰는데, 이 책은 당시 한의학의 대백과전서로서, 단순히 처방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153 종이나 되는 문헌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로서, 조선 시대 의학의 자 주적 기초를 마련한 우리 나라 의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 때 치료를 잘못하여 강등되기도 했지만 곧 복직되었고, 상 호군(上護軍)으로 죽었다. 내의(內醫)로 있는 동안 임금을 비롯하여 왕비·대군·대신들의 진료에 공이 많아 여러 번 상을 받았으며, 의 서 편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였다.
성품이 온순하여 대신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차별없이 진료하였으 며, 대가(對價)를 요구하지 않았다. 세조 즉위 후 좌익원종공신 1등 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태산요록。, 。의방유취。 등이 있다.
허임(許任)
본관은 양천(陽川). 악공(樂工) 억복의 아들로서 선조∼인조 때의 침의(鍼醫)이며, 생몰(生沒) 년대는 미상이다.
평민 출신의 명의로서, 침구(鍼灸)에 뛰어났기 때문에 선조의 침의 로서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선조 37년(1604) 문관6품의 위계를 받았 다. 임진왜란 중 선조를 수행하면서 치료한 공으로 광해군 4년(1612) 공신 3등에 녹훈(祿勳)되었고, 여러 차례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벼슬 이 올랐으며, 허준(許浚)과 함께 의관록(醫官錄)에 기록되었다.
광해군 초, 한 때 나주(羅州)에 낙향하여 임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나, 다시 침의로 복귀하였다. 광해군 8년(1616)에 영평현령(永平縣令), 이듬해 양주목사(楊州牧使)를 거쳐 부평부사(富平府使), 남 양(南陽) 부사를 역임하였다. 의관으로서 목민관에 임명되었기 때문 에 간관(諫官)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그대로 임명되었고, 품계가 2품 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의 평을 들을 만큼 침술에 뛰어났다.
인조 22년(1644)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종래의 침구서와는 달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고, 특히 보사법(補瀉法)에 있어서는 독자적 분야를 개척한 것이었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 。사의경험방。, 。동의문견방。 등이 있다.
유상(柳 상)
본관은 문화(文化)로 판관 인(湮)의 손자이고, 문해백 경집의 아들 이다.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조선 후기의 의관으로서 숙종 대의 두과 전문의(痘科專門醫)이다.
숙종 9년(1683) 서울에 두환(痘患: 천연두)이 크게 일어났을 때 왕 의 병(천연두)을 잘 치료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동지중추부사에 임명 되었다. 이 해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왕이 완쾌되지 않았기 때문에 멀리 보낼 수 없다 하여 고양(高陽) 군수에 임명되었 다. 이어 숙중 25년(1699) 왕세자의 두환을 잘 치료하여 지중추부사 가 되고, 수령직을 제수받았다. 숙종 37년(1711) 왕자를 치료한 공으 로 벼슬이 올랐으며, 합천(陜川) 군수가 되었다가 삭녕현감(朔寧縣監 )이 되었다. 두과에 대한 탁월한 기술이 있었으며, 내의(內醫: 御醫) 로서 궁중과 대관은 물론 백성을 치료하여 공이 많았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게 된 것은, 그가 처음 왕의 병을 치료하러 궁에 들어갈 때(숙종 9년 10월) 길에서 두환을 심하게 앓고 있는 아 이가 있었는데, 옆을 지나는 승려가 “시체탕())湯)을 쓰고 나았다 ”고 하는 말을 듣고, 이 약 몇 첩을 올려 왕의 병이 치료되었기 때 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고금경험활유방(古今經驗活幼方)。 1권이 전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의 의학관(醫學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전기까지 급변하는 국제 사회의 변동 속에서 방대한 저술을 통해 자기의 이상 을 펼쳐 보려 했던 대표적인 실학자(實學者)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翼)의 학문을 접해 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매부인 이승훈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다. 1789년 문 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특히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았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박 해의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과 함께 체 포되어 강진으로 귀양갔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이 곳에 서 18년 간(1801∼1818)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완성되었다.
그의 학식과 경험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어, 유형원·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유학자였으나, 학자는 학문만을 고집해서는 안되고, 이를 정치 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여 천주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당시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 양의 과학과 기술(천문·지리·의학 등)이나 세계 지도·천리경(千里鏡) 등의 서양 문물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과 문물은 그 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학의 완성자로서 정치·경제·문학·음악· 천문·지리·의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는 유학자이었고, 탁월한 과학자였으며, 또한 의학자였다. 따라서,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관찰하였고, 직 접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의학에 많은 관심을 가져 。의령( 醫零)。과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였다.
그의 의학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과학적이어서 비과학적인 이론은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는 의학에 밝은 유의(儒醫)로서 의사는 아니었 지만, 눈의 원·근시(遠·近視)와 맥법(脈法) 그리고 두과(痘科: 천 연두·성홍열과 같은 피부과)에 관해서는 임상의를 능가하는 탁견과 실용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원시와 근시에 대해, 사람이 늙어서 가까운 것을 잘 못보게 되는 원시는 양(陽)이 부족한 탓이고, 그 반대인 근시는 음(陰)이 부족한 때문이라거나, 원시에는 물(水)이 없고, 근시에는 불(火)이 없다고 하는 오행설(五行說)적인 설명의 비 과학성을 지적하고, 그러한 현상은 눈동자의 렌즈가 평평한가 볼록한 가와 초점의 원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하였으며, 젊었을 때는 눈 동자가 볼록하여 가까운 것이 잘 보이나, 노인은 혈기(血氣)가 쇠약 하여 눈동자가 평평해짐으로 먼 것이 잘 보이는 것이지 음양과는 관 계 없는 것이라 하였다.
또, 그는 손목의 맥을 짚어 보고 오장육부의 징후를 알아낸다고 하 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논박하는 등 동양 의학의 비과학적인 면을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서양 과학 기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또 하나의 의학에 대한 업적은 두과전문(痘科專門) 의서인 。마과회통。의 저술이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성홍열·천연두와 같은 악성 피부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병 이 유행하였고, 특히 정조 10년(1786)에는 이것[麻痘]이 대유행하 였기 때문에 왕명으로 이를 치료하기 위한 의서가 몇 가지 편찬되었 다. 이 책은 그가 정조 22년(1788)에 이헌길의 。마진방(麻疹方)。을 중심으로 국내외 의서 63종을 참고로 편찬한 것인데, 당시 동양의 마 진서(麻疹書: 두과 전문 의학서적)로는 가장 우수하고 과학적인 것이다.
정약용은 당시 청나라에서 성행하던 인두종법(人痘種法: 강렬한 두 창의 독을 인공적으로 인체 내에 접종시켜 그 독력을 약하게 하는 방 법)을 수입해서, 박제가와 함께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를 연구·실험 하여 종두술(種痘術)을 실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종두법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종두심법요지(種豆心法要旨)。를 집 필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영국인 의사 제너(Edward Jenner)가 발견한 우두종법을 중국을 통해 입수하여 국내에서 실시하였던 것으 로 생각된다. 그의 이러한 우두종법의 실시는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 볼 때 그가 이를 실시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두종법에 정통한 그가 같은 방법으로 실시하는 우두 종법에 기술적 문제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은 천주교인에 의해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뒤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중 단되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근대 사회로의 전환점에서 박해받은 남인 계통의 천 주교인 실학자로서 국리민복을 위해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과학 기술 의 도입과 보급에 온 정력을 기울였던 석학이었고, 백성의 질병 치료 에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던 의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