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향토색 분명한 우리 누룩, 마을마다 술 익는 향 모두 달라
한국문화 대탐사 – 전통술 <하>
우리 전통술의 주 재료인 누룩을 발효시키는 누룩방. 천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누룩의 재료와 제조법은 다양하다. 술의 향과 풍미는 누룩에 따라 달라진다. [중앙포토]
나그네가 길을 간다. 강을 건너고 밀밭을 지난다. 이윽고 서산에 타는 듯한 노을이 번진다. 고단한 나그네의 마음은 하염없이 가라앉는데 문득 술 익는 향기가 번진다. 시인 박목월은 그 서정을 ‘나그네’라는 시에 담았다.
강나루 건너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문득 궁금해진다. 술 익는 마을을 어떻게 알았을까. 발효하는 누룩의 향내 덕이다.
한반도에서 누룩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됐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와 ‘누룩 세상’을 이뤘다. 누룩에 대한 정식 기록은 조선시대 중엽 이후의 음식 관련 문헌인 『사시찬요초』,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에서 이름과 만드는 법이 상세히 등장한다. 이후 누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누룩 이름이나 만드는 법이 『치생요람』(1691), 『산림경제』(1715), 『농정회요』, 『본초강목』, 『임원십육지』, 『동의보감』 같은 무게 있는 책에까지 등장한다.
천년 세월 넘게 진화한 누룩은 다양성을 자랑했다. 지방마다 독특한 기후의 영향으로 모양과 제조법, 발효기간이 달랐다. 경기ㆍ영남지역에선 성형한 누룩을 짚으로 싸서 온돌방에 4~5일간 띄웠다. 호남과 충청도 서해안에선 짚으로 묶고 실내의 시렁이나 천장에 매달아 10~30일을 띄웠다. 밀ㆍ보리ㆍ쌀ㆍ녹두 누룩 등 종류도 수십 가지나 됐다. 밀 누룩이 발효가 잘되고 향이 좋아 가장 많이 쓰였다. 쌀 누룩은 이화주를 빚는데 쓰였고, 녹두 누룩은 ‘향온주’나 ‘백수환동주’ 같은 특수한 술에 사용했다. 녹두 누룩은 오묘한 향취를 내서 궁중이나 부유층, 사대부가에서도 혼자 마실 만큼 귀했다.
그러니 누룩이 빚어낸 술의 맛과 향을 경탄하는 시가 많을 수밖에 없다. 김종직은 ‘…기장술 거듭 기울이나 맛은 더욱 향기롭네…’라 읊었고, 정수강은 ‘…칡뿌리로 빚은 술이 술잔에 가득하니 향기가 비로소 흩어지고…’라 읊었다. 다 누룩이 만든 조화에 취한 이들이다.
누룩 자체가 글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고려의 문인 이규보(1168~1241)는 누룩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의인화해서 ‘국선생전(麴先生傳)’을 지었다. “국성(麴聖)의 자는 중지(中之, 곤드레)니, 주천(酒泉)고을 사람이다. …하루만 이 친구를 보지 못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싹돋는다…”고 노래했다. 한자로 누룩은 ‘곡자(麯子)’ 또는 ‘국자(麴子)’라 한다.
지난 21일 충북 청주 청원구 내수읍 풍정리(楓井里).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광이 좋고 양지바르며 물이 좋은 고장이다. 동네에는 조그만 술 회사 ‘화양’이 있다. 이 고향 출신이기도 한 이한상 대표는 “좋은 물을 써서 술을 빚으려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전통누룩을 손수 만들어 술을 빚는다. 자그마한 공장 내, 후끈하고 습한 누룩방에는 둥글둥글한 원반 모양의 누룩들이 볏짚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볏짚 위에서 누룩을 ‘띄우는’ 것은 볏짚에 서식하는 효모균과 효소를 분비하는 곰팡이균이 누룩에 잘 달라붙게 하려는 것이다. 누룩의 모양ㆍ재료ㆍ두께 모두에 조상의 경험과 지식이 녹아 있다.
미생물학이 없던 시절 조상은 오랜 경험을 토대로 좋은 누룩균이 많이 배양될 수 있게 했다. 온돌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다. 문득 코끝에 구수한 누룩향이 감돈다. 건너편 방에 있는 옹기로 된 술항아리에선 이 누룩으로 만든 술 ‘화양(가칭)’이 숙성되고 있다. 여기서 술은 영상 10℃의 서늘한 온도에서 길게는 석 달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쳐 애주가에 안기게 된다. 8년 준비 끝에 올해 처음으로 술을 출시하려 한다는 이 대표는 “내 누룩이 없으면 내 술도 없다”고 말했다.
한민족의 입에 감칠맛을 돋워줬던 ‘우리 누룩’은 전통술의 몰락과 더불어 근래에 들어와 모진 풍상을 맞았다. 일제는 변종 누룩인 ‘입국(粒麴)’을 이용하라고 강권했다. 입국은 특정 효모균과 효소만을 써 맛이 획일적이었다. 그래서 전통누룩으로 빚은 술의 향과 풍미를 따를 수 없었다. 수천 년 함께 해온 ‘우리 누룩’이 사라진 뒤 한국인은 공산품화된 술 맛에 길들어졌다.
일본 누룩이라고 무조건 폄하할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술은 쌀로 빚는 발효주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술의 풍미를 좌우하는 첫 단계 발효과정에 들어가는 자연 첨가물이 전혀 다르다. 쌀 같은 곡물로 술을 빚으면 먼저 전분을 당화(糖化)해야 한다. 일본 술의 경우 입국이라고 불리는 코지(효소제(곰팡이균)와 혼합물)를 함께 넣어 곡물의 전분을 당화시킨 뒤에야 발효 효모를 첨가한다. 그러나 누룩을 쓰는 우리 전통술은 첨가물도 없고 당화와 발효가 함께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을 일본 누룩은 흉내 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누룩 몰락의 주범은 일제만도 아니다. 전통누룩을 최대 월 120t씩 생산하는 ‘진주곡자’의 이진형 사장은 “80~90년대 우리 술이 맥주와 소주에 밀리고 전통누룩이 개량누룩에 밀린 대표적 원인은 누룩 생산자들의 주먹구구식 제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전까지 대도시와 각 도에 있던 곡자 회사들이 막걸리의 고정 수요만 믿고 품질관리를 게을리 한 탓에 누룩 품질이 나빠졌고 이는 술맛 저하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애주가들이 전통술, 특히 막걸리를 외면하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주에서 떠난 입맛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주류시장에서 밀리면서 그 많던 곡자회사들은 문을 닫았다. 진주곡자도 한 달에 보름은 쉴 만큼 위기에 몰렸다. 설비 자동화와 과학화로 살아남았지만 대부분 전통누룩의 처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심각한 것은 그런 사이 우리 술 고유의 향과 풍미에 대한 편견이 소비자들 사이에 커졌다는 점이다. 한국전통주연구소의 박록담 소장은 “요즘 막걸리 제조에 누룩을 밑술의 30%까지 쓰니 냄새가 심하다. 10% 이상을 쓰면 안 그렇다. 그래도 누룩을 많이 쓰면 술이 쉽게 빨리 만들어지기 때문에 업자들은 포기를 못한다. 적게 넣으면 실패율이 높아지고 술 익는 기간도 길어지는 걸 우려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좋은 누룩도 아닌 개량누룩을 쓴다. 밀 껍데기를 공업적으로 가공해 생산한 개량누룩은 전통누룩보다 싸면서 더 빨리 주조한다. 그러나 맛이 떨어져 첨가제를 넣어야 한다. 악순환이다. 첨가제가 섞인 누룩향의 맛이 제대로일 리 없으니 주당들은 외면한다. 배상면주가의 배영호 사장은 “우리의 문제는 체계화되지 않은 가양주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일정한 술맛을 유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며 “전통주의 부활은 제조 과정의 과학화와 고유의 전통 기술을 잘 골라 활용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한다.
흔히 전통주를 와인과 비교한다. 좋은 와인은 궁극의 향을 자랑하며, 그 향기를 부케 (bouquet), 즉 꽃다발로 묘사한다. 다채롭고 화사하다는 뜻이다. 전통누룩으로 빚은 한국 술도 가능하다. 제대로 된 청주의 고소하면서도 달달한 향은 보리 누룩이 주는 향취다. 이진형 사장은 “누룩향은 퀴퀴하지 않으며 고소할 정도”라고 한다. 전통누룩엔 와인에 도전할만한 힘이 담겨 있다.
취재지원=신희선ㆍ오수린ㆍ이영경ㆍ최지은ㆍ홍예지 아산서원 알럼나이 소모임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여론ㆍ계량분석센터 연구위원 mhgo@asaninst.org
출처 : 중앙SUNDAY 제390호 | 20140831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