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5천명 내외를 수용할 수 있는 그 공간은 장방형인데다 벽과 천장이 온통 콘크리트여서 제대로 된 소리를 연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 한마디로 대중음악 공연장 하나 변변히 없는 한국 공연 문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나는 추운 겨울날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든 성인관객들에게도 감동했지만 당신과 밴드의 스태프가 만들어 내는 사운드에 결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곳에서 뭉개지고 찢어지는 소리만을 들었던 나에게 그날의 공연은 너무나 신선한 경험이었고 , 歌王은 아직 하야하지 않았음을 새삼 일깨워 준 기억이 새롭다. 라이브 문화의 발전과 성숙 없이 대중음악의 미래는 없지 않은가?
☞ 나는 80년대에 컴백에 성공한 뒤에도 공연에 온 신경을 쏟았다. 몇 사람이 연합해서 벌이는 리사이틀 문화에서 단독으로 펼치는 콘서트 문화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 것을 5년 연속 방송사의 가수왕 타이틀을 딴 것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공연의 기억은 끝이 없다. 그 중에서도 나의 고향이나 진배없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81년부터 93년까지 세 차례 열렸던 백사장의 콘서트, 그리고 일본 부도캉 체육관에서의 솔로 콘서트, 그리고 최근 고려대에서 열렸던 '자유'콘서트 등등. 86년에서 87년 1년간 148회의 공연을 강행하기도 했다. 콘서트는 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음향과 조명의 노하우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나는 기자재와 스태프 가릴 것 없이 공연에 모든 것을 투자해왔다. 나는 위대한 탄생의 공연이 여느 콘서트와 다른 것은 이 오랜 노력의 결과라고 자부한다. 코엑스의 대서양 홀에서 할 때도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다 스피커를 아예 바닥으로 주욱 깔아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하울링을 맞받아 쳐서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콘서트는 진흥기금이다 뭐다 해서 거의 다 뺏기니까 잘해야 본전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 대중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직접 체험의 비중이 너무 낮다 보니 콘서트에 임하는 의식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하다. 중앙이 이러니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예 공간 자체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연전에 포항시의 초청을 받아 포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할 때다. 워낙 보수적인 분위기의 도시이기도하지만 스타디움을 채운 어른들이 공연의 반이 끝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는 데다 시선은 무대가 아니라 무대 앞 왼쪽의 , 10대 20대들이 일어서서 열광하는 쪽만 향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선 같이 호흡하는 공연문화가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난 6월의 자유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 ,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낌없는 젊음의 힘만이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내쳐 말하자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 관리들이 문화를 등지고 살게끔 만든다.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을 할 때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기도 했지만 장관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재벌 쪽은? 눈앞의 돈 벌려고 음반 사업에 뛰어들지 말고 그 돈 좀 제대로 된 문화사업에 투자하면 안 되나?
▲ 다시 디스코그래피로 돌아가자. 83년의 5집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다. <나는 너 좋아> 같은 10대 취향의 로큰롤이 A면의 한가운데에 배치되어 있긴 하지만 어두운 톤의 재킷 디자인이 암시하는 것처럼 <한강> 과 <황진이> 같은 두터우며 전통적인 이디엄이 축이 되는 노래들이 앞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트로트가 아니면서, 그리고 회고적인 민요의 틀도 아니면서 현대 한국의 음악 정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욕이 엿보이는 이 앨범의 콘셉트는 무엇이었는가?
☞ 김순곤에게 한강의 역사를 한번 파헤쳐 보자고 한 것은 우리가 매일 보고 지나치면서도 이 강의 거대함을 못 느끼고 산다는 생각이 들면서 노래로 한번 짚고 넘어가 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제3한강교>같은 노래도 이미 있었지만, 음악적으로 한강 그 자체를 인식해보고자 했다.
이런 컨셉트를 바탕으로 후주는 앞으로 몇 만 년 뒤에도 흐를 한강의 소리 없는 울음의 이펙트를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황진이>는 드라마 주제가인데 , 판소리 적인 멜로디라인을 응용하여 강렬한 리듬을 만들고 거기에 소울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나는 톤을 중요시 한다. 정신차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밤에 혼자 스튜디오에 앉아 이펙트들을 연구했다. 사운드에 대한 나의 철학은 리듬을 바탕으로 쌓인 각 악기 파트의 연주와 멜로디가 하나의 메세지로 종합되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조건 더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톤을 많이 알아야 하는 건 그래야만 이 모든 과정에서 끝없는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곡을 뒤로 미루고 <산유화>와 <한강>, 그리고 뒷면의 <황진이>등을 앞으로 내세운 건 앞면 톱에 타이틀곡을 놓아야 하는 관습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다.
▲ A면의 마지막 트랙엔 당신의 클래식 중의 하나인 <친구여>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광범한 세대의 계층 ,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이른바 애창곡의 첫머리를 언제나 차지하곤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부터 트로트밖엔 가진 것이 없는 이 땅의 성인 세대에게 새로운 음악 취향을 제공하기 위한 당신의 기나긴 노력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래의 생명은 길다지만 지금 여기의 상황은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대중음악은 의례 그런 것이거니 하고 넘어가는 선입관이 지배적인데 이와 같은 소모적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와 추억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로 우리의 노래는 애인과 고향을 꼽아 왔다. 그런데 왜 친구에 대한 노래는 거의 없는가? 그것은 아마도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가 옆을 돌아볼 틈이 없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나는 위대한 탄생의 건반주자 이호준과 '친구'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했다. 슬프고 애상적인 것도 아니고 <잘살아보세>류의 건전가요도 아니면서 어떤 정신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 이 노래는 장르의 문법이 없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처음부터 확신이 섰다.
즉 이 노래는 '친구'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수용자의 나이와 스타일을 초월할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말이다. 실제로 이 노래는 공식석상에서도 창피해하지 않고 많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이런 계열의 노래가 9집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와 13집의 <꿈>이다. 쑥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만든 노래중의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길게 사랑 받을 수 있는 그런(이 인터뷰가 있은 지 한달 후 MBC의 아침 토크 프로그램에 나온 신한국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애창곡으로 <친구여>를 쑥스러운 표정으로 첫 몇 소절을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타이틀곡이 뜨는 것보다 앨범 전체가 뜰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곡보고 사람들은 앨범을 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90년대는 너무 얄팍하다.
예술성과 스타성을 겸비한 극히 일부의 젊은 아티스트만이 몇 집까지 계속해서 내는 반면에 지금처럼 한번 반짝하고 소모품처럼 어린 스타들이 하루아침에 물갈이된다면 이들의 미래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나는 무엇보다도 제작자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본다. 얼굴과 춤만 볼 것이 아니라 음악성을 보고 픽업해서 지속적으로 뒷받쳐주어야 하는데 눈앞의 이익이 모두를 망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하지만 84년의 6집은 완성도에 있어서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정의 마음>을 제외한 대개의 노래가 다른 작곡가로부터 받아 채움으로써 당신과 위대한 탄생의 아이덴티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앨범이 아닌가?
☞ 그렇다. 2집이 그러했듯이 6집 역시 살인적인 스케줄과 1년에 앨범 하나 이상을 내어야 하는 음반사의 관행에 시간이 버텨내지 못 했다. 그것은 85년 상반기 7집의 폭발 이후 연이어 하반기에 나온 8집도 마찬가지이다. 이러다간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압박감 아래서 다른 사람의 곡으로 6집을 만들 때 이미 7집의 곡을 쓰고 있었고, 하나에 집중하고 하나를 건너뛰는 징검다리 배팅이랄까 , 비즈니스의 룰 속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의 위대한 탄생에 유재하 , 김광민, 정원영 같은 젊은 친구들이 쟁쟁하게 포진하고 있었으니까. 7집의 수록곡 <사랑하기 때문에>를 만든 유재하는 당시 한양대 음대 재학 중이었는데 , 미국 순회 공연을 앞두고 학장의 허가가 안나 도중하차했다. 지금도 나는 저 친구들 때문에 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 7집으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제왕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 앨범은 풍부하고 성숙한 감정이입이 실현된 발라드 <눈물로 보이는 그대>로 시작하지만 로큰롤의 열기가 앨범 전반을 관통한다.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질주하는 조용필 록의 비등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30대 중반에 다다른 당신에게 로큰롤은 어떤 것이었는가?
☞ 미국에서는 두 번째 박자에 턱이 앞으로 나오면 히트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느낌이 모든 록의 기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 80년대 초중반 나의 음악에 열광하던 이 땅의 10대들은 록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세대에게 록의 대중적인 모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죽을 때 나의 음악은 이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음악이 그저 흘러가는 소모품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창밖의 여자>와<비련>같은 발라드까지 강렬한 파워를 내뿜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의 근원에 록의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록이 좋다. 젊음이 좋다. 이 시대를 음악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것의 불만, 흥미, 거짓, 사랑을 얘기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시대의 가장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와<미지의 세계><여행을 떠나요>같은 노래를 만들 때 나는 더이상 젊지는 않았지만 난 젊음의 대변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러나 그 분노만 얘기해서는 안 된다. 폭력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 강산에 같은 90년대의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범함과 자유분방한 표현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좀 건방지게 말한다면 90년대의 음악이 획기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템포 120의 강렬한 로큰롤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국의 젊은 힘을 통일시킬 장르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가 원망할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반인 법이다.
▲ 그리고 당신은 활동 무대를 국내를 벗어나 일본으로 진출한다. 물론 이전에도 이성애와 계은숙을 비롯하여 일본 시장에 뛰어든 음악인이 없진 않았지만 아예 일본화 되지 않고 당대의 정상급 스타가 일본 시장에 독자적인 뿌리를 내린 예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당신이 일본에게 준 것 , 그리고 일본이 당신에게 준 것은?
☞ 82년인가, 일본 문화방송이 개국 30주년 기념으로 한국, 중국, 일본, 홍콩, 필리핀, 태국의 음악인을 초청하여 아시아 뮤직 포럼이라는 30시간 짜리 콘서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25분 정도를 맡았는데 그 공연 이후 유독 나를 찍은 것 같다. 그리하여 83년 NHK홀 부터 시작한 3개 도시 콘서트, 84년 홍콩의 알란 탐과 일본의 다니무라 신지와 고라쿠엔 구장에서 가졌던 팍스뮤지카로 이어지며 활동이 확장되었다.
처음 일본에 진출할 때만 해도 나이 많은 세대를 제외하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모르는 상황에 적이 놀랐다. 말도 못하는 놈이 건너가서 최선을 다해 활동했고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야 주는 골든 디스크를 세 장 받았다. 일본은 나에게 대범함을 가지게 했고 조그만 나를 크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은 나에게 돈을 벌어준 곳이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 한국에선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있을리 만무했고 (그래서 12집 이전의 앨범 판권은 지구레코드가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나마 87년부터 프로덕션 체제로 바뀌어서 조금 나아지긴했지만 국내의 밤무대도 거의 뛰지 않았던 관계로 그나마 들어오는 돈은 위대한 탄생에 투자하기도 바빴다. 그러니 내 개인의 수익은 일본 말곤 어디서 나왔겠나? 오히려 인기가 떨어졌다는 90년대에 콘서트 위주로 가면서 80년대보다 수입이 늘었을 정도이니 한마디로 나는 한국 음반산업의 희생타나 다름없다.
▲ 7집과 같은 해 이어 나온 8집은 7집과는 전혀 다른 세대, 곧 성인 계층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타이틀곡인 <허공>이 그렇고 아직도 노래자랑이나 주부가요열창 같은데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양인자 , 김희갑 콤비에 의한 <그 겨울의 찻집>과<바람이 전하는말>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젊은 층의 시선을 끈 것은 역시 이 콤비에 의한, 음악 모노드라마라고할 수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이 노래는 노래운동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풍자한 <군림한자로의 고독>으로 개사해서 당시 노찾사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신의 동향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안치환이 불러 대학가와 소극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 처음 한 해를 거르고 9집이 발표되었다. 이 87년 앨범부터 피로감이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물론 7집의 열기대신 앞에 언급한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같은 초연한 템포의 어덜트 컨템포러리가 장식하고는 있지만 <청춘시대>의 기타프레이즈 표절과 <마도요>의 제목 시비로 얼룩지기도 했다. 20주년을 목전에 둔 87년은 77년 활동 금지 이후 당신의 음악 이력에서 처음 맞은 위기의 시간이 아니었는가?
☞ 그 노래가 개사되어서 불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8집은 한마디로 성인세대에 대한 서비스다. 이 세대의 호응은 좋았지만 밑 세대가 많이 떨어져나갔음을 당시의 콘서트 때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삶에 대한 확신을 노래한 것이다. 확신이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운동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투쟁은 외로운 것이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한때 투쟁했다 그만두면 안 한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도 동년배가 아닐까 하는데 , 김민기가 대단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음악으로 투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87년, 9집을 발표할 때 나는 개인적인 불행과 맞물려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했다. 쉬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란 인간은 뭐냐? 회의가 회의를 물고 맴돌았다.
그런 가운데 <청춘시대>의 기타 솔로가 잉베이 맘스틴의 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타를 맡았던 당시의 멤버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리고 바로 그 노래의 홍보를 그만두었다. 가장 힘든 시기였다.
▲ 87년은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20주년을 기념하는 1988년, 10집 파트Ⅰ과 파트Ⅱ 앨범을 발표하며 불굴의 의지를 내보인다.<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의 담담함이 열정적으로 비약한부터<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모노드라마를 아예 19분30초의 장편드라마로 확장시킨<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까지 성인취향으로 꾸민 파트Ⅱ 앨범의 전곡을 양인자, 김희갑 콤비에게 맡겨 8집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당신이 전곡의 작곡을 맡은 파트Ⅰ 앨범은 7집의 에너지를 다시 불러일으킨다.
특히 A면의 머릿곡인 <서울, 서울, 서울>이 올림픽 개최의 들뜬 분위기와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동시에 B면의<서울 1987 년>은 4집의<생명>의 뒤를 이어 (작사도 똑같이 전옥숙이다) 고통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다. 이 기묘한 대비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 1987년을 잊을 수 없다. 나 개인이 힘든 것은 나 혼자 버티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온 나라까지 힘든 건 견디기 어려웠다. 전국이 연기뿐인데 이 전쟁터에서 누가 국민이고 누가 정부인가? 처음에 잘못한 자는 분명 있는데 나중에는 누가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싸움판이 이어졌다.
우리 모두의 패배이다. 이 배는 엎어진 배다.<생명>을 작사했던 전옥숙여사와 토론하며<서울 1987년>을 만들었다. 이 노래는 후렴부에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코러스를 처음으로 쓴 곡이기도 하다. 그 코러스를 '민중의 소리'로 상정한 나는 스튜디오에서 제멋대로 맘대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전체적으로 그 곡은 맥박 소리를 형상화한 리듬과 템포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들쭉날쭉한데 그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의도이다.
이 노래에 이어지는<회색빛 도시>의 가사는 MBC 라디오의 안혜란PD가 쓴 것이다. 방송 마치고 술 먹으면서 이 도시의 빌딩은 왜 다들 회색이냐?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건가? 색깔은 희망이고 꿈인데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 왜 몽땅 회색뿐이냐? 뭐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높였더니 그는 형, 왜 나한테 그래? 하고 빠져나간다. 그래서 가사를 한번 써보라고 즉석에서 부탁했다.<고추잠자리>와<못 찾겠다 꾀꼬리>를 쓴 김순곤이나 앞에 말한 전옥숙 여사와 안혜란PD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나는 전문적인 작사가에게는 거의 가사를 맡기지 않고 그때그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파트너와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김순곤은<고추잠자리>이후에 전문가가 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양인자, 김희갑 두분의 인연이 맺어지는 데 기여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음악 생활 20주년을 기념하는 10집의 파트Ⅱ 앨범은 그 콤비에게 맡기고 싶었고, 그 나머지 시간을 90년대를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91년의 <꿈>도 이미 그때 만들어놓은 작품이다.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은 70년대에 블라인드 페이스의 를 했던 기억을 상기하며 희갑이 형과 음악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결과물이다.
▲ 두 장의 10집을 끝으로 당신은 소속사로부터 벗어났다. 60년대에 음악을 시작한 당신이 90년대에 와서야 음반사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1990년의 12집의<추억속의 재회>를 차트 톱으로 올려놓으며 그 동안의 축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이 12집과 후기의 최대걸작 13집《The Dreams》는 당신이 슈퍼스타에서 마에스트로로 옷을 갈아입는 충실하고 가득한 음향의 향연이다. 어느덧 불혹의 고개를 넘은 당신의 음악적 과제는 어떤 것으로 설정했는가?
☞ 90년대..무엇보다도 80년대의 옷을 벗어야 했다. 하물며 톤까지도. 12집<추억속의 재회>부터 사운드가 강렬하고 무거워졌으며(특히 13집의 B면이 그렇다) 무엇보다 진지해졌다. 대중의 반응에 사로잡히지 않고 록을 바탕으로 서양의 클래식적인 요소, 중국의 민속 악기(14집〈이별의 인사〉에서 쓴 二湖)라틴 계열의 퓨젼 리듬을 다양하게 접목해 본 것이다.
80년 대엔 사실 탁성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음반사로부터 독립도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더 가득 찬 소리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기의 분위기는 14집 홍보를 할 때 피부로 느꼈다.<슬픈 베아트리체>에 이어 <고독한 러너>를 내보냈는데 92년 가을의 모든 채널은 랩 댄스뮤직으로 몰려갔고 그 노래는 제목처럼 더이상 힘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위대한 탄생에게 개개의 트랙을 맡겨본 후속 앨범 15집까지 최악의 실패를 기록했다고 해서 나는 슬퍼하거나 노할 까닭이 없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서야 역사다. 조용필이, 서태지가, 신해철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는 끝까지 도전하고자 했고 앞으로도 도전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 당신이 언급한 대로 92년부터 모든 시선은 비주얼한 이미지로 몰려갔다. 청각의 거장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당신은 가장 힘든 고비를 맞았다. 15집 이후 의욕적으로 시작한 뮤지컬 작업마저 불발로 끝나면서 당신의 지지자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뮤지컬에 대한 관심, 그리고 슬럼프를 넘어서 이렇게 롤백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듣고 싶다.
☞ 뮤지컬은 내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면 틈만 나면 뮤지컬을 보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미 여인의 키스>는 돈을 주고 번역한 대본을 보면서 아홉 번을 관람한 적도 있다. 내년 30주년 활동을 벌인 뒤 뮤지컬은 3년 정도의 시간을 집중해서 다시 도전할 것이다. 밀릴 때는 철저히 밀려야 한다.
이 말은 슬럼프조차도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다간 아프로 고꾸라진다. 아예 내 손으로 내 구덩이를 판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모든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그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자신만만하게 쓰러져야만 자신감 있게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 한국 록의 여명기를 일군 신중현에 대한 헌정 앨범이 발표되고 산울림이 결성 20주년을 기념하여 6년만에 13집을 발표한 것과 더불어 당신의 3년만의 신작 16집이 판매고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97년 시즌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16집에서 당신은 13집을 공동으로 프로듀스했던 키보드주자 톰 킨과 다시 해후했으며 오케스트라의 편곡이 필요한 노래는 제러미 러복을 파트너로 삼았다. 80년 컴백 이후 당신의 앨범에서 키보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당신이 겨냥한 이번 앨범의 기조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내년의 30주년 기념 앨범은 어떤 컨셉트로 임할 것인가?
☞ 나는 기타만큼이나 키보드의 웅장하고 화려한 세계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냥 달리는 심플한 록보다는 핑크 플로이드 같은 사운드 메시지가 충만한 록을 좋아한다. 톰 킨은 13집에서 신선한 경험을 안겨준 인물로 , LA에서 내가 머물던 플로리다로 날라와 이박삼일 간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면서 준비해 간 6곡의 미팅을 마쳤다.
오케스트레이션이 필요한 나머지 곡을 맡은 제러미 러복은 영국 출신으로 아주 비싼 65세의 베테랑이다. 이번 16집의 핵심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가장 중용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내는 것은 내년의 30주년 17집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히트를 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년의 앨범에선 나는 16집과는 다른 전략의, 30년 전의 초심으로 달려간 음악을 선보일 것이다.
즉 내 나름대로 록을 정리할 것이며 슬로우 곡 또한 그 기조에서 정리할 것이다. 진정한 록 은 무엇인가?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도전하려고 한다. 록은 떠드는 것이냐, 얘기해야 하는 것이냐, 함께 나누는 것이냐? 나는 아직 모른다. 만들면서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