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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 대산문화재단, 2010년 여름호.
<박인환 시인과의 대담>
이 대담은 전후 모더니즘 문학의 선두자로 활동하다가 1956년 3월 20일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박인환(朴寅煥) 시인과 가상으로 가진 것이다. 대담 시기는 그가 타계하기 보름 전 즈음으로 설정했다. 대담 내용은 최대한 사실에 바탕을 두고자 했다.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봄꽃들이 피려고 하는 계절에 뵙네요. 선생님께 이 봄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박인환 :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다만 시인이니까 좀 더 새롭고 또 절실하게 그 마음을 가져보려고 하지요. 문득 설악산의 눈이 녹고 진달래가 피면 천렵 가던 옛날 생각이 나네요.
맹문재 : 선생님의 고향 얘기가 듣고 싶네요.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박인환 : 저는 고향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거의 없어요. 고향을 일찍 떠나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원도 하면 산이 많고 사람들이 순박하다고 생각하는데 저 역시 그렇다고 여기기 때문에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를 떠올려보지요. 1년에 한두 번씩 지방 순회하는 극단이 저의 마을에도 왔는데 그때가 최고 즐거웠어요. 온 마을 사람들의 잔치였지요. 학교 운동회 때도 재미있었구요. 장마철이 되면 춘천으로 연결된 산길이 무너져 한 달 가까이 자동차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대홍수로 인해 마을이 잠기면 교회당 꼭대기로 피신했지요. 소와 돼지 등이 떠내려가는 모습이 생생하네요. 소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간성으로 전근을 가시어 60명 되는 학급생들과 20리나 되는 관제리까지 전송한 일도 떠오르네요. 그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강에서 고기를 잡고 저녁 늦게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를 큰소리로 부르며 돌아왔지요. 애국가를 가르쳐주신 마을 목사님이 해방되는 날 형무소로 잡혀가 눈물을 흘렸던 일도 있었어요. 겨울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는데, 봄이 오면 마을 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산으로 들로 천렵을 나갔지요. 그래도 도둑맞은 집은 없었어요. 그처럼 강원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인정이 많아 남을 해치는 일도 없고 과분한 욕심도 내지 않아요. 저도 겉보기에는 좀 껄렁거리지만 바탕은 강원도 사람이에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인제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서울로 전학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박인환 : 저는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아버님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님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11살 때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아버님께서 자녀교육에 많은 신경을 쓰신 것이지요. 종로구 내수동에서 좀 살다가 다시 원서동으로 옮겼어요. 저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으로 전학해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고 졸업했어요. 그리고 14살 때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공부보다는 문학과 영화에 빠지는 바람에 학교생활하기가 어려워 3학년 때 그만두었어요. 한성학교 야간부를 잠시 다니다가 아버님의 주선으로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로 전학했어요. 졸업 후 3년제인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렇지만 의학 공부에 별 재미를 못 느끼고 있었는데, 다음해에 해방이 된 거에요. 저는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저에게 또 다른 해방이 찾아온 셈이었어요. 아주 신기한 우연이지만 8월 15일이 저의 생일이잖아요.
맹문재 : 그때가 스무살이셨는데, 상경해서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요?
박인환 : 저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새로운 문학의 기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과 이모님의 도움을 얻어 종로3가의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차렸습니다. 서점 이름은 프랑스의 여성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일본 모더니즘 시인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에서 착상했어요. 초현실주의 화가인 박일영의 도움을 받아 세련된 분위기를 내는 디자인을 했고, 손님들이 외국 서점 같다고 할 정도로 원서와 일본에서 간행된 책들을 갖추었지요. 그래서인지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자연스레 시와 예술과 시대를 논하는 자리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서점은 2년 뒤에 문을 닫았어요.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파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렇지만 미련도 후회도 없어요.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고, 무엇보다 보석 같은 아내를 얻었잖아요.
맹문재 :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하셨는지요?
박인환 : ‘마리서사’를 닫은 다음 곧바로 했어요. 신부는 이정숙(李丁淑)으로 저보다 한 살 적은 23살이었는데, 좋은 가문 출신이면서 저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결혼식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셨어요. 신혼살림은 지금의 교보빌딩 뒤뜰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처가에 차렸는데, 저의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적적하다고 하셔서 따랐어요. 저는 결혼 뒤 자유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로 취직했는데,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래도 단란하고 행복했지요. 12월에는 큰아들 세형(世馨)이 태어났어요.
맹문재 : 그 무렵부터 작품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동인 활동도 본격적으로 하셨지요?
박인환 : 저는 항상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민성』이나 『신천지』 등에 작품을 발표했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문학 운동을 하려면 동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규합하고 나섰지요. 먼저 일본에 유학하면서 모더니즘 동인인 ‘보우(VOU)’에 참여했던 김경린 시인을 찾아가 뜻을 이루었지요. 그렇게 해서 1948년 4월 김경린, 김병욱, 김경희, 임호권 등과 『신시론』을 발간했어요. 저는 시 「고르키의 달밤」과 산문 「시단 시평」을 발표했지요. 장만영 시인이 운영하던 ‘산호장’에서 발간을 도와줬어요. 동인지를 내고 나니 문단에서 많은 주목을 했는데 비난도 뒤따랐지요. 소위 자연과 순수문학을 노래하는 시인들이 그랬어요. 해방기의 문단은 조선문학가동맹과 전조선문필가협회 사이의 사상 대결이 치열했어요. 저는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았는데, 달리 말하면 양쪽 모두 공격한 셈이지요. 지난날 식민지 주권의 상실을 노래한 쪽의 정신 가치는 인정하지만 감상적이었기 때문에 비판했고,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쪽은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에 비판했지요. 특히 후자를 비판했어요.
맹문재 : 『신시론』 발간 이후 또 다른 동인지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지요?
박인환 : 꼭 1년만인 1949년 4월에 발간했어요. 저는 시 5편을 발표했어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성격상 『신시론』제2집에 해당하는 셈인데, 제1집에 가담했던 김병욱과 김경희가 빠지고 대신 김수영과 양병식이 참가했지요. 현실 인식에서 모더니즘을 강조한 김경린과 현실주의를 강조한 김병욱 간에 논쟁이 있었는데,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해 동인의 구성원이 달라진 것이에요. 소규모로 기계공업을 하던 홍성보 씨가 ‘도시문화사’라는 간판으로 출간해주었어요.
맹문재 : 그 후 ‘후반기(後半紀)’ 동인 활동을 하셨는데,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박인환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고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동인 구성원에 또 변화가 있었어요.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이 탈퇴하는 바람에 김경린과 저만 남은 셈이었지요. 그리하여 조향, 이상노, 이한직, 김차영 등이 새로 가담했어요. 후반기라는 이름은 어느 날 조향과 김경린과 이한직이 저의 집에 찾아와 모더니즘 운동에 대해 논의하다가 제가 제안한 것인데, 모두들 좋다고 해서 정했어요. ‘20세기 후반’이라는 뜻이에요. 편집은 돌아가면서 맡기로 하고 창간호는 제가 맡았지요. 부지런히 원고를 모아놓았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동인지를 못 내고 말았어요. 그래서 1․4후퇴 후 피난지 부산에서 다시 규합했지요. 그때 김규동과 ‘일본 미래파’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봉래가 들어왔어요. 각자 일간지 등에 시론과 작품을 발표하며 구세대 문학을 공격했지요. 우리들의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주간국제』에서는 후반기 동인들의 작품을 특집으로 실어주기도 했어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고루함에 갇혀 있는 문단에 충격을 주려고 했는데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부산에서는 정치 파동이 있었어요. 소위 ‘땃벌떼’라고 정부와 여당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형무소에 보냈지요. 그때 문인들도 김광섭 씨가 대장으로 있던 문총구국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었어요. 그 일로 동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를 보여 끝내 해체되고 말았지요. 저는 어떻게든 동인 활동을 살리려고 했는데,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어요.
맹문재 : 그런데 선생님의 시세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릴까요?
박인환 : 한국전쟁은 참으로 뜻밖에 일어난 비극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9․28수복 때까지 숨어 지냈는데 살육, 체포, 납치, 불법 침입, 강제 압수, 노력 동원 등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9월 25일) 딸 세화(世華)가 태어났어요. 제가 이름을 지었는데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다’는 뜻으로 전쟁이 하루 빨리 그치기를 바란 것이지요. 9․28수복 후 저는 이전에 다니던 경향신문사에 복귀해서 생활의 안정을 찾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중공군이 개입하는 바람에 1․4후퇴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어요. 12월 8일 가족을 이끌고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대구 동인동으로 피란 갔어요.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자 활동을 했는데, 종군기자가 되어 경향신문 전선판 제작에 참여했지요. 그리고 1951년 5월부터는 육군 종군작가단에 참여해 이듬해 봄까지 서부전선과 강원도 일대의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어요. 저는 그때 전쟁의 참혹함과 무정함을 체험하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등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심정을 작품으로 썼기 때문에 동인 활동할 때의 작품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저는 1951년 10월 하순 경향신문사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따라갔어요. 그리하여 피란지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다들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달팠어요. 젊은 시인 정운삼이 ‘밀다원’ 다방에서 수면제 복용 자살을 하고, 전봉건 시인의 형인 전봉래 시인이 ‘스타’ 다방에서 음독자살을 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들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아파했지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후반기 동인도 활동하다가 해체되고 말았어요. 1953년 6월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김수영이 나와 기쁘게 만났지요. 저의 둘째 아들 세곤(世崑)이 그해 5월 31일에 태어나기도 했어요.
맹문재 :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언제 서울에 올라오셨나요? 서울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박인환 : 1953년 7월 중순 즈음에 상경했어요. 무너진 세종로 옛집을 어렵게 수리하여 거처를 마련했지만 일할 게 없어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었어요. 돌아오는 피란민이며 귀환 장병들이며 거지들이 거리에 들끓어 서울은 혼란 그 자체였지요. 그런 가운데에도 미군 부대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건들과 영화, 팝송, 잡지, 춤 등 미국문화가 급격히 유입해 명동 같은 곳은 묘하게 붐볐어요. 그리하여 자연스레 다들 그곳에 모였는데, 후반기 동인이 해체되어 씁쓸한 데다 전쟁의 충격에다 살아서 만난 친구들이 반가워 잘 마시지 않던 술을 부쩍 마시게 되었어요. ‘경상도집’이 술값도 싸고 빈대떡이 맛있었는데 저에게 외상술을 잘 주었어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그 무렵 영화평론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인환 : 저는 원래 중학교 때부터 영화광이었어요. 그런데 상경해 명동에 드나들며 영화 볼 기회가 늘어난 데다 영화 평론이 일거리가 되어 많이 썼지요. 오종식, 허백년, 유두연, 이봉래, 이진섭, 유한철, 김규동, 김소동, 박태진 등과 영화평론가협회도 만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남자 배우로는 미국의 험프리 보가트, 헨리 폰다, 프랑스의 장 마레 등이고, 여자 배우로는 프랑스의 미셸 모건, 미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입니다. 좋아하는 감독으로는 미국의 프랭크 카프라, 영국의 캐럴 리드 등이고, 기억나는 영화로는 영국의 「제3의 사나이」, 미국의 「젊은이의 양지」, 프랑스의 「정부 마농」, 이탈리아의 「자전거 도둑」 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얼른 전문 영화 제작자와 좋은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가 나와야 되지요.
맹문재 : 선생님께서는 그러던 중 미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여행의 이모저모를 들을 수 있을까요?
박인환 : 그 무렵 저는 대한해운공사에 나가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출근해도 할 일이 없어 그저 낡은 책상에 앉아 남들이 일하는 모습이나 바라보는 형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에게도 미안했지요. 그 기간이 3개월이나 되었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 없었어요. 시나 영화평론 원고를 들고 신문이나 잡지사를 다녀봐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무런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2월 25일 월급날인데 사장이 부르더니 월급 대신 미국 구경 한번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참으로 뜻밖이어서 놀라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지요. 그런데 박 형처럼 문학을 전공하는 분은 미국을 보는 것도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사장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빚을 얻어 사무장 자격으로 1955년 3월 5일 배를 탄 것이지요.
6일 일본에 도착해서 나흘 머물렀어요. 고베, 오사카, 교토 등지를 전차를 타고 다녔는데 파친코가 도심 곳곳에 있는 게 눈에 띄었어요. 9일 밤 고베를 떠나 태평양으로 향했어요. 배 안에서 10권 이상 책을 읽었는데,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는 세 번이나 읽었어요. 선원들과도 재미있게 보냈는데 그들의 환희와 비애에 젖은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 세계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어요. 22일 11시 45분, 마침내 워싱턴주의 올림피아 항구에 입항했어요. 조용한 바다와 수목이 우거진 산과 고운 집 등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올림피아에서 이틀을 보내고 터코마, 에버렛, 아나코테스, 포트엔젤, 포틀랜드 등을 기웃거리며 구경했지요. 그곳의 푸른 산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우리나라의 산은 붉게 헐벗었는데 미국의 산은 수목들이 무서울 정도로 무성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사람들은 교통질서를 아주 잘 지켰고, 거리도 깨끗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아 풍요로운 생활을 하지만 정신연령은 높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저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술집에도 가보았는데 구조나 분위기는 참 좋았지만, 술값은 결코 싸지 않았어요. 미국의 여자들은 대체로 건강하고 인물이 고운 편이었어요. 그리고 유학생들을 만났는데 아주 기쁘게 맞아주며 고국 소식을 물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민자들도 만났는데 모두들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4월 10일 귀국했으니 19일간 미국을 구경한 셈인데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여행 중에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고국과 가족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첫 시집 『선시집』에 대해 여쭈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네요.
박인환 : 미국에 다녀온 후 대한해운공사를 사직하고 시집 발간을 준비했어요. 그 바람에 명동에 더욱 자주 나가 술을 마시게 되었지요. 저의 『선시집』은 1955년 10월 15일 ‘산호장’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산호장은 『신시론』을 출간할 때도 인연이 있었지요. 부완혁 선생님과 이형후 선생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원래의 시집 제목은 『검은 준열의 시대』였는데, 제가 좋아하던 스펜더의 시집명이 『선시집』이었기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찾기도 전에 불이 나 몇 권 못 챙겼어요. 그래서 다시 발간했지요. 출판기념회는 이듬해 1월 27일 오후 5시 30분부터 동방문화회관 3층에서 열렸어요. 『동아일보』에서 안내해주기도 했지요. 출판기념회에는 문인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도 많이 와주셨어요. 당시에는 출판하기가 쉽지 않았고 모두들 외롭고 해서 서로 격려해주는 자리로 출판기념회를 열곤 했어요. 말하자면 문인들의 축제 자리였지요.
맹문재 : 시집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널리 불렸지요?
박인환 : 이진섭 씨가 샹숑 풍으로 만들었어요. 아주 우연하게 만들어졌지요. 우리가 잘 모이던 동방문화회관에서 이진섭, 송지영, 가수 나애심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해 한잔 하자고 길 건너 ‘경상도집’에 들어가 취했는데,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지만 부르지 않아 제가 취흥을 빌려 즉석에서 가사를 썼고, 이진섭이 곡을 만들었어요. 가사와 곡을 들여다보던 나애심이 흥이 나서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노래인데, 꿈같은 얘기네요.
맹문재 : 주위에서는 김수영 선생님과 사이가 안 좋다는 말들도 있는데요?
박인환 : 그렇지 않아요. 동인 활동을 함께했고 부산 피란 시절에도 서로 도우며 지냈잖아요. 단지 시를 쓰는 관점이 다를 수 있지요. 저는 시의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시어와 이미지에 관심이 많은데, 김수영이 아직 진정성을 인정해주지 않는가 봐요. 그렇지만 낡은 관념을 깨트리려고 하는 서로의 공통점이 언젠가는 통할 겁니다. 낡은 관념에 대항하는 정신이 시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월 17일 추모의 밤을 마련하려고 하는 이상 시인이 본보기이지요.
맹문재 : 여러 말씀들 감사합니다. 다음 기회에 또 다른 말씀들을 듣기로 하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좋은 시를 쓰겠습니다.
■ 박인환
시인. 1926~1956. 자유신문 기자, 경향신문 기자 역임. 시집 『선시집』 있음.
■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국문과 교수. 1963년생.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