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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알아듣는 말
2023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디도서 3:5-7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과 구원에 대해서 집약적으로 요약된 단어들의 집합체처럼 여겨지는 문장들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말을 알아 듣는다고 우기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성경 구절과 마찬가가지로 인간은 이 말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4을 통해서 인간들이 이 대화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즉 인간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겁니다. 이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기는 한 생명과는 결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인간들만이 잘 통하는 언어를 가지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이미 만들고 그 안에서 역사와 전통을 신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언어는 하늘 언어와 벌써 끊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바로 ‘생명책’에 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는 ‘생명’과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 끊어진 사이라는 점을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여호와를 믿는데 철저한 그들 손에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쓰는 용어나 의미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생명책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사람이 낄 자리가 못됩니다. 이스라엘도 망했으니 이스라엘도 이 생명책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생명나무의 통로는 오직 하나 ‘야곱’입니다.
진정한 야곱, 진정한 이스라엘이 생명책의 입구가 됩니다. 이 유일한 이스라엘로 오신 분이 자기 백성을 불러내는 형식으로 이 생명책 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가 되도록 불러내십니다. 내가 찾아가는 식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불러내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불러내는 식입니다. “어떻게 (그대가) 나를 아시나이까?”(요 1:48) 즉 내가 아는 나는 주님으로 인해 죽어야 합니다. 구약 욥기에서 욥은 하염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세상 언어 차원에서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하나님 앞에서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따름입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욥 40:4) 인간에게 죽음이란 더는 할 말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 것은 안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뜻과 늘 반대가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그 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4-15) 베드로는 마음 속에 분명히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을 그르다는 판단에 문제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겨냥하여 주님께서 오히려 찾아오시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는 각자 자기 존재를 지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오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존재가 깨어져 버리고 ‘십자가 사건’이 되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요 19:30)
사건이란 하나님의 일이 동결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의 실정을 충분히 경험케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그 어떤 판단을 하든지 간에 더러운 귀신의 지배를 받으면서 함께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자기 행함을 자랑할 마음 태세를 갖추면서 삽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동결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의 행위의 결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모든 작업이 동결되었다면 이는 인간의 그 모든 행위도 마귀일로 드러내면서 동결(굳어졌다)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동결의 예는 민수기 21:5-6에도 나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요한복음 3:14에는, 예수님 자신이 뱀으로 나타났음을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예수남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이유는 모든 일을 죽여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이 된다면 더는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구원작업은 사건화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만 성취된 유일한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 내용은 아가 4:12에 나옵니다. “You are garden up, my sister, my bride. You are a spring enclosed, a sealed fountain” 즉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입니다.
신랑에 단독 이름이 갖게 되면서 신부의 자기 이름, 자기 존재성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과 더불어 가족이 되는 사건으로 충분합니다. 신랑에 의해서 생산된 신부는 안에 공백의 장소를 갖게 됩니다. 과거의 충분히 죄인이었기에 중생, 즉 거듭남 이후에는 충분한 의인이 됩니다.
이 사실을 햄버거의 아래 위 두 조각을 빵으로 여겨봅시다. 두 빵 조각은 중첩되고 그 안에 패티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 패티에서 ‘씻음’의 작업이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샘이 터져 나오듯이 말입니다. 씻음을 신랑의 ‘피’로서만 성립합니다. 육즙이 흘러 넘치듯이 피만 드러내는 기능을 성도가 보여주고 말하게 됩니다.
이 말이 곧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됩니다. 하늘의 언어이거든요. 마르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자진해서 자신의 목숨같은 향수를 예수님의 발 앞에 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해주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 12:7)
마리아는 스스로 예수님의 시신을 담는 관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구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외형입니다. 곽잡힌 형식입니다. 성도가 외치는 말 중에 세상 사람이 가장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대해서 더는 흥미를 갖지 않게 해주옵소서.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것들이 차갑게 동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3-11-26 18:47
14강-디도서 3장 5-7절(못알아 듣는말)231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5-7절입니다.
디도서 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 나온 말 가운데 전체가 우리 인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인데, 오늘 읽었던 5절에서 7절까지는 어떤 대목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그것을 친절하게 쏙쏙 뽑아 한곳에 모아놨습니다. 어느 한 대목도 사람으로서 수용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로 규합, 연합, 체제가 잡혀있어요.
5절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하는데 이 구원 자체가 인간 세계에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벗어난다는 건데 이 세상에 살다가 어디로 벗어난단 말입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벗어난다, 그럼 이 세상을 놔두고 어디로 가는데요? 갈 데가 없잖아요.
‘구원’이라는 말도 인간은 받아들일 수 없고요, 특히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여기 나와요.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이것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착하고, 바르게 살고, 의롭다는 전제하에 행동하게 되어있는데, 우리가 평생 살아온 것이 의의 중첩, 계속해서 그걸 규합해서 살아온 건데 우리의 의롭게 살아온 이 모든 행위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건져낸다면, 그러면 우리는 왜 살죠? 우리는 왜 행동하죠? 우리가 살아가는 타당성과 정당성이 보장받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이것도 거부당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라고 되어있는데 긍휼이라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불쌍하게 여깁니까?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사람을 우습게 볼 때나 불쌍히 여긴다는 말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거” 이럴 때나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거지 나름대로 반듯하게 산다고 자부하는데 이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 표현일까요, 아니면 인격 모독일까요? 인격 모독으로 들리죠.
“중생의 씻음과” 중생이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거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중생인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과거의 기억 속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중간에 끊어진 곳이 없이 결속돼 있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여기 단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잖아.” “언제? 내가 언제 죽었는데?”
아, 7살 때 열병 걸려서 아플 때, 열병이 걸려서 “얘 죽겠다.” 그때 말입니까? 우리가 죽었던 적이 언제 있습니까? 이것도 퇴출, 이것도 해당되지 않아요. 그다음에 “성령의 새롭게 하심” 우리가 새롭게 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를 견줄 때 현저히 차이 날 때를 의미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단절해서 끊어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으로 하루하루 살아온 겁니다. 12월 20일하고 21일 하고 다른 인간이었나요? 현저하게 차이가 나던가요? 사람이 차이 나면 죽죠. 차이 나지 않으니까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겁니다. 이건 끊어짐이 없는 거예요. 새로운 게 아니고 발전하는 거죠. 사람은 발전을 좋아해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향상되는 것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받질 못하고, 다음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하는데 예수님을 본 사람이 없잖아요. 예수님을 누가 봤습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전부 다 동영상이나 사진 속에 기록된 사람, 또는 역사 속 인물이지 역사 속에 들어있지 않으면 그걸 신화라고 해요.
그건 전설인데 전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죠. 꾸며낸 예수 그리스도가 있더라도 그분이 하는 일에 대해 모든 인간이 다 동의했습니까? 예수의 추종자들만이 인정했잖아요. 그건 종교 단체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한 거니까 우리에겐 보편적 의미가 없는 거죠. 받아들이지 못하죠.
그리고 그분이 옛날 분인데 지금 풍성하게 주어졌다니까 지금 뭐 우리에게 풍성한 건 자기 노동의 대가, 열심히 일해서 월급 많이 받는 거, 이거 외에는 아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 이것도 퇴출, 우리가 안 받고.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의롭다는 말은 우리가 바르게 살아서 의롭지 의로운 것을 받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영생의 소망? 죽어본 적 있어요? 누가 죽어서 천국 가 본 사람이 있습니까? 영생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잖아요. 무슨 영생이 있어요. 그냥 기대하지만 기대한다는 것은 안 할 수도 있는 문제죠. 따라서 여기 디도서 3장 5절에서 7절, 이 말씀은 전체적으로 거부의 내용이에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대화이기 때문에 우리가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 동안 교회에서 목사가 “여러분 이거 알아듣죠? 알아듣죠?” 해서 우리가 알아듣는 것처럼 그렇게 억지를 부려 왔는데 실은 성경 전체는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해 우리가 거부감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잠재적 요인을 추출하는 기능을 성경은 가지고 있어요.
“너 안 믿으니까 자꾸 믿는다고 이야기하잖아.”라고 우리를 추궁하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에요. 그런데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안 믿으니까, 미안하니까 자꾸 “믿습니다.”라는 말로써 자꾸 그걸 때우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가, 이미 우리끼리는 알아듣는 이야기가 유통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아듣는 이야기만 골라 이 인간사회를 만들었어요. 그것이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어느 말씀도 우리가 알아듣는 말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알아듣는 것만 알아듣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경 말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되죠. 끼어들 수가 없어요.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 생명책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존재화된 나는요,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추방되었다는 그 이야기에 연결시키면, 존재화된 나는 사건화된 생명책에 달라붙을 수가 없어요. 존재화된 나는 생명과 달라붙으면 안 돼요. 창세기 3장 24절에서 생명 나무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우리는 함부로 생명책 이야기를 한다고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걸 기뻐하자고. 누가? 본인이.
그것은 하나님 취지에 맞지 않죠. 나는 생명책에 들어가면 안 돼요. 이스라엘도 생명책에 들어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이스라엘도 생명책에 들어가지 못해요. 생명책이라는 단어, 이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단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내용이 언어가 되어 우리 인간 언어끼리 통하는 세계에 침투한 겁니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자기 이름으로 왔으면 영접해요. “목수의 아들이잖아.” 하고 영접하는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나는 너희들이 아는 내 이름으로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게 함으로써 어떤 인간도 나를 영접할 자가 없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창세기 24장에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쫓겨난 신세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주님이 추방시킨 거예요. 주님이 생명 나무에서 추방시킨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그 사실도 모르고 생명, 하니까 넙죽 ‘생명 좋은 거잖아? 영생 너무 좋지. 내가 받아야지.’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고 말이죠.
그러니까 너희들이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온 것은 내 이름으로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 거예요.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시는 분은 아들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너를 추방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영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그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영접할 수 없는 말씀만 쏟아낸 겁니다.
그러니 예수 안 믿는 건 당연하고요, 생명책도 마찬가지예요. 어느 인간도 생명책에 들어갈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뭐 내 이름 거기 있다고? 여러분 이름 거기에 없어요. 아무도 없는 게 아니고 내 이름은 거기에 없다는 거예요, 내 이름은. 왜? 나는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생명책에 들어갈 수 있느냐? 14만 4천 명은 어떻게 생명책에 들어갔느냐? 그건 안목이 바뀌는 거예요. 내가 아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는 나로 바꿔지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이상한 대화가 나와요. 1장 48절에 나다나엘을 찾아오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언급을 해요. 차분히 한 번 들어보세요.
예수님이 인간들의 말만 알고 있는 인간 속 일부, 1인인 나다나엘에게 아버지께 속한 예수님이 말을 해요. 먼저 말을 던집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때 나다나엘이 하는 말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나다니엘이 하는 말은 먼저 주님께서 말을 건넸기 때문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자기 말을 그다음에 낸 거예요. 그럴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때에 보았노라.”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빌립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그걸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나다나엘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요. 빌립이 예수님에게 먼저 찾아가서 “쟤요,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어요.” 이렇게 빌립이 이야기한 적 없어요. 아무도 이야기한 적 없어요.
인간은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 이야기를. 왜? 나에 대해, 내 사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요. 내 사정은 나만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인간들 말의 시작, 대화의 start, 시작이에요. 인간들은 인간들과 대화해요. 자기만 아는 사정들을 내어놓고 서로가 자기 말하고 자기 말로 결과를 다시 잡아당겨 오는 거예요. 그게 사람 사는 거예요. 나만 이해하면 돼요. 남까지 이해할 필요 없고, 이해해 주면 고맙고 그런 식이에요. 시작을 자기부터 한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함으로써 나다나엘이 내가 시작한 언어가 주님한테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 공간,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 인간 세계의 어떤 것도 주님에게 강요하거나 제공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주님의 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디도서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책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생명책은 출입구가 딱 하나에요. 야곱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에요.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이 야곱의 열두 아들, 야곱의 열두 지파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하나님을 자기 세계로 끌어당긴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끌어당기고 말씀을 끌어당긴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절묘하게 일을 하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에게 죽냐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여겼던 그 유대인에게 살해당해버립니다. 죽어버립니다.
여기서 어쩔 수 없이 끊어짐이 생겨요. 단절이 생긴다고요. 이게 무척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억수로 어려운 이야기인데,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걸, 여기 있다는 걸 알아요. 있음의 세계에서 끊어졌다는 말은, 생명책은 있음의 세계가 아니고 사건의 세계에요.
존재화 된 나는 들어가지 못하고 사건화 된 나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생명책이에요. 생명책은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에 주어진 그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율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언어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통하는 그 말로 새롭게 창조한 세계, 그게 바로 생명책 안의 세계에요. 생명책 안의 세계라고요.
거기에 들어가려면 존재가 된 내가 사건화가 돼야 해요. 사건화가 되려면 존재가 이미 언약이 사건화된 십자가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자살하면 안 돼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죽어야 돼요.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뭐가 기다리는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어가 십자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기다림은 우리 인간끼리 통하는 언어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너 거기 있었잖아.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잖아.” 그 예가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먼저 묻지요. 찾아와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알았어요. 이제 알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를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자기 언어를 줄이고 예수님이 계속 이야기하도록 맡겨버리는 그런 태도를 취합니다.
구약에서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욥입니다. 40장이 되는 그 욥기 내내 욥이 이야기를 막 해요. 자기 언어를 내뱉는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을 죽여버렸습니다. 욥을 죽였다는 말은 욥의 말을 죽여 버린 거예요. 욥의 말이 중지되게 만드는 겁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렸어요. 욥기 40장 4절에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손으로 말이 나오는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 “말하는 나, 죽었습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제가 한평생 인간 세계에서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말을 내가 통달하고 그들의 지혜를 다 통달한 그것이 바로 직접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었다는 사실……”, 산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죽는 자가 그동안 계속…, 이건 욕이 아니고 안동 말이니까요, 씨부린 거예요. 그냥 씨부린 거예요. ‘나는 이렇게 죽었다’는 그걸 말로 해야 하는데 나는 반대로 생각했던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말을 씨부린 거예요, 계속해서.
그게 인간끼리는 통했죠.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죽어, 인간아. 네가 쏟아낸 말로 죽어야 네가 되는 이유를 알겠어?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했잖아. 그 말이 행함에서 나왔잖아, 행함에서”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악바리로 사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3장 19절에도 같은 뜻으로 나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입을 막고, 지금 마스크 하신 분이 한두 분이 아니잖아요? 모든 마스크를 쓰고, 즉 하나님의 언어, 율법이 인간의 언어, 입을 막아버린 거예요.
오늘 본문 디도서 중생이 어떻고, 구원이 어떻고, 하나님의 긍휼이 어떻고, 에 대해 우리가 교회 다니며 “아, 이건 내가 아는 이야기인데 요약 잘 되어있네.” 이러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도 몰랐지만 몰랐던 이것을 종합하면 이 말씀은 더욱더 우리에게 모르는 이야기에요. 왜? 우리는 내 존재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내 존재를. 이 존재를 포기 못 하니까 존재의 구원도, 내 구원도 포기를 못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있는 한, 내가 구원 포기 못 하는 한 생명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생명책이 아니고 지옥 책에 다 들어갈 거예요. 생명 나무는 끊어져 있다니까요. 내가 만날 생명이 아니에요. 만나도 주님이 만나지 내가 만날 생명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어야 돼요. 내가 말을 stop을 해야 한다고요.
또 한 예가 사도행전 10장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 점에서 참 고마워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미 구원받은 베드로, 성령 받은 베드로예요. 이 성령 받은 베드로를 주께서 어떻게 활용하시는가 한 번 보세요. 베드로에게 비몽사몽 간에 하늘에서 천사의 계시가 내려옵니다.
어떤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13절에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라고 자기 이야기를 해요. 고집 있죠. 주님께서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하는 줄 착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깨끗이 했는데 네가 왜 속되다 하느냐, 여기서 베드로의 속마음과 그리고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안목, 주님의 마음과 완전히 대치, 대립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베드로는 분명히 봤어요. 저건 율법에 의하면 먹지 못하는 것만 소복이 모아서 보자기에 넣어놓은 것을 분명히 보았고 자기는 율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정답, 백 점 맞을 자신이 있었어요, 더러운 거라고. 주님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쪼다지. 그러니까 네가 엉터리 인거야.”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짜고, 거짓이고, 엉터리인 자만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왜? 주께서 그렇게 다가섰으니까. 뭘 알아서 구원받고, 성경 지식을 어떻게 정리해서 구원받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거 모조리 가짜에요, 모조리. 내가 만약에 뭘 알게 되면 나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아요. 내 말에서 말이 계속 나와요. 침묵이 되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17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제 정신을 번쩍 차리죠. “이 내용이 뭐지?’”진작 이야기해야지. “이게 무엇이지?” 몰라요. 우리는 모른다고요. 심지어 우리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냐면 ‘내가 하루 살았다, 이게 뭐지?’ 몰라야 돼요. 내가 왜 살아야 돼요?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어제 살았으니 오늘 사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남들도 살아가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사는 게 이상하고요, 죽는 게 당연하고, 뭔가 뒤바뀐 세계에 내가 뒤바뀐 채, 하나님 보기에 내가 뒤바뀐 채 저주받은 세계에 계속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살지 말아야 될 세계를 살고 있단 말이죠.
성령을 받으면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냉담해져요. 항상 타인에 대해서 심술 비슷한 게 막 나와요. “당신은 참 예쁩니다.” 하면 “그래서?” “당신 참 똑똑합니다.” “그래서? 뭐 해줘? 뭘 원하는데?” 물로 그렇게 하면 시비가 되니까 말은 참아야겠지만 마음속은 이상하게 이 세상 자체가 버릴 카드고 그 속에 내 존재도 같이 좀 버려줬음 좋겠다는 생각이 막 들어요. 무감정한 존재, 냉혹한 사람, 그런 느낌이 많은데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무덤덤 해져버리는 거예요.
감정이란 과거의 느꼈던 것에서 발생 되는 환상에 대한 탐욕이 감정이에요. 어릴 때 내가 예쁨받고 귀염받던 것을 지금도 갖고 싶은 탐욕이 지금의 감정으로 살아있게 되어 있어요. 감정은 마귀가 인간을 가지고 노는 주특기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니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나다니엘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시간관계상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나다니엘아! 내가 이스라엘이다. 나다나엘아, 이스라엘이라는 유대 나라 있지? 아니야. 내가, 내가 이스라엘이고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곱처럼 내가 야곱이야.”
출입구가 십자가를 통해 들어올 때 예수님이 아버지 이름으로 오는 것처럼 생명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제는 그 세계 속, 생명책 속에 사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걸 주님의 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공간.
주님이 한 분인데 공간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한 분을 통해 사건화시키고 그 사건이 새로운 공간을 재생성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요,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놋뱀이 곧 나라는 겁니다. 뱀이, 뱀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거예요.
민수기 21장에서 백성들이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 할 때 갑자기 불 뱀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민수기 21장 5절 6절에 나와요.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불 뱀이 와서 원망하는 사람들을 물어 죽였어요. 죽이니까 사람들이 모세한테 해결을 하라고 당부했죠. 해결책이 뭐냐 하면, “너를 괴롭게 하고 물어 죽인 그 뱀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물어 죽게 했어. 인정해! 인정하면 구원받고 인정 못 하면 넌 구원 못 받는 거야.”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그걸 물어 죽이기 위해서 찾아온 불 뱀, 그 둘이 합해서 이게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 십자가 사건 되는 거예요. 죽을 인간 죽으라고 십자가 지신 거예요. 생명 나무 따 먹을 자격 없다고 십자가 지신 거예요. 하나님 여호와를 기다리는 유대인 손에 죽은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하나님? 여호와? 구원받는다고? 메시아를 기다려? 내가 죽일 거야, 너희들!” 그게 십자가에요. “봐! 너희들이 이렇게 날 죽이잖아. 아버지 이름으로 왔기 때문에 죽이잖아. 내 이름으로 왔으면 죽이지 않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죽였거든요.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아버님 이름으로 오게 하심으로써 너희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이름은 진짜 아버지를 모독하는 아버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일시적으로 내릴 결론은 뭐냐?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기때문에 그다음에 오늘 본문 디도서에 나온 내용이 뭐냐? ‘다시 태어나면 있다.’가 돼요. 현재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없어요. 구원은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있어요. 그런데 다시 태어나는 게 뭐냐, 는 거예요.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태어날 때 옛날의 그 존재로 다시 태어나면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죽었는데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하면 그건 구원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존재가 이어져가기 때문에 그것은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존재가 있는 한 구원은 없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의 말씀으로 사건화됐으면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주의 이름으로 사건화가 돼야 해요.
사건화된다는 말은…,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동결화된다는 말이에요. 굳어진다는 말이에요. 쉽게 하면 샤베트, 냉장고에 넣어서 딱딱하게 하는 샤베트. 사건 자체가 굳어져 버린 거예요. 우리는 뭐냐? 죄인은 뭐냐? 그 안에 소재로 들어가요. 재료로 들어간다고요. 아주 쉽죠?
하나님이 욥을 찾아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그렇게 원망했는데 그걸 샤베트, 욥 자체를 동결화시킨 겁니다. 우리 자체가 구원받는 사건의 구현체가 되는 거예요. 하나의 물건이 되는 거예요, 물건이. 그걸 주께서 생산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 먼저 동결화 되었으니까.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 보면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사망 자체가, 죽음 자체가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사람이 사망 외에는 줄 게 없다는 뜻이에요. “너 인간이야?” “인간입니다.” “에라, 사망이나 먹어라.” 이 말이에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담이 아니고 다른 아담, 그리스도인 아담, 두 번째 아담에 의해서 부활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첫 번째 아담은 다 죽은 거예요. 두 번째 아담에서 우리가 산 거예요.
그럼 첫 번째 아담은 두 번째 아담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나의 샤베트, 동결된 거예요. 전에는 죽었는데 지금은 살았다, 하면 안 돼요. 그 죽음 자체가, 죽음 자체가 살아있어야 해요, 죽음 자체가.
이걸 구약의 아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 4장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다시 읽어드립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여러분 이렇게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죠? 여러분들은 영어가 통하니까 영어로 말씀드리면 알아듣겠네요. “You are a garden locked up, my sister, my bride; you are a spring enclosed, a sealed fountain.” 포장된 샘물, 덮여 있는 spring, 그리고 너는 garden인데, 정원인데 닫힌 정원, 이게 나의 sister, 나의 가족, 나의 bride, 나의 신부라는 거예요.
주님의 존재는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존재성은 반드시 남편에게 있어요. 왜? 남편 성을 따르니까요. 한 존재에 한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존재로서의 값어치는 다 끝난 거예요. 우리는 주님에게 속한 겁니다. 주님의 공간에 속한 거예요. 내 공간 없어요.
아가서 2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주님 안에 있고 내 안에 주님이 있고’ 동일한 공간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공간을. 나의 공간 없어요. 내가 죽지 않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은 나를 죽이는 게 생명이에요. 나를 살리는 생명은 어디에도 없어요.
디도서 2장에 보면 ‘성령’이라고 나오는데요. 성령은 이미 우리에게 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 그리스도께 왔어요. 요단강에서 세례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예수님에게 먼저 임했습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먼저 임했다는 건 성령께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 인간 세계가 얼마나 악마의 세계인지를 충분히 경험했어요.
성령께서 제일 먼저 경험시킨 것이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금식시켜 사탄과 직접 대결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전부 다 뭐냐? 전부 다 성령께서 치밀하게 예수님을 앞장세워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귀신들로 이미 함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요. 그러니까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더러운 귀신과 더불어 살았구나.’ 그냥 귀신이 아니고 더러운 귀신이에요.
마가복음 1장 23절에 보면 귀신을 소개할 때 그냥 귀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귀신이에요.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그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알아봐요.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주님께서 “가만히 있어. 널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하고 쫓아내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큰소리치며 나갔다고 되어 있어요.
인간이 스스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이 멀쩡할 때도 더러운 귀신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말은, 인간이 멀쩡할 때도 더러운 귀신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거예요. 더러운 귀신의 삶이 뭐냐? 최고가 되는 삶이에요. 뭘로? 행함으로. 행해야 자기 잘난 것 자랑할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인생 삶이라는 것은 더러운 귀신 앞에 오디션 보는 삶이었어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어떤 최고의 자리도 허락한 적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허락한 것은 뭐냐? 고린도전서 3장 7절에 나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6절부터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무것도 아니로되.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평등해요. 교회가. 그런데 교회 올 때 더러운 귀신으로 살다가 교회 오고, 심지어 교회까지 더러운 귀신을 몰고 와요. 목사가 또 몰고 와요. 더러운 귀신을. ‘자랑합시다. 우리 교회 자랑합니다.’ 이런 것. 자랑 못 해서 환장해요. 주님께서는 성도를 자랑할 게 없는 자로 만드는 게 아니고 자랑할 데가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려요.
이 공간이 특수한 공간이거든요. 어떤 공간이냐? 이게 봉 샘이에요. 닫혀 있어요. 누가? 예수님의 신부가. 누가? 성도가요. 예수님이 생산한 제품, 그 만든 게 뭐냐 하면, 인간을 사건화 시킨 겁니다. 무슨 사건? 죽었던 자와 살게 된 나를 햄버거의 두 빵조각으로 만들어요. 만들어서 겹치게 만듭니다. 이게 중생이에요. 그 중생에서 뭐가 나오느냐? 거기서 죄를 씻으심이 나와요.
그게 오늘날 디도에서 말하는 ‘중생의 씻으심’이에요. 중생의 씻으심. 두 짝, 전도 후도 버릴 것이 없어요. 둘 다 버리면 안 돼요. 전에는 이렇고 지금은 이렇다, 그것을 봉한 샘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안에서 육즙이 흘러야 돼요. 패티에요. 피만 흘러야 피만, 피만 흘러나와야 돼요. 왜? 피가 사건이니까, 인간을 저주할 수 있는 근거가 피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도 그 사건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 자체를 사건화시킵니다. 우리 안에 사건이 들어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행함, 종교 행함은 비어 있어야 돼요. 공기 반 소리 반, 공백 주머니, 그냥 주머니에요, 주머니. 톡 하고 손대면 터질 것만 같아요. 꼭 봉숭아 연정 같아요. “터질 거예요~” 하는 노래도 있어요. ‘김씨 네’가 부른. “터질 거예요, 내 가슴은. 당신이 내 곁을 떠나면. 나는 그대 못 잊어하며. 날마다 생각날 거야.” 이런 가사가 있어요. 터질 거예요.
자기 신부를 어떻게 보느냐? 하나의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그 안에 곧 생명의 샘이 분수처럼 터져 나올 하나의 봉한샘으로 보는 거예요. 얼마나 귀하겠어요! 신랑이 만든 거니까. 내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구원하지요. 십자가 사건. 우리는 죄인으로 참여했고, 주님은 의인으로 참여했고, 그 십자가 사건이 구원받아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공간의 동결이에요. 공간 자체가 동결되는 거예요. 우리의 과거 시간의 감정에 흔들릴 필요 없어요. 이것은 상상도 못 한 새로운 공간입니다. 그 새로운 공간의 특징이 뭐냐?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새로운 말들이 거기서 나와요. 인간존재에서 나오는 말들이 아니고 새로운 말들이 나와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 대화가 있었습니다. 말이 있었어요. 인간의 특징을 뭘로 하느냐 하면, 말을 하는 유일한 존재, 그걸 인간으로 보거든요. 인간이 말에서 나왔다는 것,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었어요. ‘모든 것을 임의로 먹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는 따 먹지 말라.’
이걸 뱀한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코스모스 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사람 보고 했어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미 대화의 상대자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대화 상대자가 될 수가 없는 다른 약속과 계약을 맺어 버렸어요. 뱀하고. 다른 말을 들으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십자가 사건화를 해서 동결시켰다는 말은 언제 죽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고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짓거리를 하든 그것조차 사건화되는 거예요.
이게 좀 어려운데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착한 행동, 나쁜 행동을 나누잖아요. 주께서는 그걸 나눌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몽땅 다 죄악 된 거라는 거예요, 몽땅 다. 그 죄악 된 것이 하나의 샤베트의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말은 어떤 말이 되느냐? 처음에 하와가 유혹받을 때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잖아요. 그것조차도 동결돼요. 시답지 않은 것이 돼요. 세상 어떤 것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되는 것조차도 차가운 거예요. 그걸 차가운 유혹, 아주 차가운 유혹이에요. 유혹이라 하는데 손대면 차가워요.
이 언어의 대상이 되면서 동일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이 있어요. 그게 천사그룹이에요. 천사그룹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이 대화에서 벗어난 언약의 대화 대상, 언약 밖의 존재를 만들어서 그게 악마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뱀한테 말을 줘서 뱀이 여자를 유혹한 거예요.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유혹하고. 언약 밖에, 약속 밖에 있는 대화가 인간 속에 침투해서 인간이 자체적으로 붕괴하게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눈으로, 환상으로? 아니에요. 말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주님이고요. 말로 구원한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고요, 다시 말해서 주의 이름이 이 땅에 말을, 복음을 남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떻게 믿을까.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까, 가 아니고 듣지도, 예수님에 관해서 듣지 못한 자가 어떻게 믿으리오. 그다음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돼요, 전파하는 자.
누가 씨부린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되고, 전파하는 자는요, 본인이 전파하는 게 아니에요. 보냄을 받은 자가 전파해야 돼요. 그 뒤에 나옵니다.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일종의 논리적인 연결구조가 문장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말의 세계다. 말, 듣고 주고받는 말의 세계다. 이 말의 세계는 기존 인간들이 사용하는 모든 단어, 모든 세계와 차이가 나는데 인간의 세계는 자기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언어인 반면에 여기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모든, 우리를 존재에서 사건으로 동결화시키고 굳게 만들어버리는, 내 말을 죽여버리는, 내 말이 죽음으로써 내가 죽은 자가 되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이건 죽은 자의 음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로 하나의 공기주머니가 만들어집니다.
공백주머니,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행함이 끼어들 수 없는 빈자리, 그 주머니를 주께서 피로 채우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어 없어졌다는 사실. 그걸 자진해서 보여준 인물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그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뭘 하느냐? 자기의 비싼 향수, 향료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을 씻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리아는 뭐냐? 예수님의 관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담는 관의 역할로 자진해서 삽입해 들어간 거예요. 신부는 남편의 옷이에요. 성도는 주님의 외형, 곽잡힌 형식이에요. 곽, 액자같은 형식.
성도 안에는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주머니 안에 피를 머금은 채로, 육즙을 머금은 패티처럼 안에 들어가 있어요. 성도가 말을 할 때마다 그 육즙이 흘러넘치는 거예요. 샘이 흘러넘쳐서 그 말안에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말은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해요. 이 세상은 알아 듣는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 이 세상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인질하고 포로교환 했다.” 알아들어요. 광고시간에 “우리교회 지난 주에 김장했습니다.” 김장했다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요? 알아듣지요. 김장해서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알아듣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요. 모르는 이야기, 내가 모르는 이야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에요.
성경은 확고하게 고정화 되어 있는데 십자가 사건으로 고정화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바빠요. 사는데 너무 바쁘잖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내용에 이게 나옵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
나는 세상을 떠나지만 저희들은 세상에 있으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가 나를 다니게 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하나님이여, 저들이 다니면서 주의 하신 일만 드러내도록, 나타나도록 보존해 달라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동결되어야 돼요, 고정되어야 됩니다. 늘 중지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 돼요. 그래야 이 세상의 변화에 냉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여기서 인간의 때도 하나님 안목에서 보면 이게 스톱되어 있어요. 동결, 샤베트처럼 굳어져 있어요.
아무리 20년, 70년, 100년을 살아도 주님 보기에는 죽은 인간이 제자리 뛰기 한 것밖에 안 되지요. 계속해서 더러운 귀신하고 사는 삶의 일기장에 불과한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요, 죽음 제자리, 그 자리. 유대인들은 그 자리에서 생명책에 기록되겠다고 깝죽댔고, 여호와 만나서 구원된다고 여겼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들이 생명책에 기록되겠다는 건방짐을 이렇게 훑어냅니다. 시편 69편 28절에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생명책은 추방하는 거예요. 누구만큼 의롭지 않으면? 예수님만큼 의롭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아담만큼 완전하지 아니하면 생명책에서 쫒아냄을 통해서 생명책이 생명책답게 되는 용도로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사용한 거예요.
그걸 우리가 지금 과거지사로, 우리의 옛날 전에 죄인이었던 그때 시절로, 그때의 빵조각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아, 쓸데없이 교회 다녔구나, 교회 다니는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쓸데없는 신학 공부를 했고, 쓸데없는 성경공부를 했구나.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 그런데 주님의 복음이 오니까 아무짝도 쓸모없는 것이 이제는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것이 쓸모 있는, 주께서 하게 한 일인 것을.
교회 다니는 쓸데없는 짓을 주님이 하게 하시고, 쓸데없는 인생 여정을, 아무 이유도 없이 사는 인생살이가 주님에게 정말 필요한 죄인의 모습인 것을 돌이켜서 여러분이 고백해야 됩니다. 불신자는 알지 못하지요. 불신자가 알지 못하는 결정적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감사하는 거예요. 모든 일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