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장 16절을 찾아봅시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아요. 알았는데 그들에게는 뭐가 빠져 있습니다.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사도행전 17장 30절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모든 신을 섬기는 것을 묵인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증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허물치 아니했다”는 겁니다. 문제 삼지 않은 거예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명하사 어디든지 다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여기에 보면 정하신, 지목된 사람입니다. “사람.” 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이게 아주 놀라운 사실입니다. “신을 믿어라. 신을 인정해라. 신의 존재를 왜 부정하느냐? 신의 존재를 충분하게 수용하라. 신으로부터 네가 혜택만 받고 입을 싹 다실래? 하나님이 햇빛 주시고, 비 주시고 공기 주시는데 신을 잘 모셔야지”라고 하던 시대가 아니고, “너,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정하신 한 사람에 대해서 지목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것은 사람, 특정하게 지목된 사람을 증거 해야 돼요. 그냥 신이 존재하십니다. 이런 것은 이미 다른 민족들, 우리나라 고대 조물주 섬기던 우리의 조상들, 할머니 할아버지들, 조선시대 선대들이 다 했던 겁니다. 옛날 사람들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도 신을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북경원인도 동굴속에서 신을 섬겼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확실하게 구분도 안 가는데, 그럼에도 매장하는 풍습과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 등을 통해서 종교라는 것이 있었다고 봅니다. 폴리네시아, 뉴기니아, 아프리카의 우간다, 탕가니카, 마다가스카르등에 살고 있던 원시인들이 다 신에게 제사하면서 양을 잡고 닭목을 쳐서 피를 흘리는 의식을 했다는 말이죠. 이런 것들을 다 묵인했었어요. 그들 나름대로 신이 있다는 것은 덜렁 신만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은 ‘신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자’는 것이 항상 뒤따라오도록 되어 있어요. ‘신의 존재만 인정하고 내 맘대로 살자.’ 그런 신학은 어느 민족에도 없습니다. 신을 인정한다는 말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사람답다는 윤리 도덕적인 규범이 다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노모스, 법이라고 하죠. 체제.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사도행전에서 정하신 사람에게 주목해야 될 그런 시점에 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정하신 사람에게 주목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주목 안하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심판을 이미 확정했다는 말은 심판을 ‘정하신 사람’을 기준점으로 내세우고, 최종 심판 날은 신의 존재나 은총과 관련 없고, 정하신 사람과 관련된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특정 사람을 지목했다는 말은 관심사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오! 신은 자비롭다. 신은 관대하다”고 하는 이런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하게 특정하게 지목된 사람에 의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대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을 벌렸으며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가? 그리고 그 사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있고 하나님의 자비에 보답한다고 나름대로의 성심성의를 바친다는 그런 안목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낯설기 짝이 없는 어떤 특정적인 현상 같은 것, 이런 것을 뽑아 낼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것 뽑아내야 되고요. 그리고 그런 것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신학적인 시스템 가지고는 해석이 안 되고,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한, 심지어 그 일을 당했던 욥조차 ‘내가 왜 이래?’ 하는 그런 난처함 속에 있지요. 욥이 평소에 기도가 잘되었었습니다. 지난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욥이 한평생 살아오면서 늘 하나님의 축복가운데서 살았고 자기의 존재함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봤습니다.
그러니까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어 가시는 자도 하나님”(욥 1:21)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받았는데 그 속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은 악(고생, 혹은 고난)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창조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악과 고난이 찾아오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이것이 뭔가는 문제성이 있고,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아니다’ 하는 그 낌새를 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낌새를 다른 친구들이 납득 시켜주고 이해주기를 기대했는데, 그것이 전부 다 수포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욥이 화가 나는 겁니다. “너희들은 이유도 모르고 아무 뜻도 모른 채 자꾸 나에게 비난을 퍼붓느냐?” 하는 그 논쟁이 욥기에 전개됩니다. 욥기의 마지막대목에 보면 욥이 한창 극도로 예민해 있을 때에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가 등장하면서 앞에 있는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이 세 친구를 치는 일과 그 다음에 욥까지 치고 꾸중하는 일을 하는데 꾸중하는 그 내용이 달라요.
욥의 세 친구는 뭘 모르냐 하면, ‘신이 고난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중요한 거니까요. ‘하나님이 고난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 자기가 최고인데 무슨 고난을 받아요? 엘리바스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사람이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특별히 달라지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욥 22:2,3)는 말을 합니다.
엘리후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욥 35:6). 설마 하나님이 고난 받는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무엇을 몰랐느냐 하면, 고난 받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난을 안겨준 그 욥에게 축복한다는 사실을 욥은 몰랐어요. 꼭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아요.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그냥 높은 위치에 두고 아부하기 분주했습니다. “하나님은 높으십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참 훌륭하십니다.”
하나님께 아부성, 뇌물성 발언을 하기에 급급했지 하나님이 어떤 심한 아픔을 겪는다는 것을 눈치 못챈것이 욥의 세 친구의 문제점이라면 욥의 문제점은 고난을 주신 하나님이 나에게 의도 주신다는 점을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겁니다. ‘공짜로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욥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의롭게 행동을 한 근거를 찾기에 급급하다 보니까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말이죠.
이것이 욥과 욥의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유없이 까닭없이”(욥 1:9) 신앙생활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 생각입니다. “당신 교회 왜 나갑니까?” “복받으러 나갑니다.” 이유 있어요. 목적이 있다고요. 세상에서 하는 모든 우리 행동 가운데서 목적없이 행동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주부들이 나이트클럽 가는 것도 ‘원나잇 스탠드’라고 해서 하룻밤 즐긴다는 목적 때문에 가는 것이지 그냥 ‘길을 잘못 들었다든지, 혹은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가서 보니 이게 우리집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네’ 이런 법은 없다 이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을 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기대하고 노동하게 되어 있고, 노동을 했으면 그만한 대가와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동물이나 모든 자연세계의 생존하고 적응하는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물질적 변증법’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은 60조개의 세포인 물질로 되어 있고, 그 세포 하나하나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방향성이라고 합니다. 냄새피운다는 방향(芳香)이 아니고 방향성(方向性, orientation)입니다.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어요. 은밀한 노림수가 있다고요. 교회에 나와도 다 노림수가 있어요.
예를 들기 위해서 어린애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사람만 나와 보세요. 아빠하고 같이 나오세요. 이것은 제가 서울에서(서울의존교회) 강의할 때 오후 8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다들 피곤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잠깐씩은 이렇게 연극 식으로 해서 이해를 시키려고 쓰는 방법입니다. 역할분담 합니다. 여기 있는 한 목사님이 하나님(신)이십니다. 나는 이 어린이의 아빠입니다.
아까 사람은 목적성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이 애가 공부도 잘하고, 강남에서 좋은 교육도 받고, 유학도 가게해 주시고---.”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게 될 때 내 품에 이렇게 안고서 기도를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면 이 어린이를 일단 하나님 쪽으로 데려갑니다.
데리고 간 뒤에 내 품에서 어린이가 빠져나간 상태에서 내가 멀쑥해지잖아요. 이렇게 해 놓고 그 아이를 위해서 나보고 기도를 하라는 말이죠. 내 품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아까 네가 한 것처럼 기도 해봐라” 이말 이거든요. 그런데 기도할 맛이 납니까? 이미 내 품을 떠난 자식인데요.
그래서 제가 강의할 때마다 강의가 끝나고서 듣는 소리가 이거예요.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네요.” 맨 날 듣는 소리가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 기도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내 자식 아니니까 손 털고 가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식을 가져가 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같이 기도해서 나(하나님)같이 품으라는 뜻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식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내 소원대로 들어 달라’는 겁니다. 이게 주님에 대한 가해자 노릇 하는 거예요. 모든 교인들의 교회에서의 행동이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목사들이 교인들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무개 집사 신앙생활 잘하게 해주시고”부터 시작해서 좋은 소리란 좋은 소리는 다 하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기게 하옵시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 김집사가 네것인가? 하나님의 것인가?” 이것부터 묻는 거예요.
목사가 자기 딴에는 순수하게 복음적으로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그 주체의 방향성을 묻는 거예요. 목사가 그렇게 기도하게 된 그 의도, 방향성, 목적을 묻는 겁니다. “그 집사 너의 교인이 아니야. 주님께 속한 사람이야.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한다? 좋아. 기도하는 것은 참 좋은데 네가 그렇게 기도해서 그 사람이 다른 교회로 가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겠냐?” 이말 입니다.
그러면 그 목사가 말하죠. “다른 교회 간 사람을 내가 미쳤다고 기도합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런 ‘너’이니까 기도할 것이 없는 거예요. 결국 목사는 자기 주체를 수립하는데 있어서 기존의 큰 교회 교인들 많이 모이는 것에 대한 일말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빌려서 내가 교인들에게 잘 해줌으로써 저 어떤 교회처럼 되도록 하겠다’는 욕망으로 자기를 재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 되어 버리면 그 상태가 계속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지막 때에 정하신 사람과의 괴리를 점점 더 크게 벌어지게 합니다. 마지막 때에 정하신 사람과. 기존의 신의 개념은 ‘신과 나’의 개념위에 있기 때문에 이 중간에 정하신 사람이 없어요. 내가 정하신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나’ 위주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면 내가 알아서 복을 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흥정하고 거래하자는 겁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큰일을 할 테니까 나에게 능력 달라는 거예요.
이것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을 때의 두 번째 시험입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너의 팬클럽이 생겨서 “오빠! 오빠! 하고 ‘왁’ 달려 들것이다” 이 말이죠. 세상에 성전에서 뛰어 내렸는데 끄덕도 없이 천사가 받아주면 그게 완전한 메시아 아닙니까? 사람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란 말이죠. ‘진짜 하늘에서 받은 기적이구나’ 할 거란 말이죠. “네 추종세력이 많으면 되잖아. 큰 교회 봐라. 추종세력이 많은 것을 보란 말이죠.”
그 타인의 욕망이 어느새 나의 욕망이 되고, 그것이 주체로서의 내 방향성을 나타낼 때 하나의 목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누가 아느냐? 사탄이 알아요. 그래서 세상에 어느 인간치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 하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욥 1:9) 사탄은 지금 자신 만만합니다. 누가 뭐래도 자아를 부정하는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욥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까닭 없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없다”라는 것이 사탄 측의 강력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네 말 맞다. 맞는데 내가 지목한 욥은 다르다” 사탄은 “다르기는 개뿔이 달라요?” “한번 붙어볼까?” “한번 붙어 봅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거예요.
결국 욥의 존재라는 것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말한 “정하신 사람”이 과연 우리가 믿을만한 사람이냐를 확정짓기 위해서, 앞당겨서 연출을 하고 역할을 해야 될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그리스도의 모형이고요.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주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 이것은 물리학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현대 물리학은 ‘진리가 무엇이냐’를 묻지 않습니다. ‘크기가 얼마냐?’ 이것만 묻습니다. ‘뭐가 진리이며 질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묻지 않습니다. 양(量)만 따집니다. ‘이것이 계란이냐 수박이냐’를 묻지 않아요. ‘수박이냐 돌맹이냐’는 것은 우리한테는 심각하잖아요. 왜? 수박은 맛있잖아요. 돌맹이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한테는 큰 차이가 나는데, 물리학에서는 질점이라고 해서 하나의 공간, 시간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시커먼 점에 불과한 거예요. 숫자로 치면 이것도 1이고 이것도 1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 나오는 힘과 그 에너지의 크기의 차이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힘에 의해서만 따지다 보니까 힘과 힘의 관계만 알면 ‘앞으로 수천 년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미리 예측할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에서 그 안에서 떨림(진동)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나서 ‘아하! 그게 아니었구나. 뭔가 ‘떨림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이 진동을 현대생물학에도 적용시키고 철학에도 적용시키는 사람이 생겨났어요. 대표적으로 ‘들뢰즈’라는 철학자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하나의 ‘떨림’이라는 말이죠.
인간의 모든 것은 충동이죠. 또는 ‘스피노자’는 정동이라는 말을 쓰죠. 정동, 떨림, 욕망의 울림. 주체할 수 없는 욕구.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난 뒤부터는 ‘의식’이란 하나의 연출된 상황이고 실제로 그 밑에 들어가게 되면, ‘리비도’라고 하는 인간의 강력한 욕구가 있어서 그 강력한 욕구를 사회의 규범이라든지 법이라든지 그것이 강력하게 절제가 된 상태로 여과되는 과정을 거쳐서 조절된 윤리 도덕으로 그냥 비쳐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낮의 일이고 낮의 직장일 끝나면 밤에는 낮에 절제한다고 애쓴 그것을 폭탄주 마시면서 풀잖아요. 뭘 풀어야 다음에 또 일을 할 것이 아닙니까? 스트레스 받은 것 푼다는 거죠. ‘절제된 행동, 이성적인 행동, 반듯하게 살기.’ 이런 것은 오히려 작고 ‘나는 반듯하게 살아야 돼’라면서 그것을 쪼아대는 그것을 힘들게 만드는 더 큰 근원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보는 겁니다.
우리 속에 혼돈이 있고 혼돈과 질서가 같이 병행하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의 이성은 순간 순간 절제를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파트타임 뿐이고 본게임에 들어가면 개판입니다. 딱 딱 쪼는 그 긴장으로 절제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언제 풀어지느냐 하면 보통 연세가 한 50이상 되면 퍼집니다.
60되면 맛이 가고, 70되고 80되면 차 다니는 도로를 자기 맘대로 걷습니다. “할머니! 거기 건너는데 아닌데!” “차가 서야지. 내가 뭐 그런거 아나!” 자기 맘대로입니다. 나라 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구! 늙으면 죽어야지.” 늙으면 죽으면 되는데 안 죽고 욥처럼 자아가 더 굳어집니다. 어린애가 자기 맘대로 잖아요. 어린애는 이성적이 아닙니다. 그냥 욕구대로 살아가요.
그런 상태에서 부모의 강력한 노모스, 법적인 제재가 가해집니다. 당근과 채찍의 방법이 동원되지요. 그것이 양육이고 훈련입니다. 그때 동원되는 것이 19세기에 심리학자 ‘파블로프’가 실험한 것이 있어요. 개에게 먹이를 줄때마다 종을 쳐주니까, 먹이는 없어도 종을 칠때마다 침을 질질 흘리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미 법에 종속된 상태입니다. 눈치보기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이르면 졸업식 때 교복 찢고 밀가루 뿌리고, 술 마시고 담배피우고 일부러 탈선(그것보고 일탈이라고 하는데)을 함으로써 다시 숨겨진 자아를 마그마처럼 폭발시켜서 “나는 나다” 하고 드럼 치고, 오토바이 타고 ‘붕! 삐리비리삐, 삐리비리삐’ 하고 돌아다닙니다. 일부러 늦게 오고 반발해보고요. 그러다가 회사에 입사를 하면 서울 역 앞에 가서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더 크게!” “나는 물건 팔수 있다! 나는 물건 팔수 있다!”
선배가 시키는대로 해서 군가 부르듯이 하고. “고객은 왕이다! 고객은 왕이다! ♬ 빰빠밤빠밤빠밤~.” 특히 영업사원들 보험회사 사원들 철저하게 훈련받지요. 그리고 회사 일과 끝나면 퍼져서, ‘아! 더러워라. 진짜 때려 치워야지. 이 짓을 해야 되는지.’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아예 유니폼을 입혀요. 희한한 동네에요. 유니품을 입혀 가지고 어떤 자긍심을 부여합니다.
구세군처럼 계급장을 답니다. 저는 그것을 가지고 ‘퇴행’이라 합니다. 어른을 애로 만들어 버렸어요. 퇴행해서 훈장 달고 아직도 병정놀이, 딱지치기에서 못 벗어났어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주체가 죄인 됨을 깨닫게 하는데, 그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 자체가 피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종교라는 것은, 사회의 윤리 도덕에 부응하기 위해서 더 완벽한 윤리와 도덕을 폐쇄된 집단 안에서 성화라는 이름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화 되는 겁니다. “다른 단체보다 우리가 더 성스럽습니다. 다른 선교단체보다 우리가 더 깨끗하게 술끊고 담배끊을수 있습니다. 다른 단체에서는 유행가를 부르지만 우리는 유행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거듭나서 완벽한 사람이기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두겹살, 삼겹살로 꾸미는 겁니다. 하늘에서 나의 자아의 대체물이 되는 새로운 어떤 ‘정하신 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고, 정하신 분은 외면하고 귀찮아하면서 나 자신을 정하신 분으로서 승격시키려고 하는 것이 자아의 목적성입니다. 메시아 수준까지 높이는 거예요. 왜? 믿을 놈은 나밖에 없으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싶지 않은 거예요. ‘나는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그 주체의 목적성, 어떤 이유가 있고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와 까닭을 신과 결부시키는 신학체제를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주 배우지 못한 산골짜기 순박한 할머니라 할지라도 사람이면 다 갖고 있는 ‘까닭과 이유 있는 그 신앙’이 무엇을 들춰내느냐 하면, ‘주체를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가장 답답한 것은 ‘까닭 있는 신앙’ 때문에 예수님이 힘들어요. 주님께서는 팔 벌리고 “잡아먹어라” 하는데, 자꾸 이유, 까닭(내목적)을 달성해 달라는 거예요. 우리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어렵고 신학적인 것이니까 빨간색으로 쓰겠습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묵인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허물치 아니했다”(행 17:30) 아까 봤지요? 그러면 선택된 이스라엘 국가체제에서는 언약으로 움직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합니다. 언약 밖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신은 그냥 신입니다. ‘엘사다이’입니다. 그냥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신, 그 자체로 완벽하고 온전한 신입니다. 그런 신인데 그 신을 섬기는 것이 마지막 때까지는 “묵인하고 허물치 아니했다”고 했지요?
지금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맞지요? 그런데 여기는 뭐가 빠져 있습니까? 언약이 빠져 있다고요. 이 사람들에게 언약을 주면 되지 않겠느냐? 언약은 택하신 백성에게만 주는 겁니다. “이 모든 족속 가운데 나의 택하신 백성들이라. 너희는 특별히 택한 나의 백성이고 거룩한 제사장나라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옵니다. 특별히 지목한 자에게 컴퓨터 반도체 칩을 집어 넣듯이 언약이라는 것을, 선택했다는 이름하에 해부해서 거기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어서 “너는 비록 껍데기는 죄짓고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도, 네 속에 장착되어 있는 그 언약의 칩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이방민족을 이기게 하겠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참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무기도 변변치 않은데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적들이 물러가고, 모세가 힘없어서 지팡이를 내리니까 적들이 몰려오고.
이것은 기존의 이방신에게는 없는 것이 언약 안에서 뭔가 작동하고 있고 진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계속해서 모세언약이 되고 그 모세언약은 제사법(7월 10일에 대속죄일에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이 극도로 정교하게 세밀화 되면서 거기에 병행해서 대립적으로(이 제사법이 있어야 될 이유를 밝히는) 계명도 늘어납니다. 제사법이 늘어나는 만큼 계명도 늘어나야 점점 더 죄가 많아질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율법이 닿는 곳에 점점 더 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거예요. 제사법도 대립적으로 늘어난 계명도 양쪽 다 율법인데, 율법이 주어지면 죄는 증가하고, 죄가 있는 곳에 은혜는 더욱 더 증가하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십계명이 있지요. 십계명에 다섯 계명, 다섯 계명 이렇게 있습니다. 그중에 네 번째 계명이 안식일 계명입니다. 안식일이란 제사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신기한 일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더욱 신기한 일인데, ‘안식일에 제사 드리는 것과, 어떻게 나머지 다섯 개 여섯 개의 계명이 성립이 되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엘사다이’의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들의 양심수준에서도 얼마든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런 것이 충분히 되는데, ‘안식일에 제사 드리는 것과 나머지 계명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유대인들도 잘 몰랐어요. 나중에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풀립니다. 모세언약에서 제사법이 나오고 여기서 계명이 증가하게 되면, 이 제사법에서 다윗이 죄인으로 등장합니다. 지금 아주 중요한 대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터널 같은 대목입니다. 다윗이 죄인으로 등장하면서 다윗이 왕이라는 자격으로 죄인이 됩니다. 죄인의 왕이죠. 다윗에게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계속 다윗의 죄 속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죄 속에 같이 갇혀 있을 때만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효과를 봅니다. 다윗언약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파들은 예를 들어서 북쪽나라들의 경우에, “우리가 언제 유다와 함께 같이 한다는 법을 세웠나? 다윗 그까짓 것이 뭔데? 우리끼리 나라 따로 만들자” 해서 열지파로 따로 떨어져서 북쪽 열 지파를 구성하고, 남쪽 유다와 베냐민은 두지파로 나라를 구성합니다.
하나님의 ‘다윗의 등불’이 끊어지지 않아야 구원받는데 다윗과 같이 죄인 되었을 때에, 그때 언약이 작용하죠.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가 작용할 때 그 의가 다른 이방신을 이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그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새 언약에 있어서 언약을 달성할 때 어떻게 달성하는 겁니까? 자, 여기서 객관식 문제가 나갑니다.
다음중 언약을 달성하는 방법은?
1번) 선교단체 만든다.
2번) 교회짓는다.
3번) 열심히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한다(봉사중에 순교한다).
4번) 정하신 분이 오셔서 살과 피를 흘려야 한다.
몇 번입니까? 4번) 아닙니까! 우리가 상식으로 어떤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내 노동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하지, 어떤 분의 살과 피를 의지하는 아이디어는 인간에게서 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부모공경이란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고 전화하는 그것이 부모공경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이 부모공경이다’ 하는 이런 아이디어는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피와 살을 흘렸다’는 이 말은 우리의 주체는 깨어져야 한다는 것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살과 피가 합쳐져서 뭐가 됩니까? 우리 몸이 되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없다? “생명이 없느니라.”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입니까? “열심히 실천해. 말만 하지 말고. 지식만 높이 쌓는 신자 되지 말고 실천하는 신자가 되어야지.”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어요? 케이블 TV 목사들에게서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바쳐야 복을 받지. 인간들이 염치가 없어. 은혜를 받아 놓고 돈도 안내고. 받아먹은 것이 있으면 내놓는 것도 있어야지. 그 돈을 왜 다른 목자한테 주나? 이 양치기한테 안주고.” 이런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주의 십자가는 공짜인줄 아느냐?” 이런식으로 협박성 공갈성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십자가는 주체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의 일을 한다고 이 땅에서 선교단체처럼 떠벌인 것이 아닙니다. ‘너는 선교국장, 너는 행정국장.’ 이렇게 떠벌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너는 부목사, 너는 전도사’ 이런 식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든다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두제자들입니다. 열두제자들이 주님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는 속았다. 우리는 헛짓을 했으며 꿈을 꾸었구나’라고 식이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이래 가지고는 선교단체 안됩니다. 다 틀어집니다. 주님에게는 해가 없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너의 일만 생각하느냐?”(마 16:23) 새 언약의 완성이 놀랍게도 내 살도 아니고, 내 피도 아니고, 내 낙타 무릎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무엇도 아닙니다. 헌금도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서 공부하는 열심도 아닙니다.
우리 외곽에 있어요. 내가 아니고 우리의 바깥에 있으면서 나의 주체가 붕괴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신은 어떻습니까? 이방신은 욥과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냥 묵인하고 허물치 아니하는 상태에서, 새 언약의 이 상태에 접속되지 않을 때에는 그냥 열심만 내는 겁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깜짝 놀란다 이 말이죠. “깜짝 놀랬어요!”(개그)
정성이 미비 되어서 그렇지 정성만 추가 되면, 하나님도 언젠가는 마음을 움직인다는 겁니다. 이게 지금 욥의 친구들 속에서 나와요. “네가 아직까지 죄를 덜 파냈다. 더 파내봐라. 뭔가 회개할 것이 있고 그러면 다시 복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욥 22:23)는 겁니다. 그러나 발굴이 이미 끝난 상태라고 알려줘요(욥 28:12,13).
“너도 한번 아파봐라.” 아픈 상태에서 무슨 진지한 기도가 됩니까? 아프기 바쁘지 기도하기 바쁩니까?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서 온몸이 쑤시고 있는데 “자매님! 웃으세요. 화평해야 하고 양선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성령의 열매인데 온유하고 화평하십니까?” “너 한번 아파봐라. 온유와 화평과 사랑이 나오는가.” 사람이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거기다가 약을 올리죠. “드디어 성도님의 본색이 드러났군요.”
욥도 점잖 뺄 것 같으면, ‘한 점잖’ 하는 사람입니다. 욥도 착함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장차오실 하나님의 피와 살, 주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류를 어떻게 개선하고, 선교단체를 어떻게 조직하고 개편하고, 선교헌금을 합리적으로 쓰는 식의 구조조정이 아니라, 어떤 분이 흘린 피가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기존의 모든 종교를 모독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성 발휘로 되어진 큰 교회, 작은 교회, 개척교회 전부다 모독하는 거예요.
‘그것은 네가 알고 있는 이방신에게서 나오는 토대이고, 실제로는 새 언약의 노선에 접속되지 않은 상태’라는 겁니다. 새 언약 상태에 결합되지 않은 거예요. 그 노선에서 빠져 있기는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반도체 칩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게 뭐냐? 마귀한테 시켜서 고난을 집어 넣어 버려요.
처음에는 욥이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고난이 욥을 가지고 놉니다. 욥 속에 있는 고난이 하는 일은 욥의 육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을 철저하게 드러낼 대로 드러내고, 그 극도의 교만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교만을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러한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대목에서 소스라치게 놀라죠.
‘어찌 내가 그런 인간이었는가!’ 성령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때 여러분들로 하여금 극도로 자기 위주로 살도록 배려하십니다. “목사님! 그거 몇 년 걸립니까?” 몇 년이 아니고 매일 그렇습니다. 매일 매일. 오늘 겪고 또 그 다음날 일 생기고. 오늘도 기대해도 좋습니다. 오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오늘도 여러분 각자, 자신의 교만함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솟구쳐 올라오는지를 나름대로 발견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되면 정말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반도체 칩(고난이라는)을 여기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세상에 고난이라는 것 앞에서 웃을 장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좆는다고 성경공부 하러 왔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옵니다. “뭔데?” “관리비를 안냈다고 하던데?” “주여! 공부 좀 하려고 했더니 관리비 때문에 전화가 오고 어찌 이런 일이.” “원래 그래. 너는 원래 그렇다니까.”
또 공부 좀 하려고 하는데 전화 옵니다. “애 피아노 레슨비를 안냈던데요.” “가서 줄게요. 가서.” 욥은 그런 짜증마저도 메말랐을 정도입니다. 사탄이 알아요. 일본말로 기마이 쓴다고 하죠. 사나이답게. “그래! 자식은 여자 또 만나서 낳으면 되지 뭐. 재산 날라가도 또 벌면 그만이고. 젊음이 있는 이상 내 몸 하나 튼튼하면 다시 일구면 되지”라고 생각할까봐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그 기초마저 남성적 에너지마저 완전히 작살내 놓고(그것이 바로 불가능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불가능을 즐기죠.
“그래 좋다. 사탄아! 허락할게. 욥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어라.” 이것이 바로 욥이 특별히 아브라함 언약과 접속되는 철도 노선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아브라함언약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참 이것은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인데요) ‘무에서 유’입니다. ‘무에서 유’라는 아브라함언약의 공식에 의하면 언약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시간이 없어요.
현대인이 초조한 것은 이 시계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놓여지게 되면 물리학에서는 하나의 질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하나의 검은 점에 불과해요. 숫자로 표기할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다는 말은 자기를 스스로 하나의 점으로서 축소시켜서 인격이란 없고 상대방이 원하는 물질로 돌변해 버리는 겁니다. 상대방은 나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만 원하죠.
어떤 사람이 통역을 아주 잘 한다면 상대방은 그 통역의 기술만 가져갈 뿐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한 50 중반 넘어가게 되면 통역할 때 옛날에 쓰던 영어는 구닥다리가 되어서 잘 써먹지도 못하게 되고, 새로운 영어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아는 단어도 자꾸 잊어버리게 되니까 그 사람은 그 다음부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많이 받으면서 나올 에너지가 없으니까 상대방은 계약을 파기하자는 식으로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죠. 옛날에는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이 기억나십니까?) 다가설 때 무엇으로 다가선다고 했습니까? 정, 사랑, 우정으로 다가서죠. 왜냐하면 단순히 ‘나는 나다’가 아니고 ‘하나님의 순수증여, 거저 주시는 은총을 당신에게 그냥 베푼다’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아주 특이해요. 자본주의 사회가 타락중의 타락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을 한번 봅시다. 35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입니다. 자본주의적 발상과는 정 반대지요. 순수증여. ‘하나님께서 주셔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 아닙니까?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도는 “만물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찌꺼기가 되어서 고생하고 너희들은 우리 덕분에 구원받아라.”(고전 4:10-13) 이것이 사도의 특징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아넣었다는 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순수증여에서는 뭐가 성립되지 않습니까? 주체가 ‘나’라는 데서 형성되어서 그냥 그것으로 머물고 정지되기를 원치 않지요.
‘무에서 유’로 창조할 때 언약 안에서는 시간이 정지 되면서 옛날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창세기에 보면 ‘없는데서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미 창세기 시절은 이미 끝났고 우리는 그 이후를 산다는 겁니다. ‘그 이후’라고 여기는 그곳에 따라 붙이면서 언약을 통해서 수시로 옛날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창조의 능력이 파고드는 것,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과거를 잊지 않고 그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사실로 삽입시켜 버리는 겁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스파이더맨에 보면 기차에 중요한 스파이더맨의 애인이 타고 있습니다. 스파이더맨이 기차가 달리는 속도와 관계없이 거미줄을 쫙쫙 붙이면서 따라가서 (5호실인가? 애인이 있는 칸의) 기차에 들어가죠.
인류역사라는 기관차가 속도를 아무리 가속해도, 하나님의 언약이 따라 붙어서 5호실에 있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찾아오게 되면 그 찾아오신 언약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 능력이 되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명령을 했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잖아요. 명령은 명령자체가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창조 때 그랬어요. ‘무에서 유’를 처음 창조할 때 그랬거든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나사로가 그 안에서 “좀 더 찍어 바르고요.” 이럴 수는 없어요.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지. 지가 뭔데 말이 많아. 빨리 나와!” 죽은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게 언약입니다. 우리는 그 능력만 알지 이유를 몰랐지요. 나사로가 나올 때 ‘야! 정말 신기하다.’ 이것은 알지만 그 능력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왔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모를 때는 근거를 어디서 찾습니까? 나의 행위로 찾아요. ‘역시 내가 믿어주니까 역시나 나에게 복이 왔구먼’ 그 행위를 자꾸 자기에게서 찾는다고요. 하지만 그런 믿음은 ‘까닭 있는 거래고 까닭 있는 믿음이며 거래고 흥정’이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시로 뭘 합니까? 목적을 배태하고 양산해 냅니다.
‘들뢰즈’는 이걸 가지고 ‘공장’이라고 했습니다. ‘공장’에는 뭐가 있습니까? 기계가 있지요. 사람을 기계로 보는 거예요. 무슨 기계? 진동하는 욕망이 수시로 계속 나오는 거예요. 욕망, 그 에너지가 계속 나온다는 말이죠. 그 에너지는 내 자아가 있기 훨씬 전부터 있는 혼돈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그것을 막을 수가 없어요. 자아는 그 뒤에 생기니까.
그럼 자아는 어떻게 생기는가? 자아는 늘 가짜지요. 제가 첫째시간에 썼지요. “나는 매일 같이 가짜다.” 그렇게 깊은 뜻이? 그렇게 깊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가짜예요. 그럼 진짜는? 진짜는 없어요. 여백입니다. 진짜는 항상 이동합니다. 진짜는 자꾸 남겨둡니다. 요즘 초등학생들 놀이 가운데 그런 놀이가 있습니다.
숫자판이 1.2.3.4 써있고 마지막 빈칸이 하나 남아 있죠. 색깔 맞추기 하는 거예요. 이동시키면서 색깔을 맞추는 거거든요. 퍼즐처럼. 그런데 뭐가 있어야 이동되느냐 하면, 마지막 칸에 빈칸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지금 내가 미흡하면 빈칸을 만들어서 잠시 나를 그쪽으로 이동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지금의 자기 위치를 정당화 합니다.
‘앞으로 잘하면 될 것 아닌가? 앞으로. 지금의 내 모습이 그게 다라는 뜻은 아니고요. 이것을 저의 진정한 내 모습으로 보시는데 안 그렇습니다. 저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입니다’ 하고 반성문 쓰고 일기 쓰면서 ‘내일은 더 나은 내일이 되어야지’하고 빈칸을 만들어요. 또 내일 되어 보세요. ‘이게 아니겠지. 이것이 나의 전부가 될 수 없어.’
처음에 좋아하는 사람끼리 단칸방에서 살 때, “우리 둘이 만나서 한방에 사는 이것으로 족해. 아파트 같은 것은 다 사치야. 당신만 있으면 족하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되면 “아니야. 이것이 전부가 아니야” 하고 빈칸을 남겨 두지요. 그래서 전세방으로 이사를 가고, 이사 간 다음에는 “그대로 집이 있어야지” 하면서 또 빈 여백을 둡니다.
집이 장만 되어도 “아니냐. 20평은 내 품위에 안맞아. 적어도 50평은 되어야 내 수준에 맞는거야”하고 새로운 여백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전부다 뭐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가짜였고 앞으로도 그 식대로 살 것이니 가짜입니다. 진짜는 없어요. 그게 주체가 이동하는 겁니다.
학자들은 “인간의 주체는 물처럼 흘러 다닌다”고 합니다. 어떤 특정 입장을 잡아서, 특정 공간을 잡아서 위치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양자론에 의하면 전자는 핵 위에 구름처럼 모여 있어서 어느 것이 전자냐 하는 것은 위치의 확률에 따라서 대충 찍는 겁니다. 대충 찍어도 대충 맞게 되어 있어요. 워낙 미세한 공간이기 때문에. 특정위치를 하나 잡아 버리면, (쥐잡기 하듯이 ‘잡았다’ 하면) 그것은 가짜예요.
‘그거 내가 알지롱’ 하고 도망가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쥐잡기 하고 있습니다. ‘너 이근호 맞지?’ 하면 일부러 약올린다고요. ‘나는 이근호 아니지’ 하고 피해 버려요. 우리는 매일 같이 자기 자신하고 장난치고 있어요.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 안가서 그렇지, 가서 같은 일 당하면 별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정말 갔으면 “죽어라” 할 때 스데반 집사님 처럼 “오~ 하나님이여! 주님 얼굴이 보이는 구나” 하고 담대하게 이왕 죽을거 그렇게 죽으면 되는데, 왜 빌빌 거리고 뭐 하나씩 덮어 쓰고, 거지꼴같이 앉아 있느냐 하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탈레반에게 잡히면 “아저씨! 살려만 주이소.” “너, 과거에 갖고 있던 신앙이 있지 않느냐?” “과거는 무슨 과거, 다 가짜인데 살려만 주이소. 지금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저씨는 처자식도 없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백번이라도 그럴 사람들입니다. 대학교 때 한국경제에 대해서 충분하게 검토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삼성은 너무 심하다. 삼성의 족벌체제경영이 문제 있다’고 해놓고는 삼성에 입사한 다음에는 “살려만 주이소.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충성! 현대 조저야 돼. 삼성이 최고야!” 거기에 대해서 사탄이 아주 자신 만만해 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말하기를 “어떤 인간도, 욥이라는 인간도 하나님이 자신한 인간도 이 주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라고 사탄이 이야기할 때, “벗어날 수 있다”고 한 게 하나님입니다. 자 그 귀추가 주목되지요? 십분 쉬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