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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 : 이 근호 목사)
잠언 제 6강
지난 시간에 사람은 좋든 싫든 간에 이미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구조 안에서 못 벗어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속해 있는 그 구조가 어떤 구조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지 뭐가 그리 문제냐’ 그렇게 나옵니다. 잠언 11장 27절을 봅시다. 제가 지금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계속 하려고 합니다.
잠언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이미 준비된 악, 대기시킨 악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구조 안에는 악한 자는 악과 만나고 하나님이 찾는 자는 선한 은총과 만나도록 그렇게 구조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자기는 그 하는 행동이 악한 줄을 모르지만 악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제 왔느냐’ 하는 듯이 악은 악끼리 만나고 선은 선끼리 만나게 되어 있어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죠. 이것은 이미 사람의 외곽, 인간주체 외곽에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구조가 놓여 있습니다. 어항속의 금붕어가 물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자기가 태어날 때는 혼자 우주의 중심으로 태어난 것 같은데 기존에 이미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어요.
그래서 그 구조에 비춰 볼 때에 사람은 그 구조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밝혀집니다. 결국 이 말은 ‘사람은 내가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너는 구조적으로 악한 속에 포함이 되어 있다. 너는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어 있어.’
왜 그런가? ‘구조가 그러니까. 너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것을 확인해서 분류하는 식으로 세상은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악이 좋아서 악을 찾는 사람에게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 하고 성경을 이야기해도 좀 잔소리처럼 듣는 것처럼 하다가도 ‘이것은 영 내 취향이 아니다’ 하고 다시 악을 찾는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본성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까지 다 꼬셔서 구원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은 왜 그쪽으로 안 가는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왜 나 자신은 남들이 좋다는 그 악한 것, 남들이 좋다는 그 술을 싫어하고 남들이 좋아하는 그런 세상적인 것을 이상하게 나는 왜 싫어지는가?’
그것은 구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쪽에 가는 것이 시시하고 재미가 없어요. 본성상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구조상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 소관 아니니까 그 점에 대해서 ‘안심하소서.’ 그 점에 대해서 좀 마음을 푹 놓으세요.
여러 가지 부딪히는 사건들,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구조적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쪽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가게 마련입니다. 잊어버렸을까 싶어서 다시 이야기 합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성도는 완벽이 아닙니다. 완벽이 아니고 긍휼을 아는 쪽입니다.
긍휼을 알아야 이것이 하나님경외, 하나님만 높일 수 있는 겁니다. 완벽이 아니고 긍휼을 안다는 것,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어떻게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님, 저 하나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라고 이렇게 마음을 낮추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이것은 구조적으로 도와주지 아니하면 개인적으로는 성사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나 일반성도나 관계없어요.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목회 제대로 해보려고 애쓰고 복음대로 해보려고 애쓰는데 교회가 안 됩니다.’ 이게 뭐예요? 본인이 뭐하겠다는 겁니까? 완벽한 목회자 되겠다는 거예요. 영 방향이 달라요.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습니까? 악을 더듬어 찾는 거예요.
‘악을 더듬어 찾는다’는 것이 맛사지걸 찾아다니고 사창가 들락거리는 그것이 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것, ‘나는 보다 완벽하고 싶다. 남에게 뒤지기 싫어. 나는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 자꾸 이런 자기 주체 쪽으로 나가버리면 결국 긍휼과 경외쪽이 아니라 ‘나 최선 다했다’ 하는 쪽으로 가버려요.
그런데 이 세상의 지혜로 만든 구조는 지혜자가 누구냐? 예수님이잖아요. 그분은 이미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십자가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긍휼이고 예수님의 피를 쓸데없는 짓 했다고, ‘말씀만 하면 알아듣는데 피는 왜 흘립니까? 쓸데없이 피를 왜 흘려요’라고 자신의 완벽을 고수하는 사람들 쪽은 구조적으로 예수님과 바이바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세상에 참 위험한 구호가 있는데 그걸 적어 볼게요. 이것은 상암경기장에 보면 늘 걸리는 구호잖아요. ‘꿈☆ 이루어진다.’ 잠언에서는 꿈은 깨어져야 긍휼로 가요. 인간이 안 깨어지면 그 사람은 긍휼과 다른 동네에서 놀고 있어요. 꿈은 깨어져야 됩니다.
여러분이 잠언을 볼 때 ‘이것 뭐 지키면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자존심도 있으니까 몇 개 지켜주자’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어려운 말로 해 볼까요? 이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긍휼로 이끄시는 죽음의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이 잠언서를 거부하게 되어 있고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는 사람에게만 이 잠언이 은혜로 생명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지혜에 생명이 있다는 말은 곧 ‘나에게는 생명이 없었는데 그 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이 잠언입니다.
‘나에게는 생명도 없고 지혜도 없었는데 나는 죽음뿐이었는데 생명은 저쪽에 계셨습니다. 죽을 인간이 말씀 때문에 지혜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지혜와 서로 죽음 안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 증거를 지금부터 대겠습니다. ‘슬기로운 여자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할 때 잠언서를 읽어보신 분들, 특히 목사님들은 다 읽어 보셨을 텐데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요.
잠언을 유교의 삼강오륜, 도덕, 윤리와 연결시킬 때 연결점이 없어요. 유교의 삼강오륜과 차이나는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잠언에는 효도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훈계하는 것은 있지만 자식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준다는 것이 일체 없습니다. 두 번째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어떤 존재냐, 이것은 있는데 아내 입장에서 남편은 무엇이냐, 이것은 없어요.
‘노인의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말씀은 효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효도라는 것이 없고, 아내입장에서 남편이 무엇이냐를 이야기 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윤리 도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떤 주체의식에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잠언을 이용해서 이상적인 윤리 도덕으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우려고 한다면 엉뚱한 것 가지고 점치려고 하는 것이나 똑같은 겁니다. 이것은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러면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관한 것은 있는데 왜 아내에 대해서 남편에 관한 것은 없는가? 왜 아버지가 자식에게 훈계하는 것은 있는데 왜 자식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은 없는가? 잠언은 구조적으로 되어 있어요. 구조적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서열은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지만 남자는 여자한테는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지만 여자는 남자가 지배하고 남자는 그리스도가 지배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위에 계시고.’ 그렇게 서열이 구조화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1:3-11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위에 둘찌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아니하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물이 위에서 내려오지 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남편에게 여자는 왜 있느냐? 여자는 남편을 위해서 여자가 투입이 돼요. 그렇게 되면 여자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여자는 누구누구에게 종속된 사람이 되면 안돼요. ‘슬기로운 여자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거든요.
제가 아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여성이 온다는 것은 뭔가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의 신비로움을 안고 여자가 남자에게 오게 되면 그것은 여자가 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로부터 어떤 파견자가 이 남자에게 파견된 겁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남편은 누구냐’는 말이 필요 없다니까요. 그래서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은 어떤 존재냐’는 그 이야기가 필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자는 순전히 남편을 위해서 존재하거든요. 남편을 위해서 여자가 존재하지 여자를 위해서 남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열상 그래요.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 존재하지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기자식, 자기새끼 위해서 존재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구조적인 서열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언서는 일반적인 윤리 도덕과 전혀 상관없어요. 여자가 남자의 여자가 되어 버리면 둘 다 망합니다. 왜냐하면 남자의 부족한 것을 여호와의 안목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왔는데 여자가 남자와 한통속이 되어서 둘 다 까불면 여호와의 슬기는 어디서 찾습니까?
보통 식당에서 부부가 함께 일하는 것을 보게 되면 보통 남편들이 하는 일을 여자분 들이 많이 도와주게 되잖아요. 그런데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을 경우에 남편보다 여자가 더 설쳐. 옳고 그름도 없고 막무가내로 설쳐요. 그래서 남편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안주인이 무서워서 시비도 못 걸어요. ‘죽여라! 죽여라!’는 식이죠.
그러면 식당을 빠져나오면서 하는 소리가 ‘여자나 남자나 똑같다. 똑같다. 둘이 부부 아니라고 할까봐서 똑같이 노네’합니다. 옳은 것, 그릇 것을 따져보지도 않고 ‘내 남편이 뭐가 잘못 되었는데’ 하면서 여자가 큰소리 더 치고. 그 집에는 이미 하나님이 파견한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요. 그것은 이미 여자는 남편에게 소속되어 버렸어요.
그것은 여자로서, 아내로서 역할이 끝나버려서 있으나 마나 한 거예요. 잠언서 2장 16절을 봅시다. 잠언은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잠언 2:16-19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제가 질문을 던집니다. 음녀의 반대말이 뭡니까? 1) 살림 잘하는 여자. 2) 뜨개질 잘하는 여자. 3) 충실한 아내.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 몇 번입니까? 4) 번이죠. 살림 잘하는 여자는 음녀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살림 잘해 봤자 그 여자는 자기역할을 잊어버리고 한 남자에 소속된 그 남자의 여자로 전락해 버려요.
여호와께서 옆에 붙어 있다는 그런 위상을 주지 못한다고요. 둘 다 똑같이 되어 버린다고요. 그러면 안돼요. 여성의 입장이란 남자로 하여금 남자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붙여준 그런 짝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여자는 무엇을 잊어버리면 안 되느냐 하면 ‘슬기’를 잊어버리면 안돼요.
여기서 ‘슬기’란 뭐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쪽을 잊어버리면 그 여자는 그 남자에 소속된 하녀가 되어 버리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슬기로운 여자로서의 위상은 다 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음녀입니다. 잠언에서 음녀를 들이대면서 아내의 아내다움을 대조하는 겁니다. 음녀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 버렸어요. 이방 계집입니다.
또 다른 구절을 보면 이 여자는 여호와를 모르고 애굽의 이방종교를 섬기는 자로 음녀가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이 세상의 유혹들, 권세들을 가지고 음녀라고 합니다. 음탕한 여자라고 했어요.
요한계시록 17:1-8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 비치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번이 우리교회여름수련회는 호세아, 아모스를 공부하는데 목회자 부인이 바람나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그 음녀는 돌에 쳐 맞아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호세아에 보게 되면 돌에 쳐 맞아 죽이라고 하기는커녕,
“어이, 호세아야! 네 남편 값 해야지?”
“예, 알았습니다.”
여기서 남편 값 하는 것이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하고 사는 그 음녀에게 값을 치르고 다시 데려와서 여전히 내 사랑스런 아내로 살게 하는 겁니다. 값을 치르고 살게 하는데 그 기간이 삼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하는 그것과 유사하죠. ‘이처럼 3일만에 돌아와서 너를 용서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부부사이에서 무엇을 굳혀주는가 하면 바로 언약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경우란 부부사이에서 아는 경우에만 안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파이프를 통해서 ‘나는 네 남편이다 내가 너를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이미 나에게서 너에게로 언약이 뻗어져 나와서 너는 내 사랑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사이가 된다’는 말이죠. 그 뻗어져 나온 언약의 본질이란 바로 용서요 긍휼입니다.
왜 긍휼이냐? ‘너는 내 여자거든. 영원한 내 아내거든. 그리고 바알은 네 남편이 될 수 없고 여호와가 너의 남편이다’ 언제부터?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의 남편이다.’ 애굽 에서 나올 때부터 처음에 언약을 맺었는데 그게 모세언약인데 그 모세언약의 내용은 호세아 때 밝혀져요.
그 안을 뜯어보니까 그 안에 뭐가 있는가? ‘이스라엘과 메시아는 부부지간이었다.’ 이것은 스포츠 신문에 나올만 해요. ‘사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더라. 부부지간 이었더라.’ 여호와에게는 신부, 자기 아내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어떤 아내냐 하면 여호와를 버리고 자기 멋대로 도망친 아내였는데 그 아내를 아내답게 하기 위해서 남편이 값을 치르고 그 여자를 영원히 자기 아내로 삼았더라.’ 바로 이것이 언약이 품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 부부사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그것을 전제로 해서 새 언약이 이루어져요.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 된 자들아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준 것 같이 하라.’ 그 소리 듣고 남편들이 깜짝 놀랐어요. 아내는 자기의 바비인형인줄 알았는데 바비인형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그런 바보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가지고 놀다가 식상하면 버리면 그만인데. 예수님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자기 소속에 불과하고 자기의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시시하게 보는 아내를 위해서 네가 목숨을 바쳤느냐’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그게 언약이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죠. ‘야, 큰일이다. 남편노릇 하기 힘드는구나.’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기를,
“놀랬지? 실은 내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진작 그러시지. 나는 진짜 부부가 그렇게 해야 사는지 알았지.”
‘나는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교회는 신부요 남편은 그리스도 예수님이고 그런 입장에서 네가 교인이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 한 대로 잠언을 열두 번 봐도 모르는 거예요. 뭔가 계속 보더라도 거기서 그냥 흔적만 남아요. 흔적만 남으면서 그 흔적의 기초가 되는 것은 신약시대까지 와야 되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그 잠언을 다시 볼 때 ‘아, 잠언은 구조적이다. 지혜가 남긴 구조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말했지요. 사랑하는 아내도 결국 무엇을 버리면, 여호와를 버리면 음녀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이에 하나님의 지혜가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내 된 자들은 남편을 정말 위하고 싶거든 남편을 경외하지 마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길이 진정 남편을 위하는 길입니다. 아, 분위기 싸늘하다. 지금, 분위기 싸늘합니다. 차라리 남편에게 얻어맞으라는 것이 더 편하지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보이는 남편에게 얻어맞는 것이 생생하고 현실감 있지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섬기라고 하는 것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구조가 우리를 지금도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더듬어 악을 찾는 자는 악을 만나리라’ 하는 것은 이미 우주 전체가 어리석은 자, 그리고 지혜로운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지혜가 그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 되려 하지 마시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성질대로 성깔대로 가시면 나중에 제각기 따로 따로 제 길을 갈 겁니다. 어쨌든 구원받은 계통은 이 잠언 말씀을 통해서 긍휼이 형성되어서 긍휼이 이루어지고 그 긍휼이 있어야 하나님경외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지혜로운 자, 미련한자가 어떻게 발각이 되느냐? 그것은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 가지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교재에 보면 9쪽에,
7. 관계를 중요시 함
(1) 부모 자식 관계
잠 13:24, 잠 19:13,18, 잠 23:13-14, 잠 29:15,26, 잠 1:8, 잠 4:1, 잠 6:20, 잠 13:1 잠 15:5 잠 23:22, 잠 20:20, 잠 30:17, 잠 17:17,25, 잠 10:1 (2) 왕과 백성의 관계
(2) 부부관계
잠 16:10, 잠 16:12-14, 잠 20:2,26, 잠 29:4,12 잠 31:9, 잠 14:35
(3) 부부관계
잠 18:22, 잠 31:10-31, 잠 12:4, 잠 14:1, 잠 19:13, 잠 21:9,19, 잠 27:15-16
(4) 노인과 젊은이의 관계
잠 16:31, 잠 20:29
(5) 친구와의 관계
잠언 16:19, 잠 24:26, 잠 27:6,9
(6) 종과의 관계
잠 17:2, 잠 29:21, 잠 30:10
(7) 이웃과의 관계
잠 25:17
이렇게 여러 관계가 나오는데 이 관계를 통해서 미련한 자는 자기 미련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슬기 있는 자는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고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쪽으로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많은 관계가 있는데 그 많은 관계를 우리가 다 알아야 돼요. 이것을 우리가 다 알아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 관계가운데서 지혜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것을 한번 봅시다. 첫 번째 관계가 뭐냐? ‘부모 자식관계’입니다. 부모자식관계 가운데서 다 볼 수는 없고 한 가지만 본다면 ‘매를 아끼는 부모는 자식을 망하게 한다’는 겁니다.
잠언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회초리로 때리지 않는 부모는 그 자식을 미워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잠언 29장 15절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안 때리면 그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그 증거가 뭐냐? 잠언 19장 26절에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쫒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그러니까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쫒아내는 속성이 누구에게 있다? 이미 자식에게 있으니까 너희들을 그것을 미리 간파해서 ‘어릴 때부터 조져라’ 그 말입니다.
구조적으로 우리는 징계를 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을 구조를 아는 사람은 아는데 생판 처음 세상에 나온 자녀들은 자기가 잘난 줄 알기에 그냥 방치하면 자기자신이 훌륭해서 사는 줄 알고 오해를 해요. 그래서 ‘자기를 나무라고 때려주는, 제대로 구조를 아시는 분이 옆에 있어야 그것이 부모로서 그가 낳은 자식에게 부모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려면 부모 자체가 하나님의 지혜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그 구조에 비추어서 ‘비록 내 몸에서 난 자식이지만 저 인간 아직 인간 덜 되었다. 영망이다. 내 몸에서 난 자식이니 내가 손대야지 어떻게 다른 부모 손으로 때리게 하겠나’라고 조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도 한때 그랬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사람은 꿈이 안 깨지면 인간이 안돼요. 꿈이 깨어져야 자기가 깨어져요. 자기가 깨어져야 하나님의 긍휼이 보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알아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냥 입술로 경외한다고 해서 그것이 경외가 아니에요. 자기가 깨어져야 ‘나는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아줄 때 그런 나쁜 놈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이 온몸을 휘감고 다니는 거예요.’
잃어버렸다가 얻었을 때, 여러분이 지갑을 한 번 잃어보면 그 지갑에 돈 몇 푼 안 들었어도 그 지갑 찾게 해달라고 막 기도하게 되고 난리피웁니다. ‘왜 제 지갑을 잃어버리게 하십니까?’ 그런데 찾게 되면 잃어버리기 전에 상상치도 못한 기쁨이 보너스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참 아슬아슬한 기쁨이죠.
잃어버리게 해서 잃기 전에는 맛보지도 못한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크게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은 자기 위주가 아니고 여호와의 손에 의해서 여호와 위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때릴 때는 왜 때리느냐? 내 자식이 아니고 잃어버린 자식이라고 간주하세요.
‘너는 그렇게 놀면 내가 속한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에 속한 지옥에 있는 거야. 그러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때리는 거예요. 인간은 때리게 되면 맞은 그 애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맞을 짓을 왜 했지?’ 생각을 하면서 생각한 그 순간 자기 나름대로의 그 애의 포부, 꿈은 깨어지죠.
꿈이 깨어질 때 그 뒤에 나오는 현상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부모의 사고방식을 일단 수용하면서 때리는 부모를 이해하게 되지요. 그 부모 속에 여호와경외가 들어 있다면 자녀는 맞는 순간부터 부모가 갖고 있는 여호와경외를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때려야 됩니다.
그것도 정기적으로 때리면 SBS ‘세상에 이럴 수가'에 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신고감이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 있을 때 때려야 되지요. 그러면 그 어린 자식이 잘못되어 봐야 뭐가 그렇게 잘못되겠느냐? 그것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인간의 어린 자식이 잘못했다고 해서 가스배관 타고 도둑질 할 것도 아니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그 잘못됨이란 바로 주변인의 희생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린 애들은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리고 자기가 밥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희생과 아픔을 통해서 사는지 그 희생을 몰라요. 다시 말해서 희생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죽음의 힘’ 아닙니까?
죽음의 힘을 두자로 하면 이게 지혜입니다. 여호와에게로부터 지혜가 내려온다는 말은 여호와의 노선에 두 가지 노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법의 노선이 있고 하나는 지혜의 노선이 있는데 법의 노선에 의하면 여기서 제사법이 이루어져요. 제사법이 뭡니까? 제물이 안 죽고 제사가 이루어지는 법이 있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왜 제물이 죽어야 되는가? ‘그것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히 10:2)라고 되어 있어요. 신약시대에 와서야 그것이 밝혀지죠. 구약에서는 왜 제사를 드리느냐? 제사를 드리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내가 지켜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죠.
그런데 신약성경에 오면 ‘제사 드리는 행위가 의롭다는 그 문제는 이미 아니고 제사 드리는 당사자가 도리어 제사 드림으로 말미암아 제물이 죽는 것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회사일, 출장일 때문에 바빠서, 혹은 자기 개인적인 일로 인해서 교회를 한번 빠지고 두 번 빠지는 식으로 안 나오게 되면 주님의 아픔과 희생을 잊어버리게 되고 거기서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희생에서 멀어져 가면 사람 속에 무엇이 쌓이는가 하면, 자기변명을 위한 자기법칙이 누적이 됩니다. ‘바빠서 못나왔습니다. 지난주는 집안 제사 때문에 못나왔습니다. 지지난 주는 시댁에서 호출해서 못나왔습니다.’ 계속해서 어떤 법이 작용해요. 그리되면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자꾸 법과 법으로 마주치려고 해요.
주님께서 법을 주셨으니 나로서는 최선을 다합니다. 자꾸 법과 법을 대비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법으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법으로 만나면 그 인간은 죽어요. 로마서 3장 21절을 봅시다. 법이 아닙니다. 법으로 만날 수가 없어요.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은 인간의 입을 틀어막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아래 저주 아래 두기 위함’이라는 것이 로마서 3장 19절에 나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죄에 갇혀 있음을 폭로하고 죄에 갇힌 그 결과는 저주 안에 갇혀 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법을 준 거예요. 이 법을 자꾸 당겨서 ‘지난주에는 애가 아파서 못나왔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애가 아파서 못나온 것은 맞아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변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희생, 십자가의 희생을 아느냐?’ 하면서 그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 이야기는 도대체 그 입에서 안 나오고 자기변호, 자기옹호, 자기를 사수하는 이런 발언만 자꾸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니 점점 더 긍휼과 멀어지는 거예요. ‘점점 더 멀어져간다…♬’
점점 더 긍휼과 멀어져가고 하나님의 자비와 멀어져가고 십자가의 피와 멀어져가고 멀어질수록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환경과 여건이 안 되어서 못나왔습니다’라고 만 날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거죠.
“그 교회 가려고 했는데 우리 시삼촌이 목회를 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갔어요. 그게 복음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시삼촌인데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희생은요.”
“그건 다 압니다.”
‘율법외의 한 의’라는 것은, 주님께서 ‘율법외의 한 의’를 그냥 쉽게 쉽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 외에 한 의’라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은 쓰레기 같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으로서 자존심을 다 뭉개버린, 하나님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십자가에 다 쏟아 부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의 작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역사 끝나기 직전에 했던 그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다 집어넣은, 하나님의 자기 아들이 목숨까지 바쳐서 만들어 낸 작품이 바로 ‘율법외의 한 의’입니다.
십일조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안식일 지켜서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성경대로 잘 지켜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전도해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은 율법적이에요. ‘율법외의 한 의’ 거기에 하나님의 모든 희생과 사랑과 공의로움과 모든 것을 다 집어넣었어요.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독하는 자가 바로 악마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 자는 영원한 지옥가도 할 말이 없어요. 영원한 지옥에 가도 주님의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 한 방울 없어서 헥헥거려도 하나님이 주신 그 피를 모독하는 죄의 값은 치를 수가 없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무섭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피를 모독한 사람은 무서운 징벌을 받는다’(히 10:29) 했어요.
제가 인생을 살면서 안 것은 과거에 얼마나 잘나가고 화려하고 어떻게 살아도 과거라는 것은 오늘이라는 초점에 다 모인다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고통스러우면 과거에 행복했던 것 아무 소용이 없어요. 왜? 초점이 오늘로 모이니까. 끝이 나쁘면 전부 다가 나쁜 거예요. 왜? 모든 것이 끝,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지금까지 이끌어 왔기 때문에.
그 끝이 지옥이라면 그 전 것도 다 지옥이었어요. 아무리 과거에 잘나갔어도 소용없어요. 피서 철만 되면 피서 온 사람들 고민이 하나 있어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가야산 해발 450M 여기는 시원하잖아요. 내일 다시 대구시내에 내려가 보세요. 엄청 덥죠. 어제 시원한 것이 지금의 더위를 조금도 감소시키지 못해요.
지난 것은 지난 것이고 ‘아, 덥다’ 하는 사실만 남을 뿐입니다. 섭씨 35도가 이렇게 더운데, 지옥에 가면 물 한 방울 없는데, 그것도 십년 복역하고 나갈 거면 희망이라도 갖지요.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못나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합니다. ‘네 생 눈알을 빼고 네 팔을 잘라도 부탁한다. 제발 지옥에는 가지 말아다오.’
바꿔서 이야기하면 ‘네가 눈 빠지고 팔 잘려도 네가 영생 얻었나? 그러면 더 원하지 마라. 얻을 것 다 얻었다.’ 마지막이 행복하면 다 행복한 거예요. 마지막에 천국에 와 있으면 그 이전 시간이 어떤 고생을 해도 그것이 천국 생활입니다. 그것 가지고 문제 삼지 마세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우리는 덮어씌운 거예요.
그 구조가 뭐냐? ‘율법외의 한 의’,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경외, 그런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긍휼하심,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의 연장선에서 우리가 혜택을 얻은 것이기에 모든 공로는 주님이 받아야 마땅합니다’라는 것이 모든 지혜와 명철의 근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그 말입니다. 기도하면 공부 잘하고, 그런 것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나무다.’ 곧 영생이라,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종의 관계’입니다.
잠언 19:10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노예라는 것이 성경에 나올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오네시모이야기를 예로 들으면서 ‘사도바울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사도야. 왜 노예제도 자체의 악함을 지적하면서 노예해방을 주장하지 않고 그냥 노예로 두되 잘해주라는 식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긍정하고 인정하는 쪽으로 하는가? 사도바울은 오늘날 우리보다 더 은혜가 없고 거룩하지 못한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닌가?’라고 욕을 해요.
‘적어도 사도바울이 정말 하나님의 자비를 전하려면 종과 주인의 사회적 계급관계까지 타파하고 종과 자유자(주인)가 다 하나 되는 이상공동체를 위해서 촛불집회를 하든 데모를 하든 해야지 왜 종은 종대로 주인은 종대로 그냥 그 관계를 유지하게 놔두는가? 사도바울이 계시를 받아도 좀 덜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오해를 하게 되지요.
방금 읽은 잠언서 19장 10절은 ‘어디서 종이 함부로 겁 대가리 없이 주인을 다스려?’ 이 말이거든요. ‘종은 종 값을 해. 어디서 감히 자기 위치를 벗어나서 주인노릇 하려 들어?’ 라고 단호하게 종은 종으로서 값을 하기를 강력하게 지시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인정하고 지시하신 지혜라는 겁니다.
여기서 ‘대체 그러면 종은 인간 아닌가?’ 하는데 죄송합니다만 종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슬기로운 여자는 사람이 되면 안 되고 천사라고 했지요. 하늘에서 파견한 천사. 마찬가지로 여자가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서 파견한 천사라면 종은 사람이 아니고 기계죠.
하나의 기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농업형경제구조에 있어서 그 당시에 농업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필요합니다. 요새 같으면 생산수단은 기계가 되겠지요. 생산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러서 자기들이 하기 힘든 일을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아서 일종의 계약을 합니다. ‘밥은 먹여준다. 하지만 주인 없는 종은 없으니까 주인에 종속된 노예로 살아라’고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이런 경우도 있고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을 한다고 잔뜩 돈을 빌렸는데 사업이 폭삭 망했어요. 돈을 갚아야 하는데 갚을 길이 없을 경우에는 ‘내 몸 가지고 평생 노동으로 갚겠습니다’ 하면 그것이 채주(돈을 빌려준 자)의 종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개인적인 인격이 문제가 아니고 이러한 제한된 농업형경제구조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야 된다는 그 다급한 문제에 입각해서 ‘종이라도 좋습니다. 밥만 먹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태도로 종의 역할에 충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종은 주인이 있거든요. 주인은 이 농업형경제구조에서 책임자입니다.
책임자가 되었으면 그 생산물이 보다 많이 증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고 그 노력이란 종을 종답게 다루는 일을 해야 되는 거예요. 종을 인격대우 한다고 주인노릇하게 놔두면 뭐가 제대로 안 나옵니까? 생산물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으면 주인도 굶어죽고 종도 굶어죽어요.
레위기 25장에 나와요. 이스라엘전체가 여호와의 종입니다. 땅 주인은 여호와가 땅 주인입니다. 땅 주인에게 임대차 계약해서 빌어먹고 있는 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품군이다’라고 했어요. 농업형생산구조에서 종이라도 일할 수 있고 밥 먹을 수 있다면 그 신분제도가 유지되어야 농업생산이 계속 되어지는 겁니다.
주인이 외출을 하는데 종이
“주인님, 일찍 들어오세요.”
“네가 뭐야?”
“저도 하나의 인격자로서 충고하는데 주인님, 너무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세요.”
“이게 죽으려고 환장했나?”
무슨 기계에 인격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종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없어요. 없어야 생산수단으로서 충분히 역할을 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조그만 가게를 하든지 식당을 하든지 간에 고용주가 볼 때 직원들이 휴대폰 가지고 있으면 싫어해요.
직원들의 휴대폰은 오직 주인의 지시만 받을 수 있는 휴대폰이면 괜찮은데 서빙하면서도 ‘그래 오늘 가게 6시면 끝난다. 그래 간다. … 뭐 드시겠습니까? … 간다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이러면 주인이 볼 때에 생산수단으로서 또는 기계로서 자격이 없지요. 콘베이어벨트가 죽 돌아가는데 이 벨트가 인격적으로 한다고 ‘나는 좀 쉴란다’하고 멈춰버리면 콜라병 다 넘어집니다. 일의 흐름이 깨지잖아요.
지금은 산업형생산구조고 그때는 농업형생산구조이기 때문에 종은 종다워야 되고 하나의 생산수단으로서 밥을 먹여주는데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종을 죽이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기계를 부순다고 살인죄가 됩니까? 아니죠?
종을 때리면 상해죄에 해당되고, 누가 자기 종을 가져가면 그것은 절도에 해당되지 납치나 폭행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농업형생산구조에서는 이런 구조적인 질서로 해야돼요. 그 종이 주제넘게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그것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들아, 네 주제 파악을 해라. 네가 밥 먹고 사는 것도 은혜인줄 알고 곱게 곱게 감사합니다, 하고 살아라.’ 그렇게 되지요. 에베소서 6장에 보게 되면 고용주와 사용자간의 관계가 나옵니다.
에베소서 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구조 아닙니까? 구조.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는 티를 내라 이 말이죠. ‘이 자리는 그리스도가 허락한 자리고 그리스도가 주신 자리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보고는 일 안하지만 그리스도를 보고는 당신과 관계없이 일할게’라고 하는 것이 종으로서 종다운, 합당한 지혜자답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겸손’입니다. 누구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겸손’입니다. ‘주여, 주신 자리가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되는 겁니다.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 하지 절대로 개인적인 주체, 인격, 주체의 존엄성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성경해석이 잘못된 겁니다.
‘주인들아, 종들 너무 학대하지 마라’ 하는 것도 종의 인격의 존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주인위에 또 하나님이라는 상전이 계시기 때문에,
“너의 상전이 너에게 어떻게 했던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도 너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효도하라’가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하나님 입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집안이든 되바라진 형제간이 더러 많지요. ‘아, 저인간이 동생 되고 내가 형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데 그게 바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주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형이 형 되는 것도 동생이 동생 되는 것도 그게 전부 다 하나님이 정해준 그 위치입니다. ‘웅이 아빠는 죽었고….’ 그러면 죽어야 되고 ‘웅이 아빠는 동생이 되고….’ 그러면 동생 해야 되는 겁니다.
다음시간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되는가’를 하겠습니다.
2008-08-13 07:20:03 녹취 : 오용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