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이야기(3)
미국의 백인들에게 이제부터는 별로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광할한 대륙인 서부를 개척하기 위해선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어왔던 흑인들의 힘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었지요. 궁여지책으로 처음엔 유럽에서 이민을 받아 들였고 그래서 급속하게 개척을 하여 엄청난 부를 축척하는 큰 재미를 봤는데요... 처음 미국에 발을 들여놓은 백인들(WASP, 백인 앵글로섹슨이며 청교도인들)이 자기들이 아닌 구룹의 이러한 집단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들과 모양이 똑같은 유럽이민자들도 이들의 눈에는 역시 2등시민 이었습니다. 이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들이 주로 앵글로섹슨족들의 밑에서 노동자로 살았는데...이들이 힘을 결집시켜서 앵글로섹슨들에게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에서 광산에서... 모든 일터에서 주로 이들이 노동자였는데 단체파업을 일삼았지요. 임금을 올려 달라고 했고 똑같은 인간으로 폭넓은 자유를 요구하면서 재산권을 요구했습니다. 초창기 흑인들도 그들의 자유획득을 위해서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백인들끼리의 싸움을 보고 인식이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앵글로섹슨은 쉽게 부릴수 있는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 눈을 돌려서 아시안 이민자를 받아 들였습니다. 이민자라고 하지만 거의 노예로 중국과 인도(영국을 통해서)에서 아시안을 끌어 왔습니다. 이것이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러다가 이민자들의 급속한 증가에 두려움이 생긴 앵글로섹슨들이 이민을 닫았습니다. 1800년대 중국에서 노동자로 끌려온 초창기의 사람들은 우선 남자들만 잡아왔기 때문에 결혼을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모두 총각들만 있었지요 당시 중국인 사회를 ‘총각사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미국사회학계 에선 당시의 상황에서 생겨난 ‘총각사회’란 용어가 가끔 학자들의 논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로 상하이에서 잡아 왔다고 중국이라는 것 만큼 ‘상하이’라고도 합니다. 헐리우드에서 요즘까지도 ‘상하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1900년대 들어서 잠깐 아시안 이민을 받아 들이다가 1930년대 닫았고 그리고서 1965년부터 본격적인 아시안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뉴욕이나 LA의 한인사회는 그때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민 100년이라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큰 사회를 형성한 것은 이제 30년 막 지나고 있습니다. 1960년, 70년대 이민 온 사람들이 한국과의 무역관계에서(한국의 노동자는 노동력이 싸고 노동의 질이 높고 경공업제품에선 큰 돈벌이었습니다) 돈을 갑자기 참 많이 벌었습니다. 모자.가방.가발.양말....등과 같은 제품들이 미국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렸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발입니다.김대중대통령밑에서 재미를 보다가 거덜이 난 박지원씨가 뉴욕서 이 가발을 갖고서 돈을 참 많이 번 사람입니다. 경상남도 도지사를 했던 김영삼대통령때의 사람이고 지금도 권력에 있는 그 김혁규씨는 가방으로 재미를 본 사람입니다. 박지원(호남인)씨는 DJ에게 돈을 디밀고, 김혁규(영남사람)씨는 YS에게 돈을 디밀어서 한국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내가 대학을 처음 들어갈 때에 석권이와 명호. 그리고 순기하고 잠깐 서울 가리봉동에 있었습니다. 그 가리봉동은 구로구와 같이 공단으로 유명했던 곳이고 광덕리. 사창리에서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온 친구들도 열심히 공장을 다니면서 일하던 곳이었습니다. 안양천이 그곳에 있는것을 나는 그때 알았습니다. 시골의 우리동창들이 열심히 공장에서 일해서 만든 그런 물건을 갖고서 이들이 돈을 많이 벌었구나....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1965년부터의 아시안 이민자들이 밀려들어와서 지금은 그 숫자가 정말 많습니다. 동시에 대도시에 몰려있습니다. 중국인들이 가장많고 그다음이 인도와 필리핀 베트남 그리고 한국. 일본의 순서입니다. 이 아시안들이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이제까지 백인노동자들과 아시안 이민노동자들간의 관계가 원수같이 되어 왔었습니다. 1998년부터 이것이 좀 완화.해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백인사회 전체가)이 더 이상 이민자가 필요없게 되었고 또 미국내에 있는 유색인종들이 부담만 간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면서 급기야는 2001년에 9.11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순식간에 주류 언론들이 테러의 책임을 아시안들로 돌렸습니다. 파키스탄.중동...도 아시아라고 그렇게 규정짓고 ...그래서 지금 미국내 아시안들의 처지가 정말로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는 우선의 불법체류자들을 모두 색출해서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정책을 집행할 것 같습니다. 20년 미국서 요즘처럼 백인들을 증오에 가깝게 미워하기는 처음입니다.
뉴욕이야기에 위와 같은 지루한 장관설을 횡설수설하는 하는가...? 하는 불평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부시대통령이 대통령에 재선되고 취임을 한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일년 내내 워싱턴 정가에선 이민자들을 내 쫓을 궁리만을 햇던 이유가 여기에 있구요...뉴욕서 한국인들(나를 포함해서)이 올해 년 말을 이렇게 불안한 가운데에 보내고 잇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니까...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도 좀 진지하게 미국의 권력동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많은 우리동포들이 이렇게 관심을 갖질 않습니다. 여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겠다...하는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2세나 3세들은 그렇지가 않고 .... 종덕이가 그리고 희진이가 미국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에 대해서 좀 확연하게 알 것 같다고 한 그러한 생각에 나의 이야기가 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뉴욕의 12월 마지막 주간은 내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비가 뉴욕서는 많이 처량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비가 오면 나는 춘천서의 객지생활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때 참으로 민감한 사춘기 였구요...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했었습니다. 방학이라고 춘천서 광덕리 집으로 가려고 하면 춘천댐을 지나는 버스를 탑니다. 화천과 갈라지는 지점이 신포리 였는데 얼마 전에 신포리에서 교회를 담당하시는 목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이제는 그곳이 모두 포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화천과 춘천사이의 도로를 2차선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지난해에 한국국회의 건설교통위 소속 국회의원 한사람이 뉴욕에 와서 내가 통역을 했었는데 그분에게 물었더니 그 후에 서울로 돌아가서 답이 왔는데 아주 먼 뒤에 계획이 있다고 했습니다. 춘천과 사창리간 그곳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신포리를 지나고 한참을 꼬불꼬불 달리면(중간에 고탄리라는 곳도 잇는가...) 용담리가 나오고 그리고 지나면 ...큰 고개를 넘어서 고개 꼭대기에서 사창리가 보이게 되지요...사창리 버스종점 아직까지 그렇게 있는지 모르겠구요...입구의 자전거포 맞은편엔 남수네집 이었구요..자전거포 옆에는 성씨가 ‘장’인 분이 운영하는 대장간이 있었습니다. .조금위엔 강황근이네 정육점이었구...종점 옆에는 종말로 몫 좋은 곳엔 다방이 있었구 그 옆엔 중학교체육선생님을 하신 분(이분의 성함이 장..?)이 이 커다란 오토바이(당시에는 쌍기통 오토바이라고 정말 한번 구경만해도 좋았던 그런 오토바이였지요)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분이 체육사를 했지요. 나는 중학교엘 와서 박용섭이가 타는 그 구두달린 스케이트가 그렇게 갖고 싶어서 정말로 아버지와 형들에게 엄청나게 졸라서 그 체육사에서 1700원을 주고 ‘Hope'라는 상표가 달린 구두스케이트를 갖을수가 있었습니다. 내 손에 들어온 이 구두스케이트는 나에겐 정말로 당시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죽어도 잊지못할 추억입니다. 그 스케이트를 어루만지면서 스케이트를 배워서 ...지금도 스케이트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사창국민학교는 축구를 했지만 광덕국민학교는 배구를 했습니다. 석권이와 명구 그리고 명호랑 화천군에서 배구를 우승하고 군대표로 춘천의 도 시합 나갔었고 주문진의 덩치들에게 밀려서 이틀만에 돌아온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도 성호네가 시계를 팔던 ’보금당(?)‘이었던가... 이인숙이네는 ’여인숙‘을 했었던가요? 중학교 일학년 때엔 왜 그렇게 3학년 ’지도부‘가 무서웠던지...그 지도부중의 한 형이 우리 형에게 아주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것을 보고서 나는 그 시간부터 우리 형을 높고 크게 생각을 했었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춘천으로 전학을 갔는데 몇 개월 지나니까... 남수네 누나(김운희선생님?)가 마치 나를 따라서 오시는 것 같이 내가 다니는 강원중학교로 전근을 오셨습니다. 그리고선 그분이 저를 잘 해 주셨구요...학교 매점에서 뽀빠이도, 짜장면도 사 주셨었습니다. 중학교때 유덕상 영어선생님이 학생들을 벌줄때엔 꼭 뺨을 ’찰싹찰싹 ‘ 하고 때리셨는데...나도 한번 맞았었습니다. 그때의 그 짜릿한 아픔이 그후 오랫동안 기억에 있었구요... 그래서 지금도 그 유덕상선생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사내면을 벗어나서 그 후로 부터 내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온통 모순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문제가 아니고 철학(Spritual)의 결핍이었습니다. 서서히 철이 들고부터 시골서의 어릴적 성장을 큰 다행이고 큰 행운이라는 생각엔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아직까지 그곳을 지키면서 그곳의 정서를 Enjoy하는 동창 친구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광덕리의 강석권이가 이 카페에 좀 들어 왔으면 좋겠는데요... 그와 20년 만에 전화로 통화를 했습니다. 서로의 부모형제에 대한 안부를 물으면서 우리는 말을 이어가질 못했습니다. 종덕이 그리고 남수도 거기에 있다고 하니까...그러한 소중한 우리들의 친구들이 맑은 정신을 이어가고 넘겨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막연하지만 내가 그 실제이면서 마음의 고향인 그곳에 어떻게 기여할수 있을까...? 하는 궁리도 해 봅니다. 충격에 가까운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오히려 나는 어릴적의 이러한 아련한 추억을, 그리고 지금은 그러한 추억을 공감하는 보고싶은 동창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추억과 아른아른한 얼굴의 친구들이 막연한 그림이 아니고 실제가 되었습니다. 노파심일지는 모르지만 미국과 북한간의 줄다리기를 현장에서 목도하면서 늘 불안했는데 그것은 애국심이기에 앞서서 향수에 젖은 향토애였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제야 내가 제자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군대에 끌려가서 첫 번의 유격훈련에 갔는데 그 유격장에서 박희진이를 만났구요 그가 거기서 유격조교를 하고 있더라구요..군에서의 이런저런 사건으로 나는 인간으로서 가장 끝트머리의 한계에 가 있었던 그런 때 인데...그때 희진이가 훈련도 빼 줬고 건빵도 줬습니다. 그때의 그 박희진이가 내 글의 끝머리에 한마디 하니까..... 정말로 세상은 끝까지 견딜만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수용과 붙어 다니던 녀석은 김일철 이었는데...최문경과 명월리서 붙어 다니던 그 큰키의 그녀석의 이름은 가물가물입니다. 얼굴에 여드름이 있었습니다. 김기섭이네 아버지가 수송부대 인사계였는데 그 부대엔 TV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브라질의 축구팀이 한국엘 왔었고 말로만 듣던 펠레를 TV에서나마 보겠다고 기섭이를 따라서 걔네 아버지 부대엘 갔었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TV를 만져보지도 못했었습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수용이네 집의 마루에서 청룡기쟁탈 고등학교 야구를 가끔 TV로 봤는데 이수용은 그때 중앙고등학교의 황.. 무슨 투수가 잘한다고, 용섭이는 군산상고의 윤.. 투수가 더 잘한다고 논쟁을 하기도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 산골짜기에서 우리들의 그 순진한 입으로 세상을 재단하며 정복.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간첩을 신고하면 상금을 탈수 있다는 그런 표어에, 조금만 낮선 사람이 동네에 있으면 가장 먼저 간첩이겠는가...? 의심을 했습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 삐라를 주어서 지서에 갖다가 주고 그 댓가로 공책이나 연필. 책받침을 받아오곤 했습니다. 종덕이가 ‘대우’라고 하는데 검단리의 그 전대우인지...? 걔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아주 신사용 가벼운 새 자전거였습니다. 나나 종덕이 자전거는 뒷판이 더 큰 짐차이기 때문에 너무나 무거워서 내리막길을 달릴때엔 신낫지만 항상 올ㄹ가는 길에ㅐ 고나해서 걱정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전대우와 함께 붙어서 다니던 그 ‘전용환’이던가... 그 친구도 기억에 있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에 같은 덕골에 살던 3학년형인 ‘윤재근’이가 있었는데요... 중학교서 덕골의 집까지는 정말로 오랫동안 걸었습니다. 그 3학녕 형이 우리집 옆에 살았기 때문에 나는 통학길 내내 상급생에게 시달렸습니다. 산속 중간지점에 있는 머루를 따와야 했고 개울건너 산딸기도 따다가 받쳐야 했습니다. 언제는 하도 미워서 산열매에 새똥을 일부러 묻혀서 갖다가 받친 기억도 있습니다. 끝내는 산속에서 그 형을 두들겨 팼던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윤재근형이 죽었다고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멍...하니 멍청하게 하늘을 쳐다 보았습니다. 얼굴은 기억에 잘 안 나는데...버스차장들의 노조활동에 개입한 그랬던 적이 있는데 그대 그 노조원 가운데에 광덕리 출신이 있었고 그분이 이 윤재근형과 결혼해서 살았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명일이 원래는 고아덕리 안골에 살았습니다. 암골에는 황용하와 황영희라는 남자.여자 형제가 살았는데요...나는 걔네들도 기억합니다. 명일이가 암골에서 사창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렇게 키가 작던 아이가 갑자기 컸습니다. 걔하고 같이 잘 어울리던 신용희.이찬주.이해수...모두들 보고 싶습니다. 일년 위인 이선근형이 해병대 모자를 쓰고 그렇게 사창리서 만났었던 기억 이외엔 없습니다. 뉴욕에서 그 햇골의 목재소에서 운전을 하시던 분의 아들이 뉴욕으로 장가를 와서 지금 여기서 살고 잇는데 약 10년전엔 알았었는데,...이름이 김광수이고 우리보다는 2년인가 아래인 분입니다. ‘이옥’인 아마도 웅변으로 한몫 했지요(?) 그때엔 그랬는데 우리들의 누나같은 동급생인 명월리의 그 두사람이 있는데...김난아(?)와 그리고선 누구더라....춘천의 소양중학교에서 전근오신 기술선생님이 있었지요.... 그 선생님이 그때 2학년초인데 소양중학교에서 공부잘하기로 소문난 아이를 그 산골에서도 하도 많이 이야기해서 알았었고 고등학교에서 알았었습니다. 몇 년전 보스톤의 하버드대학에서 아시안계의 NGO를 초청해서 강연회를 했는데 내가 그것에 초청을 받아서 갔었습니다. 하버드에 와 있는 한국사람이 30여명 왔는데 그곳서 그 ‘한민’이라는 친구를 만났었구요...나는 그 친구에게 사내중학교때의 그 권혁음(?)인가 하는 기술선생님 이야기까지도 하면서 소주한잔을 했습니다. 카페에 사진도 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만, 나는 지금 이곳서 다니는 곳 마다 중학교 동창들의 이야기와 ‘사내중학교6회동창회’이야기를 합니다.
만나고 싶은 많은 사람들, 특히 중학교 동창들과 만나는 날도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뉴욕이야기 4편은 얼굴을 맞대고 서로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며 만들게 될 것 같습니다.
뉴욕의 년말은 연일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뉴욕서....
첫댓글 동심어린 옛 추억 정성껏 게재해준 친구에게 감사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훌륭하게 성공해가고있는 동석이에게 축하를 보낸다. 짝짝짝~~
지금 앞으로 5시간하고 39분 지나면 2006년으로 해가 바뀜니다. 일주일 남았다니 한주지나면 만나겠네요. 오시면 무엇이 드시고 싶은지 알려주세요. 성호가 그곳으로 모임을 정하게요. 미국식으로 인사 나눌까요ㅎㅎㅎ
소설 한권을 읽고 난 느낌..옛날엔 소설 읽기 좋아 했는데 요즘엔 잊고 살았었네..동석인 일기를 꼬박 썼나.어찌이리 기억이 선명한고..
명월리의 누나 같은 동급생은 나와 같은 동네 살던 노명희(뒤에 '금주'로 개명)이고, 일본 갔단 소식뒤론 연락두절...동석이의 소식을 직접 접하게 되니 인생은 정말이지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새해에 보자 동석아
글구 동석아 옛날 유격훈련 빼준 건 얘기마라.우선은 그렇지 못한 석권이가 서운 할테고, 알다시피 현정부들어선 과거청산이 주이슈인데 권력형부조리로 소환이라도 당하면 어쩌냐? 쉿
동석아! 친구들이 너를 많이 기다리는것 같구나.10일 오면 꼭보고, 되도록이면 빨리 일정 잡히는데로 연락주길 바란다.올해는 너의해가 되길 기원한다...^^
동석아 우리 동창들 추억을 조그만 책으로 한번 출판해 보거라 아주 의미가 있을것이다
아름다운 추억이라기엔 향수에 절은 얘기인것 같다. 동석의 등장에 카페의 친구들이 학창시절을 다시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된것 같다.
저는 선배님을 기억 합니다 황근이 언니 동생입니다. 수용이 오빠랑 학용이랑 얘기해서 그시절 선배님이 대단한 존재로 생각되었지요 안기부에서 감시를 하고 그래서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살수없어 미국으로 갈수밖에 없었단 이야기도 듣구요 제친구도 미국으로 12월 20일에 갔습니다.Maybe 선배님께 연락을 할런지..
성호선배님게서 연락처를 알려 주신듯 하네요.. 그은사님 성함은 권혁응 선생님이시고 선배님들 30주년 기념사진에 계십니다. 이정재선생님, 최명수선생님 모습도 있으시구요..
정자처럼나두한권에소설책을읽은느낌이네...머지않은시간만날수있길~~~~~~~
하나하나 열거한 지난일들이 하드웨어인것같아.ㅎㅎ 모두들 너의모습이 보고파서 기다림이 새로와지나보다.빨리와서 삼겹살에 쐐주한잔 해야겠다..
뉴욕에있으면서도 어쩜 우리보다 옛일들을 더자세하게 기역하고 있을까? 네글을 일고있으니 광덕리부터 사창리 명월리까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덕분에 향수에 젖어보기도하고 아무튼반갑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