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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 사군파 원문보기 글쓴이: 학산
학성군 시양무공(김 완, 1577~1635 )신도비명 (原文; 1802년 壬戌譜, 解釋 : 2005. 6. 30. 金順大)
竭誠奮威振武功臣鶴城君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鶴城君 諡襄武公神道碑銘
갈성분위진무공신학성군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학성군 시양무공신도비명
[해설] 박세채의 유고에 본 비명의 작성날짜가 정묘(1687)년 2월 29일로 되어 있다.
右議政 朴世采 撰(우의정 박세채[1] 지음) , 吏曺判書崔錫鼎篆(이조판서 최석정[2] 씀)
[1]박세채(朴世采, 1631~1695).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이다.
[2]최석정(崔錫鼎, 1646~17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이다.
公諱完 字子具 駕洛國 首露王後也 曾祖漢城 贈左通禮 祖嗣宗 贈工曺參議 考克祧 利城縣監 贈兵曹判書 鶴川君 妣貞夫人全氏 三世追 恩皆因公貴焉
공의 휘는 완(完)이고 자(字)는 자구이며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이다. 증조는 한성(漢城)으로 좌통례를 증직받았고, 조부는 사종(嗣宗)으로 공조참의를 증직받았고, 부친은 극조(克祧)로서 이성현감을 지내고 병조판서와 학천군을 증직받았으며, 모친은 정부인 전씨이다. 3세(한성, 사종, 극조)가 추봉된 것은 모두 공의 공덕 때문이다.
公家 世居靈巖 全夫人 旣娠公 夢有猛虎入懷之祥 乃以萬曆丁丑八月二十三日 某甲生 白氣滿室 經日乃散 人皆異之
공의 집안은 영암에 살았으며, <모친인> 전씨 부인이 일찍이 공을 임신했을 때, 사나운 호랑이가 들어와 가슴에 안기는 상서로운 끔을 꾸고, 만력 정축(1577)년 8월 23일 갑시(새벽 3시쯤)인가에 공을 낳았다. 흰 기운이 방에 가득한 것이 며칠이 지나 흩어져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初 判書公 爲光陽倅時 當李潑 死於逆獄 後倅韓德脩 陰知與潑 爲聯姻 乃與前都事 鄭渫等 誣告判書公 有相助狀 按問 卒無驗 德脩等 遂抵反坐法 受訊其徒七人 皆斃 惟德脩 渫 减死論 判書公 亦蒙宥 未及出獄而卒
처음에 판서공(극조)이 광양에서 원님으로 근무할 때, 이발이 역적질을 하여 처형되었다. 후임으로 온 한덕수가 몰래 이발의 사건을 알고 이에 관련을 지어, 이전의 도사 정설 등과 거짓으로 죄를 꾸며 판서공(극조)이 이를 도와주었다고 보고서를 올렸다. 신문하여 조사하니 혐의가 없자 한덕수 등은 오히려 반좌법[1]에 저촉되어 심문을 받고 그(한득수)를 따르는 7명[2]이 모두 처형당했다. 오로지 한덕수와 정설은 사형을 감해주라는 의견이 내렸고, 판서공(극조)도 풀려나게 되었으나(蒙宥) 감옥에서 나오기 전에 죽었다.
[1]反坐法; 거짓으로 고자질하여 남을 벌 받게 한 사람에게 고자질을 당한 사람이 받은 벌과 같은 벌을 주던 일.
[2]7명; 채지목(蔡之穆), 임장(林藏), 박신(朴藎), 의상덕(宜尙德), 황한(黃漢), 이득춘(李得春), 이경운(李慶雲)
公年 纔十五歲 誓復其讎 不以一日忘于心 比服闋 國家被倭兵己數年矣
공의 나이 겨우 15세에 그 원수를 갚을 맹세를 하고 하루도 마음속으로 잊지 않았으나, 3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으니(服闋), 나라가 왜병들에 피해를 입어 수년이 지났다.
公氣度雄偉 膂力絶人 力能扛鼎 射藝超絶 丁酉 以勇敢 隷全羅兵使 李福男麾下 大爲主將所稱賞
공은 기운이 뛰어나고 위대하였으며 힘이 아주 세어 능히 무거운 솥을 들어 올리고 활 쏘는 기술이 유별나게 뛰어났다. 정유(1597)년 용감하게 전라병사 이복남[1]의 휘하에 들어가 주장(主將)이 되어 찬양을 받았다.
[1]이복남(李福男, ?∼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是年夏 登武科 戌赴慶尙防禦使 高彦伯軍 行至南原 賊兵 梗路 乃約進士 趙慶男等 邀擊於弓藏峴 斬首二十餘級 擊屯院內村者 斬首十餘級 最後 獨{辶+咢}賊于獐峙下 斬首數十級 血染盤石上 至今遺跡 存焉 因名其石曰血巖
이 해(1597년) 여름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방어사인 고언백[1]의 진영에 있다가 남원으로 가니 적병(왜군)이 길을 막아 진사인 조경남[2]등과 궁장(弓藏) 고갯길에서 요격하여 20여명의 목을 베었고, 원내촌(院內村) 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10여명의 목을 베었으며, 마지막으로 혼자서 장치(獐峙)아래에서 수십 명의 목을 베니, 돌위에 피가 묻어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다. 이로 인해 그 돌의 이름을 혈암이라 한다.
[1]고언백(高彦伯, ?∼1609).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본관은 제주(濟州). 정유재란 때는 경기도방어사가 되어 전공을 크게 세웠고, 난이 수습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책록되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하여졌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 하여 살해되었다.
[2]조경남(趙慶男, 1570~1641). 조선 중기의 무인.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 남원출생.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군문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대로 하지 못하고, 29세에 전라도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막하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의 왜군을 무찔렀다. 저서는 1582년에서 1639년까지 58년간의 사적을 일기체로 기술한 《난중잡록 亂中雜錄》이 있다.
明年 歸從全羅兵使 李光岳 住南原會德脩 以都元帥 權慄裨將 來 點兵於兵使軍 公潛懷利刃 將刺殺之 有爲德脩者 渫其謀 由是 事不諧 李公 怒 斥爲德脩者
다음해(1598년)에 돌아와서 전라병사 이광악[1]을 따라 남원에 있을 때, 한덕수가 도원수 권율의 비장으로서 병사와 군진을 점검하러 온 것을 만났다. 공이 날카로운 칼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한덕수를 돕는 사람이 있어서 그 계획이 누설되었다. 이 일로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자 이공(이광악)이 노하여 한덕수를 파면시켰다.
[1]이광악(李光岳, 1557~160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군수 호약(好約)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웠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辛丑 始調小坡兒權管 兼團練使 掌輪 天朝所賜軍餉 乃隨鄭公光績 入京師 道値會射 立蒭有射者 二人 各中三矢 觀者 無不稱快 問爾國 亦有能射者乎 公應曰諾 遂取二人矢興射 連中九矢 每一中 觀者無不稱快 賞賚甚盛 公 散諸一行
신축(1601)년에 소파아권관(小坡兒權管) 겸 단련사가 되어 천자(명나라)가 보내주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아 이에 정광적[1]을 수행하여 <중국의> 서울로 가는 길에서 활쏘기 대회가 있었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활쏘는 사람 2명이 각각 3개의 화살을 명중시키니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대의 나라에도 역시 명사수가 있는가?’ 라고 물었다. 공이 이에 응하여 그렇다 하고 마침내 두 사람에게서 화살을 받아 쏘니 연속해서 9발을 명중시켜 보는 사람들이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아주 많은 상을 받아 여러 일행에게 나누어 주었다.
[1]정광적(鄭光績, 155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경훈(景勛), 호는 남파(南坡)·서간(西澗). 기문(起門)의 아들이며, 승지 희적(熙績)의 동생이다. 1601년 양응룡(楊應龍)의 난이 진압된 것을 알리기 위하여 명나라 사신 두양신(杜良臣)이 오자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대사성을 제수받았으며,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발탁되고, 이어 대사헌·전주부윤·담양부윤을 지내고 향리로 돌아갔다. 이후 벼슬을 계속하였으며 80을 넘게 살았다. 시호는 익정(翼正)이다.
癸卯 拜宣傳官 甲辰 除黔毛浦萬戶 丁未 拜南原判官 遭全夫人憂 泣謂弟府使 公宇曰吾兄弟 義不與德脩 共戴一天 所以濡忍至今者 爲老母在耳 今復何俟哉
계묘(1603)년에 선전관에 임명되고, 갑진(1604)년에 검모포의 만호에 제수되었으며, 정미(1607)년에는 남원판관에 임명되어 전부인(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울면서 동생인 부사공 우(宇)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마땅히 한덕수와 같이 같은 하늘아래 살지 못하니 눈물을 머금은 채 참고 지금까지 기다린 것은 노모께서 살아 계셨기 때문인데 지금 복수를 하는 것이 어떠냐.” 고 하였다.
乃以庚戌八月 徒步四日入京 射德脩於明禮洞口 應弦墜馬 猶爲不死 盖德脩 嘗有戒心 衷甲故也
이에 경술(1610)년 8월에 4일 동안 걸어서 서울로 가서 명례동 입구에서 한덕수를 쏘니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않았다. 이는 한덕수가 일찍부터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서 방탄복(衷甲)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公痛之 又四日 還鄕 旣而 德脩 狀斥公兄弟 乃就囚 自卞當原 會秋部爲德脩 延獄經歲 未幾 仙源金公尙容 拜小秋官 聞而憤之 獨決以 啓始得釋 權石洲韠 佩酒來慰
공은 분하게 여겼으나 또 4일간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에 한덕수는 공의 형제를 고소하여 붙잡혀가게 되고 스스로 그 원인을 변론하였으나, 마침 이때에 추부(刑曹)에 한덕수가 속해 있어 감옥에 갇혀 세월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원 김상용[1]이 소추관(刑曹중의 직위)에 임명되어 원통함을 듣고 단독으로 결정하고 지시하여 풀어주니, 석주 권필[2]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위로하였다.
[1]김상용(金尙容, 1561~1637).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서울출신.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黜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권필(權韠, 1569~1612).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저서로는 《석주집 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현전한다.
柳統制珩 與南郭朴公東說 語公事 柳公 咎公不自首 朴公 責之曰是 非汝所知 父讎 未復而徑就死地 不幾於自經溝瀆者乎 自是 德脩防患甚密 公 竟不得遂志 沒身以爲恨
통제사 유형이 남곽 박동열과 같이 공의 사건을 논할 때, 유공이 공(완)이 자수하지 않은데 대해 책망하자, 박공이 유공을 나무라며 말하기를 “이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사지(死地)에 가게 되면 언젠가 개천에서 자살(自經)할 사람이요.” 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한덕수는 근심거리를 막기 위해 숨어서 지내어 공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죽을 때까지 한이 되었다.
[1]유형(柳珩, 1566~16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진동(辰同)의 손자이며, 경원부사 용(溶)의 아들이다.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하였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중에 죽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2]박동열(朴東說, 1564~16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봉촌(鳳村). 사간 소(紹)의 손자로,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며, 동량(東亮)의 형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하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儒籍)을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하여 나주목사로 나아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그는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저서에 《봉촌집》이 있다.
乙卯 冠觀武試 旋除高山里僉使 明年 乃陞折衝 戊午 拜內禁衛將 旋除滿浦僉使 會北胡 奴兒哈赤部 衆强盛 邊鄙大聳 凡西北 守令節鎭 極選武將 公與李演慶 李廓 金應河 李希建 一時並授 人謂之關西五虎將
을묘(1615)년 관무시(觀武試)에 1등을 하고 고산리의 첨사로 임명되어 갔고, 다음해(1616년)에 절충으로 승진하였으며, 무오(1618)년 내금위장에 임명되었다가 만포첨사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후금, 청)인 노아합적(누르하치) 부족의 무리가 강성해져서 변경지방이 크게 시끄러워져, 여러 서북의 수령과 절도사(節鎭)들을 적극적으로 무장들 중에서 뽑을 때, 공은 이연경, 이곽, 김응하, 이희건과 같이 한꺼번에 뽑히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서의 5호장(다섯명의 용맹스런 장군)이라 하였다.
天啓壬戌 除平安左防禦使 癸亥 拜昌盛防禦使時 仁祖反正 有禦虜計 都元帥張晩 軍平壤 副元帥李适 軍寧邊
천계 임술(1622)년에 평안좌방어사에 제수되고, 계해(1623)년에는 창성방어사로 임명되어 있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북쪽 오랑캐를 막는다는 구실로 도원수 장만 군은 평양으로, 부원수 이괄군은 영변으로 가게 했다.
甲子正月 适詭稱南變 令公 發所部兵前進 檄至 薄暮門閉 公却不納 翌日 乃整軍徐行 至寧邊界 聞适 謀反 乃從 間道趍元帥府 次肅川
갑자(1624)년 정월에 이괄이 남쪽에서 변란이 일어났다고 속이고, 공에게 명령하여 병력을 일으켜 전진하라는 격문이 도달하니, 늦은 저녁(薄暮)에 문을 잠그고 공은 물러나 나가지 않았다. 다음날 군대를 정비하여 천천히 가서 영변의 경계에 이르자, 이괄이 반역을 꾀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사잇길로 원수부(元帥府)[1]로 가서 다음에 숙천에 이르렀다.
[1]원수부(元帥府); 대한 제국 때에, 국방‧용병‧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군부(軍部)와 경외(京外)의 여러 군대를 지휘‧감독하였는데 광무 3년(1899)에 두었다가 융희 4년(1910)에 없앴다.
先是 龜城府使韓明璉 以三千餘騎 往會适 使金孝信 康綽 領其軍千餘人從之 孝信 知明璉 與适同反 回入肅川 亦議趍帥府 猝被綽 斫死 不殊 公 慮其創甚 無以號令軍中 遣府使 公諭孝信 屬兵于 別將池繼准 軍情 始安 仍俱詣平壤 張公 握手涕泣曰我若枉殺公 豈能有今日耶 盖滿浦時 張公 用讒者言 幾殺公也
이보다 먼저 구성부사 한명연이 삼천여명의 기마병을 데리고 이괄을 만나기 위해 가면서, 김효신과 강작에게도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오라고 했다. 김효신은 한명연이 이괄과 같이 모반했다는 것을 알고 숙천에서 돌아와서 원수부(元帥府)에 갈 것을 의논했으나 갑자기 강작에게 포위되어 죽을 뻔하였으나 죽음을 모면했다. 공은 <강작이> 혼쭐이 난 것을 아주 염려하여 군중에 호령하지 않고 부사를 파견하여 김효신을 달래어 병력을 주어 별장을 맡도록 하여 군정은 안정되었다. 계속하여 평양으로 진격하여 장공(장만)을 만나니, <장공이> 악수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만일 사악하여 공을 죽였더라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이는 <공이> 만포첨사로 있을 때 장공이 고자질하는 말을 듣고 공을 죽일 뻔했기 때문이다.
仍問計將安出 公曰賊鋒 方銳 必直向王京 吾輩惟當星夜進兵 以分豕突之勢 張公 然之 命公爲左先鋒將 到臨陣 聞賊 已連破薪橋 猪灘兵 入據京都而 上 南狩公山 乃與諸將 合兵據鞍峴 公 陣其西
이어서 계책을 내어보라고 하면서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적들의 칼끝은 아주 날카로우니(적들의 사기가 충천하니) 반드시 서울(한성)로 바로 갈 것입니다. 저희들은 오히려 야간에 병사를 진격시켜 저돌적인 적의 세력을 나누어 놓아야 합니다.” 장공은 그렇게 하라고 공에게 명하여 좌 선봉장을 맡겼다. 임진(臨陣)에 이르러 들어보니 적들은 이미 신교와 저탄을 연파하고 서울을 점거했다고 하였다. 임금은 남쪽의 사냥터인 공산(공주)으로 피신하여 이에 여러 정수들은 군대를 모아 안현(鞍峴, 또는 鞍嶺;말안장 모양의 산등성이)을 근거지로 하여 공은 그 진의 서쪽을 맡았다.
黎明 賊 開門來犯 一路 自冷井洞而上 公兵 適當要衝 督戰甚力 乘勢蹙之 賊 始披靡 諸將 皆殊死戰 賊 遂大北 潛從水口門遁去 公 與鄭忠信 柳孝傑等 達夜追及於利川墨坊里則适 己爲帳下所斬矣 上 還都 命錄諸將功 封公鶴城君
새벽에 적이 문을 열고 공격해오니 한 부대는 냉정동으로 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공의 병사는 적당한 요충지에서 힘을 다하여 싸움을 독려하니, 승세로 궁지에 빠진 적들은 흩어지고 쓰러졌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우니 적이 마침내 크게 패배하여 수구문을 따라서 숨어버렸다. 공은 정충신, 유효걸 등과 같이 밤을 새워서 추격하여 이천의 흑방리에 이르자 이괄은 이미 부하(帳下)들 손에 목이 베어 있었다[1]. 임금은 서울로 돌아와 여러 장수들의 공을 기록하기를 명하니(振武功臣) 공은 학성군에 봉해졌다.
[1]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未幾 除龜城府使 歷副摠管 拜全羅右水使 丁卯 西寇急 監司尹暄 請公爲別將 時 反賊弘立 引虜兵渡江 公 領兵千餘人 往保安州 未至安州 暄 復使還兵 俄而 安州告陷 朝廷 將置公重律 比得實狀 命以白衣從軍
얼마 후에 구성부사에 임명되고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정묘(1627)년 서쪽지방에 도적들 때문에 위급하여 감사 윤훤이 공에게 별장을 맡아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반역자 강홍립이 오랑캐(후금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공이 병사 천여 명을 데리고 안주를 지키려 가다가 안주에 이르기 전에 윤훤의 명령을 받고 병사를 되돌려 왔다. 느닷없이 안주가 함락되었다고 알려오니 조정에서는 장차 공을 무거운 벌로 다스리려 했으나 실상을 알아보고 공에게 명하여 백의종군하게 했다.
至平壤 虜騎充斥轉鬪 前進所選 壯士九人 皆死 獨公以五月十五日 達于龍骨城 城中絶粮半月 士卒稍稍逃遁 及公至將士素聞 公威名倚以爲重體府 及毛都督俱給餽餉軍勢稍振
평양에 이르니 후금의 병사가 잔뜩 막고 있어 싸워서 전진하였으나 선발된 장사 9명이 모두 죽어 공이 혼자서 5월 15일 용골성에 도착하였다.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진지 보름이 되었고 병사와 졸개들은 도망가서 그 수가 아주 적었다. 그러나 공이 도착하니 장수와 병사들이 공의 위엄있는 명성을 듣고 의지하여 중요한 일을 맡겼고, 체부(체찰사)와 모도독(도독의 성이 모씨?)이 군량을 준비하여 공급하니 군사의 세력이 점점 떨치게 되었다.
未數日 虜兵三百餘騎 搶掠龍川北界 公率砲射手百餘追之 斬首七級餘 皆中箭北走 翌日 又數十餘賊 入義州之鶴領 橫行伐夯 公以三十騎往戰 斬五級 而還防禦使以 公力戰之狀馳 啓上聞 又移書椵島報{酋+或}於毛都督
수일이 지나지 않아 후금의 기병 300여기가 룡천의 북쪽 변경에서 노략질을 하여 공이 포수와 사수 백여명을 데리고 쫓아가서 7명의 머리를 베고 나머지는 모두 화살을 맞고 북쪽으로 도망갔다. 그 다음날 또 수십여 명의 적들이 의주의 학령으로 들어와 횡행하고 나무를 베어가, 공이 30명의 기병을 데리고 가서 싸워 5명을 베고 돌아오니 방어사가 공의 전과를 장계로서 임금께 보고하였다. 또 글을 써서 가도의 모도독에게도 보고하였다.
會軍中食盡飢 疫死者相屬而 新經大兵 各營蕩竭 公不得已 六月十三日 與第義州 判官麟山 僉使李德輔將校 軍兵五千餘人 入接于鐵山大鶴島以 移陣之由具 啓朝廷 又告毛都督及 退賊公還 朝叙復原封
때마침 진중에 식량이 떨어져 기아와 역병으로 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새로 많은 군사를 모았으나 각 영에서는 재물이 다 떨어졌다. 공은 부득이 6월13일 동생인 의주판관(우)과 인산첨사 이덕보와 장교, 군병 50여명과 같이 철산의 대학도로 들어가서 진을 옮긴 이유를 조정에 보고하고 또 모도독에게도 보고하였다. 또 적들을 퇴각하여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원래의 봉작을 다시 받았다.
崇禎辛未椵島 將劉興治 殺都督陳繼 盛將投北虜廷議 議進討 除公新溪縣令兼 瑞興山城 防禦使 未幾 罷
숭정 신미(1631)년에 가도의 장수 유흥치가 도독(모도독?)을 죽이고 진을 빼앗아 계속 왕성해져서 북쪽 오랑캐(후금)에 투항하니 조정회의에서 토벌하라하여 공을 신계현령 겸 서흥산성 방어사에 임명하였으나 좀 있다가 파직하였다.
甲戌拜訓鍊都正 旋拜黃海兵使 明年請暇還鄕 上 賜宴而 餞之乙亥二月二日 感疾卒 于寢壽五十有九訃聞 命致祭 贈官以 是年四月某甲禮葬 于海南縣北船山抱午之原
갑술(1634)년 훈련도정에 임명되고 황해병사로 옮겨, 그 다음해(1535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잔치를 베풀어 주며 송별하였다. 을해(1535)년 2월 2일 병으로 돌아가시니 59세였다. <조정에서> 부고를 듣고 제문과 제관을 보내어 이해 4월(四月某甲)에 해남현의 북쪽 선산포의 우좌(7시방향;남남서)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公旣自立於忠孝大節 又能敦行睦婣 軫其飢寒 解衣推食 如不及 然 好善疾惡 出於 天性 見人善 不啻若己有之 不善 若將浼焉 居官行事 一遵繩墨 不以成敗利害 有所前郤 雖時遭阨窮 未嘗自悔也
공은 이미 자립하여 충성과 효도를 중하게 여겼고, 또 행실이 돈독하고 친척들간에 화목하였다.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마음 아파 하였으며 헤어진 옷과 보통의 식사를 해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이 천성으로 나타나, 착한 사람을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고> 착하지 못하면 이를 아주 싫어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할 때는 규범(繩墨; 원 뜻은 먹줄)을 따르고(一遵), 성패와 이해를 따지지 않으니 우러러 볼 수 있었고, 비록 시절이 운수가 나빠 고생하였으나 스스로 후회하지 않았다.
破賊之後 瀛海君金公 起宗 往訪 見所摛賊數十人 留置軍中 曰何爲不殺 公曰雖不幸陷賊 本皆良民也 何以殺爲 其勇而能仁 類此 當勘勳日 公名 宜在高等而用事者遂屈之 然 終不出矜伐語 識者以爲 有大樹風焉
적들을 격파한 후에 영해군 김기종이 와서 방문하여, 적들 수십 명을 잡아서 군중에 가둬두었다는 소문에 대해서 직접 보고 말하기를 ‘어찌 죽이지 않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비록 불행하게도 적으로 사로 잡혔으나 본래는 모두 양민들인데 어찌 죽이겠습니까.’ 하니 그 용맹과 인자함이 이와 같았다. 공적을 조사하는 날에 공의 이름이 당연히 제일 위에 있어야 하였으나 그 일을 한 사람들이 마침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공적을 말하며 아쉬워하지 않았으니 이를 아는 사람들은 큰 나무에는 항상 바람이 있다고 하였다.
公娶郎州崔氏 父曰復謙 生子汝水北兵使 襲封海城君軍 繼靑松沈氏 父嘉善彦謙子汝河 忠義衛 側室 生子汝海 女適郡守柳屹然 曾孫男女幾數十餘人 多以武顯 嫡孫世器 又爲南兵使學林君 三世裂土受封 古所穻有者也
공은 낭주최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복겸의 따님이다. 아들 여수는 북병사가 되었고 해성군에 세습하여 봉해졌다. 둘째부인은 청송심씨로서 가선대부 언겸의 따님이다. 아들 여하는 충의위이다. 후실은 아들 여해와 딸을 낳아 딸은 군수 유흘연에게 시집갔다. 증손의 남녀는 수십여 명이며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적손 세기는 또 남병사 학림군이 되니 3세에 걸쳐서 봉군된 것은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記余少 侍先君子中峯公 有修刺者 先君子爲之款語從容 盖府使公 方以碧潼守 來辭 余觀容貌騈脅多力 質直有智 非常人也 旣而 先君子語座客曰此 鶴城之弟也 其稱引 甚重至 今如目前事 今其後孫 以公顯刻 來謁余 不獲辭 銘曰
이 글을 쓰는 내가 젊을 때 선군자 중봉공(中峯公)[1]을 모시고 있었는데, 배우고 닦는 가르침이 있어 선군자의 정성스런 말과 그 자태를 따랐다. 일찍이 부사공(우)이 벽동의 군수로서 와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보니 용모는 몸이 곧고 힘이 세었으며 직설적인 질문에 박식하여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선군자께서 좌객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분이 학성군(완)의 동생(우)이다.’ 라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것이 아주 소중했으며 지금 눈앞에 일을 보는 것 같다. 지금 그 후손이 공의 공덕을 나타내어 새기기 위해, 나에게 와서 부탁하니 사양할 수가 없다.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지은이 박세채의 부친인 박의(朴漪)
惟帝賦物 衆材林林 鬱彼豫章 挺然百尋 公禀雄姿 武勇自專 爰有大讎 誓不共天 懷劍湖營 射矢都城 事竟不成 痛若無生 中興草刱 西帥反國 公奮大義 回兵禦賊 鞍嶺之役 首嘬其鋒 逆憝旣平 茅土載封 觀公始終 忠與孝聯 縱饒他美 莫之與先 矧爾子孫 世爲虎臣 肆勒大石 用垂千春
하늘이 만물을 주어 여러 재목(材木)이 번성하였네. 울창한 저 예장[1]의 나무는 일백 길이나 빼어났네. 공이 영웅의 자질을 타고나서 무예와 용맹에 전력(專力) 하였네. 큰 원수는 같은 하늘아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네. 호남의 병영에서는 칼을 품었고 도성에서는 활을 쏘았네. 뜻을 이루지 못해 원통하여 살지 못할 것 같이 하였다네. 중국(청)이 흥할 때에 서쪽 장수(이괄)가 반역하자 공이 대의를 떨쳐 군사를 돌이켜 적을 막았네. 안령(鞍嶺)의 싸움에 선봉이 되어 반역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군(君)으로 봉하여졌네. 공의 시작과 끝은 충성과 효도로 연결되었네. 다른 아름다운 행실이 있다고 해도 먼저하고 할 것이 없다네. 하물며 자손들이 대대로 용맹스런 신하가 되었네. 이에 큰 돌에 조각하여 오랜 세월에 드리우네.
[1]예장(豫章); 중국 한(漢)나라 때에, 현재의 장시 성(江西省)에 두었던 군(郡). 중심은 난창 시(南昌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