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에서 2박한후 인도네시아로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국경은 반드시 항공이나 열차를 이용해서 넘는다는 고정관념은 깨졌다. 하기야 이곳은 유럽이 아니라 섬으로 이루어진 남지나해의 인도네시아인데. 인천 공항에서 만나 일행이된 사람들의 일부는 인근의 휴양지 링거나 빈탄으로 가고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섬중에 크기가 네번째인 바탐섬으로 가는 것이다. 도시국가 싱가폴에서의 이틀보다 훨씬 원시적인 인도네시아 관광이 흥미와 관심이 컸다. 싱가폴 항구에서 바탐까지의 40여분동안 선상에서 바라다보이는 이름모를 유,무인도들은 하나같이 달력장의 그림 같다, 이런 남국의 아름다운 풍광에 예술가들은 매료되어 평생 창작활동의 본거지로 삼았을 것이란 추측도 했다. 반드시 인도네시아는 아니더라도 이바다를 빠져 나가면 남태평양의 무수한 섬가운데도 알만한 예술가들이 정착한 예는 많다는걸 상기하게 된다. 바탐에 도착하자 현지의 가이드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만 상대하니 이사람은 곰돌이라는 애칭도 사용했는데 돌아와서도 그의 순수한 눈빛과 유머 넘치던 일거수 일투족이 잊혀지지 않았다. 친절한 곰돌이에게 내가방에 소중한 무엇이 있다면 다 꺼내주지 못한 것이 원으로 남을 지경이다. 바탐에 주재하는 우리나라 상사 직원의 부인들로부터 배운 어눌하지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 솜씨가 기특하기도 하고 조국 인도네시아를 알리려는 정직한 태도도 가상하다. 본인이 고백했듯이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다면서 복잡하게 구성되는 우리말을 그만큼이라도 하려면 그간의 노력 정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곰돌이가 인도네시아의 본모습을 전할때마다 나는 기이하고 충격적이었다. 말로만 듣던 일부다처제가 이슬람 국가인 이곳도 법으로 허용된 점은 과연 남자들의 천국이라는 생각도 든다. 법으로 정한 네명의 부인이 낳은 자녀수가 하도 많아서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수두룩하다니..... 석유와 가스가 충분히 나고 컵피도 세계 두번째 생산국이라고 한다. 자원이 풍부하지만 못사는 이유를 곰돌이는 몇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했다. 국민성이 게으르고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풍족한 자원조차도 빈곤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당장 야자 열매가 눈앞에 있어서 배를 채울 수 있고 전쟁의 위험도 없는데다 날씨는 한결같이 뜨거웠다. 인도네시아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동티모르에 우리나라는 병력을 파견했다. 독립된 동티모르 선수들이 부산의 아시안게임에 입장하는 모습을 나는 호텔의 TV를 통해 보았다. 젊은 종업원들은 월드컵은 물론 아시안게임을 알고 있었다. 나의 짧은 몇마디의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인도네시아의 바탐섬에서의 이튿날, 오전내내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호텔 밖으로 나와서 일행들끼리 바닷가를 산책하고 더러는 잘가꾼 열대 식물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특히 야자나무가 흔하고 멋있지만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실내에서나 살 수 있는 화분용 식물들이 이곳은 노지에서 지천이다. 사람의 숨결이 아직은 닿지않은 바탐의 밀림을 군데군데 제거하는 작업 인부들도 보였다. 머지않아 그곳에도 집이 들어서고 길이 닦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곰돌이는 우리가 달리는 도로나 중요한 건물들을 한국기업이 건설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국에서 느끼는 상당한 자부심이다. 일행들은 우리나라의 60년대와 견줄만 하다고 나름대로 느낀 현지인의 삶을 평가했다. 흡사한 부분도 없지는 않으나 드넓은 원주민 마을을 둘러보고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60년대의 시골이 저렇게 가난했을까를 돌이켜 보기도 했다. 내일이면 우리는 말레이시아로 떠난다. 곰돌이에게 선물할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남편이 갈아 입으려고 베낭 깊숙히 넣어둔 티셔츠 한장을 꺼냈다. 까만 곰돌이 얼굴에 빨간 셔츠는 색상의 대비에도 만점일것 같다. 경치 수려한 바탐을 떠나는 것도,순진 무구한 곰돌이와의 작별도 아쉽기만 하다.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뱃머리에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바탐섬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곰돌이는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