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스피드에 관한 한 한국에서 박찬희 이상 가는 챔피언은 없었다고 단연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957년 3월 23일 부산 태생인 박찬희는 아마에서 쌓은
탄탄한 기본기와 눈부신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
트로이카(김상현, 김성준, 박찬희)의 시대를 열었던 복서였습니다.
박찬희는 데뷔전을 국제전으로 치를 만큼, 데뷔때부터 미래의 챔피언으로
점찍혀져서 길러졌습니다. 1977년 "무또 슈지"를 1회 KO로 제압하고 성공적으로
데뷔한 박찬희는 전 한국챔피언 "정상일"을 10회 판정으로 꺾은 경기를 포함하여 그
해에만 4전 4승 2KO승을 거두는 쾌조를 보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원채 기량이
출중하고 스피드가 있어서 세계 챔프로써의 싹수는 충분하지만 주먹이 가볍고 몸을
사리는 복싱을 구사하여 아직 아마의 티를 벗지 못한것이 아닌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만, 1978년 일본의 파이터 "푸마 고야"를 2회 KO로 제압하면서 인파이터를
상대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77년과 78년까지 9전 9승 5KO의 전적을 쌓은 박찬희는 1979년 바로 세계 정상을
노크합니다. 세계랭커 "시오니 카루포"와의 경기에서 접전끝에 무승부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당시 WBC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미구엘 칸토"가 노쇄기미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여 정상을 노크하게 됩니다.
칸토에 관한 글은 전에 올려둔 것이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참조하시구요.
짧게 말씀드리자면, 칸토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복서 중 최경량급 선수입니다.
인기없는 플라이급 선수로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량을 인정해 줄 만 하지요. 대단한 스피드와 완벽한 테크닉으로 "링의
대학교수"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1979년 3월 18일, 박찬희의 고향인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벌어진 칸토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스피드와 테크닉의 향연이었습니다.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동여매고
링에 올라온 박찬희의 스피드는 칸토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하였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세계 타이틀전은 15회전이었는데, 두 선수는 3분 15회전 45분간의
경기동안, 단 두번의 클린치만을 하는 현란한 경기를 보여줍니다. 박찬희는
칸토에게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당시로써는 최단기록인 11전만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지금은 문성길의 7전 이지만요.
정상의 자리에 오른 박찬희였지만, 타이틀 방어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일본의
"이가라시 쓰토무"를 상대로 하여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2차 방어전에서 다시 만난
칸토와의 대결에서는 무승부를 기록하며 간신히 방어에 성공합니다. 두 경기에서
1승 1무를 기록한 박찬희에게 복싱팬들은 펀치력 부재를 안타까와하며 롱런에 대한
의문부호를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맞이한 것이 전 세계 챔피언인 강타자 "구티
에스파다스"와의 경기입니다.
에스파다스는... 제 기억으로는 한국의 "김환진"선수하고 비슷한 신장을 가진
선수로, 단신에도 불구하고 펀치력 하나만큼은 가공할 만 하였습니다. 박찬희의
방어전중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예상된 이 경기는 1979년 12월 16일. 역시
박찬희의 고향인 부산에서 벌어졌는데요.
이 경기에서 박찬희는 시작하자마자 에스파다스의 주먹에 엉덩방아를 찧습니다.
경기장에 모인 팬들은 모두 안타까운 비명을 지르며, 이젠 끝이 아닌가...라는
비관적인 분위기에 쌓이지만, 벌떡 일어난 박찬희는 예의 각도를 가리지 않는
현란한 연타를 퍼부으며 다운으로 응수하고 2회 KO승으로 마무리를 지으면서 그간의
펀치력 부재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킵니다. 이 경기로 박찬희는 한국 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복서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980년에 벌어진 필리핀 선수 "아르넬 아로살"과의 경기에서도 15회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한 차례 다운을 뺏음으로써 펀치력도 점점 향상되고 있다는 중평을
들었습니다. 아로살은 김태식 선수의 1차 방어전 상대로 국내 팬들에게 잘 알려진
선수죠. 김태식 선수의 턱을 부순 선수로 유명한데, 자기는 주먹으로 부쉈다고 하고
김태식은 버팅으로 부서졌다고 하니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또
김성준 선수와도 주먹을 섞은 적이 있었는데, 김성준 선수는 아로살과의 경기에서
생애 유일한 다운을 한 차례 당하죠. 이것 역시 슬립성이 농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전 보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아는건 하나도 없군....
80년 4월 12일 "알베르토 모랄레스"와의 지명 방아전에서 역시 판정승을 거두고
고비를 넘긴 박찬희는 롱런이 기대되었으나, 일본에서 날아온 늙은 여우 "오꾸마
쇼지"에게 충격적인 9회 KO패를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합니다. 박찬희는 초반
우세를 잡았으나, 4회전부터 박찬희의 스피드를 잡기 위하여 시도한 오꾸마의
복부공격을 대책없이 허용하면서, 한국 내에서 벌어진 세계 타이틀전 에서 최초로
일본선수에게 패하는 치욕을 맛보게 됩니다. 오꾸마 쇼지에 관한 글도 전에 올려둔
것이 있습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박찬희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일본으로 두 차례 원정을 떠나지만 모두 오꾸마에게
판정패를 당하면서 좌절됩니다. 결국 1982년 무명의 "위크 텐검"에게 4회 KO패를
당하면서 한계를 느끼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통산전적 23전 17승 2무 4패 6KO
오는 일요일날 "오스카 델라 호야"와 "오바 카"간의 웰터급 세계 타이틀
전이 벌어집니다. 지난 2월 13일, 쿼테이를 상대로 웰터급의 매운 맛을
본 호야가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가 대단히 기대가 되는데요.
호야는 Jr 라이트급 선수로 프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똑같은 키를 가진
사람이라도, 가장 좋은 컨디션을 보이는 체중은 체질에 따라 각각 다릅니
다. 180의 키에 70Kg이 최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170의 키에 80kg이 최
적인 사람도 있지요. 단순히 신장이 충분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체중을 올
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호야가 웰터급까지 올라와서도 여타 선수에
비하여 신장이 그렇게 딸리는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으로는 곧 한계점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호야는 30전 전승의 24KO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보이고 있지만, Jr 웰터
급에서부터의 전적은 9전 9승 5KO승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것도 나쁜 성
적은 아니지요. 하지만, 5KO승에는 노쇄기미를 보이던 "훌리오 세자르 차
베스"에게 거둔 두 차례가 포함되어 있고, 적어도 동급 톱 클라스 선수라
는 "미구엘 곤잘레스""리키 쿼테이"등에게는 고전끝에 판정승을 거두는데
그쳤습니다. 게다가 "퍼넬 휘테커"나 "헥토르 카마쵸"같은 선수와의 대결
에서는 이전 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더군요.
물론, 이번 일요일 경기에서는 호야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문제
는 다음에 벌어질 웰터급의 터줏대감 "펠릭스 트리니다드"와의 경기입니
다. 트리니다드는 93년 세계 타이틀을 차지한 이래 단 한번도 웰터급을
떠나지 않은 말 그대로 터줏대감입니다. 외신에 의하면 최근 약간 체중조
절에 문제를 보이고는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모두 열 두차례의 타이틀
방어전을 치러낸 동급 최강자 입니다. 로이존스 Jr는 "현재 챔피언중 최
강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트리니다드가 단연 최고"라고 말 하더군
요. 특히 트리니다드의 레프트 훅은 역대 웰터급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것
으로 평가될 만큼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기량이나 테크닉
면에서도 호야보다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호야가 오바 카를 물리칠 경우 오는 9월 경에 트리니다드와 격돌하게 됩
니다. 쿼테이에게 매운 맛을 단단히 본 호야가 Jr 미들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트리니다드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트리니다드 역시 호
야전을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을겁니다. 웰터급에서 열 두차례나 방
어를 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가를 높혀 줄 만한 강호들과의 경
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거든요. 기껏해야 지난 2월 20일
가졌던 "퍼넬 휘테커"와의 경기정도이지요.
전에 어느 신문기사에서 호야와 트리니다드를 가리켜 "마주보고 달리는
두대의 폭주 기관차"라고 하더군요. 멋진 표현입니다. 두 선수 모두 투쟁
심이 강한 선수이니 제법 볼만한 경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이긴 선수는 절대강자가 없는 Jr 미들급,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미들급
까지도 석권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미국과 푸에르토리코를 대표하는 두 대의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
돌할 9월이 기다려집니다.
제 목:[복싱] 각 체급별 한계체중 관련자료:없음 [3311]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23 01:32 조회:329
제 목:[복싱] '호야 VS 카' 뒷 이야기 관련자료:없음 [3317]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5-23 22:47 조회:902
명심판으로 알려진 "리처드 스틸"은 7회에 카에게 - 저는 한 차례인줄 알았는데 -
두 차례의 감점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외신 기사에는 이것을 이해하기 힘든
판정이라고 하며 이 판정때문에 쫏기고 있던 호야가 여유를 찾을 수 있었으며, 카는
더욱 급해져서 무리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KO패 당한것이 아닌가...라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호야는 카와의 경기전, 연습중에 왼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경기를
강행하였다고 합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1회에 다운을 뺏은 후 더욱 프레스를
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손 부상 때문이라고 했다는데요, 이 부상은 9월에 있을
트리니다드 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만큼 심각하다고 합니다.
사실, "윌프레도 바스케스"는 고메스에 비견할 만한 명복서는 아닙니다.
물론 세 체급 석권이라는 아무나 해 낼 수 없는 위업을 달성한 복서이기
는 하지만, 그나지 빠르지 않은 발과 스피드, 탁월할 것 없는 테크닉 등
, 굉장한 기량을 가진 복서는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
감각적인 받아치기의 위력은 정말 대단해서 그가 이룬 세체급 석권은 이
하나만으로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위력적이었습니다.
바스케스는 고메스를 배출한 복싱강국 푸에르토리코 출신입니다. 1981년
데뷔전에서 4회 판정패 하면서 순탄치 않은 출발을 보인 바스케스는 데
뷔 첫해 에만 8 차례 경기를 소화하는 의욕적인 활동을 보입니다만, 8전
6승 1무 1패 4KO로 가능성을 선보인 정도로만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그
러나, 82년부터 85년까지 4년간 15연승에 13KO승을 보이며 세계 랭커로
뛰어올랐습니다. 그가 포함된 밴텀급은 남미의 선수층이 워낙 두껍기 때
문에, 이만한 성적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연승행진에 자신감을 보인
바스케스는 1986년 2월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미구엘 로라" WBA 밴텀
급 타이틀에 도전하지만, 12회 판정패를 당하고 타이틀 획득에 실패합니
다. 86년 당시 미구엘 로라는 자국인 멕시코에서 경기를 가질 경우 보통
5만 이상의 관중을 모으던 인기 절정의 복서였고, 바스케스의 기량으로
는 넘기 어려운 선수였습니다. 또 그해 5월에는 "안토니오 아베랄"에게
8회 KO패 당하면서 복서로써 가장 힘겨운 해를 보내게 됩니다.
아베랄에게 패한 후, 푸에르토리코에서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다시 4연속
KO승을 거둔 바스케스는 87년 10월, 그가 가진 전 재산인 주먹 하나만
믿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새로운 WBA 챔피언 "박찬영"의 1차 방어전 상
대로써 한국으로 날아듭니다. 당시 박찬영은, 훙수환이래 13년만에 한국
으로 밴텀급 타이틀을 가지고 온 복서로 인기가 대단했고 특히 일본원정
경기에서 타이틀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는 복서였습니다. 박찬
영은 타이틀을 획득했던 경기에서 처럼 경기가 시작하자 마자 탐색전 없
이 바스케스를 일방적으로 몰아부쳤습니다. 스피드에 관한 한 바스케스
는 박찬영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고 바스케스는 수비에만 급급 하였으나,
2회전 중반 바스케스를 일방적으로 공략하던 박찬영의 안면에 바스케스
의 받아치기 일 발이 터지자 박찬영은 뒤로 쓰러집니다. 순식간의 일이
었습니다. 박찬영은 맷집에 있어서 그렇게 약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까지 단 한차례의 다운도 기록한 적이 없었으며, 태국의 영웅 "카오
사이 갤럭시"와의 경기에서도 비록 패했지만, 그의 주먹을 끝까지 견뎌
낸 선수였습니다만, 이 바스케스의 한 방은 경기를 결판지을 만 한 위력
으로 보입니다. 결국 박찬영은 2회전을 간신히 넘기고, 코너에서 2분 넘
게 쉬다가 나오는 홈 어드벤티지를 누리기는 하지만, 결국 10회에 다시
바스케스의 주먹을 허용하고 KO패 당하고 맙니다.
꿈에 그리던 세계 챔피언이 된 바스케스였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하
였습니다. 88년 1월 일본으로 원정하여 전 챔피언 "무구루마 다쿠야"와
대결하여 12회 무승부로 간신히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지만, 88년 5월 태
국의 복싱영웅 '카오코 갤럭시'에게 12회 판정패 함으로써 단명에 그칩
니다. 밴텀급과는 달리 훗날 J 페더급과 페더급에서는 롱 런 한 것을 보
면, 이 시절에 체중 조절에 문제를 겪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
하간 갤럭시에게 패한 바스케스는 8월에 재기전을 가지지만 훗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라울 페레스"에게 10회 판정패 함으로써 충격
을 안겨줍니다. 이 패배의 충격으로 바스케스는 약 13개월간의 긴 공백
을 가집니다.
1989년 10월, 심기일전한 바스케스는 재기전을 가져서 판정승을 거두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비 온 후에 땅이 더 다져지는 법! 쓰라릴 패배를 딛
고 일어선 바스케스는 선수로써 만개합니다. "페트릭 카미"를 1회 KO로
제압하면서 건제를 과시한 바스케스는, 재기전에서 자신에게 쓰라린 패
배를 안겨줬고, 당시에는 WBA jr 페더급 챔피언이었던 "라울 페레즈"를
단 3회에 일축하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Jr 페더급 챔피언이
된 바스케스는 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절정의 기량을 보입니다. 그는
타이틀을 8차 까지 방어해 내는데, 그 중에는 한국의 "최재원"선수를 2
회 KO로 물리친 경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복싱에 관심을 끊고
살기 전에 꽤 유망했던 선수였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싶었는데 바스
케스에게 도전했다가 패하고 은퇴한 모양이군요. 원래 허리 디스크로 선
수생활이 어려운 선수였는데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내고, 전 페더급 세
계 챔피언이었던 박영균 선수가 "엘로이 로하스"에게 패하기 전까지 유
일하게 안고있던 1패가 바로 최재원 선수에게 당한 것입니다. 펀치력은
강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대단히 테크닉이 좋은 선수였는데 그도 바스
케스의 물오른 주먹을 견디기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재원을 비롯하여 "루이 멘도자""올란도 카니잘레스"등 동급 강자들을
연파하고 롱런하던 바스케스는 95년 5월 9차 방어전에서 "안토니오 셀마
노"에게 판정패 하면서 다시 무관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3개월만에 재
기에 성공하고 96년 박영균을 꺾고 정상에 올랐던 WBA 페더급 챔피언 "
엘로이 로하스"를 11회 KO로 꺾고 꿈의 세체급 석권에 성공합니다. 사실
제 머리속에 남아있는 바스케스의 기량으로 로하스를 꺾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로하스는 테크닉 스피드 펀치력의 삼박자를 겸비
한 선수였는데, 바스케스의 힘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바스케
스는 페더급에서도 세 차례 방어에 성공했지만, 1998년 4월 18일 신세대
강타자 "나심 하미드"에게 7회 KO패 당하면서 정상에서 내려옵니다. 하
미드에게 당한 KO패는 생애 통산 두 번째로 당한 KO패로, 힘이 좋은 바
스케스 역시 세월 앞에서는 어쩔수 없음을 보여준 경기라 할 수 있습니
다. 통산전적 60전 50승 2무 8패 37KO
제 목:[복싱] 태국의 별 "카오사이 갤럭시" 관련자료:없음 [3345]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6-09 14:03 조회:609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 다부진 체격, 참
새처럼 잽싸게 도망다니는 상대를 소걸음으로 따라잡아 반격의 의지조
차 상실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주먹을 풍차 돌아가듯 쏟아 부어 쓰러
뜨리는 Jr 밴텀급의 최강자. 그가 바로 "카오사이 갤럭시"입니다. 얼마
전 갤럭시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요.
동양권에서는 일본의 "파이팅 하라다"에 이어서 두번째로 올라가는 셈
이 되네요. 짧은 Jr 밴텀급 역사에 인기없는 경량급 선수로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가 그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갤럭시는 천부적인 감각과 킥복싱으로 다져진 기본기를 바탕으로 1980
년 말에 프로로 전향합니다.... 근데.. 접때 복싱하시는 분께 물어봤는
데요. 킥복싱 하고 복싱하고는 링에서 글러브 끼고 한다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스포츠래요. 킥복싱을 했다는 것이 약간 도움은 되
겠지만, 복싱실력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죠. 여
하간... 보름 간격으로 벌어진 데뷔전과 데뷔 2차전에서 연이어 KO승을
거둔 갤럭시는 3연속 1회 KO승 포함 6전 6승 5KO승을 기록합니다만, 81
년 7월 29일 "삭다 삭수리"에게 10회 판정패를 당하면서 그의 캐리어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검은 별을 답니다. 그러나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갤
럭시는 13연속 KO승을 거두면서 단번에 유망주로 뛰어오릅니다. 13연속
KO승 속에는 첫번째 국제전인 "오하시 가츠유키"전과 첫번째 원정경기
인 한국의 "조문균"과의 경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갤럭시의 연속 KO
승 행진은 훗날 세계 밴텀급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한국의 "박찬영"
에게 판정승 함으로써 멈추지만, 세계 정상을 향한 그의 행진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 4연승 3KO승을 전적에 보탠 갤럭시는 1984년 11월 21일
공석중인 WBA Jr 밴텀급 타이틀을 놓고 벌어진 타이틀 결정전에서 "에
우제비오 에스피날"을 6회 KO로 일축하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섭니다.
갤럭시의 첫번째 방어전은 1985년 3월 6일 한국의 "이동춘"선수를 상대
로 벌어졌습니다. 이동춘 선수는 비록 전적은 이긴경기가 진 경기보다
약간 많을 만큼 초라했지만, 당시 5연승을 거두면서 상승가도를 달려
단번에 세계 랭커로 뛰어오른 선수였습니다. 태국으로 원정한 이동춘
선수는 강타자 갤럭시를 상대로 선전 했습니다만, 7회 KO로 무릎을 꿇
고 맙니다. 그런데, 당시 갤럭시가 이동춘 선수를 팔꿈치로 가격했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었습니다. 갤럭시가 던진 라이트 훅에 맞고 이동춘 선
수가 다운을 당하였는데, 당시 화면상으로는 여지가 충분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재 대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인정받
지 못했던 모양이죠.
초반, 갤럭시의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2차 방어전의 상대로 만난 선수
는 김철호 선수와의 대결로 국내팬들에게도 낯이 익은 전 세계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와의 경기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전까지 갤럭시가 오
로노를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오른 것으로 알고있었을 만큼, 갤럭시 관련
기사 곳곳에서 그가 오로노를 곤욕스러워 했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그는 인터뷰때마다 "자기가 만났던 가장 강한 복서는 오로노"라는 이야
기를 하고 다녔지요. 하지만 결과는 갤럭시의 5회 KO승. 이 경기로 갤
럭시는 상당한 자신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86년에는 "이스라엘 카라카오"를 상대로 단 한 차례의 경기를 가지는
데 그쳤으나, 이듬해인 1987년에는 전 IBF 챔피언이자 인도네시아의 자
존심 "엘리 피칼"을 상대로 적지인 인도네시아에서 경기를 가져서, 치
열한 접전끝에 14회 KO승을 거두었고, 한국의 정병관을 상대로 하여 3
회 KO승을 거두며 10연속 KO승의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한국에 원정하여 역시 전 IBF 챔피언인 "최창호"를 가지고 놀듯이 농락
한 끝에 8회 KO승을 거두었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된 이래 88년까지는
그야말로 갤럭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Jr 밴텀급 무적을 과시하
였습니다. 거기에다가 1988년 5월에 그의 쌍동이 형인 "카오코 갤럭시"
가 WBA 밴텀급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서 세계 최초의 쌍동이 형제
챔피언으로 명성까지 날리게 됩니다.
1989년 들면서 갤럭시는 조금씩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예
의 펀치의 위력은 여전 했지만,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진 듯,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경향의 경기를 보여줍니다. 한국의 장태일을 상대로 2회 KO
승을 거두기는 하지만, 이어 벌어진 일본의 "마쓰무라 겐지"와의 원정
방어전에서는 별로 의욕이 없어 보이는 경기 끝에 12회 판정승을 거두
는데 그칩니다. 6월 29일에 강타자 "알베르토 카스트로"와의 지명 방어
전에서는 10회 KO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전에 없는 치열한 난타전을 벌
였으며 갤럭시 역시 충격을 받을 만한 공격을 많이 허용하기도 하였습
니다. 그러나 이 경기가, 까딱하면 권태기에 빠질 뻔한 갤럭시에게 자
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갤럭시는 복서로써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
게 태우기 시작합니다. 원정경기에서 고전했던 "마쓰무라 겐지"를 홈링
으로 불러들여 12회 KO승으로 앙갚음하고, 전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이
던 김용강을 6회KO 로 제압했으며, 톱 랭커 "데이비드 그리만"을 역시
5회 KO로 꺾으면서 7연속 KO방어에 성공한 후 1991년 12월 21일 "알만
도 카스트로"와의 경기를 12회 판정승으로 장식하며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1991년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형 이었던 카오코 갤
럭시가 "루이시토 에스피노자"에게 1회 KO패 당하면서 타이틀을 상실하
고 얼마 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갤럭시로써는 선수생활을 더 이
상 유지해 나아갈 힘을 잃어버린 듯 보였습니다. 통산전적은 50전 49승
1패 43KO승.
제 목:[복싱] 살아있는 전설 "조지 포먼"(2) 관련자료:없음 [3353]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6-13 12:55 조회:667
77년 "지미 영"에게 패한 조지 포먼은 78년 은퇴를 선언하고, 선수생활로 모
은 돈으로 고향"휴스턴"에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런
그가 87년 복귀를 선언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
다. 과거 근육질의 날렵했던 포먼은 간 곳 없이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고, 10년간 운동을 떠났던 그의 하체는 부실하기 이를데 없었습
니다. 그의 경기는 스포츠 뉴스 보다는 해외 토픽에서 다루는 것이 낫다는
평판이 있을 정도로, 포먼의 복귀선언은 늙은이 망령 정도로 치부되는 현실
이었습니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제임스 스미스"와 "토니 터커"를 제압하고 헤비
급 천하통일을 이루었던 1987년. 포먼은 링으로 돌아옵니다. 타이슨이 스미
스를 꺾고 WBC-WBA 통합 챔피언이 된 1주일 후 "스티브 죠스키"라는 무명 선
수를 상대로 4회 TKO승을 거두면서 복귀전을 승리로 장식하지만, 여론은 여
전히 싸늘했습니다. 재기 후 7연속 KO승을 거두면서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들
려오는 소리라야 "늙은이가 제법"이라는 수준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상대가
이름없는 로컬파이터 들이었던 탓이지요. 그러나 경기를 거듭할 수록 체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엉성했던 자세는 점점 옛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습
니다.
1988년 3월 19일. 재기 후 포먼은 첫번째 실험에 들게 됩니다. 전 크루저급
챔피언이었던 "드와이트 콰이"와의 일전이었는데요. 아마 복싱계에서도 "영
감님. 이 정도 해 두시고 사라져 주시죠..."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재기
후 싸웠던 선수들 하고는 차원이 틀린 선수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경기에서
예상을 뒤엎고 포먼은 7회 TKO승을 거둡니다. 사실 이 경기는 그간의 평판을
완전히 뒤엎는 충격을 가져다 줬습니다. 그간의 KO승 행진이 결코 허장성세
가 아니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지요. 하지만, 아직도 포먼을 의
심하는 사람들은, 콰이가 헤비급 선수가 아니며 신장이 겨우 174cm 정도에
불과한 초 미니 선수라는 점을 들어 애써 운으로 돌리려는 분위기가 역력했
습니다. 그러나 1989년 4월 헤비급 세계 랭커인 "버트 쿠퍼"와의 경기에서
마져 3회 TKO승을 거두자, 사람들은 헤비급 세계 정상에 가까이 다가선 선수
로써 포먼은 인정해 주기 시작합니다. 재기 후 쿠퍼전 까지의 그의 전적은
18전 18승 18KO. "타이슨과 붙어도 쉽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며, 그의 선전은 다른 노장선수들의 링 복귀에도 기폭제가 되었습니
다.
포먼의 경기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가볍게 툭~ 던지는 주먹을 맞고
도 상대가 나가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실 겁니다. 가벼워 보이지만 체중이 실
려있다는 이야기지요. 재기 후 포먼의 몸을 보시면, 상체는 엄청나게 큰 데
반해 하체는 굉장히 약해 보입니다. 경기중 스텝을 거의 밟지 않을 정도로
느릿느릿 하지요. 하지만, 이 하체가 어쩌면 파워의 원천이 아닌가 싶네요.
대나무살 끝에 쇳덩어리를 달아놓으면 살짝만 휘둘러도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되지요. 포먼의 주먹이 미스될 경우 중심을 잃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문기생각.
1989년 "에버트 마틴"을 상대로 10회 판정승을 거두며 연속 KO승 행진은 끝
나지만, 10회 전 라운드를 소화할 수 있는 체력도 충분하다는 검증을 받는
계기가 됩니다. 1990년 1월. 한 때 전 미국 백인들의 희망이었던 "게리 쿠니
"와의 대결에서도 2회 KO승을 거두고 5연속 KO승을 기록한 포먼은 드디어 세
계 정상에 도전할 기회를 잡습니다.
포먼은 헤비급 통합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에게 도전장을 냅니다. 당시
홀리필드는 타이스을 꺾었던 "제임스 더글러스"를 단 3회만에 일축하고 챔피
언이 되어 당분간 적수가 없을 것이라던 무적함대였습니다. 대부분 전문가들
도 포먼이 홀리필드에게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며, 포먼의 파괴력이 약간의 변
수는 되겠으나 승패는 초반에 갈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진 점은, 포먼이 챔피언이 될 경우 "아치 무어"가 가지고 있던 39
세의 최고령 세계 챔피언의 기록을 깰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1991년 4월 19일 포먼은 무려 열 세살이나 어린 홀리필드를 상대로 맞섭니
다. 경기는 예상을 뒤엎고 접전이었습니다. 홀리필드는 예의 인파이팅으로
포먼을 꺾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포먼은 양 팔을 엇갈리듯이 하는 독특한 커
버링으로 이를 무산시키고 홀리필드가 붙었을 경우에는 확실하게 클린치 함
으로써 저지하였습니다. 홀리필드는 훤히 드러난 포먼의 옆구리를 공격했으
나, 두터운 포먼의 옆구리는 거의 충격이 전달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제임스 더글러스"를 꺾을때 까지만 해도 헤비급에서 거칠 것이 없었던 홀리
필드였지만, 포먼과의 경기에서 중량의 차이를 실감하며 당황하는 빛이 역력
했습니다. 사실, 포먼과의 경기 이후 홀리필드의 복싱 스타일이 바뀔 정도로
홀리필드는 위축당했습니다. 매 라운드가 끝날 때 마다 홀리필드는 가쁜 숨
을 몰아쉬며 코너로 돌아왔지만, 포먼은 별로 지친 기색도 없이 자리에 앉지
도 않고 서서 1분간의 휴식을 취했습니다. 젊고 기량이 뛰어난 홀리필드를
상대로 해서 결국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를 당하기는 했지만, 모든 찬사는 승
자인 홀리필드가 아닌 패자 포먼에게 쏟아졌습니다.
홀리필드전에서 비록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포먼으로써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은 경기였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포먼을 늙은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대전료도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대전 상대도 세계랭커급으로 격상
되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포먼은 "지미 엘리스""알렉스 스튜어트""피에르 코
이체아"등을 상대로 해서 3승 2KO승을 거두면서 기회를 노렸으며, "토미 모
리슨"에게 판정패 당하기는 했지만, 다시한번 12라운드를 소화해내는 기염을
토합니다.
1992년 2월. 동갑내기 "래리 홈즈"가 - 비록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기구이긴
했지만 - WBO 세계 챔피언 "래이 머서"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이
되면서 "아치 무어"의 기록을 경신하자, 포먼도 다시 세계 정상에 도전하게
됩니다. 1994년 11월 5일. 포먼은 홀리필드를 꺾고 헤비급의 새로운 주인이
된 "마이클 무어러"에게 도전하게 되는데요. 경기는 스무살 가까이 어린(무
어러는 67년생입니다) 무어러의 우세로 흐르게 됩니다만, 포먼은 착실하게
하나씩 맞춰 나가는 작전으로 맞서서 10회에 체력이 떨어진 무어러를 쓰러뜨
리는데 성공합니다. 포먼이 이 승리로 최고령 세계 챔피언의 기록을 세웠으
며, 알리에게 세계 챔피언 자리를 상실한지 20년만에 다시 정상을 되찾는 최
장기간 리턴 챔피언이 됩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업적이었으며 당분
간, 어쩌면 영원히 깨지기 힘든 기록인 것 같습니다.
무어를 꺾은 포먼은 "악셀 슐츠""클로포드 그림슬리""루 사바레스"등을 상대
로 세 차례 방어에 성공합니다만, 모두 판정승에 그치면서 힘이 많이 떨어졌
음을 시사하며, 결국 1997년 "샤넌 브래그"에게 12회 판정패 하면서 타이틀
을 상실합니다. 통산전적 81전 76승 5패 68KO
제 목:[복싱] 조인주의 통쾌한 승리 관련자료:없음 [3355]
보낸이:김대연 (fc1ajax ) 1999-06-13 16:13 조회:350
조인주 선수의 타이틀매치와 1차방어전을 본 적이 없기때문에
신문에서 본 내용으로 조인주 선수에 대해서 들었었다.
두 경기 다 홈 텃세로 이긴 경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어쨌든 이번 2차 방어전은 꼭 멋지게 방어해주기를 바라면서 보았다.
1,2 라운드는 거의 탐색전이었고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단지 자세면에서 태국선수는 교과서적인 안정된 자세를 보여주었고]
또한 도전적이었다.
반면에 조인주선수는 뻣뻣이 선 자세에서 간혹 나오는 주먹과
옆 뒤로 피하면서 간간히 내 뻗는 잽만이 있을 뿐이었다.
3라운드도 한 두발의 정타 비슷한 것만 교환했을 뿐..
위기에 몰린 4라운드는 이번엔 타이틀을 뺏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경기내용을 보여주었다.
역시 뻣뻣한 자세에서 턱에 큰것 두방을 허용하고 체력이 잠깐
떨어진 듯 보였다.
그러나 5라운드 들어서는 4회의 충격을 거의 다 회복한듯 했지만
그래도 많이 맞았던 라운드였던것 같다.
5라운드까지는 태국 선수가 점수상으로 우위에 있던 라운드였다.
그런데로 볼만한 내용은 역시 6라운드!
깨끗하게 연타 2방이 적의 턱을 가르자
폰생모라콧은 그 충격으로 한바퀴 휙 돌며 방어를 했지만
조인주의 불꽃같은(?) 연타가 잇달았다.
그러나 단, 적절한 유효타가 없었던 것이 흠이었던것같다.
조인주의 연타에도 불구하고 생모라콧은 반격의 주먹을 내뻗었고
그 주먹에 1~2대를 허용하자 조인주의 연타는 중지되었다.
7회에 들어서자 태국선수는 아직 6회의 충격이 남아있는 듯 했다.
기회를 엿보던 조인주가 6회와같이 연타를 날려봤으나 별 효과가 없는듯했다.
조인주도 정타는 아니지만 몇발을 허용하고 체력이 좀 떨어진듯
7회가 마칠때까지 별다른 내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드디어 8라운드!
정확히 8라운드는 기억이 안나지만 통쾌한 KO 장면만은 기억이 난다.
스로화면으로 보지 못했다면 버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조인주의 머리와 생모라콧의 머리가 동시에 번쩍하면서
통나무 쓰러지듯이 생모라콧은 쓰러져 버렸다.
슬로화면으로 보니
조인주의 레프트 훅 2방이 스쳐지나가면서 마지막 날렸던 레프트 훅이
크게 빗나갔다.
그새를 놓칠새라 태국선수가 라이트를 조인주의 왼쪽 눈 부분을 작렬
동시에 조인주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태국선수의 턱에 꽃혀버렸다.
태국선수와 마찬가지로 조인주도 펀치력이 있는 편은 아니다.
승부수는 펀치를 맞은곳에 있었던것 같다.
분명히 태국선수의 펀치가 먼저 날라갔었고 한대 맞은 상태에서
조인주의 펀치가 날라갔으니말이다.
말로만 듣던, 카운터 펀치란 것이 이런것인가..
완벽한 카운터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맞받아치기 카운터펀치였다.
플라이급의 체급이라서 KO 가 많이 안나오는 상황이고
조인주의 주먹으로봐서도 그렇고
이번 KO 승에 너무 집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조인주보단 최용수의 롱런이 더 기대가 되었었다.
조인주 기본기와 수비가 탁월하지 못하고
더구나 펀치력이 있는것도 아니고
단지 스피드만 뒷받쳐줄 뿐이니
조인주의 롱런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에 비해서 최용수의 홈텃세에서의 패배는 정말 가슴 쓰리다.
어쨌든 조인주의 KO승을 축하하며
최용수도 하루 빨리 좋은 경기를 보여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으면 좋겠다.
제 목:[복싱] 조인주의 2차 방어전 관련자료:없음 [3362]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6-14 01:29 조회:470
오늘(벌써 어젠가?) 벌어진 조인주 선수의 2차 방어전은 조인주 선수의
통쾌한 8회 KO승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라테 선수와의 1차 방어전
에서 지지부진한 경기로 많은 복싱팬들이 이번 경기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 보았었는데, KO승으로 이런 걱정을 불식시켜 줬습니다.
저는 조인주 선수의 경기를 1차 방어전에 이어서 두번째로 보았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레프트 잽"이었다고 생각됩니
다. 1차 방어전 경기를 보고 "레프트가 주무기라는 선수가 왜 저러지?"
하는 의심을 할 정도로 레프트의 활용이 어설펏는데, 경기전 보여주는
조인주 선수의 이전 경기를 보니 꽤 날카로운 잽과 스트레이트를 구사하
더군요. 오늘 경기에서 저 정도만 해 주면 1차 방어전같은 졸전은 돼지
않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컨디션을 회복한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단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의욕이 앞서서인지 레프트 카바가 완전히
열려 있어서 상대의 공격을 많이 허용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몇차례
상대의 펀치를 허용하고도 가드를 굳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상대
의 주먹이 견딜만 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쪽으로 공격을 많이 허용하면 승부가 판정까지 갈 경우에 득될것이 없
어 보였습니다. 자신의 스피드와 눈을 과신하지 말고 착실한 수비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공격을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반격을 허용하여 손해를 보는 경우
가 많이 보였는데요. 이 점만 보완이 되면 한국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별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복서로써 완성된 모습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미
완성 복서가 챔피언이 된 후 일취월장하는 경우도 많이 있씁니다. 오늘
조인주 선수가 KO승을 거두었다는 사실 보다는 1차방어전 보다 나은 모
습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저는 더 기쁩니다.
"나심 하미드"는 최근 프로복싱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복싱의 총 본산인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의 프로복싱을 경
시하는 풍조가 있는 듯 합니다. 특히 영국출신 선수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라
이벌 의식까지 가미되어 호의적인 경우가 드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나심
하미드는 경량급인 페더급 선수인데다 영국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단 두번의
미국원정경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었으니, 대중적인 인기를 끌
만큼 상품성있는 선수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하미드의 경기를 지난 4월에 있었던 "폴 잉글"과의 경기를 본 것이 전
부입니다. 하지만, 유독 그 경기가 부진했던 탓인지,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체력도 별로인 것 같고 투쟁심은 강하지만 그렇게 예리
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그의 가공할 전적이나 트리플 크라운인 "윌
프레도 바스케스"를 KO로 제압하고 세계 정상에 선 사실로 미루어 보면 그것
이 그의 참 모습이 아닌 것 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의 복싱에 대해서
운운한다는 것은 좀 그렇고 하니 그냥 간단한 약력과 개인 프로필만 소개하
도록 하지요.
나심 하미드
생년월일 : 1974년 2월 17일
Hometown : 영국 세필드
신장 : 165cm
체급 : 페더급
아마추어 전적 : 62승 5패 18KO
1992년 프로데뷔 (4월 14일 리키 베어드 2KO승)
1994년 전 유럽 챔피언 (5월 11일 빈센조 벨카스트로 12회 판정승)
1995년 WBO 챔피언 (9월 30일 스티브 로빈슨 8회 KO승)
1997년 WBO-IBF 통합 챔피언 (2월 8일 톰 존슨 8회 KO승)
1997년 첫번째 미국원정 (12월 19일 캐빈 캘리 4회 KO승)
1998년 WBA-IBF-WBO 통합 챔피언 (4월 18일 윌프레도 바스케스 7회 KO승)
통산전적 : 32전 32승 29KO
제 목:[복싱] 움직이는 알프스 "프리모 카르넬라" 관련자료:없음 [3371]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6-21 13:21 조회:371
'프리모 카르넬라'의 경기를 이태리 위성방송에서 봤습니다. 경기를 봤다고
하기엔 좀 그런가요? 한 1분 남짓한 기록필름을 봤을 뿐이니 말입니다. 하지
만, 복싱을 좋아하는 저로써는 그것만 해도 대단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르넬라는 1930년대 헤비급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선수 중 한 사람이죠. 전에
어떤 분이 "카르넬라는 마피아의 꼭둑각시일 뿐이며, 역대 헤비급 챔피언 중
가장 챔피언 같지 않은 챔피언"이라고 하셨는데요. 뭐.... 그게 사실일 지라
도..... 카르넬라가 활동하던 당시의 복서들 중 어둠의 세력으로 부터 자유로
왔던 선수가 얼마나 될까요. 당시만 해도 입장수입이나 도박등으로 가장 많은
현금을 끌어들일 수 있는 스포츠는 복싱이었으니 말입니다.
카르넬라의 별명은 '움직이는 알프스'입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카르넬라의
신장은 197.5cm정도로 "레녹스 루이스" 보다도 큰 키를 가지고 있으며, 몸무
게는 126kg정도입니다. 요즘에야 간간히 볼 수가 있지만, 그래도 흔하지 않
은 체격이며 당시로써는 정말 '알프스'라는 별명이 붙을 만한 거구였습니다.
약 1분간의 자료필름만 보고 선수를 판단한다는 것은 전문가라고 해도 불가
능한 일이겠지요. 그래도 본 대로만 말씀 드리자면, 카르넬라는 안면카바를
거의 하지 않더군요. 보통 선수들과 크게는 약 20cm 까지 신장 차이가 나는
형편이었으니 안면수비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였겠죠. 잽을 간간히 던
지기는 했지만, 공격적인 의도 보다는 상대의 접근을 저지하는 정도의 모션
으로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프레이져나 타이슨의 경기같이 익사이팅한 맛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리 저리 재 보다가 하나씩 맞춰 나가는 정도.... 허긴,
그러니까 과거의 복서들은 20라운드 이상을 소화할 수도 있었겠지요.
1906년 10월 26일 생인 카르넬라는 1928년 프랑스 파리에서 2회 KO승을 거두
며 프로로 데뷔했습니다. 독일, 프랑스, 이태리, 미국을 오가며 활동한 카르
넬라는 엄청난 체구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데뷔 후
1년 남짓한 시간동안 18전을 싸워 전승을 기록하고 그 중 14KO승을 거두는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1930년복싱의 본 고장 미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29년 12월 17일. 런던에서 "프란츠 다이나"를 6회 KO로 꺾은 카르넬라는 불
과 한달 뒤인 30년 1월 24일에 미국 뉴욕의 링에 섭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항공기를 이용한 교통수단이 없던 시기라서 배편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건너
간 카르넬라는 오랜 여행에 따른 피로에도 불구하고 미국 데뷔 첫 경기에서
1회 KO승을 거두고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카르넬라는 미국데뷔 원년인 1930
년에만 17연속 KO승을 포함하여 26전 25승 1패 24KO승을 기록합니다.
30년 말에 한 차례 영국으로 건너가 원정경기를 가진 카르넬라는 31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폅니다. 비록 뒤에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
르며 카르넬라의 숙적이 되는 "잭 샤키"에게 한 차례 판정패를 당하기는 했
지만, 이 패배를 제외하곤 32년까지 단 한차례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으며 세
계 정상 도전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1932년. 카르넬라는 한 차례 패배를 기록한 바 있던 헤비급 세계 챔피언 "잭
샤키"에게 도전합니다. 경기양상은 전과 달라서 카르넬라는 약 13cm이상 우
세한 신장을 이용하여 경기를 압도합니다. 경기결과는 6회 KO승. 카르넬라의
승리였습니다.
세계 챔피언이 된 카르넬라는 본바닥이었던 유럽으로 돌아와 한 차례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2차 방어까지 성공하지만, 1934년 벌
어진 "막스 베버"와의 3차 방어전에서 11회 KO로 무릎을 꿇으며 타이틀을 상
실합니다.
베버에게 패한 후 무관이 된 카르넬라는, 남미 원정경기를 떠납니다. 워낙
거구였기 때문에, 그는 가는 곳마다 관중을 끌었으며 인기도 대단했다고 합
니다. 34년과 35년에 걸쳐 브라질 원정 3연전을 가져서 3승 2KO를 기록한 카
르넬라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훗날 헤비급 세계 정상에 오르는 갈색의 폭
격기 "조 루이스"와 대결하지만 , 그의 젊음을 당해내지 못하고 6회 KO패
당하고 맙니다.
루이스에게 패배한 카르넬라는 뚜렷한 하락세를 보입니다. 바록 재기 후 3연
승을 거두며 희망을 보이기는 합니다만, 1936년 "르로이 하인즈"와의 2연전
에서 모두 초반 KO패를 당하고 결국 파란 많았던 미국무대에서의 활동을 접
게 됩니다.
카르넬라는 1938년부터 44년까지 선수활동을 중단하였다가 45년 일시 링으로
돌아옵니다. 링에 복귀한 카르넬라는 이탈리아 내에서만 다섯경기를 갖는데
요. 초반 2연속 KO승을 기록하며 옛 기량을 다시 되 찾는 듯 했으나, "루이
지 무시나"에게 3연속 패배를 당하면서 결국 영영 링을 떠나게 됩니다. 이
희대의 풍운아는 1967년 6월 29일 사망합니다. 통산전적 102전 88승 14패
69KO.
복싱 100년사에서 배출해낸 무수한 "파이터"들 중에서도, "로키 그라지아노"
는 가장 인기있던 선수 중 한명입니다.
1922년 6월 6일생인 그라지아노의 본명은 "토머스 리코 바벨라"입니다. 그는
맨하탄에서 태어나-대부분의 파이터들이 그러하듯-어린 시절부터 절곡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이미 그라지아노는 길들여졌
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야성미를 바탕으로 1942년 3월 31일
프로로 전향한 그라지아노는 데뷔전에서 2회 KO승을 거둔 것을 포함하여 3연
속 KO승을 거두는 쾌조를 보였습니다. 비록 다섯 번째 경기에서 "찰리 퍼거
슨"에게 6회 판정패를 당하면서 제동이 걸리지만, 그후 8전 7승 1무 7KO를
기록하면서 팬들의 관심을 끕니다.
그라지아노의 경기 스타일은 팬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원초적이
고 야성적인 파워를 가진 그라지아노는 견고한 수비,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강력한 라이트를 바탕으로 그의 상대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라지아노가 활동한 주 무대는 미들급이었습니다만, 그 당시 선수들이 그렇
듯 웰터급도 자주 오가며 싸웠습니다. 비록 웰터급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
지는 못했지만, 1945년에는 웰터급의 강호 "빌리 아놀드"와 "버미 데이비스"
를 연속해서 3회와 4회에 KO로 승리를 거두었고, 특히 웰터급 세계 챔피언이
었던 "프레디 코치렌"과의 2연전에서 연속 10회 KO승을 거둠으로써 웰터급
정상의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이 1945년은 그라지아노 최고의 전성기였으며
이 한해에만 6전 6승 6KO를 거두는 쾌조를 보입니다.
이러한 쾌조를 바탕으로 그라지아노는 1946년 9월 27일에 첫 번째 정상도전
을 시도합니다. 상대는 미들급 세계챔피언 "토니 질"이었습니다. 이 토니 질
은 이 이후에도 미들급 정상의 자리를 놓고 그라지아노와 세 차례 격전을 벌
리는데, 세경기가 모두 KO로 승부가 났으며 도합 일곱차례의 다운을 주고 받
는 접전이었습니다.
46년 9월 27일 벌어진 첫 번째 대결은 양키 스타디움에서 세계 챔피언 토니
질에게 그라지아노가 도전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만, 그라지아노가 생
애 처음 KO패를 기록하는 치욕을 당하면서 6회에 경기가 종료됩니다. 복수의
칼을 갈던 그라지아노는 2연속 KO승을 거두면서 재기에 성공한 후 47년 7월
두 선수는 다시 뉴욕에서 맞섭니다. 이 경기는 유혈이 낭자한 난타전이었는
데 뜨거운 여름 날씨에 벌어진 이 경기에서 체력이 앞선 그라지아노가 6회
KO승을 거두면서 설욕하고 미들급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1승씩을 주고 받은 그라지아노와 질은 마지막 승부를 벌립니다. 이 경기는
1948년 6월에 뉴 저지에서 벌어졌는데요. 앞선 두 차례의 경기와 마찬가지
로 시합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난타전이었지만, 질의 강타에 그라지아노가
3회에 어이없이 무릎을 꿇으면서 타이틀을 상실하고 결국 토니 질 과의 경기
에서 1승 2패로 열세를 기록합니다.
타이틀 상실의 충격에 빠진 그라지아노는 그 후 약 1년간의 공백을 가집니
다.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충전한 그라지아노는 "보비 클라우스"와의 재기
전을 2회 KO로 장식하면서 정상을 향한 재도전에 나섭니다. 재기에 성공한
그라지아노는 52년까지 21전 20승 1무 18KO의 놀라운 성적을 보이며 마지막
불꽃을 태웁니다.
1952년. 그라지아노는 마지막 기회를 잡습니다. 52년에만 두 차례의 경기를
모두 초반에 KO승을 거두며 기세를 올린 그라지아노는 미들급 세계 정상에
다시 한번 도전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미들급 세계 챔피언은 20세기 최고의
테크니션이?제 목:[복싱] 복서열전의 막을 내립니다. 관련자료:없음 [3394]
보낸이:최문기 (포템킨 ) 1999-06-25 23:08 조회:924
지난 겨울부터 계속해서 올려오던 "명복서 열전"은 "맨하탄 파이터 '로키 그
라지아노'편을 마지막으로 끝내겠습니다.
원래는 지난 봄에 마무리 지으려 했었는데, 조금 시간이 더 생겨서 계속 이
어졌었는데요. 이제는 더 이상 이어지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기에 말씀드리는데요. 이미 올려진 제 글
들은 필요하시면 갈무리 해서 다른 게시판에 올리셔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틀린 곳도 더러 있으리라 생각되니까요. 그런 부분을 발견하시면, 수정을 가
해서 올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번 달로 약 5년간 가지고 있던 하이텔 아이디를 정시시킬 생각입니
다.
그동안 아껴주시고 성원해 주신 복싱 팬들께 감사 드립니다.
p.s : 확인 결과 니노 벤베누티의 연승 기록은 74연승이 아니라, 64연승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