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의 교훈
다소 지난 이야기지만 2003년은 한국 영화계에 커다란 획을 그은 한 해였다.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4500만 밖에 되지 않는 우리 남한의 인구를 감안하면 1,000만 관객 돌파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자랑스러운 것은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 ‘올드보이’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자타가 공인하는 <깐느 영화제>에서 영예의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것이었다.
‘올드보이’의 수상은 여태껏 영화예술의 변방으로 취급받던 우리 한국의 영화가 당당히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뛰어든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깐느의 낭보가 있기 전에 ‘올드보이’를 극장에서 보았는데 최민식의 신들린 듯한 연기와 상상을 불허하는 반전,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텔링, 등에 완전 압도당하고 말았다.
주인공 오대수(최민식 분)는 비 오는 어느 날, 퇴근길에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그의 딸 생일날이었고 오대수가 전화를 하던 공중전화부스 옆에는 딸에게 줄 장난감과 우산만이 뒹굴고 있었다. 오대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납치 당해 어느 건물의 사설감옥에 갇히게 된다. 처음 오대수는 분명 누군가의 오해가 있었거나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옥 문을 발로 차며 반항을 한다. 그러나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그 사설감옥 안에는 TV가 있어 자신이 실종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오대수를 가둔 정체불명의 인간들은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오대수는 ‘나를 가둔 이유가 뭐냐?’고 발광을 했지만 묵묵부답이었고 세월은 흘러갔다.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 원한을 살 일을 저지른 적은 없었던가?’
그는 기억을 할 수 있는 유치원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 이 날까지 자기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사설감옥에 갇혀야 할 만큼의 큰 죄를 저지른 기억은 없었다.
1년이 흐르고 2년이 흐르고, 속절없는 세월만 흘러갔다.
‘좋다. 내 언젠가는 이 감옥을 탈출하여 나를 가둔 놈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복수를 해 주겠다.’
절치부심하던 오대수는 15년 만에 사설감옥에서 탈출하여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일식집에서 한 여종업원 ‘미도’(강혜정 분)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사설감옥으로 쳐들어간 오대수 앞에 나타난 범인은 어이없게도 그의 고등학교 친구 우진(유지태 분)이었다.
기가 막힌 오대수는 우진에게 ‘나를 15년 동안 가두었던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그들의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대수’는 어느 날 부모를 따라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사를 가기 전날 ‘오대수’는 지금껏 자신이 공부하고 꿈을 펼치던 학교를 마지막으로 둘러보게 되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짙어가는 저녁 무렵, ‘오대수’는 자기의 교실을 둘러보다가 숨이 멈출 듯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고야 만다.
그 교실 안에는 친구 ‘우진’이 그의 누나와 짙은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본 ‘오대수’는 이웃 집 친구에게 이 엄청난 사실을 전해주었고 그 다음날 전학을 갔다.
그리고 그 사건은 오대수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진’은 달랐다. ‘오대수’가 별 생각 없이 던지고 간 그 이야기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고 가족들과 학교친구들,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며 살수가 없었다.
결국 ‘우진’의 누나는 저수지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고 ‘우진’은 복수를 다짐하며 서울로 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가며 돈을 번다.
그리고 ‘오대수’가 가장 사랑하는 딸의 생일날 그를 납치하여 15년 동안 가두어버렸던 것이다.
‘오대수’는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한 인간의 목숨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친구의 인생을 파괴한데 대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지만 ‘우진’의 복수는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오대수’가 사설감옥에서 탈출하여 만나 살을 섞고 사랑한 아가씨 ‘미도’는 바로 오대수의 딸이라고 ‘우진’은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복수였다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너의 딸에게도 알리겠노라’고 말한다.
경악을 금치 못할 잔인한 ‘우진’의 복수심 앞에 오대수는 피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만 ‘우진’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결국 오대수는 ‘이 모든 것이 나의 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가위로 자신의 혀를 잘라 버린다.
이 세상에 인간의 혀처럼 무서운 것도 드물 것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올드보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잘못 뱉은 말이 일으키는 엄청난 파장을 현실 속에서 곧잘 경험한다.
인류의 역사는 곧 말의 역사다. 작게는 개인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는 국제정세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말의 힘인 것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부부싸움을 일으키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말 한마디의 실수 때문에 정국이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고 국가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자신을 포함한 주위를 아름답게 하고 부부간, 부모 자식간은 물론이요 인간관계를 친밀하게 만든다.
선생님의 격려해준 말 한마디가 아이의 운명을 바꾼 이야기는 허다하고, 너그러운 직장상사의 말 한 마디가 부하직원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산성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진정한 대화란 남을 배려하고, 상대를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자세와 올바른 인격을 가진다면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주위, 우리의 사회와 국가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는가!
진정한 말이 그리워지는 세상이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