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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교육위한 책 「내훈」펴내 글:한희숙 | ||||||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1469~1494 재위)의 어머니로서
여성을 위한 교육서들이 제대로 없던 당시에 여성 교훈서인 「내훈」을 쓴 인물이다. 소혜왕후는 1437년(세종 19)에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시대는 조선왕조의 가장 성군이었던 세종(1418-1450 재위)이 집권하던 때로 문화가 발달하고 성리학적인
유교사상이 왕실과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많이 보급 실천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녀는 양반의 가문에서 유교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
1455년에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비로 간택되어 수빈(粹嬪)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남편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왕비가 되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일찍이 과부가 되어 어려움을 참으며 자식인 월산대군과 뒤에 성종이 된 자을산군 형제를 훌륭히 교육시켰다. 세조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자 의경세자의 동생이었던 예종(1468~1469 재위)이 왕위에 올랐다. 그 또한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는 예종이 죽던 날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손을 쓸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당일로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을 결정하였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던 같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도 있었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군은 4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세조(1417~1468 재위)의 장손으로 세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16세의 월산대군을 배제하고 동생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것은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성종의 왕위 계승 배경에는 정치적 결탁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정희왕후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장손인 월산대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쳐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본 것 같다. 이리하여 1469년 11월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남편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고 자신은 왕후에 책봉되었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덕종 비라 불려지기도 하지만 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인수대비라 불려지기도 하였다. 부녀자를 위한 교훈서 「내훈」을 펴내 소혜왕후는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불경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일찍이 범(梵)ㆍ한(漢)ㆍ국(國) 3자체로 쓴 불서를 펴내었을 만큼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의가 바르고 부도(婦道)를 몸에 익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자녀와 부녀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당차고 엄격한 인물이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부덕을 쌓는 일이었다.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 특히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다. 궁중의 여성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1475년(성종 6년)에 「내훈」3권 4책을 펴냈다. 「내훈」이라는 것이 어떠한 책인지는 그 서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태어남은 천지의 영적인 기운을 타고나며 다섯 가지의 상덕(오륜)을 갖게 되어 그 이치는 옥이나 돌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난초와 쑥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몸을 닦는 도리를 다 하였는가 다 하지 못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나라 문왕의 훌륭한 교화는 태사의 밝음 때문에 더욱 빛이 났고, 초나라 장왕이 패주가 된 것은 번희의 힘이 컸었다. 임금을 섬기고 남편을 섬기는 데에 누가 이들보다 나을 것인가. 내가 글을 읽다가 달기의 미소와 포사의 총애와 여희의 눈물과 비연의 참소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 또한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 하물며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라도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小學)」, 「열녀(烈女)」, 「여교(女敎)」, 「명감(銘監)」등이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었으나 권수가 많고 복잡하여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네권의 책 가운데에서도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르침을 취합하여 일곱 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아아! 한 몸에 대한 가르침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 도를 자칫 한 번 잃게 된다면 비록 후회한다 하여도 어떻게 쫓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이를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어 날마다 성인의 경지를 바라도록 하여라. 밝은 거울은 빛이 나는 것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성화(成火) 을미 첫 겨울 어느 날에 「내훈」이란 이름의 훈육서는 소혜왕후의 「내훈」외에도 이미 중국 명나라 성조의 비인 인효문황후가 지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우리의 실정과 잘 맞지 않았고 또 간략하여 완전한 책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혜왕후의 「내훈」은 부녀자들에게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별로 없었던 당시에 부녀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우리나라의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한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소혜왕후는 「내훈」을 통해 언행의 규범을 가르치고 효친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혼인의 중요성과 부부의 도리를 강조하였으며 어머니의 자식 가르치는 의무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형제와 친척의 화목을 역설하고, 욕심없이 사는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한 노년, 연산군과의 갈등 그러나 소혜왕후의 말년의 삶은 평탄하지 만은 않았다. 성종이 집권한지 10년이 되던 해에 며느리이자 연산군(1494~1506 재위)의 생모인 윤씨가 성종이 규방을 자주 출입하며 자신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다투던 끝에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이를 알게된 소혜왕후는 격분하여 그녀를 폐비시키고자 하였다. 세자의 친어머니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소혜왕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하여 성종 13년에 윤씨는 폐비가 되고 사저로 추방되었다. 추방된 윤씨는 몹시 참회하고 왕의 부름만을 기다렸으나 '매일 화장만 열심히 하고 후회하는 빛이 없다.' 고 주변 사람들이 고자질함으로써 결국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다. 세자가 자신의 생모의 죽음에 대해 알까 걱정이 된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결국 손자인 연산군이 알게 되고 연산군은 어머니를 폐비시키는 일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였다. 이에 할머니인 소혜왕후는 병석에서도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였다. 하지만 1504년 소혜왕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이 머리로 그녀를 치받아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무덤은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오릉에 있으며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 ||||||
출처:한국역사속의 여성인물 상/ 한국여성개발원, 1998, 도서 |
첫댓글 우리에겐 소혜 왕후라는 명칭보다는 인수대비로 더 알려진 여자였지요. 성종의 어머니요..연산군의 할머니였던...그 유명한 연산군의 할머니...연산군의 패륜때문에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자업자득인지 모르겠지만요...그래도 개인적으로 소혜왕후를 참 좋아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여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내가 만약 조선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살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철의 여인이라고 불렸던 인수대비도 저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