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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이 주기도문을 번역한 한국 교회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단지 어휘만 현대어로 바꾸었다고 주기도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증진되는 것은 아니다. 예배때 마다 빠른 속도로 암송되는 주기도문을 어휘 몇 개 토씨 몇 개 바꿨다고 해서 이해될 수 없다. 우리는 중국어 성경을 거의 그대로 베낀 성경을, 오역 투성이인 성경을 백년이 훨씬 넘도록 거의 그냥 사용해오고 있다.
수 없이 많은 어휘들을 현대어로 바꿨다고 했지만, 우리의 개역 성경에는 아직도 성경을 수 없이 읽은 사람도 심지어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를 수십년 한 이도, 분명한 그 의미를 알지 못할 일천여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심지어 권위있는 목회자들도 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그냥 건너뛰어 읽으라고 성도들에게 권한다. 자꾸 와서 물어보면 귀찮을지도 모른다. 우리 한국교회의 성경공부는 도무지 질문의 기회가 없다. 내가 물어서 그가 모르면 서로 미안하지 않겠는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성경공부 시간은 미국 교회와 달리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많은 성경공부 교사들은 어휘에 관한 한 대략 넘어가고 배우는 이들도 그저 대충 넘어간다. 신약성경의 오역(誤譯)중의 하나인 “몽학선생”을 어떤 설교자는 수 없이 그의 설교에서 외쳐댄다. 설교하는 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듣는 이들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아멘”한다.
영어성경을 참고하기 전에는 도무지 참고문헌도 없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인용해서 설명하지만 배우는 성도들은 그 어휘 중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왜 번역이 잘된 성경이 있다면 우리말로 이해 가능한 말씀을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강해까지 들어야하는가?
이해는 뒤로 밀어두고, 무조건 필사하고, 무조건 읽고, 무조건 외우고, 우리는 그렇게 성경공부를 해 왔다. 교회에서 주기도문 강해를 여러번 들어본 이라도, 주기도문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풍토 아래서 우리는 이번의 주기도문 재번역 시도에 찬사를 보낸다.
한글성경을 개역할 때 그리했듯이 어휘 몇 개 토씨 몇 개 바꿔가지고는 주기도문은 여전히 이해되기 힘들다. 그리고 이의가 있을 때는 공식적 적용을 보류하고 재고할 수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한번 발표하고 나면 과거의 한글성경의 예가 보여주듯이 잘못된 번역이라도 앞으로 100년 이상을 그대로 사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의 번역에 있어서도 “각교단과 신학자들의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힘들만큼 만큼까지 교리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매번 예배때마다 암송하지만, 사도신경(Apostles' Creed)의 “신경(信經)”의 의미를 아는 성도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문을 아는 세대도 힘든 어휘인데, 오는 세대에게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어휘가 될 것이다. 제목부터 알기 쉬운 현대어로 재번역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고려된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경우에 있어서는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적절한 시제(時制) 반영에 관하여 국어학자들의 의견이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한글개역성경은 전반적으로 시제를 무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어는 영어와 같은 시제를 수용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과거는 과거로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의미를 분명히 하면서 암송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한 과거의 사건들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때, 우리는 문법적으로 우아한 문체를 쓸 이유도 없다. 의미가 분명한 고백을 드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리듬도 우아한 문체도 이차적 문제이다. 우리는 문학 작품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고백을 암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녀”는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 뜻이 분명할 수 없으며, 재번역의 “공교회”도 옛 “공회”도 모두 설명을 해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어휘들이다.
그리고 수십년 교회에 출석한 성도들도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주기도문에 있어서도, 영어로는 그 표제가 주의 기도문(Lord's Prayer), 혹은 때로 모범기도문(Model Prayer)라고 부른다. 둘을 함께 풀어쓰면, “주께서 가르치신 모범기도문”이 될 것이다.
아마도 중국어를 거치면서 그대로 왔을 “주기도문(主祈禱文)”은 우리 어법에도 맞지 않는 제목이고, 또 한문으로 써 놓을지라도 의미도 분명치 않다. 이 제목은 “주(Lord)"가 다른 의미, 예를 들어 ”주(main 혹은 major)“로 오해될 공산이 크다.
히브리어나 고대 그리스어를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들 오늘날 우리가 영어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해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원문(原文)에 대한 충실“을 아무리 주장해도 그 원문에 씌여진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국어와 접속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번역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그런 자질을 갖춘 충분한 인력이 있는가? 고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만 알아서 되겠는가? 이제는 사장(死藏)된 아람어나 콥틱어나 시리아어와 같은 고대언어에 정통한 학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구약 번역에 참고로 필요한 아케이디언이나 기타 아브라함의 시대나 요셉의 시대에 가나안 지역에서 사용되던 문자들이나 언어들에 대한 전문가가 한국에 몇 명이나 있는가?
아니 충분한 인력이 있다고치자. 그들은 모두 우리말과 글에 전문적 지식을 가졌는가? 영어 성경들은 일생을 성경에 몸바친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되었고 때로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번역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에 있어서 우리는 영어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한글 성경을 가질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최선의 방안은 영어 성경을 번역하고 그 번역이 사용한 사본(원문)을 참고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러 번역들을 참고해서 짜깁기하자는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최소한 영어성경들을 가장 중요한 자료들로 참고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재번역된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그런 시도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한다. 우리는 참여하신 분들의 노력이나 결과를 평가절하할 의도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동기와 노력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무려 신학자 60여명이 6개월간 원문에서 이끌어낸 번역을 영어성경 번역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난감함을 느낀다. 한 페이지도 안되는 짧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발표된 재번역과 같이 번역하는데 신학자 60여명이 6개월 걸렸다면, 1700여 페이지의 성경을 소위 말하는 ”원문“에서 번역하는데는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 것인가?
성경에 관계된 모든 번역에 있어서 국어학자들의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한 예로 미국에서 공부한 어떤 한국의 신학자가 그의 저서에 ”쓴 뿌리“라는 어휘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그는 영어성경에 많이 쓰인 ”bitterness"라는 어휘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이 해괴한 어휘를 창조해냈다고 본다.
그후 우리는 많은 목회자들이 “쓴뿌리”라는 어휘를 책과 설교에서 사용하는 것을 자주 대한다. Bitterness는 다름아닌 우리 언어의 “한(恨), 혹은 원한(怨恨)”에 해당된다. 우리는 재번역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국어학자들이 참여했다는 낌새를 맡을 수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위에 언급된 “성실한(faithful)"과 ”왕국(kingdom)"이라는 아주 중요한 어휘 외에 우리 한글 개역성경이 오역해서 그 빛을 가리워버린 어휘들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 어휘들은 성경을 이루는 기둥과 같이 중요한 어휘인 경우가 많다.
"영적인(spiritual)"이라는 어휘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나 신학적으로나 얼마나 중요한 어휘인가? 그런데 이 어휘는 “신령한”이라는 엉뚱한 어휘로 번역되어 그 빛을 잃어버린채로 교회에서 사용된다. “죄”의 유사어들을 모두 “죄”로 번역해서, 구체적인 죄들에 대한 개념들을 도외시했다.
사도들의 서신들에 언급된 수 많은 믿는자들의 덕과 부덕의 요소들에 관하여, 중국어 성경을 그대로 베낀 부덕의 요소들에 사용된 어휘들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저 성령의 열매만을 강조한다(사실은 이에 사용된 어휘들도 모두 이해가 쉬운 어휘들은 아니다).
잠언의 기둥이 되는 어휘인 “깨달음(understanding)"은 ”명철“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어 그 소중한 말씀들을 베일에 가리워버렸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는 크리스천의 인격형성 혹은 점진적 성화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교회는 구원의 은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렸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다른 도덕과 인격을 가지는 자들로 사회에 비쳐졌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거기서부터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지도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어떤 목회자들은 말하되, “모르는 어휘가 나오면 건너 뛰어 읽으라”고 말한다. 혹은 “성령을 받으라, 그리하면 그 모든 말씀이 살아 생동하는 말씀으로 다가온다”라고 말한다.
무조건 읽기, 무조건 암기하기, 무조건 필사하기, 심지어는 성경 속독(速讀)까지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이 모든 현실이 나태(懶怠)한 성경 번역의 결과이다. 어법에 맞는 표현뿐이 아니고 제 2 혹은 제 3의 “쓴뿌리”나 “신령한”이나 “명철”이나 “몽학선생”의 오역을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번역에 있어서의 국어학자들의 참여는 필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교단이 연합하여 시도한 금번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재 번역 노력은 한국 교회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며, 우리는 이 노력이 더욱 발전하여 영어성경과 원문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성경번역작업에 이를 수 있기를 고대하며 우리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동서성서학회는 금번의 주기도문의 재번역을 주도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이 사업에 참여하신 번역 신학자 제위께 다시 한번 주 안에서 찬사를 드린다. 단지 전 교단 및 교회에 사용을 촉구하기 전에 우리의 이 소고(小考)를 참고한 재고찰(再考察)이 있기를 요청드리며, 이러한 요청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또 참여하신 번역신학자 제위께 용납되도록 우리 모두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한다.
LA 동서성서학회(회장 김영휘)
참조 : 주기도문 및 사도신경 새번역
주기도문 새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