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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광수 목사 전도 일대기
(1)/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가 시대적 전도자 키워
@ 류광수 목사 전도사역 일대기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는(골4:14) 바울과 동행하면서 그의 전도행적을 기록하여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사도행전」이라는 귀중한
증인문서를 남겨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누가의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록목적이 결코 사도바울 개인의 사역에
포커스를 둔 것이 아니라, 33세의 유대청년 예수가 이 땅에서 가르치고 행한 일을 통해 어떻게 우리의 주(主)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나타내셨는지를 복음서를 통해 밝힌 이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음직한 신원미상의 인물 데오빌로에게 띄우는 서신을 통해서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셔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가운데 성령을 통해 하늘에서 그분의 일을 계속 수행하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다는데 사도행전의
무게중심이 실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본지에서 밝혀나갈 류광수 목사 전도사역 일대기는 결코 류목사 개인의 이야기나
더욱이 공적 같은 것을 들추어 내려는데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배후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밝히자는데 역점을 두고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매스 미디어(Mass Media)의 선(善) 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한 전도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류광수.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발한 6.25전쟁 중에 태어나 하늘아래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천막촌 「부산시 동구 수정동 산의 17번지」에서 유년과
청년의 때를 보내야 했다.
그런 그가 오늘날, 초대교회의 역사 이래로 바울의 발걸음 속에 나타난 성경적 전도전략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져온 지난 세대 위에 새롭고 큰 획을 긋는 다락방 전도운동의 주역이 되어 예수 생명, 예수 능력 운동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난 25년간 부산의 후미진 골목을 누비며 어린 영혼에서부터 한국교회의 영원한 사각지대로 남을 뻔했던 무속인, 역술인에 이르기까지 「빛의
자녀」로 이끌어낸 그의 성과는 미래에 하나님 앞에서 전개될 한국 기독교사의 영원한 내일을 위해서 한 번 쯤은 세인들에게, 특히 구령의 열정을
가슴에 품은 이 시대의 전도자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사실(事實)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이 시대의 전도자 류광수. 그는 이제 칠순을
넘긴 어머니의 기도로 인해 피멍든 무릎과 아내의 헌신과 성도의 기도로 태어난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이다. 자칭 재림주만 37명이나 된다는 이
혼돈의 땅에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언약을 선포하는 그의 발걸음으로 사도행전 29장을 넉넉히 창출해 내리라 기대하며 본 시리즈를
시작한다.
@ 출생 - 유년시절
류광수는 6.25 전쟁 발발로 인해 한반도가 혼돈과 경악으로 몸부림치는 가운데
1950년 10월13일 부친 류판백(1915년생, 1963년 소천) 집사와 모친 장차연(1925년생) 권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밀양에서 1953년 부산으로 이사한 이래로 그의 유년시절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친의 끈질긴 생활력으로 인하여 윤택한
생활 가운데 안전할 것 같은 기미가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새벽 동트기 전에는 온 마을에 간장 배달을, 저녁에는 호롱불 밝힐 석유
배달을, 그리고 낮에는 나무판자 집에 약 쳐주는 일을, 집에 돌아와서는 가게 일을 돌보는 중노동 속에서 공장을 운영할 만큼 재산도 모아진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4년 4월 부산시 동구 좌천동 일대에, 인근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기름이 인화되면서 일어난 큰 화재로
인해 3백여 명이 참사를 당하는 재난이 일어났고 어린 광수에게는 죽음을 향한 깊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포와 두려움의 기억을 4살의 여린
가슴에 각인하는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이 화재로 인해 과자 공장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이불 밑에 넣어 두었던 현금을
자취 없는 한줌의 재로 날려버린 채, 경찰도 고개를 내젓는 하늘 아래 말썽 많은 동네, 천막들이 납작하게 둘러앉은 「수정동 산의 17번지」
인생으로 그의 유년기는 여지없이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피난민의 공허와 이재민의 상실감, 무당들의 저속한 문화, 떠도는 인생들의 어두움
속에서 그의 유년기의 아침은 싸우는 소리, 술주정 소리로 시작되었고 이웃집 또래 아이들은 껌팔이나 구두닦이로 끼니를 찾아 나섰다.
그때의 충격인지 부친은 지병인 위장병으로 시달리다가 2남 2녀를 뒤로 남긴 채 젊은 아내를 두고 하나님 나라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구역 예배드린 후 '예수님 손 꼭 잡아야 산다'는 기도같은 유언을 남긴 채, 유난히 명석하고 지혜로운 아들 광수의 미래를
아쉬워하며 남편이 떠난 후 어머니 장차연 권사의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는 오늘까지 연연히 그 맥을 이어왔다.
장례식 비용도 남겨놓지 않고
떠난 남편에 대한 미련과 슬픔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의 사치일 뿐, 단칸방에 누운 2남 2녀를 토닥이며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를
자장가로 불러 잠재운 후 「수정동 일신교회」의 예배당은 그녀의 눈물어린 기도소리로 새벽미명을 맞이했다.
다행스레 해운항만청의 청장
부속실에서 잡무를 거드는 일로 입사는 했지만 4남매를 거두기엔 힘겨웠다.
도시락 가방과 시장 본 것을 양팔에 끼고 풀빵 사서
시려운 손 뎁히며 어두운 골목길 걸어 집에 이르면 국민학교 1학년에 다니는 막내딸이 해 놓은 보리밥 눈물 섞어 넘길 지라도 그녀의 고백은 오직
이랬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 4남매를 주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라게 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그릇 되게 해주세요."
물 묻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깊은 밤 예배 당 뒤편에 앉으면 몸부림치는 기도로 인해
새벽녘이면 피아노 밑에까지 밀려가 있을 정도였다.
명석한 두뇌와 흘러 넘치는 기지, 끝없는 지적 욕구, 어떤 곡조도 들은 자리에서 악기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기능, 부친을 닮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기질..., 큰아들 광수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깊었던 그녀는 도저히 받쳐줄 수 없는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그저 기도로 하나님께 그를 맡기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 장차연 권사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바른거라예, 눈에 거친 게 하나 없어."
눈자위가 붉어지며 회상하는 그녀의 기억에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회사
갔다오니 어둑한 길에서 막내 업고 광수가 울고 있었어. '니 와 우노' 물으니 말없이 상장만 내밀드구만, 아빠 없이 상장 받아 왔을 때가 제일
가슴 아펐지."
@ 방황 - 회심
「나사렛」만큼이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산동네에서 류광수의 청소년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일신교회」였다.
그러나 보수동 헌 책방 골목을 누비며 많은 책을 읽은 그의 교만한 정신세계를 복음으로
유연케하기엔 교회 안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자리다툼과 돈 문제로 목사와 장로 3명은 멱살 잡고 싸우는 판이었고 잔뜩 떠맡은 교회
빚에도 불구하고 2층으로 사택을 지었다는 이유로 교인 3명 남고 모두 떠나버렸다.
억지로 끌려 다니던 교회도 식상하기에 이른 데다가
대학포기하고 차린 스웨터 짜는 요꼬공장이 완전 빈손으로 나 앉게되자 그의 방황은 끝간 데를 몰랐다.
원인 모르게 사람이 죽어가는 영적
대물림 때문에 위로 두 딸을 잃은 부친의 결단에 의해 나가게 된 교회였지만 발길을 완전히 끊어버린 채, 조직도 없고 깡패도 아닌, 그러나 동네
파출소에서도 귀찮아서 잡아가지 않는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가 회심하게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일곱 명과 붙어
싸우다가 한 명을 찍어 늘씬하게 패주었는데 그만 생명이 위독하게 되어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게 되었다.
"내가 왜 이리 됐나
싶었습니다. 본심은 아니었죠. 그래서 타락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 진실하게 부탁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모님댁으로 피신해 있다가 돌아온 어느 날 아침,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께 그는 물었다.
"어머니, 나 위해 얼마나
기도합니까?"
말없이 치마 끝을 올려주는 어머니의 무릎은 오년여의 세월을 주먹으로 치며 기도한 상처로 피멍이 들어있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의 그의 방황은 그날 아침으로 막을 내리고, 팔달다리 밑 흐르는 물에 담배 갑도 던져버렸다.
청소년과
청년에게 생을 걸고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한 날도 바로 그 날이었다.
오늘의 류광수 목사는 말한다.
"전도자에게 있어 과거의
실패는 오늘과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전도운동의 준비이고 전도자의 끝없는 축복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를 뽑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2)/ 전도할 일이 없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 없어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야기(His story)를 엮어 가시는데 있어서 전도자의 여정에 촛점을 맞추고 계시다는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과 기독교사에 남은
참된 전도자들, 그리고 기도의 사람들에 의해 증거 되고있다. 따라서 군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명설교가나 부흥사, 성경을 꿰뚫는 성경학자나
신학교수로 불리워지기 보다는 오직 무릎으로 태어난 이 시대의 참된 전도자로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만 불리워지기를 원하는
류광수 목사의 삶에는 늘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가 한 겨울 삭풍이 스며드는 판잣집의 골방에서 호롱불을 밝히고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에도, 부산 수정동의 비탈진 골목길을 돌아 예배당을 향해 가는 길목에도, 그리고 나름대로 이유있는 반항 속에서 끝없는 내적 갈등으로 비틀걸음을
걷는 그의 뒷모습 속에도 주님의 사랑은 스며들었다. 이제, 그가 「전도할 일이 없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고 결론 내리기 직전까지 그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던 상처들과 숨은 문제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승화된 그의 연약함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려 한다.
우리의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시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서 죄는 없으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적고있다.(히4:15)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고난과 어려움들이 오는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주기도 하고
마음을 시원케하는 해답이 되기도 하며 우리네 영혼의 잠재된 상처를 끄집어내어 치유하는 메시지가 되고 있다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이 없어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확신이 없어 유리하고 방황하는 이 시대의 성도를 향해 피 토하는 절규로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강할 때나 연약할 때나 그 언제든지 함께하셨고 그의 실패와 시행착오의 현장 속에도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꽂는 그 순간에도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회심 후 신학교 시절
세계 복음화를 위해 생명 바치는 종으로, 양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종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아들 류광수를 가슴에 안고 생명 건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린 어머니 장차연 권사의 끈질긴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였고 도저히
대책이 없을 것 같았던 아들 류광수의 공허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그즈음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에서 시무하시던 임병길 목사님이 운영하는
성경전문학교에서 실제적인 성경공부를 하게되는데 이 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말씀의 현존과 역사에 대한 눈이 열리기에 이르러 1978년 예장합동
장로회 신학대학을 거쳐 고신대학교에 편입, 졸업후 1984년 총신대학원에 입학 졸업함으로써 정통 칼빈주의 신학에 바탕을 둔 목회의 길을
걷게된다. 가난하고 왜소하지만 여론에 휩쓸리지 않는 당당함으로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걷는 류광수는, 때로는 교만하게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특이한
인물로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성구를 넣어 복사한 열악한 전도지를 가방에 넣고 배고픔에는 초연한 채 골목길을 누비는 그가 독백처럼 하는 말은
오직 "나는 세계복음화 할 거다"였다.
농담 반 호기심 반으로 받아들인 주변의 사람들에겐, 영혼을 바라보는 긍휼함으로 세계를 품은 그의
넓은 가슴과 미래를 꿰뚫는 빛나는 눈빛이 보여질리 없었다. 그의 방황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삶을 지켜보아온 동료 조은택 목사는 말한다.
"그의 메시지는 비단 책상에서 나온 것 만은 아닙니다. 현장에서 무르익어져 나온 것이죠."
결국 독서와 전도현장이 오늘날의 류광수를
만들어낸 것이다.
전도에 생(生)을 건 세 가지 이유.
성경전문학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게 된 것이 첫 번
째 이유라면 목회자가 되겠노라고 결단 내린 시점에서 그에게 찾아온 영적문제야말로 두 번 째 이유요, 실제적인 전도 계기가 되었다. 너무도
사실적인 성경에 매료되어 있었던 그즈음 그는 정신병원 수용소를 겸하고 있는 기도원에 가게 되었는데 기도하던 중, 그의 뇌리에 한 가지 속삭임이
스쳐갔다. "이러다가 내가 정신이 돌아버리는 것 아닐까?" 섬광처럼 스쳐간 그 생각이, 24시간 그를 사로잡아서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무력증에 빠트려 고통스럽게 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말씀을 읽는 동안 치료될 것 아닌가, 주님은
정신병자도 고치셨는데..., 하지만 이러다가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도 없고 상담할 수도 없는 이
숨은 문제로 그는 3년도 넘게 홀로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말씀읽고 기도하던 중「생각나지 않는 치유」의 응답을 받게된다.
"창세기 3장을 읽는 순간 이게 바로 사탄이 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신다는 큰 믿음이
생겨 기도하던 어느날 아침, 마치 학창시절 방학하던 날 같은 기쁨이 내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고침 받았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새털처럼
자유로워졌지요, 지금도 숨은 생각과 영적인 문제로 시달리는 사람은 공감이 갈 것입니다." 그때 그는 현대인의 90% 이상이 영적문제를 안고 사는
이때에 이 응답의 증거를 꼭 말해야한다고 결심했고 또 열심히 말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를 잘
설명하는 것이 전도라고 할 때 그의 전도자로서의 삶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지막이유를 든다면 그의 가정생활이다. 성경전문학교시절
만난 김영숙 사모는 귀엽고 활달한 모습을 한 믿음 좋은 자매였다. 그러나 결혼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어서 어려운 신학교 시절을 거쳐오는 가운데,
그리고 온통 관심이 전도현장에 머물러있는 그의 삶 가운데 사랑받는 한 여자로서의 위치를 끝내 고집하는 아내와의 갈등은 심도를 더해갔다.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가는 가정에서의 영적 전투는 그를 무시로 기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힘겹게 했다. 식사 중에 돌을 씹어도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서 그냥 삼켜버릴 만큼 자기 절제에 강한 그이지만 오직 유일한 돌파구요 표현출구는 아내였기 때문에 가정의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갔다.
"대화의 시간이 없었던 것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아내를 믿는 마음에서 였죠.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참
전도자의 가정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정이 그 증거입니다. 이제 아내를 향해「당신은 복 있는 여자」라고 부르죠." 그의 가정에서
묻어나오는 진솔한 고백과 증거들은, 오늘날 분리된 가정 속에서 위장된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탁상공론이나 인본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치유능력을 근거로 한 진정한 가정 치유 메시지가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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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김영숙
전남 승주군 주안면에서
일남 오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1955년 10월생) 15살 때 사람을 만든 주인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는데 부산 반여교회에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되자 오직 목회자와 결혼하여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살겠다고 결심했다. 성경을 찢어버리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헌금할
용돈을 받을 수 없자 남의 집 연탄 배달하고 번 돈 백원을 몽땅 교회에 바친 사건이 알려지게 되어 집안 망신당한다는 이유로 핍박도 심했다. 우상
섬기는 작은 아버지가 밤 열시 반부터 새벽예배 종 칠 때까지 전기고압선 줄로 매질을 하기도 했지만 눈물 콧물 핏물이 범벅된 얼굴과 살점이 뜯겨진
다리를 끌고 찬송을 부르며 교회에 가는 그녀 앞에서는 핍박의 매질도 무력해졌다. 작은 아버지가 그런 것이 아닌,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세력을 이미 간파했던 그녀의 믿음은, 순수하고 깨끗하게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었던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가슴 부풀었던 십대의 소녀기를 지내자마자, 성경전문학교에서 학생 회장직을 맡고 영어를 가르치는 꽤나 지혜로워보이는 청년 류광수를 만나게
되어 결혼하기에 이르지만 생활에 묻힌 그녀에게는 사도처럼 되겠다는 꿈 자체가 환상일 수 밖에 없었다. 심한 입덧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유난히 약한 아들 성종이가 아파서 병원으로 들추어 업고 뛸 때도 많았지만 가난한 전도자의 살림에는 늘 궁핍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게다가 믿는
가정은 무조건 행복할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유난스러운 완벽주의와 까다로움이 정도에 지나치는 영적 대물림 때문에 갈등은 심화되었다.
「소가
일하다가 몸바치듯이」 사모는 희생해야 한다는 박00목사님의 약혼 주례사가 마음에 걸려 고비고비마다 참고 또 참았다. 밤이면 하나님 앞에서 울고
낮이면 웃고 다녀야하는 사모로서의 삶은 위장의 가면이라는 무게때문에 더욱 그녀를 버겁게 했다. 옷입은 매무새 하나 행동거지 하나 얼굴 표정까지
타겟이 되는 성도들의 지나친 관심 속에서 다섯개 교회를 전도사로 부목사로 거치는 동안 그녀의 가슴은 멍들었고 태종대 앞 바닷물이 온통 그녀의
눈물이 되었다.
25년여의 세월을 전도하느라 뛰어다니는 남편으로부터 빼앗긴 아내의 자리는 포기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자녀 성종이와
신애가 잃어버린 아버지의 자리는 그녀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직 빨리 커서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방황하던 성종이가 어느날 잔뜩 술에 취한 채 새벽에 들어와서는 "아버지가 엄마와 나를 버렸다"며 부둥켜안고 엉엉 울 때는 전도도 좋고
복음도 좋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때로는 오기도 생겨서 당신 혼자 세계복음화한다고 잘난 체 하지 말라며
대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단시비와 각종 루머에 걸려 무고하게 고통당하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무릎 꿇지 않을 수 없어 하나님 손에
그를 완전하게 맡겨버리는 치열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과연 참 전도자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증거가 그녀의 가정에서 사실적으로 일어났다.
아내를 비난하기보다는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남편 류광수 목사의 중심이 옮겨지자, 하나님이 보내주신 김은영 전 동삼제일교회 독일 선교사와의
만남이라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아들 성종이의 삶도 달라졌다. 단골술집 주방아주머니가 류목사의 아들인 것을 알고 땅을 치며 통곡할 정도로
대책없는 아이로 놀았던 성종이가 급속히 안정되어 결혼도 했다. 가장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무서운 아버지, 늘 바쁜 아버지, 용돈타는
짧은 시간도 복음을 들려주기 보다는 늘 나무래는 아버지,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따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아버지..., 이해할 수
없어 곁길로 한없이 빠져나가다가도 아들 성종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기억하나가 가슴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청년 복음화 때문에
늘 청년들이 끊이지 않았던 건넌방에서 그날 밤, 저는 자는 척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제 볼을 쓰다듬으시며, 해주고 싶은 것도 많고 사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못해줘서 마음 아프다며 무겁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그때 나는 아버지가 저를 무척 사랑하고 계신다고 믿었죠. 그 때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저를 위해 표시없이 계속하신 기도 때문에 오늘날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깨달은 경제인이
되는 것이 우선의 꿈이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버지처럼 전도자의 길을 걷겠노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목회자의 가정에서 방황하는 청소년이나
세상문화에 빠져있는 청년들에게 증인으로 서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저는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이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한 믿음과
정직한 헌금관이야말로 우리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도 많은 상처들을 흔적없이 삭여 버리는 어머니의 단순함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유명한 아버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요. 우리 가정이야말로 복음으로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사실적인 증거입니다. 복음전하는 자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확신있는 설교는 바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죠."
( 4 )/전혀 미쳐있는 전도사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전통있는 모 일간지의 사회면에 톱기사를 장식했던 헤드라인은 바로 ' 오늘의 청소년 이대로는 안된다'였다고
한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기엔 청소년의 시기란 시대에 관계없이 늘 뭔가 부족하고 안정되어있지 않는 미완(未完)의 상태로 보여지기 때문인
터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는 간과할수 없는 또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 우선 시대적으로는 뉴에이지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종교가
하나되고 세계가 하나된다는 미명아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희석시킴으로써 영적으로 혼미한 상태에 놓여있으며 우상과 미신, 무속이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개인의 삶과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범람하는 불건전 종교집단과 이단 사이비의 급증, 그리고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메마르게하는 마약과 본드, 각종 향정신성 독극물들이 음지에 피어나는 독버섯 마냥 조용히 그러나 상당히 신속한 속도로 번식되어 가고있는
실정이다.
이에대해 성경은 이미 영적혼란과 핍박의 시대가 올 것을 예고 하고 있지만(딤후3:1-15, 마25:1-40)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전도현장을 잃어버린 채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21C를 이끌어갈 미래의 지도자들, 즉 후대들의 현장을
간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것은, 오늘의 청소년들이 심한 영적문제를 겪고있는 가운데 갈등과 방향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청소년들은 거리를 떠돈다. 이들은 꿈을 잃어버렸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는 그나마 대통령이나 과학자, 선생님이나
의사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들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물질의 풍요와 화려한 문화의 범람 속에서 오히려 청소년들은 내일에 대한
비젼(Vision)을 잃어가고 있다.
미확인된 사실이지만 중국 청소년의 90%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대답한 반면, 한국 청소년의
35%, 일본 청소년의 25%만이 꿈이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물질문명의 발전과 청소년의 허무주의는 비례한다고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퇴폐문화와 귀신문화의 홍수 속에서,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음란문화, 모든 일을 컴퓨터로 처리해 버리는 사이버시대의 도래로
말미암아 따뜻한 감성과 사랑, 신앙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은 심한 영적 문제를 겪고 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62%,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50%에 육박한다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청소년 문화의 위기 속에서 그 대안을 찾아 부심하고
있는 이때에, 청소년의 영혼을 가슴에 품고 「미친 듯이」 전도현장을 헤맨 류광수 목사의 발걸음은, 오늘날 책상에 앉아 탁상공론에 시간을 허비하는
정책입안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프로그램과 인본주의에 빠진 일부 기존 교회에 도전의 계기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너무나 전도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류광수 목사의 전도사역을 함께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의 영혼을 향한 긍휼함과 애절함으로 넘쳐 흐르는 가슴을 우리의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는 내일이 주워지고 세계의 청소년에게는 새로운 꿈과 진정한 자유가 솟구치리라.
실제적인 전도운동의 태동기 -
청소년전도운동
유년주일학교에서의 전도운동이 교회 내적 부흥에 동기를 둔 전도운동이라면 청소년전도운동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본격적 전도운동의 서막으로서 조직을 갖춘 전도운도의 태동기였다. 유초등부의 전도 폭발로 빚어진 다른 부교역자와의 갈등과 소외의 한계를 넘지
못하던 당시 류광수 전도사에게 김광일 장로의 제의가 들어왔다. 중고등부 사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전도만 할 수 있으면 어떤
제의도 괜찮았다. 그러나 막상 사역을 옮기고보니 만만치 않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학교 보내준 것 만으로도 감사했던 자신의
청소년시절과는 전혀 딴판인 아이들이 공부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해서 복음에 대한 확신도 갖지 못한 채 친구사이의 갈등, 집안문제로부터의 갈등
등으로 심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더욱이 대부분의 학생들이 복음도 없고, 관심도 없이 그저 반항 일변으로 나가고 있었다. 당시, 지식층의 신자를
확보하고 김광일 장로를 중심으로 흐르는 반체제 운동의 자유 분방함과 특권의식에 물들어 있는 부산중앙교회의 영적 기류를 그대로 타고있는 청소년
또한 인간관계 갈등과 자살의 충동적 욕구 속에서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는 교회내에서 무기력에
빠져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훼스티발(Festival)작전에 들어갔다. 중직자들의 비난 속에서도 찬양팀을 만들어 디스코텍 못지않은 분위기로 그들을
띄웠다. 한편으로는 겨자씨 작전을 써서 물밑으로 제자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김광일 장로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서 00장로(작고)와 그
계열의 부교역자들이 한 팀이 되어 그의 전도운동에 늘 쐐기를 박았다. 할 수 없이 내부의 핍박을 벗어나는 해결책으로써 당시 부목사로 시무했던
최동근 목사의 협조를 얻어 부산 YMCA 사무실의 한켠을 빌려 청소년 전도협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현재 부산 기독교신문사 사장을 역임하는 신이건
장로와의 교우(交友)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청소년 전도협회 구성 - 전도현장의 두려움이 없어진 시기.
부산 시내 전 지역의
중고등학교에 손수 전도메시지와 초청장을 써서 2천-3천장을 복사하여 배포하고 아이들을 모아 YMCA강당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때 입수된 교사
명단과 학생 명단을 참고로 다시 각 학교를 파고드는 전략을 통해 청소년 전도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반체제
운동가로서 심한 감시를 받았던 김광일 장로와의 교분때문에 '김광일 장로의 끄나풀인 류광수가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조직망을 짜고 있다'는 오해를
받아 정보부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는 해프닝을 낳았다. 그도 그럴것이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그 당시 큰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불행히도 부산 미문화원의 바로 뒤에 위치한 부산 중앙교회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방화사건과 맞물려 그 오해는 증폭되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 브니엘 고등학교 교사로서 당시 전도집회를 도왔던 임인호 목사(현재 부산 해운교회 담임)는 회상한다. "당시 류광수 전도사를
만난 교사들이 우선 변했죠, 그래서 교사들이 적극 도왔습니다. 똑똑하고 어학에 능통한 젊은 전도사라는 기억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다."
신이건 장로(현 부산기독교 신문사 사장)와의 교우(交友)
"당시 YMCA에 사무실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전도에 완전히
미쳐있는 한 젊은 전도사가 찾아와 책상 하나와 전화 한 대 만 빌려달라고 것이었습니다. 별 생각없이 허락 했습니다. 전도하고 싶어
죽겠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죠." 그런데 며칠 못가서 후회가 막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날이면 날마다 사무실을 찾아와 천둥치는
목소리로 "이 엄청난 황금어장을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옵소서."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 까지는 참아 주겠는데 손님이
찾아와서 눈치를 줘도 도무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한편 괘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 특이한 사람이다 싶어 할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많게는 3백명 이상 모여든 학생들이 그의 「신선한 복음」에 조용히 귀기울이며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한 사람에게 완전 홀키는구나." 하면서도 전도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한 젊은이를 바라보면서 미래에 뭔가
반드시 해낼 것 같은 비젼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작은 사람이 큰 일 하는 것 아닙니까, 복음 외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그
희한한 사람을 한 달도 못되어 제 사무실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제 자신이 전도 훼방하는 사탄 될까봐 꾹꾹 참았죠...허허허." 언론인다운
냉철함과 분별력, 그러면서도 인간애가 넉넉해 보이는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류광수 목사, 그는 엄청난 연단과 현장 훈련으로 빚어진 참
전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에 대해서는 겁이 없는 사람이죠."
(6)/ 전도만 할 수 있다면, 여자 기숙사 담도
뛰어넘는 배짱으로
전도자 류광수가 밟는 길은 늘 가파르고 메말랐다.
수정동 판자촌 비탈길이 그랬고 전포동 꼬방동네 골목길이
그랬다. 미신에 빠진 인생의 낙오자들이 모여살던 범천동 안창마을의 무당동네 가파른 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디 그 길 뿐이랴. 전도하겠다는
구령의 열정 하나로 달려가는 그의 앞길 또한 교권과 기득권 세력의 걸림돌들이 그로 하여금 험난한 길을 걷게 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휘몰아치는
전도의 물결을 인정은 하면서도 "너무나 똑똑해서 부담스러운" 류광수를 부교역자로 넉넉히 받아들일 '큰 그릇'들이 없었다. 세간에 회자되는,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는 노랫가락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시기와 질투의 악신이 들어가 버린 사울왕처럼, 그때 당시 부산
노회의 기류는 교교히 흐르는 힘의 논리로 전도자 류광수의 앞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이 무엇인지 피토하는 기도를 통해
알게된 그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찬송은 이거였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 ,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바다를 거쳐오는 습하고 더운 바람이 한 여름의 땡볕에 더위를 더하는 비탈길에 서있는 그에게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크고 능한 손을 펴서 그를 덮으시고 큰 바위에 숨기셨다.
동성교회에 부임하다
1985년 새 아침이
열리는 날, 전도자 류광수의 동성교회 사역은 시작되고, 그를 진정한 전도자로서 궤도에 오르게 한 '주식회사 삼화고무'의 공단 전도운동은 시초부터
다이나믹한 힘을 가지고 태동한다. 장로 4명이 둘씩 짝을 지어 편싸움에 급급해서 성도들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는 교회의 내분을 수습하고 부산에
외국인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꿈을 동시에 실현시키고 싶었던 최동근 목사(동성교회 84년 12월 6일 부임)에게는 영어통역과 뛰어난 기획력, 전도와
선교에 정통한 조력자가 시급히 요청되자, 부산 중앙교회 부목사 재임 시절, 청소년 전도운동의 진행을 경이롭게 해내던 류광수 전도사의 암팡진
모습이 자꾸만 눈에 잡혔다. 급기야 최목사는 동성교회에 부임하면서 '류광수 전도사 대동'이라는, 양보를 불사하는 조건을 내걸기에 이르게 되었고
그 조건은 관철되었다.
전도사가 담을 넘다니 ... !
독수리처럼 멀리 보는 눈과 개미처럼 치밀하게 주변을 정확히 관찰하는
시각을 동시에 가진 류광수에게 길 앞 건너 거대하게 서있는 주식회사 삼화고무와 1천명의 귀한 영혼이 함께 사는 기숙사가, 그리고 삼화여상이
정확하게 그의 시야에 잡혔다. 이미 고신대학 졸업 논문으로 '근로청소년 전도운동에 대해' 발표했을 만큼 공단에 애정을 가졌던 그에게 엘리야가
보았던 손바닥만한 구름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다름 아닌 교인 기록 카드의 신상란에 적힌 3명의 삼화고무 근로자 명단이었다. 즉시 그들을
불러 성경공부에 돌입, 제자로 키워나갔다. 그때 당시 규율에 얽매인 생활은 공단뿐만이 아닌 사회전반의 분위기였다. 모임 자체가 허용되지 않던
군사 파쇼정권은 언론의 철저한 검열로 말하는 자유를 막았을 뿐 아니라 회사마다 군사훈련식 시스템으로 경제 부흥을 빌미삼아 사원들을 옭아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마치 감옥 문처럼 굳게 닫힌 기숙사 정문 앞을 맴돌던 류광수는 드디어 담을 넘기에 이르렀다!!
율법과
도덕으로 정죄를 일삼던 그때의 바리새인들 눈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법행위였으니 교회는 잠시 소동을 치루어야했다.
"전도사가 담을
넘다니...! 그것도 여자 기숙사 담을, 음침한 밤에...!"
전도하고 싶고 복음을 말하고 싶어 피가 끊는 그는 '진짜 못말리는
전도사'였으며, 사람의 눈을 피해 기숙사 후미진 곳으로 스며들어가 '카타콤식 바이블 스터디'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으로 인해 지쳐있어야 할
자매들의 눈빛이 복음 앞에서 빛날 때마다, 공순이, 공돌이로 인생을 이미 포기해버렸던 그들이 새힘을 얻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분연히 일어 설
때마다 전도자 류광수는 같이 감격했다.
금남의 집에, 딱 하나 남자 은동현
남자 직공들의 어깨너머로 간간이 복음을 들었던
은동현, 그는 남자라고는 얼씬도 못하는 여자 기숙사에서 당당히(?)살 수 있는 단 하나의 남자였다. 늙수구레하고 왜소한 체격, 착해보이는 그의
외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어 식당에서 삽으로 밥푸는 일이며 주방일을 돕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기숙사에 들어가고파 몸이 달은 류광수의
앞에 나타났고, 류광수는 그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그때부터 담 넘을 필요없이 취사장으로 통하는 비상구를 유유히 거쳐 들어가 식당과 기숙사를
논스톱으로(?) 통과, 식당구석에서, 보일러실 귀퉁이에서, 그리고 수백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목욕탕 안에서 400여명의 전도하는 제자가
양육되었다. 공단 내의 핵심인물들이 모두 복음화 되자 류광수 전도사 말 한마디면 공장전체가 가동을 멈출 정도로 삼화고무는 하나님의 영토로서 그
경계선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잊을 수 없는 정해원과 김경애
어느 날 얼굴이 흙빛이 된 상무가 교회로 찾아왔다. 공장 집무실
책상에 올라앉은 정해원이라는 사원이 정신착란을 일으켜 전 공장을 소란케 한다는 것이었다. 급히 달려온 서장이 뺨을 맞을 정도이고 보니 목사님이든
전도사님이든 사태를 좀 수습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급히 최동권 목사와 류광수 전도사가 달려갔다. 공장 문에 들어서자 정해원은 소리쳤다.
"이 가짜 목사놈들아 다 꺼져라. 류광수만 데려와라. 진짜 목사는 류광수다. 류광수는 세례요한이다아!"
이후에 지속적인 개인
성경공부와 관심어린 심방을 통해서 완전히 치유된 정해원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한편, 신상파악을 전도의 기초로 삼았던 류광수의
눈에 띈 김경애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대학 졸업자였다. 그 때 당시 근로자를 와해시켰던 도시 산업선교회의 일원도 아닌 그녀에게
공장까지 올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거의 도피상태였으나 복음으로 세워지자 공장의 요소요소에 그리고 과별로 전도의 문을 여는 최고의
핵심전도자가 되었다.
공단을 살린 메시지
공장에서 일하는 그들을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낙심해 있던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우선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치를 누리게 하는 일이었다. 왜 예수만을 믿어야 하는지, 왜 전도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이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도전을 줌으로써 동성교회 역사 이레 전무후무한 청년 부흥이 일어났다. 부임 당시 2, 3명의
청년이 앉아 있던 예배실은 6백여 명의 청년들의 열기로 가득 채워졌다.
(7)/ 미국인 교수 도전으로 무속현장 관심 갖게 돼
전도는 안하는 것(Do not)이 아니라 못하는 것(Can not)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전도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사람들의 말이다. 예배당은 있으나 진정한 교회 -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교회 - 는 없고, 교리는 있으나 참된 복음이
끊어지고 교인은 있으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없으며 프로그램은 있으나 참된 기도와 참된 전도가 없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머리칼을 짤린 삼손처럼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성경책이 네 종류라는 비아냥이 회자될 정도로 하나님을 잘 믿노라하는 교인들끼리의 갈등은, 자신의 의지나 인격으로
도무지 통제가 안되는 거짓말의 현실 속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속이고 멸망시키는 간교한 자, 사탄의 실체와 영적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지식으로 알거나 종교 중 하나로 아는 무지와 타성에 깊숙이 젖어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교회나 교인으로 하여금
힘 빠지게 하는 존재가 누구인가. 사탄이나 귀신이라고 답하면 소위 특권의식을 가진 경건한 유대인이나 교권과 전통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웬 품위
떨어지는 경망스런 말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25년의 발로 뛰는 전도현장 속에서 인간의 삶을 완전하게 망가뜨리는 자, 더러운
귀신, 사탄의 존재를 밝히 알게 된 류광수는 진저리치도록 사탄을 미워했다. 범천동의 가파른 무당동네, 안창 마을에서 원인모를 고통과 재앙을
견디다 못해 '귀신내린 인생들'의 처절하게 망가진 삶을 바라보면서 그는 하나님께 피 토하는 기도를 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무속인과 역술인들,
그리고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복음 앞에 무릎 꿇고 돌아왔다. 신학교 교과서에서도 전도전문 서적에서도, 찾아 볼 수도, 배울 수도 없는 무속전도의
현장, 1백년을 웃도는 교회사 속에서 과연 누가 무속인의 애환에 복음의 눈길을 보내었던가.
류광수,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복음의 사각지대, 철저히 버려진 땅에 하나님의 사랑 가득한 복음의 씨앗을 걸음마다 뿌림으로써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이 시대의
전도자가 되었다. 모방은 여러 사람이 공유(共有) 할 수 있으나 창조는 혼자 만의 것이다. 더구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창조적 메시지가 사람을 살리고 교회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왕상3:10)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얻어진, 지혜와 명철의 창조적 열매임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본지에서는 그의 본격적인 무속 전도현장의 증거들을 엮어가기
전에 교권에 의해 꼬이고 왜곡된 다락방 전도총회의 사탄론 내지는 귀신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고자 한다.
-
다락방 전도총회는 기존교단과 달리 전도 측면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은 이미 한국 교계에서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무속전도의 측면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런 무속 사역에 관심을 갖게된 동기가 있습니까?
▲ 복음을 바르게 깨닫기 전에는 주변에 가까이 있는 무속인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그저 나와 상관없는 또 하나의 삶의 형태나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도현장 속에서 복음을 가슴으로 이해함에
따라 얼마나 무속인들의 삶이 심각한 위기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더욱 나를 못 견디게 한 것은, 귀신들려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회가 해답을 줄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베뢰아로 가서 이단에 빠지거나 아니면 교회를 아주 떠나버린다. 실제로 전도현장에서 만나는 무속인의 70-80%가 전직
집사였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해답이 성경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윤리, 도덕, 질서 운동, 섬김, 개 교회 부흥만 강조되는
교회 안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토록 심각한 무속현장에 대해 한국교회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 신학을 공부하던 때에도 무속 현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 고신대학에서 공부 할 때, 데오르드 하돌이란
미국인 교수가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면서 '한국 사람은 이상하다. 왜 한국의 무속을 연구 하지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통도사는 불교 신학교가 있고
범어사는 어떻고… 하는데 강한 충격을 받았다. 또 다른 계기는 김권호 교수의 샤마니즘 강의를 통해 무당이 되는 이유, 시기, 그들의 사역을
배우고 나서 꼭 연구해 보리라 맘먹었고 그후 이에 대해서 논문도 썼다.
- 본격적인 전도시기와 무속전도의 시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약 25년 전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열심과 부흥동기로 전도했고 정확하게 22년 전부터는 전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무속 전도사역은 약 20년 전부터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구체적 방법을 모르던 중에, 13년 전 안창마을 무속전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가장 전도하기 쉬운 데가 신학자보다도 무속인이다. 왜냐하면 나와 훨씬 말이 잘 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득도'에 30년간 교주로 있던 분이 지금은 좋은 성도가 되었다.
- 13년전과 비교해서 무속 현장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어떻게 확산되었습니까?
▲ 우선 학력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 눈에 뛰는 변화이다. 시대가 어려워서인지 무속인이 급증하고 문화권에 깊숙이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서민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은 상류층 사람들이 그들을 모시고 다닐 정도로 영적인 리더가 되어있다. 사실상
그들은 서민들에게 교회보다 훨씬 가깝고 친밀하다. 왜냐하면 미래를 점쳐줄 뿐 아니라 종교와 문화라는 양면성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책에는
문화라는 옷을 입고 파고들었고, 서민에게는 종교로 접근한다. 이것이 그들의 강점이다.
- 교회에서도 평신도의 일부와 심지어
목회자, 중직자들까지도 주역이나 택일, 궁합, 기(氣) 운동 같은 것에 참여하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교회는
무속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무속인은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준다. "내가 교회 다녀보니 안되더라"는 그들의 간증(?)에 교인들은 쉽게
미혹된다. 인간에게는 기(기)가 실제로 있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최면술, 기 운동, 병 고치는 초능력 같은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이런 것을 배우고 있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도 그들이 특별히 외우게 하는 주문이나 가르치는 사상이 비 성경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 방향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교회 내에서 '예언의 은사'를 내세워 미래를 점쳐주는 직분자들의 사례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은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악한 영의 역사로 보시는지요.
▲ 만일 이런 것이 자생하고 있다면 개인이
실제로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정시, 무시기도만 잘하면 하나님께서는 개인에게 말씀으로 미래를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복음적이기보다는 특별한 체험을 중시하는 기도 쪽으로 감각이 빠르고 대부분 신비주의 성향을 짙게 띄고 있다. 한 번에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체험하려고 한다거나 착각된 것을 현실로 보려고 하는 신비적인 태도는 옳지 못하다. 늘 그런 방식으로
예배드린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사도행전 26장에서 큰 역사를 바울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바울에게
주신 로마 복음화의 언약을 확인시키고, 그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위로를 주신 것이었다.
- 다락방 전도운동은 유독 창세기 3장의
사탄의 출현에 대해서 강조함으로써 한때 베뢰아 사상을 이어 받았다는 주장이 난무했었는데 실제로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교계의 어떤 분들이 마음대로 추측하고 상상해서 '베뢰아 아카데미'에 수료 여부를 직접 확인했으나 명단이 없음을 확인했다. 한때 베뢰아의 성경적
오류에 대해서 교무과장과 토론할 것을 제의했으나 그쪽에서 노코멘트였다. 사실상 초대교회의 바울 이래로 창세기 3장의 비밀이 감취어져 왔다고
본다. 바울은 이 영적 사실에 대해 대단히 밝은 전도자였다. 1차 전도여행 때는 구브로에서 정치권을 장악한 무속과 대결했고(행13:4-12)
마게도냐 사역에서는 복음을 방해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했으며(행16:16-20) 두란노에서는 악귀가 떠나가는(행19:11-12)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전도자들은 사탄의 전략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신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상
웨슬레나 무디의 전도운동은 시대상황에 맞아떨어진 성공적 전도운동인 반면에, 창세기 3장에 감추어져 있는 어마어마한 비밀인 여자의
후손(창3:1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나, 사탄의 실제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고 본다.
- 사탄의 존재가
개인과 가정, 문화, 정치, 경제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활동한다고 보십니까?
▲ 사탄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 존재하며 인격적인 행위를
한다. 따라서 단순한 상징적 존재나 관념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개인의 약점을 잘 알고 공격하기도하고 문화권에 파고 들기도하며
좋은 것으로 위장하여(고전11:17) 불신자의 마음과 생각을 조정하기도 한다. 사탄의 양 날개는 종교와 타락한 세상이다. 즉 광명을 위장하여
종교, 지식, 철학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은 완전한 어둠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다. 특히 사탄은 개인의 마음과 생각을 건드리며
감정을 가지고 조정한다. 특히 미움이나 의심, 오해 같은 것으로 생각을 타고 들어오며 성격이나 체질을 컨트롤 하기도 한다.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은 뇌부분을 통제당한 것으로 본다.
- 그렇다면 복음을 가진 자에게는 어떻게 공격하는가.
▲ 예를 들어 바둑을 둘 때
실력이 부족하면 속임수를 쓰듯이 이미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신분과 권세를 지닌 성도에게는 궤계를 써서 늘 속이려든다. 따라서 사탄의
속임수를 알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사탄의 활동에 대해서 무지한 교계의 성도들을 향후 어떻게 일깨우시겠습니까?
▲ 성경에 있는 대로 만 끊임없이 얘기하겠다.
- 지나치게 전도만 강조한다거나 창세기 3장의 사탄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오해로 인한 이단시비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시겠습니까?
▲ 이 문제를 푸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순복음 교회는 이 문제를 풀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노력마저 하지 않겠다. 한국교회와 함께 가려고 하는 내 마음의 중심을 이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교계에도 이미 밝힌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이단 시비에 묶여 있다고 해서 낙심한 적은 없다. 교회사를
보라, 흥미있는 사실은 진짜 복음 전하는 자에게는 꼭 이단 시비가 따랐다. 초대교회가 250년간 이단이란 누명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진짜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죽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닌가. 요한 웨슬레도 그랬고 무디도 그랬다. 이것이 교회사의 아이러니이다. 초대교회가 로마를
정복했듯이 전도가 되어지는 그 날 이단 시비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에서는 다락방 안하는 교회가 이단일 정도가
되었다.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락방 전도총회에서 말하는 사탄론이나 귀신론, 조직신학은 요한 칼빈의 신학이론에 위배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 학자 메릴 F 엉거(Merrill F. Unger) 박사가 언급했듯이 교회가 마귀의 억압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를
포기한다면 영적 파산을 선고하는거나 다름없다고 본다.
- 한국교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전도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첫째는 목회자 자신이 버리지 못하는 개교회 부흥에 대한 욕심이 문제라고 본다. 부흥 열정이 너무 강하다 보니 목회자도 병들고 성도도
힘들어하고 있다. 그 단단한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참된 전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날 참된 해방과 자유를 맛볼 것이다.
둘째는 전도현장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상 목회자 자신도 전도현장에 가서 직접 불신자나 무속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기피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로는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할지라도 다른 사람까지 영향력을 미칠 만한 영적인 힘이 없다. 수박 겉 핥기 식으로 골고루 성경공부만 해서 지식만 쌓거나, 말을
잘해서 부흥사로 나가거나, 훌륭한 인품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분명 이것은 좋은 것이지만 현장과 민족과 세계를 살릴 만한 교회로서의
강력한 힘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8)/ 떠 밀려간 안창마을에서 무속전도 눈 뜨게 돼
리처드 버크는
그의 저서 '갈매기의 꿈'에서 아름다운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의 말을 빌어 "하늘을 난다고 하는 것은 날개를 퍼덕여 단순히 장소를 옮겨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동료 갈매기들이 비와 안개에 갇혀 바위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 시속 342Km의 한계
속도에 도전하여 이루어낸 갈매기 조나단의 비행 기록은 갈매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만 먹이를 찾고
살아가는' 갈매기의 평범한 삶의 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갈매기 평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머나먼 곳으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초대교회의 역사 이래로 약 이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기독교회사에서 율법과 교권과 인본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시대적 전도자들은 그 시대에 늘 질타의 대상이 되어왔다. 소위 이단이라는 딱지를 떼어내지 못한 채 그들은 안일한 기독교의 풍토에서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유배지인 거리로 내몰려야했다.
그러나 유배지가 곧 천국이었던 갈매기 조나단과 같이 시대적 전도자들이
강단에서 밀려난 거리에는--그 시대의 교회가 미처 보지 못했던 복음의 사각지대--그곳에는 하나님의 최고 관심이 머무르는 '갈급한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 웨슬리가 그랬고 무디가 그랬다. 그들이 밀려난 공장지대와 시장거리, 교도소, 군부대, 어린이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은 교권과 율법, 종교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희열과 기적들이 있었다.
전도자 류광수, 그는 신학책을 펼쳐놓고 책상에
앉아 분석하기보다는 강단에서 밀려나 외로이 선 좁은 비탈길에서, 실패한 인생들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전포동 꼬방 동네에서, 말이 좋아 수출역군이지
노동의 무게에 눌려 허리 펴지 못하는 인생들의 한숨소리 가득한 공장의 한 모퉁이에서, 귀신들려 맨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무당마을에서, 그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위력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는 귀담아 듣지 않는 한국교회를 향해 울부짖는다. '오직
예수'만이 인생의 해답이며 '오직 전도'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여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무속의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과
전도자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세상보는 지혜를 배운 전도자 류광수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안창 마을 - 그 첫 걸음
비루함이 운명처럼 내려앉은 판잣집들이 게딱지 마냥 내리막길에 아슬아슬 붙어있고 비바람에 삭아 문드러진 사립문 조각들 사이로 어스럼 불빛
새어나오는 초저녁의 범천동 무당 마을은, 악다구리 쌈박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 악에 받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내일 아침끼니는 없어도 안주
없는 깡술만은 거를 수 없어, 어깨에 짊어진 빈 지게 무게도 감당키 어려운 비쩍 마른 몸으로 비틀거리며 걷는 지게꾼의 한숨 섞인 타령조
노랫가락이 늘 시끌쩍한 '인생의 실패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 퀴퀴한 시궁창 냄새에 야릇하게 섞여 동네를 흐르는 향불 냄새까지 교교하게 스며드는
소위 재수없는 동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이는 인생낙오자들이 모여 사는 안창마을, 그곳에 류광수 그가 발을 디딘 것은 솔직히 특별한
박애정신이나 사명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강권적으로 밀어붙인 하나님의 큰 손, 그의 강한 팔이 그를 움쩍 못하게 껴안아다가 동댕이치듯
그의 작은 몸뚱이 하나를 왕따시켰다.
생명 걸고 전도해 보겠노라고 밤잠도 사양한 전도자 류광수의 무소유(無所有)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교계의 풍토는 척박했다. 더구나 전직 부목사가 끼리끼리 패거리 만들어 몽땅 끼고 나가 버젓이 교회 하나 세우는 바람에 생긴 분열의
상채기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동성교회의 당회원들에게는, 육칠백명의 청년들의 구심점이 되고있는 부목사 류광수를 평범하게 봐주기엔 지난 날의 아픔이
너무나 깊었던 것이다.
평소에 전도자 류광수로서 그를 각별히 아꼈던 당회장 최동근목사가 예사롭지 않게 갈등과 수심에 찬 얼굴로
그를 부른 것은 당회가 있는지 수일 후였다. "류목사, 내가 자네를 얼마나 아끼고 신뢰하는지는 잘 알 것이네, 그러나 당회의 결정이어서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주기 바랄 뿐이네." 삼화고무 기숙사를 중심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청년전도사역을 떠나 새로이 배정된 교구는 그를 잠시
아연하게 만들었다.
안창무속마을 - 간판만 안 걸었지 한 집 건너 무당들이 산다는 그 동네에는 겨우 교인이 한 두 가정, 그것도
삐지기 잘하고 말이 많아서 골치 아픈 교인 두서넛 정도였다. 그날 이후 그는 미로처럼 얽힌 안창마을 구석구석을 여리고를 돌 듯 걷고 또 걸었다.
겨울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비탈길을 곡예하듯 올라 심방가던 류광수, 그는 양지볕 쪽에 버려진 걸레처럼 비천하고 힘없이 앉아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서는 그냥 지날 칠 수 없어 말을 붙였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셔야 삽니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를 뒤로하고 일단 심방을 마친 후
다시 도전(?)해보리라 발걸음을 돌렸다.
난생 처음 가본 무당집에서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 자리엔 이전의 그 아저씨가
아닌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예수 믿으셔야 삽니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대응해서 나온 대답은 전혀 예측치 못한 것이었다. "어디,
그럼 날 예수 믿게 만들어 본나." 벌떡 일어선 그녀는 손을 들어 자기 집까지 가르쳐 주고서는 황망히 사라졌다.
그가 동성교회 부목사인
것을 알고있는 가겟집 아주머니가 곁으로 다가서며 속삭였다. "목사님, 그 집 가지 마시라예, 저 여자 나쁜 여잡니다. 신학교 다닐 때 찍은
전도사 사진까지 걸어놓고 점치고 있다 아닙니꺼, 못된 여자라예." 말리자고 한 그 말은 오히려 류광수의 발 걸음을 더욱 떠밀어서, 어느새 그녀의
시커먼 집 앞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 무당 집은 한 마디로 사람이 사는게 아니었다! 삭아서 너덜거리는 방문은 마루도 없이 토방에 걸쳐있었고 방
한 칸에는 세 명의 환자가 널부러져 누워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오십이 훨씬 넘어 뵈는 퀭한 눈의 사내가, 아마도 남편인 듯 싶은데
이빨도 빠지고 머리도 빠져버린 흉한 몰골로, 딸로 보이는 다른 병자와 부시시 일어나 앉았다. 가난이 죽죽 흐르는 신당에서는 곧 구토가 날 것
같은 향불냄새가 배어있었는데 사각모 쓴 그녀의 신학교 시절의 사진이 걸려있어 분위기를 더욱 기괴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머니,
내가 살리러 왔소이다, 이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신학교까지 나온 사람이." 전도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뛰쳐나오고 싶은 그 집에서 그는 차분히
복음의 위력을 설명했다. 우상 섬기며 귀신과 교제하면 어떻게 망하는지, 삼사 대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었을
때 누리는 축복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있던 병약한 딸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울음이 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예수 믿고 구원 받겠심더." 예수님을 영접한 그녀의 딸은 그날 이후로 완전히 치유 받아 병석에서 일어났고 그 소문은 발빠르게 안창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안창마을이 복음화되는 첫 순간이었다.
기생라합같은 리장을 통해 전도의 문은 열리고
우상을 섬겨 생긴
영적인 문제가 그 원인인 병은, 원래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깨끗이 치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소문을 예사롭지 않게 들은 것은 그 동네
리장 김씨였다. 그 리장 집에는 부모 말이라고는 발악적으로 듣지 않는 딸 하나가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뿐 아니라 원인불명의 병으로 늘
비실거렸다.
안창마을에서는 나름대로 배울 만큼 배운 유지로서 행세를 부렸던 그였지만 자식문제 만큼은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던 차에
류목사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그의 딸이 교회에 나가 변하는 모습을 보고 받은 그의 충격은 대단했다. 자녀를 통해 증거를 본 리장 내외는,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능히 알아낼만한 훤한 정보통으로 류광수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어이, 박씨, 그거 점치는거 말고
류목사님 말씀 좀 들어봐" "에헴, 김아무개인가, 이젠 무당질 때려치고 여기 선생님 말씀 좀 들어보게나" 징치고 북치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전도의 문을 여는 것은 리장이었다. 기생라합을 통해 육중하고 단단한 여리고가 무너져 내렸듯이 하나님 살아계심을 실제로 체험한 리장과 그의
가족들의 전도열정과 도움에 힘입어 복음으로 파고든 무당집마다 한 사람 씩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한 번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불모지, 아니 전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전해야 할 이유는 물론 방법조차 몰랐던 무당들에게, 전도대상으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귀신들린
자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것은, 그렇게 순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서곡에 불과한, 이곳 안창마을로부터
시작된 무속전도는 이후 전도자 류광수로 하여금 영적 사실은 물론 성격적인 전도방법을 일깨워주는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오는 축복의 현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무척 사랑하시는게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나를 무속마을에 보내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오늘날의 류광수는 없을겁니다."
(9)/ 무속 현장에서 깨달은 마가 다락방 성령운동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으로부터 이방선교의 전초기지였던 안디옥교회의 출현까지, 초대교회사는 그 전편을 마무리 한 후, 성령의
거대한 역사로 그 후편을 전개해나갔다.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바꿔놓은 초대교회사의 후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성령의 적극적인
개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선민사상의 두툼한 벽을 허물고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과 이방인에게 기쁜 소식(Good News)을
선포하는 이방선교의 길이 험난할 것임이 분명한 터인지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명쾌한 승리로 서막을 여는 대역사를 준비하심으로써 그에게
위로와 담대함과 용기를 선물하셨다.
그것이 바로 무속(巫俗)과의 한 판 승부였다.
정치와 권력의 뒷전에서 궤계와 악행으로
주 하나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마귀의 자식(행13:10), 박수 엘루마를 단판에 꺾음으로써 복음의 능력이 어둠의 세력을
능히 제압하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역사로서 전도자 류광수 앞에 펼쳐진 안창마을의 무속전도사역과 그로부터 맺어진
전도열매를, 애시당초 기독교 사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우연'이라는 단어로 억측을 부릴 수 없는, 너무나도 명백한 성령의 쾌거였다는 해석
앞에서 무리가 있다고 말할 자 그 누구이겠는가! '귀신들린' 운명에서 빠져 나오는 길을 몰라 방황하는 그들 영혼들, 가난과 실패와 어둠 만이
숙명처럼 덮여진 안창마을을 긍휼함과 구령의 열정으로 가슴에 싸안은 류광수, 그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물은 바울행전의 성취 곧, 가는 곳마다
말씀으로 그 지역을 정복하는 다락방전도운동을 향한 비밀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었다.
류광수, 그의 표현을 빌자면 무속인 전도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고두고 내려주신 축복'은 다락방전도운동이라는 비밀스런 문 뒤에 숨겨진 엄청난 보화들 - 말씀성취,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영권, 후대, 경제력 - 이었다.
* 남의 밭에서 왠 전도?
복음의 사각지대에 빛이 들어가 전도사
출신 무당의 전 가족이 회심한 일과 발빠른 동네 리장의 전도열정을 힘입어 안창마을에는 가랑비가 굳은 땅에 스며들 듯, 복음은 그렇게 은밀히
집집마다 파고들었다.
무속인들로 한 구역이 형성되고 마을에 말씀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자 마을 단위 전도집회를 열기로 계획하기에
이르렀고, 전도하고자하는 물밑 계획을 세운 전면에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잔치 겸 부흥회로 기획된 집회인지라 기념 타올도 만들고 축제분위기도
은근슬쩍 돋구었다.
아무래도 그 집회를 위해서는 작기는 하지만 그 마을에 유일하게 서있는 하나 뿐인 교회가 적합하리라 생각되어 그
고신 측 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을 찾아갔다.
순수한 동기에서 흔쾌한 대답을 예상하고 찾아간 류광수 앞에는 예측불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남의 밭에 와서 왠 집회...?!"
당장 꺼지라는 노발대발과 함께 할 수없이 뒷걸음 친 그는 차선책으로써 당시
유아원으로 쓰이던 마을회관을 빌려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고 은혜였습니다. 예배당이 아닌
마을회관에서 집회를 여니까 뭐 재미난 일이 있나해서 무당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참석했지 뭡니까. 우리의 기준과 수준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전도의 큰 열매를 얻게 되었죠."
* 무속전도를 통해 확인된 영적 사실과 체험
처음부터 영적사실, 좁혀
말하면 귀신의 세력에 대해 그가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지닌 차가운 머리의 소유자였던 류광수의 체질상
'귀신'에 대한 언급자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와 광신으로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무속인을 바라보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텐데'라는
마음은 품었지만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몰라 고민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평화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시절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무당으로 있다가 예수 믿은 무식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교회의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찰로서, 전도를 제일
많이 하는 분이셨다. 늘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라고 중얼중얼 하곤 하셨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큰아들은 이렇다할 직업도 없이 정신이상이
되었고, 작은아들은 불치병에 시달렸다.
그저 처음엔 "무당 하다가 예수 믿으니 저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으로 지나치다가 슬쩍 말한(?)
복음을 들은 둘째 아들이, 완전 치유되어 신학을 하게 되었다.
내심 우연이려니 생각 하다가 얼마 안 있어 교회당 종소리만 들리면 귀를
틀어막으며 '제발 예배만 드리지 말라'고 괴성을 지르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를 만나게 되었다.
교회 옆 사택에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지라, 그 애의 발악이 골칫거리여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아이를 방문한 순간 섬뜩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아하,
저게 바로 귀신들린 얼굴이구나."
성경에서 본 그 귀신, 그의 머리에 관념적으로 새겨졌던 귀신의 정체가 형상화되는 순간이었다.
엉겁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이름을 사실적으로(?) 선포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시로
그 아이는 깨끗이 치유되었다. 놀란 것은 그 가족도 가족이지만 속으로는 류광수, 그 자신의 놀라움이 더욱 컸다.
아직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에 그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답변하는 그에게 성도들은 '엄청난 믿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기실 그의 마음 속에는 '우연'이라는 의심이 꼭꼭 숨기어져 있음을 누가 눈치나 챌 수 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지 않으셔서 그의 불신앙을 완전히 제거하는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드셨다.
친정과 시댁이 동시에 이 대 째 무당을
하고있는 집안의 외아들 신복근이 급성폐질환으로 죽게되었는데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듣고 완전 치유되는 기적을 베푸신 것이었다.
일
년 사이에 일어난 이 놀라운 세 번의 체험을 통해 그에게는 '전도자의 권세'에 대한 확신이 심어졌고 동성교회로 부임하여 떠 밀려간 안창마을에서,
그의 전도로 점철된 인생을 좌우하는 무속사역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이었다.
*교회없는 마을, 우상마을 찾아다녀 결국
우상의 땅 태국까지
한국 전도와 세계선교는 무속사역을 모르고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린 후 세상 말로 류광수 그는 그때부터 전도에
미쳐버렸다.
명절도 없고, 쉼도 없었다. 전도하는 청년 30명과 함께, 모아 교회당 짓는다고 전도사 두들겨패서 내쫓은 울진마을로, 교회도
없고 복음도 없는 오직 우상 섬겨 절반은 정신병자가 모여 사는 경주 안강마을로, 그의 발걸음은 지칠 줄을 몰랐다.
이후 생(生)을 건
그의 무속 전도는 우상의 땅 영도에서 화사한 꽃을 피우고 태국까지 뻗어갔다.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있는 태국의 '쌩께오'는 부적을
악세사리처럼 목에 건 초등학교 3학년의 어린이었다. 백혈병으로 머리칼 한 올 남지 않은 어린 대머리 소년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나도 예수
믿고 싶어요"라는 고백 한 마디로 완전 치유되어 온가족이 복음화된 것이었다.
*다락방의 효시는 안창마을의 무속인 구역에서부터
공단전도 운동에서 일어난 청년전도자 100명을 이끌고 안창마을에 들어가 복음의 바람을 일으켜 얻은 것은 무속인으로 구성된 한 구역이었다.
부목사로서 당회장이신 최동근 목사님을 겸손히 섬기면서 전도에 힘쓰는 류광수를, 최목사는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한편 그에 대한 존경심도
주저없이 표현하는 큰 마음의 소유자였다.
"저 친구에게는 배울 것이 있다"며 수요예배 설교를 빠짐없이 경청하던 최목사가 어느 날 무속인
구역에서 일어나는 성령충만의 역사를 보고 던진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맞다, 이것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말씀운동을 다락방이라 부르자." 안창마을의 무속사역에서부터 그렇게 시작된 다락방말씀운동은 서서히 그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상을 진단하는 불신자 상태와 신자의 축복은 성경에서 발견된 비밀
점치는 일이 생계와 직접 연결된 무속인들이 말씀으로
삶이 변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을 양육하는데는 말씀의 지속과 반복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메시지가 성경에서
답을 찾은 불신자 6가지 상태로 세상을 진단하는 것이고 성도가 누리는 7가지 신분과 권세였다! 하나님 떠나서 우상을 섬김으로써 오는 영적인
문제, 이에 이어져 고리처럼 이어지는 정신문제, 육신문제, 생활의 문제 그리고 내세문제와 후대에게 계승되는 영적 유산과 그 대물림의 문제는 바로
안창마을 주민의 문제였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진단 받은 그들에게는 힘을
주는 메시지가 또한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누리는 7가지 신분과 권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양자권(요1:12), 성령의 내주
인도역사(요14:16), 그리고 기도응답권(요14: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리는 영을 동원하고(히1:14), 귀신을 결박하고 내어쫓는
권세(막3:15, 마12:28, 29), 천국시민권(빌3:20), 세계정복권(행1:8)이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소망의 메시지는 인생에 철저히
실패하고 낙오된 그들에게 환희의 빛으로 다가와 그들의 삶을 족히 변화시켰다.
*전도학교의 시작
봇물처럼 터지는 성령의
역사와 전도의 열매를 감당하고, 무리 속에서 전도하는 제자를 찾아내는 지속적인 사역을 위해서 류광수의 뇌리를 스친 계획 중 하나가 전도학교였다.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지표가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면서 전도전략에 대해 꼼꼼하게 짜여진 강의안은 류광수,
그의 손으로 직접 쓰여졌고, 그 말씀에 의해 힘을 얻고 기도응답을 실제로 누리는 성령충만의 역사를 통해서 한 기에 100여명의 전도자를 양육하는
전도학교의 장거는 그가 동성교회를 사임하기까지 2년간 지속, 5기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다.
*무속전도는 축복의 비밀 중에서 가장 큰
비밀
류광수 그는 말한다.
"무속인 전도를 안하는 이유는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도 없고 해 봤자 잘 안된다는 선입견과 그들에 대한
심리적 위축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결국 무속인에 대한 전도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믿음으로 그들 집에 드나들기만 해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과연 목회자 중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나는 바로 그 축복의 증인입니다. 무속전도에 관심만 가져도 그
전도자에게는 절대로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미래의 축복까지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바로 이 비밀 중의 비밀을 한국교회와 나누고
싶습니다."
(10)/ 말씀 성취의 현장,
◆ 생각을 여는 글
땅 끝까지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좇아 한국 기독교사의 텃밭 위에, 마른땅을 기경하여 '오직 예수'와 '전도'라는 거룩한 씨앗을 심은 다락방 전도총회의
태동은 참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답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땅, 부산의 끝자락 영도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부산이라는 본토에서
실패한 자들이 도망치듯 몰려와 적당히 자리를 트는 영도 땅, 한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들이 태종대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오직 생의 마감을
상상하는 절망의 땅, 영육 간에 치료받아야 할 인생의 낙오자들이 주로 모여 산다는 척박한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제는 세계복음화의 베이스
캠프(Base camp)를 든든히 세워 놓은 것이다.
십이 년이 하루 같다는 전도자 류광수의 표현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오늘날의 동삼제일교회는 오히려 숙연하다.
이미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준비된 동삼제일교회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과 계획 속에 진행되었다.
핍박과 환난의 상황을 반전(反轉)시키는 하나님의 심묘막측한 상황전개는 전도자 류광수의 진실한
기도로부터 절묘하게 시작된다.
수백 명의 주일학교 어린이들, 꼬방동네 청소년들, 점포동 비탈길 골목마다 가난에 찌든 어른들,
안창마을의 소망없는 무당들, 주야로 기계 돌아가는 소음에 지친 노동자들..., 구령의 열정으로 그들을 향해 가슴 내민 그의 음성을 듣지 않은 곳
그 어디랄 수 있을까.
그가 밟은 땅 마다 씨알 틔워 잎 나고 꽃이 피더니 드디어 작은 꽃받침 위에 연두색 여린 열매가 맺히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시간표는 동삼제일교회 위에 정교하게 맞추어졌던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사도행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온 오늘의 동삼제일교회와 다락방 전도총회가 있기까지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잊지
못할 사건들이 그득히 쌓여있다.
벼랑에 선 듯한 그를 향해 손 내어민 따뜻한 사람들도 있고, 때로는 원수처럼 그를 괴롭히기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엔 누구나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자신의 영혼을 회복시킨 고마운 사람들로 새겨져 있다.
바로 그 이야기들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 내가 가는 곳, 영도다. 한 사람도 따라 오지 마라
전도학교가 본격화되면서 참된 전도의
일꾼들이 세워지고 공단과 무속사역이 무르익는 그 즈음에도 동성교회에서는 장로 너댓이 패를 나누어 여전히 자리다툼에 몰두하고 있었다.
화장실과 붙어있는 당회실에서는 고성이 끊이지 않아 새신자가 시험들 정도였다.
싸우는 교회에 진저리치던 차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J 목사의 동기부여는 류광수 목사로 하여금 새 일을 위해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봐, 류목사. 빈 교회 있으면
이력서도 내 봐, 쌈박질하는 교회에서 그리 가만있으면 되나...? 대책을 세워야지."
사람이 할 일, 하나님이 할 일 따로 있을까...?
새벽 미명에 꿇어앉아 류광수, 그는 진실한 기도 속으로 들어갔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망 중에 기다릴
뿐이었다.
"주님, 제가 이력서 가지고 이곳 저곳 다녀야 합니까. 돈도 없고 배경도 없지만 제가 전도하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어느 때든지 맘놓고 전도할 수 있는 교회 문만 열어주시면 가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싸움하는 교회는 안 있게 해주십시오."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역 앞 '행운 커피숍'에서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김금애 집사와 하을연 권사(박원규 장로의 부인)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역시 분쟁이 심한 동삼교회에서 상처 입은 채 '싸움에 밀린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그곳에서 '선 보이는 설교'를 제의해 온
것이었다.
"이력서 낸 분이 30여명이라는데 나까지 내면 되겠습니까? 더구나 선보이는 설교는 하지 않겠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싶으시면 주일저녁에 오시든지 이 테잎을 들으시든지 하십시오."
그 후에 박원규 장로로부터 걸려온 전화내용은 이것이었다.
"목사님을 모셔야 겠습니다. 선보이는 설교가 절대 아닙니다..."
사직하기 전, 그는 중요한 청년 전도요원 30명을 교회로 모아
20일간 비장한 고별설교에 들어갔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동안 자신이 체험한 전도현장에서의
모든 전도전략을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그렇게 쏟아 부었다.
그리고 마감하는 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가는 곳은
영도다. 한 사람이라도 절대 따라나오면 안된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들 도움은 조금도 필요없다."
◆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만 원했던 38명으로
한편 부산 영도에 위치한 동삼교회는 30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였다.
그때 당시 12년을 몸담고 있었다는 김금애 집사의 증언이 적나라하다.
"갈려나오기 사오 년 전부터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주보에 오자가 났는데 누구 책임이냐느니, 아무개가 한 대표기도는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느니..., 무가치한 논쟁이 그칠 날이
없었지요. 그 내면에는 당시 K 목사를 쫓아내려는 K 장로의 술수가 있었습니다. '짐 싸고 갈 준비하라'는 식이었죠.
일년동안
시달리던 목사님은 결국 그 장로를 치리하여 일년간 근신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당회권한도 박탈하고 대표기도도 안시키는 벌이었죠."
그때부터 교회의 분쟁은 본격화되었고 급기야는 1987년 5월 어버이 주일에는 목사를 구타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금식기도로 부르짖는 일부 성도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2주 후 예배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목사님이 걱정되어 사택에 찾아간 박우성 장로(그때 당시 집사)의 눈에 비친 K 목사는, 방 한 켠에 밀쳐진 채 장정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면 되겠느냐고 나서는 그에게 "야, 박우성이, 너 언제부터 동삼교회 다녔냐?"며 오히려 등등한 기세로 달려들어 넥타이를 잡고
후려쳤다.
새벽기도회 때마다 바로 앞자리에서 큰 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K 장로를 보며 처음에는 등돌렸던 성도들이 하나 둘 동정표를
던지더니, 결국 평소 앙숙으로 지내던 남전도 회장까지 똘똘 뭉쳐 K 목사를 집중 공격한 끝에 재직 40명이 결속하여 일으킨 폭행 사건이었고 결국
노회가 개입하여 중재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철야하며 금식하며 교회의 회복을 기도했던 김금애 집사와 박원규 장로,
하을연 권사를 필두로, 예배당도 없고 교역자도 없는 첫 예배가 그 사건이 있을 지 두 달여 만에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정하여 순수하게 모인 그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회자를 찾아 나섰던 끝에 만난 전도자가 바로 류광수였던 것이다.
◆ 동상제일교회 예배의 첫 설교
"모든 교인들이 확실한 복음이 없어 자리다툼과 이해관계에 빠져있는 것이 기존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그저 열심히 봉사해야하고 헌금 많이 내야 복 받는다는 생각이 지배하다보니 맥 빠지고 힘 빠지고 자리 싸움만 하게 되는
것이죠."
박원규 장로는 덧 붙여 말한다.
"그런데 테잎으로 들어본 류 목사님의 설교는 뭔가 달랐습니다. 그때까지는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었지요."
나경숙 집사의 2층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는 미술학원과 삼원 스포츠
공장자리를 거치는 사이 거의 80명으로 확장되었다.
순수하게 시작된 동삼제일교회가 백퍼센트 찬성으로 전도자 류광수를 청빙,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하리라"(행27:9-25)는 그의 설교를 들었던 시간은 세계복음화의 일성(一聲)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 말씀의 성취, 그 현장의 시작
거처할 만한 변변한 사택도 없이 황망히 동성교회를 사임하고 나온 류광수
목사는 겨우 몸 누일 사택을 마련하자마자(이때도 결국 김광일 장로의 도움이 컸지만) 그의 힘있고 부지런한 성격대로 본격적인 2주간의 전도전략
부흥회에 돌입했다.
"88년 9월 군 제대 후 첫 금요철야에서 듣게 된 류 목사님의 전도 메시지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백운규
전도사(당시 청년)는 회상한다.
더욱이 교회에서 조용히 봉사나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지산옥 전도사(당시 집사) 또한
전도자 류광수를 통해 생의 방향이 전폭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언젠가 전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차가 몹시 밀려
정체되어 있는데 창 밖을 바라보던 류 목사님이 말씀하셨죠. '앞으로 동삼제일교회 앞길도 차가 못 들어올 만큼 부흥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60년의 목회 스케줄이 없다면 목회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우성 장로의 말이다.
(11)/
푸른 수의, 수형번호 1068번, 아픈 기억 만은 아닙니다
생각을 여는 글
세계복음화의 깃발을 높이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길을
나서려는 부산 동삼제일교회와 류광수 목사를 향한 하나님의 완벽한 각본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십여
년의 목회현장에서 쌓아놓은 전도의 노하우(know-how), 동성교회에서 이미 3년간의 임상실험을 걸쳐 만들어진 완벽한 전도전략이 그의 부풀대로
부푼 세계복음화의 꿈과 맞물려 그 서막을 화려하게 열려했던 1987년 12월. 류광수 목사, 그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이 느끼기에 '너무나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를 아끼는 최동근 목사(예수생명 기도원장)의 표현대로라면 '독수리처럼 멀리보고 개미처럼 하나
하나 챙기는 그의 철두철미한 프로그램의 탁월성'에 비추어 볼 때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꼬리표가 되어 끊임없이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사건, 그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 잠시도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 그 음주사건은 그를
향해 난무하는 험담과 이단 시비에 빠지지 않는 '말거리'를 제공해 왔다.
부산의 교계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그 사건은 과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때로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실수나 실패의 결과 앞에서 그것을 미리 막지 않으신 하나님께 묻곤 한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라고....주님은 이때 무응답이시다. 단지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은 치유와
회복과 갱신과 소망의 메시지로 응답하신다.
'why'가 아닌 'what'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전도자 류광수, 그의 미래를 알고
계셨던 주님은 이미, 그의 교만을 꺾을 완벽한 시나리오를 마련해 두셨던 것이다.
음주사건의 배경
처음으로 자신이 맡게 된
교회를 향한 그의 애정과 열정은 2주간의 전도전략 부흥회를 통해 토해내었고, 이미 지역다락방 6군데와 류 목사 개인의 다락방 30여 군데를
확보해 놓았을 뿐 아니라 지역 복음화의 완벽한 전략인 다락방 운동의 본격화를 위해 새 봉고차도 한 대 준비한 터였다.
12월의 첫
화요일 오후 1시, 김금애 집사의 집에서 시작 될 다락방운동은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전날 밤,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조OO 목사의 집에 들러 저녁식사를 한 후 성찬식에서 사용하고 남은 포도주를 몇 잔 마시게 되었다.
사실 그 포도주는 소주를 섞지
않은 원액포도주여서 더욱 안심하고 마셨는데, 원액포도주가 술을 섞은 포도주보다 알코올 도수가 더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어쨌든 바깥 날씨는 꽤 추워서 히터를 가동하고 운전석에 앉아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서 도로로 한 발 나온
행인의 귓전을 봉고차의 오른쪽 백미러가 살짝 스치고 지나가게 되었다.
새 차라서 감각이 무뎌서였는지, 아니면 사고가 경미해서인지,
아니면 포도주로 인해 온 나른함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류 목사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가고 말았고, 다치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사과의 말도
없이 지나치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한 피해자는, 그때 마침 서있던 경찰에게 신고하게 되었다. 곁에 있던 경찰도 사고라고 느끼지 못했던 그 정도의
사고가 그만 음주에, 도주라는 무거운 죄명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욱 설상가상인 것은 경찰서에 마침 나와있던
기자가 신문과 방송 뉴스에 보도하게 된데다가 더욱 류 목사를 당혹하게 한 것은 그 사건을 다루었던 한OO 조사계장이 부산노회 장로여서 즉각
노회에 보고된 것이었다.
동삼교회에서 분리된 동삼제일교회가 노회에서 보낸 열댓 명의 설교자를 모두 마다하고 상의 한 마디 없이 류
목사를 전격 초빙한 터인지라, 한 장로의 보고를 받은 노회의 분위기는 '조금 고생 좀 시키는 것이 좋을 거다'는 기류가 보편적으로 은근히
흘렀다.
'이미 언론에 흘러간' 이 사건은 법대로 재판 받을 수밖에 없겠다며 경찰서장마저도 안타까워했다.
판결이 나는
과정까지 2달,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괜찮을 거라는 생각과 끝났다 라는 극단적인 두 생각이 오가면서 그저 체념으로 멍해지고 말았다.
피해자는 치료 할 데가 없으니 그냥 내 보내주면 좋겠다. 그냥 괘씸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오히려 변호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김광일 장로와 그의 성도들
그날 밤 11시 30분 경에 연락을 받은 김금애 집사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축호전도도 해보고 노방전도도 해보았지만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지 않은가, 이제 분명 전도는 될 것인데 큰 일 났다. 사탄의
역사구나. 밀고 나가자."
평소에 동삼제일교회 목사가 아닌 대한민국 목사가 될 거라고 자부해 왔던 그이지만 한편 근심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같이하는 성도들과 함께 삼일을 금식한 후 지산옥 전도사(당시 집사)를 불렀다.
"제일 이쁜 옷 입고
온나, 김광일 변호사님 찾아가자."
부산중앙교회 전도사시절의 전도운동으로 이미 류 목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김광일 장로(전 대통령
비서실장)는 찾아간 성도들을 오히려 격려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아주 중요한 분입니다.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그런 분 찾기 힘드니 힘을
모으십시오."
그는 결국 댓가 없이 류 목사를 법정에서 눈물로 변호해 주었다.
한편 구치소로 류 목사를 찾아온 김 장로의
격려는 오늘까지도 류 목사에게 잊지 못할 따뜻한 기억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목사님, 저도 4.19 때, 군부세력 때 교도소
생활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쯤 거칠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괜찮습니다. 바깥일은 걱정 마시고 기도만 하십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푸른 수의, 교도소 생활
교도소에서는 그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흉악범이나 정치범을 수감하는 0.8평의
독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때 당시 마약사범으로 잡혀온 박동명(고 박태선 교주의 아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살인주범, 정치인 등 30여명이
줄지어선 독방에 수감되어 있어서 십이척 담장에 갇혀 하루에 10분씩 하는 운동친구들이 되었다.
특권의식(?)이 강한 또 하나의
작은 사회, 그것도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돌아버린다는 독방생활이었지만 웬일인지 류 목사에 대한 예우는 뜻하지 않게 깍듯했고 당시 대성교회 집사로
있던 한 교도관과 교도소장은 특별한 관심으로 그를 위로하며 힘을 주었다.
재판 전야, 교도관 한 명이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목사님, 별거 아닌데 묘하게 죄명이 크게 되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못 나가실 수도 있습니다."
경험 많은 교도관의 말인지라 더
있어야 할 두 달이 이십 년쯤으로 느껴지면서 순간 아찔했지만 그는 철장 높이 매달린 희끄무레한 전등불 아래서 밤새 「희망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두 달 더 있다면 교회는 어려워질 것이다. 노회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하자, 영어회화도
공부하고 성경공부 계획도 더 면밀히 짜야겠다."
그를 휘도는 절망감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가치있는 목록을 뽑다보니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로 그를 감쌌다.
정시기도와 무시기도의 비밀 속으로
한 시간 있기도 괴로운 독방생활에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기도의
깊은 비밀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하루에 10분 운동시간, 자는 시간외에는 모두다 성경 읽기와 기도였다.
그때 처음 그는 위기 상황
속에서 다니엘이 시간을 정해놓고 한 정시기도의 위력과 24시간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무시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기도의
응답은 출감 이후 생생하게 확인되었다. 오히려 기도로 하나된 성도들은 강한 메시지가 되었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고자하는 그의 뜻은 정확하게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교회는 35평으로 이전되어 있었고 집행유예선고 이후 그의 첫 설교는 역시 '전도'였다.
또 하나의 재판
사회의 법으로 심판을 받고 나온 그에게는 또 하나의 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광일 장로의 표현대로
그때 교계에서 '너무 튀는' 류광수 목사의 사건 심리를 위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 임시 노회가 열린 자리에서 한 마디 변명 없이 서있는
그에게 도덕성을 거론하며 성도의 화살이 쏟아졌다.
"나도 몸이 아파서 여러 가지 술 담궈 놓고 먹는다. 좀 봐주면 안되나?"
그중 보다 못한 목사 한 사람이 강단으로 나가서 한 변호였다.
하지만 결과는 3개월 간 근신, 절대로 강대상에는 못 선다는
선고였고 3개월 후 투표로 신임을 묻는다는 내용이었다.
임시 당회장으로 김광열 목사가 노회에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강단 설교만 안 했지, 그가 감옥에 있을 때에 이미 활성화된 다락방 운동은 전교인의 가정을 다니며 메시지를 할 수 있는 기막힌 터전이
되어있었다.
금족령이 내려 집회로 모일 수 없었던 초대교회에서 복음확산의 비밀이 되었던 다락방 말씀운동, 사도들이 찾아다니던
'집'은 바로 사도행전 2장이 성취되는 현장이 되어 전 교인을 성령 충만한 은혜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3 개월 후, 신임을 묻는
투표에서 100% 찬성이 나올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광열 목사는 떠나며 말했다.
"그래도 류 목사 교만해지지 마라."
다락방
말씀운동이 이해 안된 김 목사로서는 당연한 충고였는지도 모른다.
만일 이 일이 없었다면
"만일 이 일이 없었다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 개인에게는 큰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도운동도 일어나고, 현장에서 역사도 크게 일어나는데 기도가
체질화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기도해야 되는 것은 알면서도 사실은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도 대부분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0.8 평의 어두컴컴한 독방에서, 작은 창문을 향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또 기도하고를 반복했다. 푸른 수의를
입은 두 달간의 그의 생활은 그를 완전히 '기도의 사람'으로 새로 빚어 놓았다.
"그때 그 기억, 아무리 떠 올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이었으니까요. 오히려 내 인생 전체에 큰 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자칫 교만할 수 있는 그에게
주님은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이유 하나를 주신 것이었다
(12)/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 급성장하는 교회
어렵고 중요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 동삼제일교회는 급성장하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숨은 계획이 있었겠으나 교인들의 전도
사명과 류 목사의 전도의 진정한 열정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님이 증거되기 시작하는 해였다.
좁은 지하에서 모이는 교인을 감당할
수 없어서 3부 예배로 나누어서 드리며 버스 안에서, 식당에서, 이웃집에 있는 식당 안에서 VTR을 연결하여 예배하는 일이 일어났다.
영도 지역 안에서 30여 군데 황금어장을 전도지역으로 삼았으나 갈 곳이 너무나 많은 현장이었다.
힘을 내어 부산의 공단으로
전도하러 갔으나 믿을 사람은 많고 전도하고 양육할 일꾼은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대학으로 전도하러 가니 대학 한군데에만 수 십 명이
제자로 변했다.
아파트에서 말씀운동을 하니 교인들이 힘을 얻었다.
직장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하니 참된 사명자는 당연히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부흥되고 성도는 힘을 얻으며 뒤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2. 이상한 소문
류광수 목사와 그 교회를 죽여야 한다는 소문이었다. 이유는 교인들이 거기로 간다는 것이다. 류 목사의
설교와 내용은 복음적이나 기성교회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의 남태평양 호텔에서 비공식 모임인 10인방이 류 목사 죽이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류 목사는 깨닫지 못했으니 과연 세인의 말대로 그는 행정과 교회 정치에 관하여 무지하다는 소문이
헛소문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전에 어느 작은 모임에서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박 모 목사께서 자기 교인이 거기로 가니 목회 윤리상
주의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사실상 류 목사는 많은 교인 중에 누가 어디서 왔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매일 일어나는 전도운동, 거리 찬양, 현장 다락방, 전도집회 등이 잠자는 성도와 현장을 깨우는 중요한 일이었으나 이웃교회들은 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거의 매일 모이기만 하면 류 목사에 대한 얘기로 시간이 할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많은 교회들이 류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많은 일꾼들이 전도훈련을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3. 류광수
목사의 실수
류 목사는 열심히 전도하던 중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많이 몰려드는 성도들이 앉아서 예배드릴 곳이 없었다. 소문에 듣기를
마산의 산해원교회가 산아래 넓은 땅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 큰 예배당을 만들어서 평일에는 칸막이로 막아 부속건물을 사용하며 주일에는 그것을 접어서
큰 예배당이 된다는 것을 전해듣고 건축위원들과 함께 그 교회를 견학했었다.
당시 그 교회는 이단으로 지목 받고 있었다(현재는
합동측 교단 소속). 별 이유 없이 그 교회의 광경을 보고 온 류 목사는 교인들에게 설교 중에 설명을 했었다. 그런데 이웃 교회에서 그 테이프를
듣고 문제를 제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것은 아마 류 목사의 큰 실수인지도 모른다.
4. 1990년 가을 정기 '부산 노회'
정기노회에서 작고한 홍 모 목사가 노회에 류 목사 사건을 제소했다. 죄명은 산해원교회를 방문했기 때문에 '이단 관련설'과 그 교회가 많이
모이고 열심인 것을 칭찬했기 때문에 '이단 고무 찬양'이었다.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어느 한 회원의 류 목사 본인의 해명을
듣자는 제의가 묵살되다가 3분만 설명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노회에서는 류 목사에게 배려를 해주었다.
이단과 관련이 있었으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류 목사는 걱정을 끼친 것과 이단교회를 방문한 것은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나 이단과 그
교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그 자리에서 먹혀들지를 않았다.
그 때에 나온 재판 결과는
이러했다.
(1) 산해원교회 방문을 했기 때문에 '이단 관련 죄'
(2) 그 교회를 보고 부흥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단 고무
찬양 죄'가 적용되었다.
(3) 그 결과 동삼제일교회 '당회장직 박탈'이었다.
노회를 마치고 나니 참석했던 교인들이 억울하고
납득이 될 수가 없어 분개했다. 특히 당회원 박원규 장로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다며 자신의 평생 신앙생활의 신앙양심을 걸고, 이것은 납득할 수
없다며 당시의 심정을 고백했었다.
그러나 노회가 끝난 뒤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은 류 목사를 위로하며 헤어졌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세계복음화를 하는 류 목사에게 뭔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3) / 류광수 목사의 두 번째 실수: 노회 탈퇴
■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일
산해원교회 이태화 목사를 만난 적도 없고 그와 관련된 아무 일이 없는데 임시 건물을
구경했다는 이유로 이단 관련설을 말하는 것은 류광수 목사 자신과 교인들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도 '이단과 관련이 있었다고
자백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말은 더더욱 납득이 되지 아니했다. 당시 어느 목사는 류 목사 가까이 와서 귀에 대고 말하기를 "이단과 관련되었음을
시인만 하고 용서만 빌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데 류 목사가 너무 고집이 세고 교만하기 때문에 일이 더 어려워진다"고 알려주었다.(그 목사는 지금
작고했다.)
도무지 납득이 안될 뿐만 아니라 마음에 상처와 오해와, 솔직히 표현하면 인간적인 정과 마음이 떨어지는 분위기였다. 그
때 당시 동삼제일교회 교인들 중 몇 명이 뒤에서 그 현장을 보았다. 참석한 목사 중에서도 '너무 심한 처사다, 류 목사가 조금만 평소에 대화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일에 잠시 휴회가 되었고 그 사이에 특별 정치부가 모인 듯 했다.
그 자리에 불려가게 되었다. 더욱더 이해 안될 일만 계속되었다.
"무슨 돈으로 이런 전도활동을 하느냐."
"모든 전도활동과 조직을
폐지하라."
"모든 예약된 집회를 취소하라."
"왜 남의 동네에 와서 전도하느냐."(공단, 학교 전도)
"우리가 너의
하수인이냐?"
"그렇게 잘 났느냐?"
수많은 질문 이후에 속회가 되어 일방적으로 결정이 되었다.
첫째 이단 관련설,
둘째 당회장직 1년 박탈이었다.
■ 깊은 생각에 잠긴 류광수 목사
그 누구보다도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그것도
많은 시간을 생각한 사람은 류 목사 자신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너무 목사 세계를 몰랐구나.
둘째, 혼자서 열심히 살아왔구나.
셋째, 전도 사명에 불이 타 좌우를 너무 살피지 아니하였구나.
넷째, 사람을 사귀는 것도
중요한데 너무 관심이 없었구나.
후회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과연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아니했다.
그 당시 위로가 되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스스로 자위하기를 '전도자는
언제나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 밖에 위로될 것이 없었다. 어려움과 핍박 뒤에 언제든지 더 좋은 전도의 열매가 맺어졌음을 상기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 류광수 목사의 두 번째 실수
이것이 미래를 좌우하는 일이요, 한국 교계와 세계 교계에 영향을 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시 류 목사는 작은 개척교회 목사요,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세계 교회에 여파를 줄 것이라는 것은 본인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류 목사는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회(교단) 탈퇴였다.
당시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죄명과 안면을 바꾸는 사람들의 처사와 인민재판 식의 일들을 본인과 교회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교인의 서명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부산노회를 탈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사역, 전도사역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고, 교회도 계속 부흥이 되며 전도의 문은 계속 열리게 되었다.
■ 면직 공고
예상은 했으나 어느 날 기독신보에
면직공고가 나와 있었다. 면직 내용은 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뢰아 아카데미 수료자'라는 공고가 나왔다. 류 목사는
베뢰아와 그 목사를 본 적도, 간 적도, 만난 적도 없었다. 이토록 전 세계가 보는 신문에 그것도 큰 교단에서 거짓말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한
사실에 더욱 실망을 하게 됐다. 그 뒤에 많은 사람들과 기자들과 교단이 확인을 했으나 부산 노회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우리
기자들도 가서 확인했으나 그런 사실은 없었다. 베뢰아 측에서도 류 목사는 관련이 없음을 공고한 적이 있다.
더욱 우스운 것은 몇 년 전
자신들이 치리하고 처리된 '포도주 사건'을 추가하여 공고문에 실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노회, 다른 교단, 다른 나라에까지 계속 알리는 비난
문서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난이 선전이 되어 계속 전도운동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며 몰랐던 사람들이 비난을 듣고 난 뒤
확인하다가 같이 전도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더 중요한 것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이 수천 명이나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하여 이 운동이 성경에 어긋남이 없는 전도운동임을 확인했다. 급기야 이 운동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전도총회가 결성됐고 한국에서만
500여 교회가 회원으로 가입하게 됐다. 또 교단에는 가입하지 않았으나 같이 전도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는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
현재 광주, 대구, 부산, 서울에 매주 만여 명에 이르는 요원들이 계속 참여하며 전도현장으로 나가고 있고, 무속인이 적어도
전국에서 500명 이상 돌아와 예수 믿는 일이 일어났으며, 80여 명의 선교사가 세계 각 지역으로 파송되어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참여된 선교사들의 전도열매가 계속되고 있으며 평신도들이 전문적인 전도훈련을 받아 전도하겠다는 전도신학원생이 1만 명이나
배출되었으며 많은 현장에 실제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 그 동안 다락방과 류광수 목사는 무엇을 해 왔는가?
6-7년간 계속하여 전도할 요원을 훈련시켜 왔다.
첫째, 다락방 전도운동이란 내용으로 초대교회의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성경과 현장에서 찾아 훈련을 시켜왔다(행2:1-47).
둘째, 안디옥교회가 일꾼을 일으킨 전도와 팀의 움직임을
가르치는 팀사역 훈련이 계속되었다(행11:19, 25-26; 행13:1).
셋째, 극심한 핍박 속에서 살아남은 가정교회 운동을
찾아내는 미션홈(MISSION HOME)운동을 교육시켰다(행16:15).
넷째, 직장, 기능, 산업을 가지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는가를 가르치는 전문사역 훈련이 6-7년의 과정 속에서 계속되었다(행18:1-4).
다섯째, 드디어 지역의 우상, 무속,
점술, 미신에 빠져서 죽어 가는 심각한 지역으로 실제 파고드는 지교회 전도 전략을 훈련시켜 왔다(고전16:14-24).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전도캠프 시대
지난 6-7년간의 긴 훈련을 마친 류 목사는 현재 모든 모임을 전도캠프로
움직이고 있다. 이 전도캠프를 통해 실제로 현장에서 전도가 되어지며, 역사가 일어나며, 말씀이 성취되며, 일꾼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다.
급기야 전국과 세계에 전도캠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특히 개 교회들이 연합하여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캠프를 여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전도캠프와 함께 실제로 다른 부분에도 응답이 일어나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한 모든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명자들의 발걸음과 모든 삶을 지켜보시고 계심을 믿으며, 끝없는 전도 현장을 향해 류 목사는 오늘도
전국으로 세계로 쉼 없이 달리고 있다.
(14) / 본격적인 전도운동, 전국으로 확산
● 생각을 여는 글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이방선교는 '너무나 전도하고 싶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 즉 주를 섬기는(행13:2) 몇 사람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소위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바울행전은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이라는 미미한 출발에서 비롯되었으나 성령의
폭발적인 권능으로 말미암아 후일 유럽과 전세계를 복음화하는 발판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다락방 전도운동 또한 갖은 오해와
갈등 속에서도 현실을 바라보지 않은 몇몇 목회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류광수 목사의 거듭되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소 엉성한 것처럼 보이는 다락방
전도운동이 그토록 힘있게 지속되는 그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소원이 오직 영혼 구원일진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고전1:21) 하나님의 뜻에 방향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부산·경남
지역으로의 확산 - 수영로 교회.
부산 노회 사건 이후 웬일인지 전도운동의 기초는 더욱 확립되었다. 당시 고려신학대학 동아리
'익투스'에서 류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된 것이 작은 시발점이 되어 그의 사실적인 전도현장의 증거에 충격을 받은 신학생들의
입을 통해 류 목사의 전도강의에 대한 소문이 점차 퍼져나갔다.
이를 계기로 90년 봄, 부산에서 가장 전도에 열정을 갖고 각종
프로그램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 부흥집회에서의 충격은 복사되어나가는 녹음 테잎의 물량이
증명하였다. 과다사용으로 기계에 문제가 생기고, 당회에서 테잎 복사를 중단시킬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던 것이다.
이에 마음을 열게된
정필도 목사는 이미 교회 자체 내에서 실시하고 있던 목회자 세미나에 류광수 목사를 초청하게 되었다. 이때 부산 경남 지역의 목회자 170여 명이
모여들었고 급기야는 350명 내지 500명의 '전도하고 싶어하는' 목회자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지역전도의 전략으로써
다락방전도운동은 그의 25년간 전도현장에서 비롯된 노하우(Know-how)요, 성경적 전도 전략이었으며 그가 부르짖는 예수생명, 예수능력은 당시
전도가 안되어서 힘 빠져 있었던 목회자들에게 새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류 목사의 목회자 세미나는 수영로교회 부목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때 당시 프리셒트 성경공부와 다른 강사들의 성경 강해가 호응을 얻지
못하여 강의에 불균형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취해진 조치였다. 게다가 수영만 광장에서 오십만 명을 목표로 대형 집회를 계획했던 수영로교회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고 그 내면에는 대형집회가 아닌 '다락방을 통한 말씀운동과 제자양육'에 비중을 두었던 류 목사의 의견과 다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락방 전도훈련원 탄생
이를 계기로 류 목사 자신은 1991년 부산의 금정구 남산동 속칭
'두실'에 본부를 둔 다락방 전도훈련원을 출범시킴과 동시에 김해의 장유 수양관, 송정리 청소년 수양관, 가나안 수양관 등지에서 집중적인 전도
임상훈련과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전국 각지에서 목회자들이 몰려들었고 전국적으로 열리는 류광수 목사
초청집회로 말미암아 다락방 전도운동이 크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전도하고 싶으나 너무나 전도가 안돼서 고민하고 있었던, 강호인
목사와(당시 기쁨교회 개척, 현 서초지교회 담임) 강은중 목사(현재 부산 남산동교회 담임) 및 수많은 목회자들이 합류하여 본격적인 전도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 눈물과 찬양의 현장, 양수리 수양관 - 전국확산의 획기적인 계기
93년도 여름, 서울 양수리
수양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목회자 800여 명이 운집하였다. 반주자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반주를 미처 할 수 없을 정도였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목회자들 또한 시간이 넘도록 뜨거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다. 2박3일 동안의 집회기간 동안 순수한 동기로 뜨거운 가슴을 안고 모인 목회자 전체가
잠자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여 그야말로 마가 다락방의 현장이 되었다.
"그때 그 기쁨과 충격을 체험한
목사들과 전도에 대한 확신을 얻은 목사들이 현재까지 남아 이단시비와 면직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이 전도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그리운
최고의 감격적인 집회였죠." 강은중 목사는 말한다.
● 전도학교의 탄생과 합숙훈련
당시 30여 군데의 류 목사 개인
다락방과 동삼제일교회 150-200여 군데의 다락방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목회자들이 모여들자 이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이들을 한데 묶어 숙식도 제공하고 간간이 강호인 목사가 맡아 강의도 하다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합숙훈련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여관에서 태종대 관광호텔로 그리고 동삼제일교회가 35평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본교회로 이전되어
오늘까지 287기의 합숙훈련원생을 배출하였다.
이에 앞서 교단의 강력한 비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에서 일어난 전도운동은
전도학교로 발전되어 '전도하고 싶어하는 평신도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가나안 수양관에서 시작된 제1호 전도학교를 시발점으로 시작된 전도학교는
대전, 부산, 마산, 서울, 광주 지역으로 확산되어 현재 200여 개로 발전하였다.
● 만일 외부에서 오는 어려움이 없었다면
"전국 세계 각지로 확산되는 지금의 전도캠프를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존교단과 교권에 국한된 집회만 해야되고, 만일
이단시비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연합집회만 다니느라 전도는 구호로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류 목사는 담담히 말한다.
"하나님은
너무나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 아닙니까?"
● 향후 전도학교는 빛의 근원지
"전도학교는 지역에서 빛을 발하는
전도캠프(창 1:-3, 사 60:1, 요 1:1-11)를 위해 명실공히 그 지역의 베이스 캠프(Base camp)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전도학교가 훈련중심으로 이루어진 전도신학원, 선교사훈련원, 핵심훈련 등으로 다소 쇠퇴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제는 숫자
중심이 아닌 요원 중심으로, 그리고 지역을 중심으로, 평신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도캠프에서 발견된 '전도하는 제자'를
전도학교에 세워 지속적으로 그 지역에서 빛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전도캠프시대로 접어든 이 때, 앞날을 예상하며
던지는 류광수 목사의 말이다.
(15) / 핍박 속에 피어난 꽃 - 기도, 전도의 열매
생각을 여는 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서 역동적인 사고방식으로 삶을 살아간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공통 분모는, 극한
역경과 핍박 가운데서도 결단코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오직 주만 바라봄으로써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 받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들을 일컬어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 부르고 있다. 감당하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악시오스' 즉
'칭찬할 만한, 합당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볼 때, 결국 그들은 세상에 적합하지도 못하고, 같은 유대교도와 로마인들로부터 칭찬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 - 이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공동번역성서 히11:38).
그래서 그들은 불과
칼날과 악형과 희롱과 채찍, 옥에 갇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삶이었으며, 믿음의 조상들의 삶이었다. 반면에 이 시대는 특별히 순교를 원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극한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기존의 교권과 교리에 위배되거나 역행하지 않기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믿음의
선진들이 뿌린 피로 얻어진 후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신자들은 방황하고 불신자들은 무속과 역술,
미신에 빠져 영적 문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교인은 감소하고 교회는 자꾸만 문을 닫는 유럽화의 현상이 일어나, 젊은 세대를 잃어가고 있는 예배당의
공동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단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던가
오직 전도만 해야겠다고 모여든 교역자 1600
여명과 신앙의 연륜을 가진 2만 여명의 사람들이(1996.4.24 국민일보참조) 도저히 칭찬 받을 수 없는 대열에 서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이라 불리는 일종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배경과 방법은 다르지만 원리는 하나, 목사는 면직되고 성도는 기존 교단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만 것이다.
목사 된지 5년이 되어도 전도만 하느라고 노회에 불참하고, 목사의 기본자세와 도덕성이 결여되어 포도주 마시고
운전하다가 인사사고를 내는데다가 기존교회와 목사는 전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함으로써 교회와 목사를 이간질하며 경남 노회에서 면직 당한 산해원 교회를
찾아다니는 등 (대한 예수교장로회 부산노회 1991.11.26),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는 자, 류광수 목사의 메시지를 좇았다는 이유에서이다.
비난의 포화 속에 주만 바라보는 무시기도
"91년 11월 은광교회에서 개최된 제133회 부산노회 제1차 임시노회에서
속칭 김기동씨의 베뢰아 귀신론 수료자한 자라는 죄목과(사실무근으로 판명됨) 이미 87년 징벌을 끝낸 음주사건까지 들먹여 류광수씨를 면직 결정하자
동삼제일교회 성도들은 전교인이 서명한 노회 탈퇴 서명서를 발표, 그후 92년 예장(고신) 남부산노회에서 베뢰아와 관계없음을 인정하고 가입하게
되었으나 이 역시 지역이 틀리다는 이유로 원인 무효라는 통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류씨는 침묵을 지킨 채 다락방전도훈련에
열중, 이미 전국의 1만 여명 목회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실시하여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5.7.17 교회 복음
신문)
한편 부산 기독교 신문은 '합동측 부산노회가 91년 당시 류씨를 장장 4시간에 걸쳐 노회 재판을 통해 정죄한 이유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보복성 정치 재판의 저의와, 목회자의 시기(?)가 깔려 있었다는 부인 못할 사실이 현실로 나타나고야
말았다는 등의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포도주를 마시고 음주운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장을 검증한 결과 경미한 사건으로 판별되어, 곧 석방되었으나
이미 노회에서는 류씨를 3개월 근신시켰기 때문에 이를 다시 거론하여 면직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자 교권과 교단은
악성루머를 퍼뜨려 류광수 목사가 그때 당시 부산 기독교신문사의 신00사장에게 5억을 주었다느니, 교회 복음신문사에 10억을 건네었다는 분명한
확증을 잡았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절묘하게 유포하고 있었다.
"이러니 어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한 순간도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때 받은 축복은 바로 무시기도의 축복입니다. 삶 속에서 24시간 계속되는 무시기도의 비밀. 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기도했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는 기도였지요."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제목과 내용이 계속적으로 바르게 수정되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경적 전도방법에 관한 메시지가 계속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실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신자는 방황하고 불신자는 문제 가운데 시달리며 실제로 전도는 도무지 안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고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전도열매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워지는 겁니다."
"오직 전도만 하겠다고 모여든 목회자와 성도들이야말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욕심이나 동기없이 그들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기도하노라면 그들을 향한 메시지도 나오고 전도방법도 나오며,
전도의 시간표도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다락방, 팀사역, M.H, 전문교회, 지교회, 전도포럼, 전도캠프 아닙니까."
연약한 자
불러 전도현장 속으로
1991년 부산 두실에서 시작된 전도학교는 부산 동삼제일교회와 대구 동광교회 마산 서마산교회, 광주
평화교회, 대전 초원교회, 서울 강남 복지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핵심훈련과 합숙훈련, 팀합숙훈련이 성경을 근거로 태동하였다. 다락방
전도신학원과 (1993.9 서울 창대교회에서 시작.) 선교사 훈련원(1997.3 서울, 부산, 대구, 광주에서 동시 시작), 70인 1차 훈련이
95년 4월 제1기생을 배출한 이후 2차 해외사역과 3차 훈련이 1996년 11월 목포 늘사랑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진정한
복음을 몰라 방황하는 무속인들과 불신자들의 현장에 누가 들어가 전도하겠습니까? 바로 나처럼 흠 있고 부족한 자, 연약한 자가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목사님들은 갈 수 없는 곳이지요."
다락방전도운동이 집회 중심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불신자를 전도하는 전도캠프
시대로 약진하는 가운데, 진짜 전도가 되어지는 현장 속에서의 류 목사의 말이다.
(16) / 다락방을 깨닫게 된 이유
<다락방을 깨닫게 된 이유>
■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류광수 목사가
하지도 아니한 말, 사상, 신학을 억지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하여 전도를 막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용히
전도하는 사람들을 하지 못하도록 문제를 걸어 그 결과 문제가 발생하자 '다락방은 문제가 생긴다'고 덮어씌우니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원래 문제가 있었던 소수의 사람의 말의 실수를 가지고 다락방의 전체의 실수처럼 크게 만들게 악평하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요?
몇몇 감정 가진 사람이 아전인수격으로 쓴 글을, 그것도 거짓말이 섞인 글들을 그대로 세계교회가 인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입니까?
너무나 답답한 류 목사는 가끔 그에 대한 대답을 강단에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류 목사는 이같은 상황에서 위로 받을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누구나 겪는 과정일 것이다. 예수님, 바울,
개혁교회도 처음에 이단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나중에 해결이 되지 않았는가?' 그것만이 위로였다.
■ 그때에 하나님은 류
목사에게 중대한 깨달음을 주셨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류 목사는 현장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었다.그것은 바로 교인들의
방황, 구원의 무 확신, 기도의 무 응답, 전도의 두려움, 교회 안의 갈등 등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류 목사는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게 됐다.
그것은 곧 '현장 말씀운동'과 '교회 안의 확신운동'이었다.
그 내용은 물론 실제적인 것들이었다.
첫째,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창3:1-20의 저주로 인해 영적으로 요8:44에 기록된 것처럼 마귀의
자녀가 되고, 그 결과 마11:28의 정신 문제로 수고하고 짐 진 삶을 살게 되며, 또 육신 적으로도 행8:4-8의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눅16:19-31의 문제를 당하게 되며 그 후손들은 마27:25의 재앙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둘째,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류 목사는 역시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요1:12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권세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요14:16-17의 성령의 인도를 늘 받으며
행1:8의 언약이 성취되는 삶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눅10:19말씀처럼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부여받으며 히1:14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마28:16-20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며 빌3:20의 하늘 시민권을 배경 삼아 살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셋째,
류 목사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행1:8의 언약을 붙잡고 행12:1-25처럼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계8:3-5에 기록된 대로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된다는 사실이었다. 또 행3:1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정시로) 기도하며
엡6:18의 말씀처럼 무시로 기도할 때 행27:20-25같은 응답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넷째, 류 목사는 또 전도는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도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았다.
막3:14-15의 주님과의 동거의 원리와 마28:16-20, 막16:15-20,
요21:15-18 등의 부활 메시지에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얻고 이 내용을 목회와 제자 사역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 그 때였다.
류 목사는 올바른 성경적 전도운동이 성경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가 다락방의 시작이 성경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행1:13-15의 언약을 붙잡은 기도를 하게 되면 행2:1-47의 응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행2:41-42의 제자가 일어나며 행2:46-47처럼 현장에서 날마다 구원 사역이 성취된다는 사실이었다.
또 행6:7처럼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이들이 현장에 나아갈 때 행8:4-8, 26-40과 같은 생명운동이 확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운동은 또
행9:1-15과 같은 중요한 인물들을 복음운동으로 돌아오게 하는 결과를 보게 되며, 따라서 행11:19, 25-26에 나타난 대로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더욱 더 제자를 세워 궁극적으로는 로마를 복음화하는 행28:30-31의 현장 전도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류 목사는 또 복음운동은 반드시 현장운동이라야 된다는 사실을 행2:46-47을 통해서 깨달았다. 복음의 비밀과 기도의 비밀의
중요성을 아는 지속의 현장이라야 전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었다.
그러자 전국과 세계에서 벌떼같이 신자, 불신자가 일어났다.
■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은 엄청났다.
이러한 깨달음을 현장에 적용하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류 목사에게 메시지,
전략, 건강, 사람을 붙여 주셨다.
그 결과 300명이 넘는 무당이 곳곳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다.
또 의학,
법으로 안 되는 마약 중독자가 돌아와 사명자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정신적으로 고통 당한 자들과 육신의 병든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수 천명의 목회자가 가는 곳마다 모여들었다. 평신도와 함께 전도 운동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성도, 목회자들이 전도해서 축복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되지 못한 그릇 탓에, 일어나는 역사에 충격을 받고 지나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핍박이 일제히 시작됐다.
'기성 교회의 교인들이 간다. 다락방에 너무 쏠린다. 계속 같이
다니며 전도한다. 교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등등의 얘기들이 나오며 기성 교단들이 운동을 막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증인과 복음 전할 요원과 생명 건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교단문제로 그만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실제적인
전도 운동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 정리되어졌다. 류 목사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드리고 있다.
곳곳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나 그것은 오히려 '초대교회가 마가 다락방에서, 집에서, 현장에서, 이름 없이 누룩
작전을 쓰게 된 이유'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초대교회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 바로 그 때의 그 일이 우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더욱 중요한 것은 날이 갈수록 진정한 전도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된 사실이다.
류 목사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오직 한 마디.
"모든 영광을 여호와께 돌려 드립니다."
(17)
<핍박 중에 받은 응답(행23:11)>
과연 핍박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숨어서 전도하며 고난 당했던 초대교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삶과 심정을 이해 못한다면 초대교회의 방법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류광수 목사는 핍박과 고난을 통해 세상 그 어느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축복을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류 목사가 성경에서 발견한 전도의 축복에 공감하는 양심적인 고백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마가 다락방에서 숨어서 모였던 그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대 헤롯 성전, 교권전통, 많은
사람들의 정죄. 이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그들에게는 금족령이 내려졌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면 사형이 선고되는 시기였다(행4:1-12, 7:56-60). 그러나 그 어떤 상황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류 목사를 둘러싸고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 외롭고 힘든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류 목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성경으로 돌아가 초대교회 전도자들이 어떠한 자세와 방법으로 전도에 임했는가를 찾아내게 하는 놀라운 은혜의 계기를
제공했다. 때마침 부산을 중심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말씀운동은 곧 초대교회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현장을 본 전도자들의 전도내용은 바리새인과 같을 수가 없었으며, 그 열매 또한 같을 수가
없었다. 이 초대교회의 다락방운동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시에 예루살렘 전체에 복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 큰 핍박과 죽음
- 안디옥 교회 탄생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가 여러 번 구속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스데반은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나타난 운동이 팀 사역
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을 통해 안디옥 교회는 세계 복음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법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압박을 가해왔기
때문에 공개적인 전도보다는 개별적인 만남을 통한 팀 사역 전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류 목사는 사도행전을 통해 이같은 비밀을
발견하고 자신의 현장 전도에 이 성경적인 방법을 접목했다. 류 목사와 그와 함께 전도하는 사람들의 팀 사역은 곧 세계를 강타했다. 세계 곳곳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올바른 복음을 전하겠다는 제자들이 일어나기를 시작한 것이다. 팀 사역을 통해 기도, 말씀, 복음, 전도의 확신 등을 얻고
교회마다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발맞추어 더욱 거세지는 핍박은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목회자들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고 일부 겁을 먹은 목회자들은 이 전도운동을 중도에서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전도한
교회에서는 오히려 옛날보다 더 알찬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행11:19, 행11:25-26이 이해되어졌으며 행13:1의 시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집'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오늘날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말하는 '미션 홈(Mission Home)'이라는 단어가 된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전도자를
핍박했고 심지어 깡패를 동원하여 죽일 정도로 폭력을 행사했다(행14:14-19, 행17:1-9). 또 전도운동으로 인한 이방종교의 핍박이 초대
교회를 새로운 길로 인도되게 하였다.
그래서 '가정교회'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행16:15 루디아의 집, 행17:6 야손의 집,
행18:1-3 브리스가의 집, 고전16:19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 골4:15 눔바의 집 등을 중심으로 한 전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 현장과 말씀을 붙잡고 류 목사는 미션 홈(M. H)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거기에는 가장
먼저 일어난 응답이 가문의 문제, 우상·제사 문제, 미신·점술 문제 등이 해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션 홈마다 열매가 일어나며
일꾼들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도가 응답되며, 말씀이 성취되고, 전도 열매가 맺혀지는 삶이 확인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과 전 세계적으로 류 목사의 미션 홈 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현재 5,0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들만 일어나도 한국 복음화는
눈앞에 놓인 것이다.
● 전문 사역
무속에서 돌아온 무속인, 각종 종교에서 돌아온 사람, 정신적으로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전문사역'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을 향한 전문교회.
영적,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치유사역.
무당으로 있거나, 무속인으로 살다가 돌아온 수 백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전문사역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류 목사는 지체, 정신 장애 아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이 시대에 그들과 함께 하는 전문사역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지(地)교회
이제 류 목사와 함께 세계복음화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자신들의 생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자 나선
전도자들은 국내 4,000군데 지교회를 통한 전도운동을 놓고 뛰고 있다.
모든 학교, 모든 지역에 전도하는 팀을 심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임을 알고 생을 걸고 뛰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과 핍박과 따돌림이 없었더라면 성경에 숨겨져 있는 이렇게 세밀한
하나님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전도운동과 교회, 현장을 두고 보아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류 목사는 지금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일할 것이며, 말씀을 따라
부족한 것을 찾아 고치며 주 앞에 서는 그날까지 뛸 것입니다."
(18)<세계교회에 하고 싶은 말>
류광수 목사의 전도 일대기를 취재 보도하고 있는 세계복음화 신문사는 전도일대기를 기록하는 중 중간점검도 할 겸 류 목사 자신이
국내외 교계에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을 기록하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류 목사는 본지에 아래의 글을 보내 왔습니다. 류 목사는 이 기고에서 자신은
항상 한국교회를 위해, 또 세계복음화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변함없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싶음을 고백했습니다. <편집자 주>
1. 저는 이단이 아닙니다.
저를 불러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한번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언제든지 고치겠다는 발표가 있은 후 한 명도 지도하는 질문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정통교회에서 정통신학을
공부했으며 지금 현재도 올바른 정통신학을 공부한 목사님들과 함께 전도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몇 사람이 교인 이동관계를 던진 내용의
말들을 한국과 세계교회의 사람들은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모든 분들의 생명과 미래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기다리며 복음을 열심히 전하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2. 그 동안에 얻은
전도열매
목사님들과 함께 한국에 1천여 군데 전도하고 있으며 국외에 80여 국가의 중요 장소에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었으며 돌아온 무속인 숫자가 제가 알기론 500명이 넘습니다.
현재 저희 교회에는 많은 무속인과 스님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출석하고 있으며 한국의 진짜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현재 출석 중에 있습니다. 현재 한국 내에 4천여 군데
전도운동을 계획하며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전도 운동에 가입된 교회는 500개가 넘으며 전도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양심적인
목사님 수가 수천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세계현장에 청소년 사역(Remnant)에 집중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전도캠프 조를 수없이 많이 만들어 전도현장을 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복음을 알지 못하여 큰 고난 속에 방황하던 중 23세가 되었을 때 복음을 바르게 깨닫고 이 복음을 생명을 걸고 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걸어 갈 것입니다.
3. 귀신론에 관한 오해
교계에서 저에 대한
오해 중에 귀신론에 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시거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계의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1) 현장에 전도해보니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귀신을 섬기지 말 것과 그 위험성에 대해 소상히
성경에 있는 대로 설명했을 뿐입니다.
(2) 한국에 귀신들린 무속인 100만 명 등록되어 알려진 수만 그러하며 곳곳에 표시 없이
귀신 섬기는 무속인은 국민의 절반 이상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귀신에 관한 메시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 점치러 다니는 사람이 너무나 많음을 확인하고 더욱 강조하게 되었으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속인 중에 대부분이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에 분한 생각까지 들었으며 그들을 향해 본격적인 메시지를 현장에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상숭배, 미신, 종교, 제사 등 귀신을 섬기는 일을 하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막3:15)
(3) 특히 귀신 들린 자 들이 만든 New Age 운동은 미국과 유럽, 전 세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문화, 도서, 음악, 예술,
체육 등에 수천 종류를 만들어 냈으며 명상 운동 등의 정신 세계를 거의 장악하다 시피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기에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21세기를 맞이한 요즈음에 귀신의 소리를 들으며 행동한다는 사람과 청소년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가정, 국가에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4. 이제는 이렇게 해야합니다.
우상문화는
곳곳에 파고들었기 때문에 전도 운동도 전문성을 가져야하며 문화 쪽으로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문화 쪽의 전도가 시급하며 학생, 어린이들의 치유가
절대적인 과제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후대를 위한 Remnant(사6:13) 운동을 전개해야합니다.
특히 산업선교
쪽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흑암경제, 우상경제, 타락경제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성도들에게 전도의 비밀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않고 세상에 나가면 종착점(Terminal Point)을 놓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목회자와 선교사님들의 전도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다른 것을 다 가져도 이 부분에 전문성이 없으면 결국은 힘없는 교회, 옳지 못한 제자를 남길
것이며 사회문제를 해결치 못할 것입니다.
5. 다락방 전도하는 가족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전도하면 열매도
많으나 다른 교단과 다른 교회의 성도들이 현장에서 듣고 은혜를 받은 나머지 교회를 옮기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복음이라면 절대로 그것을 막아야 할 것이며 오히려 본교회의 귀중함과 전도의 귀중성을 알고 섬기도록 만드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지나친 열심과 표현은 삼가야 할 것이며 결국 우리는 한국과 세계복음화, 나아가서 한국과 세계교회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비난하고 무고히 욕을 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바르게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 수 있는 날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것을 성경과
역사를 보며 확신합니다.(사60:22)
오직 순수한 복음운동만 계속하도록 다시 한번 우리는 다짐해야겠습니다. <류광수
목사>
(19)<전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1. 전도하게 된 전도사 시절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전도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실감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전도현장에 가도록 사람이 생기거나 찾아오거나 사건이 생겨
전도현장에 있게 되는 것이 저의 삶이었습니다.
2. 교회의 시험
전도사로 섬기고 있는 어느 교회에서 목사와 교회간에 문제가
발생하여 오랜 시간 시험에 빠져 온 교회가 힘이 빠진 때에 새로운 목회자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전 부교역자가 사임하게 되므로 같이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회였습니다.
부산시내에 있는 전 중·고등학교 대상으로 전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도가 한 장 짜리 메시지 전달이었습니다. 그것은 계속 사용하다 보니 말씀 현장이 연결될 분 아니라 많은 축복을 받게 된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행위는 작은 것이라도 영원한 응답과 지속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욱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3. 부목사 시절의 어려움
많은 전도현장, 전도학교, 요원훈련, 청년부흥, 교회부흥을 체험하게 되어 감사한 일이 너무
많으나 교회자체가 왠 일인지 분쟁과 불 신앙, 인간의 생각 등으로 가득 차 싸움이 끊어질 날이 없었으며 전도를 해도 교회가 편치 않으니 제대로
열매가 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새벽 제단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복음전할 수 있는 교회로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일평생 복음만 전할 수 있는 교회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달만에 어느 날 하나님은 문을 여셨습니다. 개척이 시작된
조그만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13년 전 부산 동삼제일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시설, 일꾼, 환경, 경제,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전도하는 저에게 많은 응답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전세계 요원들이 실제로 왔다가며 훈련을 받는 교회가 되어
미약하나마 세계복음화와 기독교회사에 약간이라도 헌신하게 하심을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예기치 않은 사건
어느
정도 나름대로 전도의 방법이 준비된 나로서는 복음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갖추고 시작하려던 전날 하나님은 방법보다 중심과 전도자를 위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는 사고가 났습니다.
별 것 아닌 일에 큰 문제가 발생이 되어 전도는커녕 교회를 섬길 수 없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 동안에 두
가지를 하게 하셨습니다.
(1) 진정한 기도
그때에 정시기도와 무시기도의 비밀을 참으로 중심을 가지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난생처음 서게 하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하나님은 그때 가장 축복하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체험케 된 기도는 날이 갈수록 보완이 돼
지금은 잠시도 기도 안 하면 컨디션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2) 강단에 설 수 없는 짧은 시기
진정한 현장 전도, 나를
돌아보는 현장 전도, 초대교회, 다락방운동, 예수그리스도 소개, 기도의 비밀과 응답, 성도들의 현장치유 등이 그때에 진정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축복들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두고두고 감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은 신기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동삼제일교회는 날로 날로 성장하며 부산의 대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전도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5. 계속되는 부흥회 인도
(1) 초청서 가방 가득
부산 지역을 시작으로 하여 경남, 대구, 경북, 서울,
수도권, 호남 지역으로 부흥회 초청을 받아 하루도 쉴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목회자 집회, 개 교회 집회, 전도 집회, 현장 집회,
학교 집회, 군 집회 등으로 일정표가 가득 짜여졌습니다.
거기다가 국외집회가 열리기를 시작하여 태국,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일본,
태국, 호주, 아프리카, 유럽,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대만, 캐나다 순으로 계속되는 집회가 연결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집회를 계속하니 전도를 할 수가 없고 제자를 찾아 전도훈련을 시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기다리고 있는 대학과 그 속의 불신자들, 엄청난 공단과 전도대상자들, 초·중·고등 학교의 생명들, 가난·질병·결손가정으로 시달리는
빈민 속의 아이들, 우상·미신에 빠져 동네 곳곳에 자리잡고 영적 문제에 빠져있는 무속인(무당)과 그 가족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외국의 한국인 1.5세, 2세들의 부모들이 모르는 갱단·마피아·마약 집단과의 연결이 심각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엘리사, 루터, 무디, 웨슬리 등을 핍박 속으로 밀어 넣어 전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가장 먼저 떠올라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6. 일어나는 핍박, 방해, 음모운동
일찍이 이런 상황을 보며 하나님의 뜻을 쉽게
발견하게되었습니다. 때를 맞추어 전도해야 된다는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를 시작했습니다. 방해운동과 전도운동이 맞물려 모든
집회를 포기하고 또 방해와 포기를 당할 때 전도집회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수 천명의 전도자들이 가는 곳마다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7.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도 나의 약점과 장점, 간사함과 진실, 삶과
중심들을 잘 아셨고 전도의 현장으로 점점 인도해 가셨습니다.
다음 호에 다락방 운동이 본격화되며 어떻게 성경적 방법을 적용시키도록
하셨는지를 간증하겠습니다.
(20)<성경적 전도방법을 찾게 된 배경>
■ 누구나 경험하는 어린
시절과 신앙
기독교 가정에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던 저는 별문제 없이 착실히 예배드리며, 활동하며,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경험하는 것과 같이 특별한 확신이나 복음의 비밀이 없이 자랐습니다. 당연히 청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을 겪으면서 세상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빠른 적응력으로 인해 저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알고 보면 신앙 유지를 못한 것이 아니고 내용 있는
신앙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방황, 불 신앙, 타락, 실패, 원망, 포기, 가난, 실패가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생활은
재개했으나 복음은 알지 못하고 힘든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알게되고 그리스도를 알게되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를 알게되고 기도를 알게되니 응답도 알게되었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알게되니 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축복과 전도의 배경
그 결과 저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이 하나하나 삶을
통해 체험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를 배울 곳이 없었다고 말씀드리는 저의 고백은 누구나 동감하실 고백일 것입니다.
많은 전도서적, 간증집, 간증 집회를 듣고 보았으나 부분적 고백이었지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언약과 확신이 있는 전도내용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인도였습니다.
첫째, 어린이 전도를 위해 교회 주위를 찾아가서 전도하며 말씀을 가르친 것이 다락방 운동의 효시가 된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많은 아이들이 계속 복음 얘기를 듣고 변하는 사실에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 중고생 전도를 위해
중·고등 학생들을 찾아가면서 메시지 전달, 메시지 설명, 메시지 준비가 되어졌으며 문화권 속에서의 전도, 방황하는 청소년의 전도를 이해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셋째, 청년, 공단, 대학 전도를 통해 사실상 제자 훈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됐고, 많은 것을 같이 배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직접 찾아간 대학, 공단 현장이 그렇게도 훗날에 계속 축복이 되었음을 저는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습니다.
넷째,
부목사 시절 교회의 지시를 따라 맡은 구역이 무속인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었습니다. 실로 작은 사역이었으나 거기에서 창3장 문제를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 막3:15, 16:15-20, 눅10:19에서 말씀하신 그 내용을 실제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성경에 이런 기록이 많이 있는
이유를 불신자들의 삶을 실제로 보면서 알게 되었고 다락방 전도운동의 많은 방법 중 하나로 체험케 되었습니다.
■ 제자가 생겨나는
것을 따라 역사 하신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관심가지고 묻는 말 중의 하나가 성경에 나타난 전략과 메시지의 근원지가 어디냐?
구원파냐? 웟치만 니냐? 베뢰아냐? 하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부분만 보고 비판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20년이 넘게 끊임없이 전도현장을 뛰는 중에 제자들이 일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첫째, 전도운동을 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양육부분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면서 다락방 운동과 기본 메시지인 구원의 비밀, 내용, 축복 등을 성경에서 소상히 발견케 된 것입니다.
둘째, 전도 방법
중에 전도의 문이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팀 사역과 안디옥의 메시지를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인간관계, 현장관계,
현장의 시설 등이 팀 사역이라는 세계의 문을 여는 전도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집집마다 일꾼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자는 물론 집 얘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케 되었습니다. 거기서 미션 홈(Mission Home)이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많은 엘리트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었고 사람은 누구나 생업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기에
롬16장, 골4장, 고전16장을 중심으로 전문사역, 혹은 전문교회라는 단어를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한국의 400이 넘는
대학, 일본에 1천이 넘는 대학, 미국에 5천이 넘는 대학만 해도 분명한 답이 나왔습니다. 지역마다 우상, 이상한 단체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거기서 지교회(地敎會) 전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여타 교단들이 세력확장을 위해 설립하는 지교회(支敎會)와는 그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 제자가 생겨남에 따라 발견되어진 훈련
현재 다락방에서 실시하고 있는 훈련은 실로 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가 생겨남에 따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발견된 훈련과정이라고 저는 분명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첫째, 행2:1-47에 기록되어 있는 마가 다락방의 내용, 방법, 모임, 메시지, 기도와 전도 등을 이해시키고 소개하기 위해
성경에서 발견한 훈련 과정이 바로 합숙 훈련입니다.
둘째, 팀 합숙 훈련은 그룹으로 혹은 두세 사람이 안디옥의 만남과 같은 만남을
통해 전도현장을 보게 하는 중요한 훈련입니다. 이것 역시 행11:19-30의 말씀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셋째, 미션
홈(Mission Home) 훈련은 현장 전도, 합숙 훈련, 팀 합숙 훈련, 현장 집회 등을 참여한 자들에게 M. H. 자격을 주어 제자운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자격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부분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저 역시 궁금한 사항입니다.
넷째, 전도학교는 초·중·고·대·일반인들이 지역마다 모여 훈련을 받고 전도를 위해 기도하게 하는 운동입니다.
다섯째, 전도 신학원은 전도가 체질화되지 않고, 전도를 오해한 목회자, 평신도, 선교사에게 2년간 전도 신학원을 통해 많은 변화와
응답을 체험케 하는 훈련입니다.
여섯째, 전문사역과 70인 훈련은 이상의 훈련을 통해 전도에 전문화된 요원이 목회자를 도울 수
있도록 말씀운동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과정입니다.
일곱째, 선교사 훈련원은 지도자, 목회자, 선교사들이 전도하는 제자를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받는 훈련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일들이 하나로 묶여져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또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이같은 과정은 서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앞으로 받을 응답과
훈련이야말로 다락방 전도운동의 본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같은 미래를 놓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기도하면서 기대할 뿐입니다.
저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민족과 세계를 향해 '예수가 그리스도'인 이 사실을 전하는 전도운동에 동참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경적 전도가 현장에서 진행되는 과정 전하고 싶었다
(21): 제 1부 끝
시대마다 하나님의 역사와 변화의 흐름은, '전도자' 중심이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언약을 잃었을 때는 어김없이 실패와 고난의
역사가, 언약이 회복됐을 때는 복음이 꽃을 피웠다. 중요한 때마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전도자를 세상 가운데 세우셨는데, 그 전도자는 늘
세상과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아주 멀리는 구약시대의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이, 또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초대교회의 바울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그 전도자의 계보를 이어온 무디, 요한 웨슬레, 윌리암 뿌스와 같은 이들 역시 외로운 영적 전투 속에서 복음의
꽃을 피웠던 인물이었다. 세상과 타협을 거부한 채, '오직 한 가지-복음'에 방향 맞춰, 안 해도 되는 일을 자청하는 이단아였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비밀을, 사명자들에게는 제자의 비밀을 일깨우며, 오직 성경에서 전도의 비밀을 찾았던 다락방 말씀운동. 류광수
목사로부터 시작된, 이 현장의 말씀운동이 25년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전국과 세계의 일꾼들을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인 전도의
시작, 그리고 진행 과정'을 담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지면이 기획됐고, 많은 이들의 관심 가운데 20회(1년 8개월)에 걸쳐 글이
실려졌다.
하지만 2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일일이 풀어나가기에는 주변 여건이나 시간이 시원스럽지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
곧 전도의 역사는 계속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 상세한 부분과 현재 진행되는 내용은 다음 기회로 기약하면서 '류광수 목사 전도일대기'의 제 1부를
우선 마감하고자 한다. 마무리하는 가운데 류 목사에게는 다락방 말씀운동의 방향, 아쉬움 등을, 취재를 담당했던 김유순 객원기자(서울 예수사랑교회
사모)에게는 취재과정에서 경험한 에피소드, 소감 등을 들어보았다. <편집자>
- 20회에 걸쳐 류 목사님 전도일대기가
문서화 됐습니다. 미력하나마 목사님의 전도 역정이 소개됐는데, 어떤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기를 바라셨는지요.
▲ (류광수
목사) '전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 성경적인 전도 방법이 어떻게 시작됐고, 현장에서 전도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개인의 이야기가 다뤄지다 보니, 전도보다는 특별한 사건 위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 그래서인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쏟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 (류 목사) 신문에 잠깐 소개한
것도 있지만, 속시원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전도 과정 중에서 어려움 당한 일들, 그런데 그 과정 중에서 일일이 다 밝히지 못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당시 틀린 정보로 저를 공격했던 이들이 많이 있지만, 제가 그들과 똑같이 공격하듯 사실을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부산 노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언젠가는 밝힐 때가 있겠지요.
- 듣기에 워낙 목사님이 바쁘셔서 취재 과정
중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취재 중 어려움이나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으셨습니까?
▲ (김 유순 객원기자) 목사님 스케줄이
너무 바쁘시고, 또한 전도를 통해 되어지는 역사에 대해 물으면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짧은 답변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20여 년이 넘은 전도
현장을 직접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지금은 많이 개발됐다고 하지만, 꼬방동네의 어려운 이들의 삶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안창
무속마을과 공단은 한마디로 감동적이었어요. 차로도 다니기 힘든, 가파른 동네를 오직 전도하겠다는 일념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곳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고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성장한, 당시의 청년들, 정신문제로 고통받다가 사역자로 세워진 이들, '평생
자기 소원이 류 목사님 같은 분과 함께 전도와 선교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한 김광일 장로, '언젠가 한국 교계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바른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며 말해줬던 신이건 장로 등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때는 감동과 은혜의 시간이 되었지요. 또한 아쉬움이 한 가지 있는데,
세계 현장에서 만나야 할 증인들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여건이 잘 되지 않았는데, 거의 세계의 현장은 다루지 못했어요.
- 가까이
취재하시면서 목사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요.
▲ (김 기자) 먼저 이 글을 쓰면서 기도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류 목사님 개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곳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한마디로 성령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사실 취재 현장에서 증인으로 선 이들을 많이 만나면서, 복음의 능력은 이상한 신비나 은사가 아니라, 복음을 실제적으로 접하고 누린 이들이
치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임을 보았습니다.
이런 관점이 밑에 깔렸을 때 목사님의 인간적인 면모도 보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일단 너무 바쁘세요. 어떤 경우에는 공항 식당에서 급하게 맛도 없는 식사를 드실 때,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전도자로 보일 때 그
모습이 조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부정적인 이야기가 다 쓸데없는 것이고, 정말 '이 전도자를 도와서 함께 세계복음화
해야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차에는 항상 책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진실하게 느껴졌어요.
또
개인적으로 듣기에도 목사님의 가족들에 대해, 그리고 어린 시절 방황하던 이야기들이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갔던 것 같고, 특히
대안학교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품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 이번 일대기를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목사님께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최근 목사님의 생활, 특히 기도와 건강 관리에 대해 다뤄지지 않았는데요.
▲ (류 목사)
그렇지요. 그 부분에 대해 길게 할 이야기가 많아요. 간단히 소개하면 건강 관리는 매우 철저히 합니다. 기본적인 운동은 정기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반신욕, 호흡법 등은 오랫동안 건강관리 하면서 함께 병행하는 비법입니다. 호흡법 같은 것은 덧붙여 할 말이 있는데, 요즘 바깥의 기운동
하는 이들과는 조금 다른 노하우가 있어요. 이를테면 복식호흡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기도는 생활입니다. 이 부분이 안
되어지면 메시지가 절대 나올 수가 없어요. 기도 없으면 내가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기도에 대해서는 특별히 은혜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내
생활에 있어 기도와 건강은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아쉽지만 이번 목사님의 전도 일대기를 일단락 접으면서, 앞으로 이
말씀운동의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 (류 목사) 다락방 전도운동은 지금까지 세 단계로 진행돼 왔습니다. 첫
단계는 다락방부터 지교회, 두 번째는 전도캠프인데, 여기까지가 훈련이며 준비하는 단계였어요. 이제 세 번째 단계는 제자훈련입니다. 여기서부터
본론이에요. 한국과 세계에 교회의 공해시대가 왔습니다. 1% 밭에서 싸우고 있을 뿐, 99%의 불신 현장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목회자들은 99% 밭으로 가서 직접 제자를 찾을 생각입니다. 바로 제자훈련이에요. 두 가지로 접근해야지요. 기존의 교인들은 구석구석에서 제자로
자라도록 도와주고, 한편으로 불신자들 중에 제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주일 동안 만나는 사람들이 새롭게 보이고, 불신자들을 보면서 예비된
자인가? 그리고 어느 지역으로 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 새삼 깊이 생각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중심으로 제자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 더 깊이 있는 전도 일대기는 언제쯤 나오게 될까요?
▲ (류 목사) 속 시원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때, 다시 이 작업이 지속될 것으로 봅니다.
- 바쁜 시간 중에도 25년의 시간들을 되짚으며 '전도'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해주신 목사님, 그리고 취재를 맡아 좋은 글을 남겨 주신 사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언제쯤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대에 도전을 주는 전도 일대기 후편을 기대하겠습니다.
♪208.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되고
♪4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