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 원효사 www.wonhyosa.or.kr
관 리 청 : 원효사 (전화)062-266-0326
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062)265-0761
개 요 : 무등산의 북쪽 무등산지구 한켠에 자리한 원효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산자수려함을 사
랑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지냈다 하여 원효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효봉
한 기슭에 있는 원효사 동부도는(지방유형문화재 제7호) 현존하는 부도중 조각기법이 가
장 뛰어난 작품으로 사면에 동물모양의 해학적 모습이 특이하다. 절 바로 앞에 높고 긴
계단이 있고 양옆으로 하늘을 뒤덮은 우거진 대숲 때문에 절을 향해 나 있는 통로가 마
치 하늘을 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1980년 5월 대웅전 신축 작업중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팀에 의해 발굴된 청동, 청동불
입상, 동경(구리 거울),각종 소조불 등 백여점의 유물은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
르는 다양한 시대의 것들로서 원효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등산코스 : 1) 무등산장 -> 꼬막재 -> 장불재 -> 입석대 -> 서석대.중머리재 -> 증심사
2) 무등산장 -> 약수터 -> 중봉 -> 증심사
현지교통 : 1) 증심사 : 시내에서 15,27,52,771,555,1001번 시내버스 이용
- 광주에서 8km(25분 소요), 충장파출소에서 10km
- 광주공항에서 17km (555번 시내버스로 40분 소요)
2) 원효사(무등산장) 1187번 버스 이용
- 광주역에서 12km , 충장파출소에서 11.5km, 광주공항에서 24km
도로안내
1) 증 심 사 : 광주시내 → 화순방면 남문로 → 전남대병원 → 1.2km → 증심사진입로(좌회전)
→ 4km → 주차장
2) 무등산장 :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 → 고속도로 벗어나 우회전 →2.2km → 사거리에서 좌회전
→ 1.8.km → 산수동5거리에 서좌회전 → 신양파크와 지산유원지 입구 → 잣고개
→ 청암교 → 충장사 → 원효사지구 주차장
현지숙박
업소명 전화번호 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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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무등파크호텔 (062)226-0011 동구 지산동
신양파크 228-8000 "
뉴프린스 524-0025 동구 운암동
그랜드호텔 224-6111 동구 불로동
주변관광지 : 충장사, 충민사, 경렬사, 무등산레저타운, 지산유원지, 만경대 환벽당, 소쇄원, 식영정,
가사문학관, 화순온천
정보제공자 : 500-400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209-5 광주광역시무등산공원관리사무소
(062-265-0761 / 전송 062-266-5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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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는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번지 무등산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입니다. 절은 무등산의 북쪽 기슭 원효계곡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광주시내에서 약 12km거리며, 도립공원 집단시설지구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계곡을 건너 의상봉(해발 530m) 윤필봉과 멀리는 천왕봉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원효사는 신라시대에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합니다. 1980년 6~7월에 국립광주박물관의 발굴조사가 실시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신라 말기에 작은 암자로 창건되었고 그 뒤 고려 충숙왕대(재위 1314~1339)에 이르러 중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뒤의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 때 사세(寺勢)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靈圭)가 수도하 |
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증심사(證心寺)를 중창하였던 석경(釋經)이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하였습니다. 그뒤에도 1636년(인조 14)에는 신원(信元)이,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信玉)과 정식(淨式)이,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會雲)이, 1831년(순조 31)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乃圓)이 각각 중수하였습니다. 6·25동란으로 다시 소실된것을 당국의 무등산 개발에 힘입어 1954년부터 중창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때 대웅전, 선원(禪院)과 요사(寮舍) 등을 중건하였습니다. 이 공사 때 옛 절터에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해서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 고려자기 및 기타 고려와 조선시대에 만든 토기불두(土器佛頭)가 140점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조선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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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아미타후불탱화 (1954년, 인조견,143.8 *191.8cm)
후불탱일란 전각내 불상 뒤편에 걸리는 불화로 전각에 따라 대웅전에는 석가모니후불탱, 극락전에는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된다.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주협시보살로 하여 보살과 사천왕, 부처님의 제자, 신중등이 그려진다. 이 불화는 본존 오른쪽으로 보관에 화불이 그려진 관음보살을 배치시켜,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아미타후불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미타불은 화면 가운데 원형의 연꽃 대좌 위에 앉아 계시고 그 좌우에 각각 세분의 보살상이 서 계신다. 그리고 부처님의 두광좌우로 네자와 동녀, 동자를 배치시켰다. 아미타불은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위로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옷을 걸치고 있으며, 길고 가느다란 눈썹과 엄정한 눈맵시 등은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킨다. |
뿐만아니라 삼곡자세를 취한 좌우의 보살상은 일본 법륭사 금당벽화 보살상의 유려한 선맛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조선불화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화사의 기량이 떨어지고 약식화되거나 여러개의 양식이 혼합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오지호 화백은 당시의 불화가 아닌 완벽한 조형감각을 보여주는 7~8세기의 작품을 참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다채로운 광배, 청색하늘 위로 표현된 밝은 분홍빛 구름등은 역시 유화가다운 개성을 잘 보여준다. 현재 물감의 박람이 심하지만, 뛰어난 뎃생과 능숙한 필선에 의해 채색감각이 잘 살아 보인다. 1954년 오지호 화백이 후불탱을 그리고, 돌아가신 후 49재에 그의 아들들이 화기를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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