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황토집 사랑 과 전원주택 원문보기 글쓴이: fine design
담틀공법의 흙집 또는 다짐 흙집 이란 이름으로 번역되고 있는 이 공법은 과거의 담틀집을 짓던 공법을 현대화 하여 오늘날의 흙건축으로 다시금 태어나고 있는 현재적 담집을 이르는 말이다. 물론 무엇을 주된 요인으로 보느냐에 따라 흙다짐 또는 다짐흙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담틀집 또는 담집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일단 담틀공법의 흙집으로 정리를 하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건축가 정기용님이 1988년 충남 예산 구억말의 장용순 할아버지와의 인연을 계기로 담틀공법에 관한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97년 파주 연다산리 주택을 설계하고 시공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 공식적인 현대적 담틀공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담틀공법은 목재나 철재거푸집을 이용하여 틀을 세우고 거푸집 안에 흙을 채워 넣은 후 공이 등으로 다져서 벽을 구축하는 방법으로 흙벽 자체가 내력벽으로 작용해 지붕의 하중을 전달하는 구조체가 된다. 그러기 위해 입도가 적당한 흙을, 이상함수률에 맞추어서, 강력한 다짐으로 벽체의 강도를 돌과 같이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이것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흙과 담틀란에 자세히 설명토록 할것임)
이러한 흙건축 방식은 프랑스의 Rone-Alpes, Auverne, 미국의 South Califonia, 페루, 모로코,호주, 네델란드, 짐바브웨, 중국 그리고 한국 등 세계곳곳에서 이 축조법으로 된 건물들을 볼 수가 있고, 공법의 특징상 현대화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몇채의 현대건축물을 중심으로 작업이 진행중이거나 건축된 것이 있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가 1997년을 기점으로 담틀집이 새로이 조명받기 시작했듯이(그 즈음이 IMF 때가 아니던가?) 외국의 담틀공법이나 흙건축에 대한 연구가 경제적 대 공황과 동시에 일어났던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와 실험이 프랑스에서는 1772년 Goiffon이 전적으로 주제에 충실하여 집필한 최초의 책으로 알려진 "피제 건축술"( L' artdu macon piseur)을 출판했을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 2차대전 이후 도시와 마을이 모두 파괴 되어진 영국 프랑스 서독 특히 동독에서 흙을 사용하여 재건한 것은 60년대 까지 계속되었고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문화적 주체성의 추구는 서구기술의 도입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흙건축의 역사적 대중적 전통을 부활하여 현대화 시키는데 노력한 이집트 건축가 Hassan Fathy에 의해 가장 웅변적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그의 시험적 마을에 대한 책'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는 정기용님의 번역으로 국내에도 출판되었으며 '새로운 구르나마을'은 문화적 상징이 되었고 서구의 젊은 건추가들은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했다. 또한 단지 자국의 자원에만 의존하고저 하는 정치적 ,경제적 결정을 내린 중화인민 공화국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댐에서 인민공사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조믈을 흙으로 건설했다. 1950~6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와 아ㅡ리카 중동에서는 주로 경제적 포기 이농현상과 인구폭발을 대처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 많은 흙건물을 세웠다.
1973년 에너지 파동이 제3세계의 석유수입국 뿐만이 아니라 서구에서도 타격을 주었을 때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나라들에게 있어서 에너지 관리는 거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힐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서구에서는 심각한 경제적 난국 즉 대규모의 실업문제(1882년 미국과 EEC의 실직인구는 2천만명이었다)와 생태학적인 포기에 직면한 양심문제를 안게 되었다.
선진 사외의 토대가 흔들리는 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흙건축에 대한 최근의 관심을 이해하기는 쉽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기에 5개 대륙 모두에서 이 유서깊은 풍습의 현대화와 확장에 있어서 건축가, 엔지니어, 정부 와 잠재수요자들의 강렬한 관심이 일어나고, 동시에 그토록 많은 나라에서 그토록 많은 흙건축물이 건설된 적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 담틀공법 흙건축으로 유명한 Divid Easton의 경우도 대규모의 실업문제를 안고 있던 시기와 거의 유사한 80년대 중반에 흙건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련의 흙건축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흙건축의 실현가능성이 실질적이고 납득이 가도록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위의 글은 Jean Dethier 의 저서 '흙건축의 조형세계'에서 편집하면서 제가 바라보는 흙건축의 방향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러한 외국의 사례를 볼 때 우리에게 있어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문화적 유산이자 자산인 담틀공법은 현대의 새로운 두레나 품앗정신으로 이어나갈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그러한 가능성은 지금 이곳 저곳에서 시험되고 있는 담틀집 짓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만 흙건축의 기술을 자신만의 노하우라 생각하고 감추려 하기보다는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을 내어놓고 서로가 부족한 것을 나누어 가져서, 보다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건축형태가 되고, 집짓기가 노동이 아닌 놀이가 되고 축제가 되는 그런 현장에서 걸쭉한 막걸리나 한사발 들이키며 타령이나 한자락 뽑아보았으면 좋겠다.
함양 청미래 마을의 담틀공법 흙집 아마 최초로 내력벽으로 세워진 흙담위에 지중이 올라간 건축물일 것이다. 다만 건축과정에서 시공사와 지붕공사를 맡은 회사와의 문제로 인해 작업이 중단된 채 겨울을 지나게 되고 늦게서야 완공된 건물이다. 결국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사가 되었는데... 새로이 설계한 담틀을 사용하여 시공했던 바 가벼우면서도 편리한 조립방법이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6명의 순수한 초보자들(그중 노동력의 절반이 여자분들이었다.)과 함께도 얼마던지 담틀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아마 품앗이로 집짓기를 한다거나 내손으로 집짓기 프로그램을 운용할 때 아주 훌륭한 담틀조립방법이 될 것이다. 다만 시공회사의 문제로 인해 그 마무리를 직접 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밖에........
함양현장의 마을 안내판 작업과 일꾼들 이 사진들은 함양 주택을 짓기전에 흙의 입도 및 함수율등을 확인하면서 마을의 안내판 작업을 해본 것이다. 또한 이 사진속에 있는 7명의 전사(?)들에 의해서 30여평의 흙담건축물을 훌륭히 완성해 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담틀공법이 한두명의 기술자와 장비만 있다면 초보 일꾼들과 함께도 얼마든지 건축되어질 수 있다는 걸 거듭 확인 할 수 있었으며, 이 자리를 빌어 그때 고생한 식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햠양의 건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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