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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3구간 일시 : 7.3 산행구간 : 여원재-(5.47)-고남산-(5.0)-매요리-(3.3)-사치재(88고속도로)-(2.93)-새맥이재-(1.4)-시리봉-(3.38)-복성이재// 21.48km
산행시간 : 9시간 40분, 새벽 2:30~12:10 일행 :다올대장 등 19명 진주님, 제이시님, 광풍님, 들꽃님, 푸른바우님, 높은하늘님, 천산님, 설정님, 케빈님, 운봉산님, 이철민님, 소래산님, 지마님, 풀빛님, 돌쇠님, 나비님, 하양님, 산조아 날씨 : 豪雨警報상황에서 산행 내내 비 오락가락하다. 1. 豪雨警報에 조바심나다. 주5일제가 실시되어 처음 맞는 토요일, 일어나자 마자 이부자리에서 TV를 켜 보니, 백두대간팀이 가야 할 전라북도지역에 호우경보가 발령되었고, 이미 밤 내내 내린 폭우로 특히 전라북도 장수지역의 피해가 크다. 雨中山行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만 豪雨警報까지 발령되어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가지고 있는 덧바지가 너무 오랜 기간 입은 탓에 기능성이 거의 없어져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 주변의 등산구점을 찾아 알아보니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다행히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스패츠를 추천받아 샀다. 이번 우중산행에서 통풍이 잘 되고 재질이 가벼워 유용하게 사용했고, 앞으로도 웬만한 비에는 등산화가 젖지 않을 것이고, 겨울에도 이 스패츠를 사용하는 것이 겨울용 스패츠보다 더 좋을 것 같다. 산행하는 지역의 아는 사람에게 전화하여 비로 인한 도로상황 등을 알아 보니 다행히도 우리가 가야 할 여원재와 복성이재의 접속도로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TV에 육십령 접속도로가 붕괴되었다는 보도) 2. 우중산행에 대비한 베낭꾸리기 및 장비점검 우중산행에 대비해서 최소한 필수적인 장비와 먹거리만 챙겨 큰 비닐에 쌓아 베낭 안에 넣고, 지갑, 핸드폰 등을 넣을 작은 비닐을 챙기고 나서, 등산화에 방수약 바르고, 산행후 갈아 입을 여벌의 옷 한 세트를 별도로 쇼핑백에 담았다. 장비준비를 마치고 집합시간까지 시간여유가 있어, 아름산방의 산우들이 백두대간팀들의 무사산행을 위해 올린 격려의 글을 보고 있으니, 지마님으로부터 “태그”를 가르쳐 주겠다는 전화가 와 황급히 사당역의 PC방에 갔으나, “태그”는 배우지 못하고 “서울 장수막걸리”를 대신 하다. 3. 오륙도 회장님의 격려를 받고 사당역 출발(밤 10:35) 집합시간이 되기도 전에 대원들이 모인다. 20명 예약인원이 모두 나왔다. 사정상 못 가게 된 솔내음님이 눈물을 감추며 배웅해 주는데 안쓰럽다. 가고 싶었는데도 사정상 못 가는 아쉬움을 누르고 배웅까지 나왔으랴 생각하니 갸륵하다. 오륙도 회장님은 1구간, 2구간 출발할 때도 나오셨는데, 또 나오셨다, 그 시간에 댁에서 “제5공화국”을 시청하는게 더 좋으련만, 백두대간팀의 유니폼을 가져 오신 것이다. 나누어 준 유니푬을 입어 보니 폼이 난다. 상의 몸통은 오렌지색에 어깨는 검정색, 어깨 죽지에 하얀 글씨로 “4050아름다운 산방, 백두대간 종주”라고 새겨 있다. 룸쌀롱형 디럭스한 버스의 뒷자리에 있는 테이블에서 다올대장 등 몇몇 대원들이 환담하다가 소등, 취침에 들어 갔는데 역시 잠이 안 온다. 4. 여원재에서 산행출발(새벽 2:30) 산행출발지점인 여원재에 도착하니 새벽 2시. 점심은 하산 후에 한다는 다올대장의 지시에 따라 점심 먹거리와 산행 후 갈아 입을 옷 등을 차에 남겨두고 산행 출발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산행복장으로 우의 걸쳐 입고, 등산화 보호용 스패츠차고, 헤드랜턴 밝히고 출발하는데, 고남산 오르는 길목이 동네야산을 지나고, 시멘트길 가다가 묘지를 오르고, 또 다시 논길, 또 묘지로 오르는데 길을 안내하는 다올대장이 神奇할 따름이다. 이 구간이 백두대간중 길 잃기 쉬운 베스트10 구간인데도, 야간에 비 오는 가운데 길을 찾아 내는 게 神技에 가깝다. 5. 흙탕길, 가시덤불 헤치고 고남산 도착(05:05) 백두대간 띠지를 찾으면서 3~4차례 선두와 후미가 뒤바뀌는데 이 때 GPS가 위력을 발휘한다. 들꽃님이 대열 중간에서 “20m정도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가세요, 오른쪽으로 가면 안되요”, “앞에 반짝이는 불빛지점이 고남산인데 **Km남았어요”, 文明의 利器가 산행에서까지 활용되는 모습을 보다. 줄장 내리는 비는 내리는 양만 많아졌다 적어졌다 할 뿐 그칠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휴식시간에 그 누구도 간식을 꺼낼 엄두를 못 낸다. 간식을 꺼내려면 배낭 풀고, 배낭커버를 열고, 간식 꺼내고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등산로에 고여 있는 물을 처음엔 피해 갔으나 시간이 지나다보니 그저 철버덕 철버덕 지나고, 내림길에서 미끄러져도 그러려니 하면서 궁둥방아 안 찧은 걸로 위안삼으며, 등산로 주변의 온갖 나무와 풀들이 비를 흠뻑 맞아 제 세상인양 생생함을 자랑하는 틈바구니를 헤치고 나가다보니, 여원재에서 부터 표고차 400여m차이가 있는 고남산이다. 고남산에 오르니 빗줄기가 수그러들고,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명 직전(해뜨는 시각 05:19)이라 어스푸레하여 사진을 찍었으나 파란 색조만 강조되어 나온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능선은 雲海에 쌓여 있고, 고남산 정상은 통신시설이 설치되어 갈 수 없다. 6. 매요마을까지 호흡 고르며 산행(매요마을 도착 06:50) 고남산에서 매요마을까지는 머리에 찬 랜턴이 없고, 빗줄기도 수그러 들어 우의를 벗으니 시원하고, 내리막길이라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름모를 새들의 소리와, 이름모를 나무들이 빗물을 흠뻑 머금고 자랑하는 싱그러운 자태를 듣고 보고 가는 自然과의 交感의 시간이다. 산행하기 좋은 시간대를 나에게 고르라면 단연 이 산행시간대다. 黎明 직후에 능선에 오르면 雲海를 볼 수 있고, 온갖 만물이 기지개 펴는 이 시간, 체력 또한 아침 氣를 받아 충만해 있으니 말이다. 통안재와 유치재를 지나 매요마을을 거의 다 간 지점에서 피어 오르는 雲海를 보았다. 산불이 났었던지 벌목이 되어 있는 가운데 몇 그루 서 있는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雲海를 사진찍기 위해 요리조리 포커스를 맞추어 보나 앙상히 서 있는 소나무 때문에 제대로 구도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7. 매요마을을 관통하면서 궁시렁 궁시렁 매요마을에 접어드니 꽤 큰 마을이다. 산행 전에 백두대간 종주관련 책에서 읽어 생각나는 마을회관을 확인하고, 휴게실도 보았다. 여기서 아침밥을 먹나 했는데, 사치재까지 가서 아침을 먹는다고 하니 배가 고파진다.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면 다방도 있을 법 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이시님이 “쌍화차에 달갈 동동 띄워 한잔, 그라고 마담 것도 갖꼬 오고 말이시......” 하는데 쉬어 갔으면 좋으련만 계속 선두는 앞장서 가고 그저 뒤따라 갈 수 밖에 없다. 8. 사치재 가는 길은 온통 산불 난 지역 매요마을을 지나 포장도로로 가다가 산길로 접어 들었는데, 대간길을 잠시 놓친 것 같다. 대간길과 만나는 지점까지는 예전에 산불이 났는지 온통 伐木이 되어 있어 쓰러진 소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능선길에 올라서니 왼쪽으로 88고속도로가 보이고, 고즈넉한 마을이 보인다. 불현듯 빨치산 생각이 난다. 우리가 가는 대간길은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젊은이(오해없으시길 저는 사상이 양호한 사람)들이 금강산에서부터 지리산까지 오가던 길이다. 보이는 저 마을도 한때 낮에는 남반부세상, 밤에는 북반부세상이 되었던 解放區가 아니었는지 생각이 든다. 낮에는 국방군에게 빨간 색은 절대 아니고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무지랭이라고 하소연하고, 밤에는 보급투쟁하려 내려 오는 빨치산들에게 은밀히 동조하여 식량을 주는 사람들이 같은 空間에서 살았을 저 마을, 그 때 태어 난 자식들이 벌써 50대를 훌쩍 넘겨 旣成世代가 되어 있다. 88고속도로, 전두환 시절 동서화합의 상징물로 국책사업으로 건설된 고속국도, 시멘트포장이 아스팔트포장보다 경제성이 있고, 편도 2차선으로 중앙분리대도 없이 되어 있고, 낮에도 지리산 권역에서는 라이트를 켜고 운행하기를 권장하는 도로이다. 3년여 전 대구에 근무하면서 광주까지 아내와 같이 수차례 이용하였던 생각을 하며 가다. 능선으로 난 대간길의 왼쪽은 대규모 산불이 난 지역 같다. 무참히 훼손된 산림이 볼 성 사나웠지만 경제림으로 잘 조성하여 가꾸면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생각하며 가다보니 어느덧 사치재, 88고속도로를 관통해야 할 지점이다. 선두팀들이 고속도로를 넘지 말고 그대로 도로를 따라 내려 오라하나, 내 평생 한 번도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한 경험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도 없을 것 같아, 경험삼아 무단횡단했다. 9. 88고속도로를 관통하는 農路(?)에서 아침식사(사치재 도착 08:20) 사치재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세진다. 88고속도로를 관통하는 農路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농로 바닥은 연이어 내린 비로 물이 졸졸 흐르고, 앉을 수는 없지만 하늘의 비는 피할 수 있다. 새벽부터 근 6시간동안 비를 맞았고, 앉을 수가 없어 준비한 반찬도 제대로 꺼내기가 귀찮아, 아침밥 먹기가 불편하다. 이철민님이 준비한 된장국에 각자 준비한 밥 및 김밥을 말아서 대충 끼니를 때우다. 1구간에 왔다가 2구간을 쉬고 3구간에 “하양”으로 改名하고 참가한 친구는 야간산행에다 우중산행으로 우의도 변변치 않고 배낭커버가 없어 고생하였으며, 안경에 빗물과 땀이 뒤범벅되었다면서도 껄껄걸 웃으며 시간나는대로 백두대간에 오기 위해 배낭커버 등 여러 장비를 구입하겠다고 의욕을 불태운다. 10. 시리봉까지 좌우 전망을 즐기다.(사치재 출발 09:00) 아침식사를 마치고 들머리에서 標識木을 보니 여원재 12.9Km, 복성이재 4.8Km이다. 사치재까지 내려 왔으니 또 오름길이다. 3구간이 비록 전라도지역에 있다 해도 백두대간길은 만만치 않다. 벌써 6시간 여를 산행한 후라 오름길이 버겁기는 했지만 비가 다소 개어 지리산휴게소의 동서화합의 탑이 선명히 보이고, 머얼리 있을 지리산 연봉을 떠올리니 피로가 좀 가신다. 철쭉인지 진달래인지 이것들과 더불어 잡목들이 등산로를 터널로 만들어 놓았고, 이를 헤쳐 가는 것이 재미있다. 2구간에서 진주총무님이 앞으로 낫을 가져 와 길을 내 주겠다고 한 것이 기억나서, 낫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건 남정네들이 해 주어야지유”한다. 시리봉을 왼쪽에 두고 앞선 대원들이 쉬고 있길레 좀 쉬려는데, 날쌘 대원 몇 분은 아예 보이질 않고, “先入先出”로 출발해서 가버린다. 11. 지나고 지나도 나오는 숲터널을 지나니 아막성터(11:20) 오락가락 빗줄기속에 숲터널을 오르락 내리락 가다보니 자그마한 너덜지대인 아막성터가 나온다. 아막성은 신라와 백제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곳이고, 황산벌이 바로 아래 펼쳐져 있다. 백두대간길은 어느 길이나 우리 역사의 기록이 있다. 지나 온 여원재는 왜구의 침탈에 대항했던 아낙네 民草의 한이 서려 있고, 임진난이나 동학난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고, 고남산은 이성계가 왜구침략을 막은 곳이다. 하산지점 복성이재는 전북 장수군 번암면으로 갈 수 있는 곳이며 임진난때 ”논개“의 고향이며 사당이 있는 곳이다. 이 들 역사의 현장은 외적으로부터 침략당해 방어한 기록, 서민들이 봉기하여 무참히 패배한 기록, 한서린 아낙네의 한이 절절이 베어 있는 야담 등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12. 복성이재에 맨 마지막으로 하산(12:10) 3구간도 가다보니 또 맨 후미다. 그러고 보니 傲氣(오기)가 생긴다. 인제 기록을 만들어 보아야지. 1구간, 2구간에서 맨 꼴찌였으며, 이번 3구간도 맨 꼴찌로 왔으니 이 또한 기록 아닌가? 백두대간 종주를 마칠 때까지 내 기록을 깨뜨릴 隊員, 容恕(?)하지 않으리라, ㅎㅎㅎ 13. 몸을 씻고, 옷 갈아 입다. 진흙탕으로 뒤범벅된 바지가랑이, 등산화는 아무리 빗물에 젖은 풀숲에 비벼대도 없어지질 않는다. 친절한 기사님의 안내로 번암면을 향해 가다가 도로변에 있는 공터(앞으로 휴게소 부지 아닌지?)에서 콸콸 쏟아져 내려오는 약수물(?)에 땀과 비로 뒤범벅된 옷가지와 몸을 홀랑 씻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 입다. 14. 함양휴게소에서 점심(15:00 서울로 출발) 비가 줄기차게 내려 점심을 먹을 수가 없어 고속도로로 진입, 함양휴게소에서 점심을 하다. 젖은 옷가지를 넣은 베낭의 맨 밑바닥에 들어 있는 점심 준비물을 꺼내기 힘들고, 제4조의 대원들이 매식하자고 하여 매식하였는데, 다른 조는 준비해 온 특식과 기사가 제공해 준 소주로 만찬을 즐기다. 15. 사당역 도착(18:10) 2주후를 기약하고, 헤어지다. * 태그를 배우질 못해 이런 글을 또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