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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집을 주목한다
생명성의 탐구의 시학
설정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 시와사람(2010)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설정환의 첫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는 생명성 탐구가 그의 시 세계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살펴볼 수 있다.
원초적 생명성에 대한 그의 관심과 보편적인 생명에 관한 관심이다.
원초적 생명성 탐구는 그야말로 생물학적 관심에서 거의 본능적인 사랑애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인 생명에의 그의 관심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훼손되어가는 생태자원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성적 목소리가 투사되어있다.
마루 끝에
귀뚜라미 우는 밤,
볼일 보러 나온 새댁은
외양간 옆 재래식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참다참다가는
그 환하고 덩그란 달덩이를
우물가 풀섶에 까내리었네
풀섶에서 소리내던 풀여치가
옛다, 몹쓸 것하고
찌찌찌 찌리 찌찌거리지만
부끄러움도 잊고
쏴, 쏴쏴쏴 시원시원 터졌네
풀섶을 적시는 꽤나 긴 소리가
안방까지 들릴 기세인데
그 소리에 놀란 풀여치
가만 숨죽인 사이
맨 엉덩이를 까고 앉아
달빛에 뒷물하던 풋감이
쿵하고 뒤깨로 떨어지는데
마침 볼일 급해진 신랑이
벌렁 문 열고
마루로 내걷는 소리에 놀라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렇게 저렇게 있는데
눈 돌릴 새도 없이
꼿꼿한 그것을 꺼내 놓는데
저것이 쏟아내는 소리로도
눈 뜰 수도 없을 만큼의
뜨거운 것이 훅, 일어나는 것이
그냥 자기는 다 틀렸네.
- 설정환 「거동(擧動)」 전문
이 작품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어져있다. 가을밤 ‘볼일 보러 나온 새댁은’ 무서워서 외양간 옆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우물가 풀섶에” 소변을 눈다. 이때 “마침 볼일이 급해진 신랑이” 문을 열고 마루로 걸어 나와 소변을 눈다. 새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신랑의 거동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렇게 저렇게 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는 원초적인 생명의 욕구가 꿈틀거린다. 새댁은 신랑의 그것이 “쏟아내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힘찬 것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만으로도 “눈 뜰 수도 없을 만큼의/ 뜨거운 것이 훅, 일어나”게 된다. “뜨거운 것”이란 성애(性愛)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냥 자기는 다 틀렸네”라는 진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내밀하게 들여다 보면 성애, 즉 성적 욕구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새댁과 신랑이 모두 소변을 참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정숙한 새댁이겠지만 재래식 화장실을 혼자 가기에는 무서워서 우물가 풀섶에다 소변을 눈다. 소변 누는 소리가 민망해 풀여치가 “찌찌찌 찌리 찌찌거리지만” 새댁은 “부끄러움도 잊고/쏴, 쏴쏴쏴 시원시원”하게 소변을 눈다. 화자는 이 대목에서 새댁의 소변 누는 소리를 부각시켜 에로티즘적인 정서를 환기시킨다. 새댁의 소변 누는 소리가 실제로 놀랄만하게 큰 것은 아니겠지만 화자는 그 소리가 꽤나 길어 “안방까지 들릴 기세”라고 말한다. 신랑을 불러내기 위한 하나의 암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마침 볼일 급해진 신랑이/ 벌렁 문열고/ 마루로 내 걷는” 것이다. 이 때 앉아있던 새댁은 놀라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그 사이 신랑이 “꼿꼿한 그것을 꺼내놓”고 소변을 누는 것이다. 이 작품은 남녀의 소변 누는 소리를 매개로 하여 성애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텃밭가에 선 사내가 두리번대더니, 안심한 듯
땅이 파이게 밭고랑에 오줌빨을 뻗친다, 푸르르르
마침 밭고랑을 후비던 방울새란 놈 그 소리에
한 마리는 건너 밭고랑에 푸르르르 날아 앉고
암놈인지 수놈인지 모를 한 마리는 푸르르르
껀정한 고추막대기 위로 뙤똥하게 올라 선다
그러더니, 사내가 퉁퉁한 아침에 것을 탈탈탈 털자
두 연놈 모두 마당 끝 감나무까지 날아간다.
- 설정환 「방울새 날다」 전문
앞에서 살펴본 「거동」과 「방울새 날다」의 공통점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오줌’ 누는 모습을 형상화 시켰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침”이라는 시간적 우연성을 통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거동」에서는 “마침” 볼일 급해진 신랑이 안방 문을 뛰쳐나와 소변을 누는데서 사건이 발단되고, 「방울새 날다」는 “텃밭가에 선 사내가 두리번대더니, 안심한 듯/ 땅이 파이게 밭고랑에 오줌발을 뻗”치다가 “마침 밭고랑을 후비던 방울새란 놈 그 소리에” 행동을 멈칫거리는데서 사건이 발단된다. 「거동」은 새댁과 신랑의 성애를 불러일으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방울새 날다」는 방울새의 성애를 암시하고 있다. 화자는 “암놈인지 수놈인지 모를” 방울새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러나 시인의 의도는 확연하다. 이 작품을 단순하게 시의 제목처럼 사내가 오줌을 누는 것 때문에 방울새 두 마리가 불편해하며 “모두 마당 끝 감나무까지 날아”간 것만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행위를 하기 위해 사랑하기 좋은 곳으로 날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행에서 “두 연놈”이라고 직접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에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가 방울새의 암수를 감별하는 눈을 지녔는지는 몰라도 “두 연놈”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방울새의 원초적 생명성 발산의 행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방울새 날다」라는 제목이다. 방울새가 날아가 앉은 곳은 마당 끝 감나무이다. 그곳에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제목이 말하는 것은 방울새의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방울새를 자신의 몸을 훔쳐보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사내가 바라볼 때는 방울새가 미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방울새야말로 사랑을 나눌려고 텃밭에 온 존재들로 사내가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꼴이 되었다. “한 마리는 건너” “고랑에 푸르르 날아 앉고” 또 한 마리는 “껀정한 고추 막대기 위로 뙤똥하게 올라 선다” 그리고 “사내가 퉁퉁한 아침에 것을 탈탈탈 털자/ 두 연놈 모두 마당 끝 감나무까지 날아간다” 사내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살펴본 「거동」과 「방울새 날다」두 작품을 성애를 바탕으로 한 원초적 생명성, 또는 원초적 사랑을 건강하게 잘 형상화 하였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설정환의 생명성 탐구의 또 다른 축은 인간의 욕망으로 빚어진 자연의 죽음에 대한 반성과 연민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편들은 그의 시집에서 자주 눈에 띈다.
꽃샘추위에 얼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상사화 화분에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꽃처럼 다시 핀 오후
동짓달 전기요금고지서 여백에는
실종된 아이의 신상기록이 두 달째 똑같이 배달되어 왔다
내 삶의 흔적과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의 삶이
수평으로 관계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믿기에는 너무 긴 목마름의 시간들
죽었다는 사실을 따르기에는 너무 짧은 기다림의 날들
모두들 죽은 상사화 화분을 내다버리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괭이밥풀꽃이나 피웠다 지는 화분을 던지지 못하였다
끝 모를 침묵의 뿌리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마음들을 이으며
이미 죽었다는 세상의 말들에 곧이듣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꽃이 돌아왔다
저예요 저예요를 연발하며 와락 달려들었다
소리 없이 초록의 연한 혀로 부르고 있었다.
- 「상사화가 돌아왔다」 전문
위의 작품은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죽게 내버려진 상사화를 “모두들 죽은 상사화 화분을 내버리라고 성화였”지만 화자는 다시 상사화를 정성껏 살려낸다는 이야기이다. “꽃샘추위로 얼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상사화 화분에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꽃처럼 다시” 피어난 것을 발견한 화자는 “화분을 던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화자의 생명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동짓달 전기 요금 고지서”가 발부된 시기이므로 일년 중 가장 추운 달이다. 즉 생명이 견뎌내기에 가장 어려운 때를 암시한다. 그런데 화자는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또다른 생명의 위기를 발견한다. “실종된 아이의 신상기록”이다. “돌아오지 않는 이의 삶” 또한 ‘죽음’에 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명에 관한 시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종된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대로 화분을 버리면 죽을지도 모를 상사화 화분에 대한 관심이 이 작품을 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탐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화자의 “목마름의 시간들” 또한 제대로 된 생명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인간존재로써의 가치있는 것을 가리키는 생명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반성이 버려지기 직전의 생명, 즉 상사화를 살려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화자는 “죽었다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도 없지만, 죽었다고 쉽게 단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죽었다는 사실을 따르”지 않고 기다린다. 그러한 화자의 마음이 “끝 모를 침묵의 뿌리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마음들을 이”은다. “이미 죽었다는 세상의 말들에 곧이 듣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참으로 따스하다. “어느날 문득 꽃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다림이 가져다준 상사화가 화자에게 보내는 ‘사랑’의 화답이다. 그러므로 “저예요 저예요를 연발하며 와락 달려들었”던 것이다.
다음 작품 「쇠비름 꽃」에서도 생명에 대한 시인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골목 소방도로에 주차된
낡은 트럭 짐칸에 쇠비름꽃
며칠째, 번들번들 통통하게 피어 있는데
석불(石佛)처럼 얼마를 서 있었으면
쇠비름은 꽃을 피워올렸는가
쇠비름꽃이 질 때까지
정녕 거기서 육탈할 작정인 듯
새끼손가락 만하게 굵은 쇠비름은
뻔득뻔득 살 오르는데
바퀴에 따순 오줌을 쏟아 부어도
피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트럭은
발도 저리지 않는지
장마 내내 쇠비름꽃, 그 밥알 만한 꽃을
목마르지 않게
잘 키우고 있을 참인가 보다.
- 「쇠비름 꽃」 전문
언젠가 신축하는 건물에 새들이 집을 짓고 알을 품자 새끼들을 모두 데리고 날아갈 때까지 건물을 짓지 않고 기다렸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쇠비름 꽃」은 그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어느 날 화자는 “골목 소방도로에 주차된/ 낡은 트럭 짐칸에 쇠비름 꽃/ 며칠째, 번들번들” 피어 있는 것을 본다. 쇠비름 꽃은 한낱 잡풀로 밭가에나 있어야 할 풀이다. 그런데 쇠로 된 차 바닥에서 “통통하게 피어있”다. 트럭이 짐을 싣고 다녀야겠지만 쇠비름을 키우기 위해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있으니 트럭 주인의 마음이 참으로 따스하다. 아니 “바퀴에 따순 오줌을 쏟아 부어도/ 피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트럭은” 쇠비름을 키워내기 위해 꼼짝하지 않고 있으니 “발”이 “저리지도 않는지” 대견하기만 하다. “장마 내내 쇠비름 꽃, 그 밥알만한 꽃을” 비를 맞게 하여 “목마르지 않게/잘 키우고 있을 참인가 보다.”
앞에서 살펴본 「상사화가 돌아왔다」, 「쇠비름 꽃」은 생명에 대한 시인의 관심을 직접화법을 통해 생명을 살려내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나 다음 작품 「봄날」은 은유적으로 생명을 돌아오게 하고 있어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 생명성을 드러내는 방식도 매우 이채롭고 재미있다.
황톳길 위였다
황토더미 속에
삽을 찔러 넣었다가
던지듯 뿌리며
사래질을 한다
흙은 위에서 아래로
끈 풀린 다홍치마처럼
차차차 흘러내려서
불이 꺼지기라도 한 양
발밑으로 밀린다
전희의 순간이 흐른다
가늘고 부드러워져서
내리기까지는
모나고 거친
모국어의 조각들을
낱낱이 걸러내어
연한 뿌리를 받아내는 중이다
사래질하는
반대쪽으로는
고르고 부드러운 속살이
봉긋봉긋 솟아오른다
그 속에 뜨거운 것을
밀어넣었다가 나오는 순간
붉고 부드러운 살들은
빈 곳으로 허물어져 내린다
길 위에 두 노인은
길고 환한 그 몸짓을
저물도록 이어간다
모판은 별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별빛 아래였다.
- 「봄날」 전문
얼핏 보기에 이 작품은 두 늙은이가 봄날 황토 더미에서 사래질하는 것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 은유를 구사함으로써 생명의 싹을 틔우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토더미 속에/ 삽을 찔러 넣었다가/ 던지듯 뿌리며/ 사래질을 한다” 노인 둘이서 모판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모판은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공간이다. 이러한 노동 행위 자체만으로도 생명을 발아시키기 위한 노력이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황토더미 속에/ 삽을 찔러 넣”는 행위, 즉 “삽”이라는 남성성이 “황토”라는 여성성에 생명의 관을 잇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즉 원초적인 생명을 낳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여성성인 향토가 “끈 풀린 다홍치마처럼/ 차차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삽이 지나가 이후 황토는 “연한 뿌리”를 “받아 내”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는 행위 사래질은 “그 속에 뜨거운 것을/ 밀어 넣었다가 나오는” 것이다. 그 생명의 몸짓을 “길 위에 두 노인은/ 길고 환한 그 몸짓을/ 저물도록 이어” 감으로써 봄날은 환해지고 따스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젊은이가 황토더미에 사래질하는 것이 아니라 두 노인이 한다는 점이다. 두 노인은 필시 부부일 것이다. 젊은 날 자식들을 모두 낳아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나이이지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처지에 또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인의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