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의 수행결사로 유명한 백련사는 다산초당과 함께 강진군 만덕리 만덕산의 이쪽저쪽에 자리잡고 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닿는 데는 약 30-40분가량이 걸린다.
백련사의 내력은 정다산이 제자들과 찬술한 [만덕사지], 중중 때 명문장 윤회가 지은[만덕산 백련사 중창기],
그리고 지금 백련사에 남아 있는 조종저(1631-1690)찬의 ‘백련사 사적비’비문이 남아 있어 소상히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통일 신라 839년 구산선문 중 충남 보령 성주산문을 개창했던 무염(無染)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니,
신라말기에 지방호족들이 큰 스님을 초치하여 산간벽지에도 절을 세우던 그 시절에 그런 사연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 후 절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는데, 고려 후기에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무신정권은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쳐줄 사상의 재정비작업을 착수하게 되는데
여기에 부응했던 불교계의 동향이 이른바 결사(結社)운동이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조계산 송광사에서 수선(修禪)결사를 맺으며 선종을 개혁하여 조계종을 확립하던 바로 그 시점에,
원묘(圓妙:속명 徐了世, 1163-1245)스님은 백련결사를 조직하면서 천태종의 법맥을 이어갔다.
요세는 고려 희종 7년(1211)부터 지방호족으로 최씨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강진 사람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의 후원을 받아
만덕산의 ‘옛 신라 절터’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고종 3년(1216)에 80여 칸의 절집을 완성하고 당당한 위세를 떨치게 되었고,
수선사(修禪社, 지금의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자리 잡았던 조계종의 정혜결사 - 지눌이 열었다.)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 수행결사의 양 갈래를 이룬다.
이후 120여년 동안 이 절은 백련결사의 중심으로 번창하면서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그 후 고려 왕조 말기 왜구들의 잦은 침범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시대의 척불론으로 사세가 기울었으나,
세종 12년 천태종의 종장인 행호선사가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하면서
절을 둘러 쌓은 긴 토성이 지금도 흔적이 남아 행호토성으로 불린다.
1760년 큰 화재로 수 백칸을 다 태우고 2년의 복구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백련사는 8명의 대사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바로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혜장선사 아암으로, 대둔사 쪽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힌다.
* 건축 - 백련사의 규모는 크지도 작지도 않다.
맨 앞에 만경루가 있고 그 뒤에 대웅보전, 명부전, 칠성각, 응진당이 남향으로 앉아 있다.
* 글씨 -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현판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의 독특한 글씨이다.
* 백련사 사적비(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137호)
이곳에는 고려의 문필가인 최자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의 부도비가 있었는데,
그 비신이 없어지고 돌거북과 머릿돌만 남아 있었다.
이것을 다시 사용하여 조선 숙종 7년(1681)에 당시의 홍문관 수찬 조종저가 지은 비문을 새겨 백련사 사적비를 세운 것이다.
고려시대의 돌거북은 점잖게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윗니를 맞물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