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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경인년 첫날, 아파트 창 틀위에 소복히 내려 않은 눈을 보니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했나 봅니다. 온 누리가 하얗게 덮여있는 것을 본 순간 추사의 세한도가 생각났습니다
'세한도'는 추사 1884년 추사의 나이 59살 때 제주도의 귀양생활 5년 차 되던 해 사제간의 정(情)과 변함없이 정성을 다하는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려준 그립입니다.
한때 추사의 문하에는 3.000명의 문하생이 있었다는데 그들을 세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첫번째, 양반 출신의 문인으로 이당 조영호, 위당 신헌, 유재 남병길, 추당 서상우, 묘정 민태호, 자기 강위, 이재 유장환, 왕손인 석파 이하응(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 수제자)
두번째. 우선 이상적(역관 가정에서 태어나 본인도 23세에 역관시험에 합격), 역매 오경식, 소당 김석준, 유장환, 민태호, 남병길, 오경석등
세번째, 서화가 이자 화가인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소당 이재관, 소치 허련, 하원 이한철, 해사 유숙, 학석 유재소, 북산 김수철 등이 있습니다. 추사의 문화생들은 급변하는 국제 정치(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영불 동맹군과의 전쟁)등으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여 초기 개화운동의 추진세력이 되었으며,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등 북촌의 젊은 제자들에게 전수 되었습니다.
이 중 이상적은 역관으로 수시로 연경에 다녀 왔으며 70여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학식과 서문에 능통하였고 스승 추사에게 구하기 힘든 계복의 '만학집' 운셩의 '대운산방문고'를 북경에서 구하여 제주도로 보내준 것입니다.
'만학집'의 저자 계복은 완당이 옹방강, 완원과 교류 할 때 익히 알고 그의 학예를 흠모해 온 터였다. 더욱이 1841년에 전 8권으로 인출된 이 책에는 옹방강이 제명(題名)을 썼고, 완원이 서(序)를 쓴것이 들어 있으니 완당으로서는 더욱 감격스러운 책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1884년)에 이상적은 또 하우경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이라는 책도 보내주었다. 이 책은 자그마치 총 120권, 79책) 이었으니 양 으로도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원당은 감격하고 또 감격하여 집 옆에 뱌락맞아 허리 꺽인 낙락장송이 겨우 한가지 비틀어 잔명을 보존한 형상을 그린 그림을 초묵의 갈필로 이상적에게 그려 주었다.
완당은 이상적에 변함없는 사제지간 정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한도"를 그리고 발문을 적었다.
지난 해에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 해에는 우정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 만리 먼곳으로 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단 번에 손에 넣을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松伯)가 뒤늦게 시든다(後週)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게는 전(前)이라고 더한것도 아니요 후(後)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여름철 모든 나무가 초록일 때는 소나무 잣나무의 푸름은 특별나 보이지도 않았다. 낙목한천의 겨울이 되어 모든 나무가 잎을 떨어트리자 그제야 송백의 상청(常淸)이 새삼 눈에 들어온 것이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추사에게 제자 이상적에 배려마저 없었다면 그는 아마 제주에서 맥을 놓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찬 서리 한번 맞은 적 없던 그가 혈혈단신으로 죽음에 구렁텅이에 내던져지자 가깝던 친구들 마저 등을 돌려 외면했다.
단물을 다 빨고 나면 사귐도 멀어진다. 추사는 고맙다는 말 대신 세한도에 붙여 쓴 글에서 이렇게 물었다.사마천의 말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네가 나를 이익의 잣대로 보지 않은 것인가?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디.
완당으로 부터 뜻하지 않게 천하의 명작을 선물받은 이상적은 너무도 기뻤다.
그는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세한도'를 받고는 감격하여 완당에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눈물이 흘러내림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분수에 넘치게 칭찬해주셨으며 감개가 절절 하였습니다.
아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권세와 이익을 따르지 않고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번 걸음에 이 그림을 갖고 연경에 가서 표구하여 옛 지기분들에게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할까 합니다. 나라의 공론이 봉책(封冊)의 칙명을 받을 일을 여러가지로 지시하니 이 한 몸이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어 마치 쇠망치로 하늘을 내려 친 것처럼 이루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내전에서는 연경에 가면 사오라는 물건이 아주 많아 이 일은 어찌할 지 모르겠습니다..... 끝에 있는 조항은 불태우시기 바람니다
김영호. 추사의 붓을 따라 천리를,,,
'세한도'는 완당의 마음속에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文氣)가 생명이다. 이 그림이 우리를 감격시키는 것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에 붙은 아름답고 강인한 추사체의 발문과 소산한 그림의 어울림에 있다.
완당 해서체의 대표작으로 예서의 기미가 남아있는 듯한 반듯한 이 해서체는 글씨의 울림이 강하면서도 엄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서 심금을 울리는 강도가 아주 진하다.
그리고 이 "세한도"에 더욱 감동하게 되는것은 그러한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 보다도 그 제작과정에 서린 완당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씨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완강의 예술세계가 이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속에 흥건히 배어있음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이상적은 그 해 10월 완당이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동지사 이정웅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이듬 해 (1845년) 정월 스무 이틑 날, 그의 벗인 오찬의 장원에서 벌어진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이 잔치는 8년 전인 1837년에 이상적이 오찬의 처남인 장효손과 시와 술로 만난적이 있었는데, 그 재회의 환영연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이번 잔치에는 주인 오찬, 주빈 이상적 외에 장효손등 17명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완당의 "세한도'를 펴놓고 좌객들에게 보이니 모두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다투어 제(題)와 찬(贊)을 시로 문으로 붙였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있는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이다.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을 받은 이상적은 한 권의 횡축으로 합장(合樟)하고 표지에 붙이는 제첨(題簽)은 장목(長穆)에게 부탁하여 표구를 완성해 가지고 돌아와 귀국 후 완당에게 보고삼아 또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완당은 1848년 12월 6일 61살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몰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나 오랜 벗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을 면하고 9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던 완당이다.
책읽기를 즐겨한 해외 유학파 완당은 제주도 유배시절 일종의 안식년을 갖게 된 것이다. 오로지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그림을 그리고 학문에만 열중한다. 절해고도 제주에서 책을 구하기란 힘든일 이었으나 제자 우산 이상적은 연경에서 귀한 책을 조달해 주었다. 이상적이 구해다 준 책으로 완당의 학문세계가 더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유배지에서 완성된 추사체
완당은 유배시절 많은 지인과 벗들로 부터 글씨 청탁을 받게 된다. 지묵이 넉넉지 않은때 라 종이도 보내지 않고 글씨 청탁만 한다고 불평하던 완당이었지만 이로 인해 추사체가 완성된 것이 아닌가! 시와 글씨 모두 유배지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9년 간 낮선 풍토와 음식, 질병에 더하여 아내까지 잃은 정신적인 외로움까지 견디며 학문과 예술세계 모두를 완성 시키는 기회를 갖게 된다. 또한 대단히 까다롭고 오만할 정도의 자신만만하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성격의 결이 위어졌음도 유배지에서가 아닐까 , 하나 비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주에서 풀려난지 3년만에 다시 또 변경 지방인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의 북청 유배는 2년이 지난 1852년 겨울이 되어서야 풀렸다. 그의 나이 68세 이후 그는 "과지 초당'이란는 거처를 과천에 짓고 서화에 심취하였으며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다.
"내 글씨를 아직 말하기는 부족함이 있지만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냈고, 붓 일 천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
일곱살이 되던 해 입춘날을 맞아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대문에 써 붙인것을 본 체제공이 이 아이는 커서 일세를 울릴 명필이 될것이다"라고 예언 하였다. 하나 詩, 書, 畵, 경학, 금석학의 대가로 우뚝 솟은것은 하루 아침에 탄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그는 번민속에 그러 그러한 인생을 보냈을지 모른다. 그의 인생 불행은 "에술의 승화"를 가져 왔다고 볼수 있다.
추사, 완당, 과파, 매화구주, 소봉애산인, 승설학인, 과지초당 노인등 250개가 넘는 아호를 사용하였고 전각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완당, 추사체라는 소박하면서도 날카로운 경지의 글씨체로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을 개척한 추사는 71세 되던 해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 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영원한 잠에 빠졌다.
"세한도'는 1884년 (헌종10)에 그리다.
1974년 12월 31일 국보 제 180호로 지정되다.
종이 바탕에 수묵으로 가로 69.2cm, 세로 23cm
오른편 상단에 "세한도"라는 화제(畵題)와 " 우선시상완당" 이라는 글과 관지를 적었다.
유홍준의 완당 평전과 정민의 세한도.....
추사의 세한도는 추사의 제자 이상적이 죽은 뒤 민영휘가 소유하다, 그의 아들 민규식은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 후지즈카 교수에게 넘겨 주었답니다.
후지즈카 교수가 어느 잡지에 "세한도"를 소개하는 글을 썼는데 이글을 본 소전 손재형이 두달 동안 매일 아침 후지즈카 교수를 찾아가 '세한도"를 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후 후지즈카 교수기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이 손재형에게 연락하여 아버님의 유언이라며 손재형에게 돌려 주었답니다.
손재형은 정치를 하면서 돈이 필요하자 개성의 갑부인 손세기에게 저당을 잡히고 돌고 돌다 넘어 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손창근의 소유이지만 국립 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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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아 있을 때 억울하게 헤여졌는데 / 이제 다시 죽음으로 갈라서고 마는 구려
영원히 쫓을 수 없는 길을 가버렸으니 / 내 가슴이 무너지고 그리움이 사무치는구려
부인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유배지에서 듣고 추사가 쓴 詩
북한산 비봉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1816년 병자년 7월 김정희가 와서 읽다 라고 비석 옆면에 세겨 넣음
김우명과의 악연이 꼬리를 물고 따라 다닌 추사의 말년~~~
다산 초당(茶山草堂)의 현판은 추사의 글자를 모아 만든 현판 ^^*^
제주도 귀양살이 하던 집이 1948년 불에 타 1984년 다시 고쳐 지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