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성당 전면
한식목조건물과 바실리카 교회건축이 접목된 걸작
흔히들 한국의 교회건축은 서양교회건축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고유의 특성을 갖지 못하고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유리된 무국적의 건축이라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초기교회건축 중에는 토착화의 훌륭한 시도가 적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 으뜸을 꼽는다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성당이 위치한 강화읍 관청리 언덕은 고려중기 몽고군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도에 천도하고 내성을 축조한 남쪽 성터의 일부분으로 강화읍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견자산 언덕마루이다.
1960년대 강화성당의 모습
경사지 주변대지를 배 모양으로 축성하고,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을 남서향 종축으로 배치하여서 흡사 강화읍과 남산을 향해 항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외부공간의 구성이 구릉지 가람(伽藍)과 유사하게 경사 진입로, 석축계단,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 성당에 이르게 되고 성당 뒤 담을 둘린 뒤 사제관이 위치한다. 외삼문은 솟을대문에 팔작지붕이고 보다 낮은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제2대, 3대 주교의 기념비가 있다. 내삼문도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인데 서쪽 칸이 종각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당의 평면 형태는 전통 목조 중층한옥의 축을 바꾸어서 전형적인 삼랑식 바실리카 성당의 내부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정면 횡간이 보칸(梁間)으로서 좌우 툇간 한 칸씩을 합쳐 4칸이고, 측면 종간(道里間)은 앞뒤 툇간을 합쳐 10칸이다. 앞 툇간 4칸은 배랑(拜廊, narthex)으로 쓰이고 뒤 툇간 4칸은 제의실로 쓰이며 예배실은 좌우 7개씩의 고주에 의해 신랑(nave)과 측랑(Aisle)의 구별이 뚜렷하다. 신랑의 폭은 측랑 폭의 두 배이고, 신랑의 천장높이(대들보 하단까지)는 측랑의 폭과 거의 같다. 사방 고창에 의해 내부는 밝다.
강화성당의 배면
5번째 고주 사이의 신랑과 6번째, 7번째, 8번째 칸의 신랑과 측랑 사이에 3척 높이의 성찬란이 둘러쳐져 있어 지성소 내진(chancel)과 성가대석 및 회중석을 구분하며, 7번째 대들보 아래에 주제단이 놓여있고, 성찬란 바깥 좌후면에 소제대가 설치되고 그 위에 감실이 위치하고 있다. 신랑 두 번째 칸의 중앙에 상대적으로 큰 화강석의 팔각 세례대가 놓여있으며, 바닥은 목재 장마루로 되어 있고, 5번째 칸의 좌우외벽에 아치형의 측면 출입문이 나있어 전체적인 라틴십자가의 진행축을 암시한다. 건립 당시엔 회중석 중간에 남녀석을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
강화성당 입구부분(왼쪽)과 제단부분(오른쪽)
구조는 순수한 전통목조로서 중층구조로 되어 있으며, 지붕가구는 납도리 5량 구조이다. 외벽은 기둥 사이에 적벽돌 한 장 불식 쌓기로 되어 있다. 좌우 측벽의 매 칸마다 나있는 창은 쌍여닫이로 외부 유리와 내부한지의 2중창이며 처마 아래 고주 사이에는 사방 둘러 고창(clearstory)이 있다. 지붕 용마루에는 목재틀에 동판을 씌운 십자가가 올려 져 있으며, 목 부재에는 가칠단청이 칠해져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첫 사제이자 후에 대한 성공회 3대 주교가 된 트롤로프(Mark Napier Trollope)신부의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치밀한 구상과 설계, 공사를 담당한 대궐목수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걸작이다. 순수한 한식목조건물로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배치 및 외부공간구성도 한국의 구릉지 사찰건축 배치기법을 잘 응용하였다. 토착화의 매우 귀중한 사례로서 한옥성당의 모델이 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