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받은 도움 되돌려주고 싶어요"
대구경북혈액원 원장 송지열
비 온 다음날, 그 날의 하늘만큼 파란 색이 있을까. 그 날의 공기만큼 상쾌한 것들이 세상에 존재하던가... 유난히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있고,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 있어 가는 길을 배웅하는 듯한 그 길을 따리 대구를 향해 출발했다.
대구경북혈액원 송지열 원장에 있는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여느 관공서라면 퇴근 준비에 서두를지도 모를 시간이었겠지만, 그가 근무하는 혈액원은 여전히 말끔히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직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산군 남이면 매곡리 풍전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께서 딸 넷을 내리 낳으신 후로 절 낳으셨으니 귀한 아들이었겠지만, 너무도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기에 유난히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네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남일면 초현리로 다시 이사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송 원장네 집은 중학교 조차도 남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남일중학교, 금산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일가친척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지독히 가난한 집안이었던 것.
"강원 삼척에 사시던 이모와, 금산읍 송정형외과(송외과) 송만재 원장의 할아버지, 만물약초 송원재 대표의 아버지 송지상 씨등 친척들이 학비를 주시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저에겐 일생의 은인 같은 분들이지요.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겁니다."
어려운 와중에도 악착같이 공부해 그는 다행히 학업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상처는 왜 없었을까. 천성적으로 명랑해 열등의식 없이 친구들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상처받은 자존심,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들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했다. 고교시절 그는 문학도를 꿈 꿀만큼 시를 좋아해 늘 그의 손에는 한권의 시집이 들려져 있었고, 또 나름 시도 잘 쓰는 학생이었다.
"문학은 저를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문학이 있었기에 옆길로 새지 않고 인생의 목표를 올곧이 세울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시를 써나가는 송 원장은 문학이야 말로 인생의 버팀목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또 다른 버팀목이 된 것은 바로 부모님. 특히 그의 어머니는 '어른이 되면 네가 어렸을 때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것처럼 너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며 살아라'는 말씀을 늘 말씀하시며 사셨다. 어머니의 뜻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긴 그는, 봉사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1979년에 20살 나이로 대전시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지역주민들에게 봉사한다는 자부심에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열매맺지 못한 작은 꿈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대학 졸업장이었다.
"더 배우고 싶은 욕심에 야간대학을 선택했습니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더 나은 직장환경을 구하는 시기이기도 했구요. 대학을 졸업하기까지의 제 삶은, 오로지 대학졸업 그 목표 하나만을 위해 산 삶 같아요."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근거해 끊임없이 삶의 방법을 선택해야 헀던 송 원장. 그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며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계속 하던 중, 그의 인생은 1986년에 또 한번의 변호를 맞는다.
1986년, 대한적십자사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그는 진짜 인생이 시작됐다고 표현한다.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의를 보면 행한다는 그의 좌우명처럼, 그는 적성에 맞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국가와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기 시작한다.
"89년에 대한적삽지사 이산가족사업부에서 일하며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수행원으로 북한을 일곱번 다녀왔어요. 90년에는 50년 동안 조국의 가족친척들과 생사를 모르며 살고 있는 소련 사할린동포들의 모국방문을 위해 김상협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함께 소련(현 러시아)에도 수차례 다녀오기도 했구요. 그 후 91년부터는 청소년 적십자단에 소속하여 초중고대(RCY) 단원들을 훈련시켜 청소년 외국 캠프에 보내 봉사하고 올 수 있도록 힘썼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그때 처음 계간지 '청소년'도 발간했었는데, 학창시절 문학을 좋아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바탕 삼아 97년에는 골수사업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에는 골수기증이 생소했어요. 그래서 방송에 많이 출연했습니다. 골수(조혈모세포)기증자를 모집하기 위해 각종방송에 출연해 올바른 골수기증자들의 바른 이해사례를 들고 이해시키는데 앞장섰지요."
그 시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 입양아인 미국 육군사관생도 성덕바우만에게 한국 국민을 생대로 골수기증자를 찾아 골수이식수술을 성공시킨 일이다. 그때 일의 중심에서 성덕바우만을 도왔던 일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될 터.
모든 일을 자신의 일처럼 앞장서 하려는 그의 성품 탓일까. 그는 점점 조직에서 인정받아 중요한 보직을 맡게 되었다.
"2002년 혈액원에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서부혈액원과 인천혈액원을 다니며 헌혈현장에서 헌혈을 위해 뛰어다니고, 2005년에는 혈액관리본부 인력관리팀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직개혁 작업과 인적쇄신작업을 추진했습니다. 2006년에는 국장급으로 승진해 울산혈액원장으로 근무했지요. 그때 현전 사원들이 헌혈을 하도록 했는데 그 인원이 어마어마했어요. 또 울산시교육청 교육국장을 홍보대사로 위촉해 드렸는데 어찌나 사업 추진력이 좋으신지 도움을 많이 받았네요."
어떤 일이든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불장군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적절히 받을 줄 알고, 그 도움을 잘 버무릴수 있는 송 원장의 리더십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어떤 어려움 앞에도 할 수 있다는 각오로 임하는 그의 신조는, 바로 약자를 도우려는 측은지심으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중에도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만들어 주신 어머니께는 순간순간 무한한 존경심을 느낀다는 그다.
송 원장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매 순간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쓴느 사람이다. 스스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귀남이'처럼 살던 자신이지만, 자신이 꾸린 가정에서는 부부평등을 고민하는 현대 남성이기도 하다.
또 부모님을 더 잘 모시고 아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 공무원이던 아내를 설득해 전업주부로 살게 하는 결단력도 가지고있다.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아직도 서운해 해서 미안해지기도 한다"고 말하는 송원장의 수줍은 웃음 속에는 가족과 아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느껴진다.
지금도 가끔씩 시를 쓰며 자신을 위로한다는 송 원장은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금산이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금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수려한 경관이 자신을 키워냈으며 그 속에 호연지기를 기르며 성장했으니 모두가 금산의 덕분이라는 것. 거기에 자신이 절받한 상황일때 자신을 도와준 아름다운 금산 친척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에 자신의 현재가 있다는 것을 송 원장은 늘 마음에 새기며 살고 있다.
앞으로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나랏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송원장의 밝은 미소속에서 믿음직한 일꾼의 모습이 느껴진다.
<박희숙 기자>
먼 훗 날
詩 송지열
먼훗날
그대가 있어
그리워했노라고
먼훗날
그대가 있어
아름다웠노라고
먼훗날
그대가 있어
행복했노라고
먼훗날
가슴벅차게 말하겠습니다
다시만나고 싶었노라고
- 기고문
인천일보 2004년 8월 5일 기고문
안전한 혈액관리 최우선
우리 국민들이 헌혈증을 1장씩 갖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헌혈 부족 사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대한적십자사가 1981년 정부에서 혈액사업을 위탁받아 수행한지 23년 됐다. 처음에 30만명이던 헌혈자는 2003년 253만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인천지역의 헌혈 시민은 13만명에 이른다. '헌혈은 사랑'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데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과 매혈(賣血)문화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적십자사는 혈액이 없어 쓰러져가는 생명을 우선적으로 구하기 위해 양적인 성장에 주력했다. 그러다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에이즈(AIDS) 바이러스처럼 잠복기에 있는 혈액을 정확하게 검사할 수 없었던 의학적 한계도 있었다.
혈액은 일반적인 의약품이 아니다. 혈액은 생물체다.
그 안에는 몇십만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존재한다. 혈액 속에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바이러스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선진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혈액을 약품처럼 완벽한 제품을 만들기도 어렵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들은 아직도 혈액이 일반의약품처럼 완벽하기를 바란다. 혈액은 사람 몸속에서 채취된다.
한 예가 바로 잠복기 21일인 에이즈 항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잠복기 내에는 항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정상혈액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혈액관리를 소홀히 해선 안된다. 최근 적십자사가 지적을 받고 조취를 취한 일은 일부 직원들의 업무소홀이나 제도적 측면에서의 잘못에서 비롯하는 만큼,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단체헌혈보다는 헌혈의 집에 건강한 헌혈자가 스스로 찾아가 헌혈하는 선진국 형태의 헌혈방식으로 전환해 나갈 계획이다.
나에게 혈액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처럼,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병실에서 혈액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