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12/06 09:47
http://blog.naver.com/sshh388/220202037554
이별의 노래-시인 박목월과 ‘떠나가는 배
’
✦현재 70대 노장년층들이 고교시절 목청 높여 애창했던 노래가
묘하게도 시인 박목월과 관련된 ‘이별의 노래‘와 ’떠나가는 배‘라고 하여
관련된 잼있는 에피소드 자료를 찾아 보았으니 참고가 되시길~
박목월 (본명 박영종) 시인, (전직) 대학교수
생몰 : 1916년 1월 6일 생~ 1978년 3월 24일 몰(당 62세)
출생지 : 대한민국 경북 경주시
데뷔 : 1939년 문장 '길처럼' 등단
경력 : 한양대학교 문리대학 학장
수상 :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52년 전쟁이 끝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 H양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않고 홀연히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고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새로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편을 찾아 나섰는데 ...
마주하게 되자..머리채 잡는 난투극을 벌이는대신.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냐' 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 지내라고
두사람 의 겨울 옷 보따리를 내밀고 서울로 사라졌다.
박목월과 H양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 아파하며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하였고 박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詩를 지어 사랑하는 연인 H양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 詩가 이리저리를 거쳐서 김성태 선생이
작곡하게 되어 첨으로 부산에서 발표 됐다고 한다.
이별의 노래
-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1.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아~ 아 나도가고 너도가야지.~
2. 한 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아~ 아 나도가고 너도가야지.~
3.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리라
아 ~ 아 ~ 아 ~ 아 나도가고 너도가야지~
H양은 사랑과 인생을 걸었지만 박목월의 부인이 다녀간
며칠 후 부산에서 그 H양의 아버지 (당시 목사)가 찾아와
설득 했고, 사흘을 버티다 결국 이별을 선택한 목월의 연인(H양)은
부친의 손에 이끌려 제주항으로 떠나고,
망부(忘婦)를 태운 꽃상여를 뒤따르 듯 목월이 따르고,
그 뒤를 목월이 제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양중해 선생(당시 제주 제일중 국어교사)이
이별의 장면에 동행하게 된다.
목월의 연인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뱃전에서 고개만 떨구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그날 저녁 양중해가 詩로 썼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 인 독학으로 작곡공부를 하다시피한
변 훈선생에게 이 詩를 주어
지금은 ‘제주의 노래’가 된 불후의 명곡
"떠나가는 배" 가 탄생 하였다고 한다.
떠나가는 배
- 양중해 작사, 변 훈 작곡-
1.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2.터져나오라 애설픔 물결위로 한 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끓이 사라져 내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뜬 바다를 지키련다
3.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가곡으로도 널리 알려진 `떠나가는 배'
시를 자연석에 아로새긴 높이 3m, 폭 2.2m 크기 시비(詩碑)가
제주항 여객선 부두가 바라다 보이는
제주시 탑동 해변공연장 잔디밭에 세워져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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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춘이 작사,작곡한 ‘떠나가는 배’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
혹시 제목 표절이 있다면 ~ 몰라도 암튼 관련이 없음니~,
목월의 기러기 울어예는
요즘 대통령처럼 전두환도 뻔질나게 해외순방을 다녔지. 전두환이 해외 순방에 나서거나 돌아오거나 할 때 언제나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어.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함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 김일성 장군의 노래 저리 가라할 <대통령 찬가>는 지겹게도 흘러나왔지. 한번은 크게 웃은 기억도 난다. ‘길이 길이 빛나리라’ 부르는데 전두환 머리에 조명이 떡 비쳐서 반짝거리는데 어찌나 웃기는지.
아무튼 이 노래의 작사자는 박목월. 작곡가는 김성태다. 박목월. 청록파 3인 중의 한 명. 그런데 마음이 약하고 물렀다는 그의 품성 탓인지 다른 두 명, 조지훈과 박두진이 정권에 대해 보여 준 강단을 그는 보여주지 못했고 되레 저 노래를 짓고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쓴다. 육영수 여사의 신화(?)가 집대성된 것은 박목월의 손으로였지. 가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재떨이로 두들겨 맞아 시퍼렇게 눈가에 멍이 들었다는 ‘육박전’의 여장부는 ‘학(鶴 )같은 국모’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게 된다. 각설하고.
이 대통령 찬가 작사 작곡 콤비는 또 하나의 유명한 노래를 보유하고 있지.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예는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무슨 노래인지 알겠지? 일찍이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에서 함축의 절정을 보여 줬던 이 시인은 <이별의 노래>에서도 저 짤막한 단어들 안에 담을 걸 다 담는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만 천재는 천재일 뿐 부러워하지 말자.
그런데 이 노래에 얽힌 사연은 매우 복잡(?)하다. 우선 박목월 자신이 밝힌 노래의 배경과 사람들이 얘기하는 두 버전이 있어. 박목월 자신은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서 이 노래에 등장하는 이별의 대상을 밝히고 있지. 물론 이름이나 사는 곳, 진도 나간(?) 사연은 하나도 밝히지 않았지. 오월의 어느 날 처음 만나고 눈발 날리던 날 두 번째 마주하고 세 번째는 눈부신 햇살이 내려치는 날이었다나. 그런데 그녀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목월에게 자신의 침상을 지켜 달라고 청했대. 그리고 슬픈 건배를 하고.... 이윽고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목월은 <이별의 노래>를 읊조렸다고 쓰고 있지. 목월이 앞에 있었다면 즉각 “솔직히 말해 봐요 어디 사는 누구였어요?”라고 묻고 싶을 거 같은데 역시 시인답게 그는 질문자의 입을 막아 버린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는 없을 것이다.” 멋있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가장’이라는 최상급 부사는 별로 의미가 없어. 그 외에도 소중한 이름(?)은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별의 노래>는 거기에도 얽혀 있으니까. 목월에게 치명적인 사랑은 전쟁이 막 끝난 뒤에 왔다. 무려 5남매의 아버지이자 착하고 사려깊은 아내를 거느린 남자이지만 골키퍼에 수비수 많다고 골 안들어가냐고 내지르는 공격수가 있었어. 조카뻘의 여대생이었지.
이 여대생이 자신에게 보통 이상으로 접근한다 싶자 이 맘 약한 남자는 친구를 보내서 여대생을 달래려 들어. 이런 역할 나도 잘 한다. 헛물 켜는 사람 만나서 “야 포기해!” 뭐 이런 건 예로부터 내 전문이었지. 그러나 이 여학생 보통내기가 아니었어. 눈을 똑바로 뜨고 두 손을 모으고 턱을 당기고 얘기한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는 아니겠지요.” 이렇게 나오면 사실 대책이 없다. 그때부터는 삼자개입이 안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당사자들끼리 풀어야지.
박목월은 일찍이 글로만 친교를 나누던 조지훈이 경주 구경을 못해 봤다고 하자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연애편지같은 답장을 보내고 자신의 고향을 찾자 역전에 달려나와 ‘조지훈’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번쩍 쳐들었다는 일화에서 보듯 섬세한 사람이지.
경주에서 환대받고 귀경한 후 조지훈이 “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하는 완화삼을 보내고 그 답으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화답한 일은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멋있는 장면 중의 하나일지도. 그런데 문제는 이 시인 나그네께서 여대생의 구애 앞에 그만 길을 잃어버린 거야.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이 아니라 ‘저 바다 건너서 돌하르방길’로 사랑의 도피를 해 버린 거지. 여기서도 다양한 전설의 버전들이 있네, “선생님과 제주도 여행을 한 번만이라도 하면 원이 없겠어요” 해서 따라나섰더니 살림집이 차려져 있더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뭐 그러기야 했겠어. 저 가늘고 부드러운 심성의 목월이 넘어간 거지. 그들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자는 자주 아파서 목월이 업고 다니는 일이 많았고 호칭은 꼬박꼬박 선생님이었고 결정적으로 여자는 탤런트보다도 이뻤다고 해. 한 번은 도둑이 들어 방안을 싹 쓸어갔는데 여자가 사진첩만은 찾아달라고 경찰에 애걸했지만 이미 불타 버린 뒤였다지.
이 비운의 커플이 어떻게 헤어졌는지에 대한 전설도 다양하네. 여자의 아버지가 나타나 딸을 끌고 가면서 박목월을 나무에 묶어놓고 갔다는 액션 영화부터 목월의 아내가 나타나 조카같은 여자에게 겨울옷과 함께 돈까지 내밀고 돌아서자 그만 여자가 감복하여 목월에게서 물러났다는 멜로 영화까지, 또 그 세세한 버전이 다른 얘기들이 몇 가지나 있군. 어쨌건 이들의 이별에도 박목월의 절창이 드리운다. 아까 말한 <이별의 노래>는 노래 가사로 축약된 것이고 원시는 무척 길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
제주의 검푸른 바다 앞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걸로 보아 우는 것 같았지만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던” 불혹의 시인과 창백한 청춘의 이별이 그냥 9천만 화소로 그려지지 않냐. 또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가곡 <떠나가는 배> 즉 “저 푸른 물결 외애치이이며~~” 하는 노랫말 역시 목월의 것이라고도 하네. 필시 그것도 제주의 이별에서 나왔겠지. 만약 이런 시를 헤어지는 여자 앞에서 울먹이며 읊었다면 그녀는 슬펐겠지? 한켠으로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위해서만 그 아름다운 싯귀가 창조됐다고 생각하면.
“북에 소월 남에 목월”이라는 정지용의 극찬을 들으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노래를 4천만이 부르게 했으며 친구 조지훈의 표현대로 “다정하고 한 많은 게 병”이어서 어떻게든 달을 안아 보려고 애쓰는 구름 같은 여자들 사이를 ‘구름에 달 가듯이’ 주유했던, 그러나 그로 인해 본인도 무척이나 아팠을 시인. 박목월이 1978년 3월 24일 죽었다. 그의 마지막에 떠오른 여자는 누구였을까?
그의 추억에 관한 코멘트를 빌려 와 본다. “수천년 전 같기도 하지만 바로 어제 같기도 하다. 이와 같은 추억은 시공을 초월해서 살아 있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