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각하는 날, 휴가는 한 달씩,
월요일 아침엔 영화보고, 금요일엔 서점으로 출근…
[조선일보 주간조선 기자]
서울 서초구 잠원동 푸른상호저축은행 4층 강당은 일주일에 최소 1번, 정문에 셔터가 내려진 뒤 밤 늦은 시간까지 음악이 넘쳐난다. 회사 직원 70여명으로 구성된 ‘푸른코러스’가 부르는 노랫소리다. 과장급 이하 사원이 가입해 있는 이 합창단은 최근 여의도 KBS홀에서 제11회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연주회에서 합창단은 초대 받고 온 고객, 직원 가족 등 2000여명 앞에서 1년 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뽐냈다. 푸른코러스는 1993년 사원 취미 활동의 하나로 만들어졌다. 회사 측은 공연장 대관료, 회식비 등 한 해 1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지원한다. 2년 전 입사한 한성식씨는 “선후배와 매주 1번 이상 모이다보니 서로 가까워져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며 “노래를 하다보면 스트레스도 저절로 풀린다”고 말했다. 송명구 이사는 “직원들 표정이 환해지고 사내 분위기가 밝아진 데다 고객과 직원 가족을 상대로 ‘문화 마케팅’까지 펼친 셈이어서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올해 6월 달성할 예금액 목표를 반년이나 앞당겨 지난해 말 달성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늦잠을 자고 지각 출근하는 ‘레이지 데이’(게으름의 날), 한 달짜리 휴가, 월요병을 없애기 위한 ‘월요일 아침 영화 보기’….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에서 벗어나 즐거운 근무 환경을 조성하는 ‘웰빙 직장’ 만들기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 기업은 “불황일수록 직원의 기(氣) 살리기가 중요하다”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의 사기를 올리고 창의성을 북돋워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어 좋고, 직원들도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어 윈윈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게 전반적인 평가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웰빙 직장’이 기존의 경직된 기업문화가 인간중심의 감성 경영으로 변화해가는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 1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우림건설 본사 3층 강당. 이날 시무식에서 사장 신년사 등 의례 절차가 끝나자 다양한 이벤트가 이어졌다. 직원들이 조선시대 궁중 의복, 웨딩 드레스 등을 입고 모델로 등장한 패션쇼,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음악 작곡을 담당했던 김종문씨 등 전문 음악인들로 구성된 ‘필그림 앙상블’의 공연이 펼쳐졌다. 심영섭(49) 사장이 이해인 수녀의 시 ‘기차 안에서’를 낭송하는 모습도 이 회사에서는 이색적인 장면이 아니다. 매월 초 월례조회 때도 시낭송 순서가 있다. 김종욱 문화홍보실장은 “건설사의 딱딱하고 거친 이미지를 깨고 감수성 넘치는 즐거운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우림은 2003년 6월부터 매주 하루는 자신이 출근시간을 정해 지각출근할 수 있는 ‘레이지 데이’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의 결혼기념일에는 꽃바구니와 와인을 보내고, 하루 휴가를 준다. 2002년부터 각 부서별로 뮤지컬 관람, 야간 스키 등 문화활동을 한다. 심 사장이 매달 ‘이달의 책’을 선정해 책을 추천하는 이유와 자신의 철학 등을 실어 전직원에게 나눠주고, 직원들은 독후감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독서경영’은 우림만의 독특한 쌍방향 대화채널이다. 입사 2년차인 조성준씨(분양사업실)는 “회사에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다는 얘기에 친구들이 부러워한다”며 “일도 억지로가 아니라 즐겁게 하게 된다”고 말했다. 건설 불경기 속에서도 이 회사의 매출은 3년 전 2000억원에서 2003년 6000억원, 지난해 8000억원으로 늘어났다. 도급 순위도 2003년 123위에서 지난해 69위로 뛰어올랐다.
직원들 氣 살리자 매출 ‘쑥쑥’
네이밍 전문회사 ‘메타브랜딩’ 직원들은 매주 월요일 사무실 대신 극장으로 출근한다. “월요병을 없애려면 월요일 아침을 색다르게 시작해야 한다”는 직원들의 제안에 따라 1999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조조영화를 보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 출근 시각은 오전 10시. 출근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서다. 주5일 근무제는 1994년 회사 설립 때 도입됐다. 메타브랜딩 관계자는 “네이밍 회사이다 보니 근무 시간보다 창의력이 중요하다”며 “직원들이 즐겁고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메타브랜딩은 네이밍 업계에서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홍보대행사 ‘예스커뮤니케이션’ 직원들은 금요일 오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로 출근한다. 2시간여 동안 업무와 관련된 책은 물론 평소 보고 싶었던 책을 고른다. 책값은 회사가 지원한다. 이승희 대리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업무 특성에 비추어볼 때 ‘서점 출근’은 평소 일에 치여 소홀했던 책을 보며 아이디어를 충전할 수 있는 기회”라며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는 금요일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을 한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업무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직원 수가 25명인 이 회사는 지난해 11월 4박5일 일정으로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이 대리는 “서로 힘들었던 일을 털어넣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바캉스 시즌 유럽 사람들이 한 달씩 휴가를 간다는 뉴스는 적어도 광고대행사 ‘화이트’에서만큼은 꿈이 아니다. 화이트 직원들은 매년 한 달씩 휴가를 간다. 이 회사의 ‘한 달 휴가제’는 2000년부터 계속돼오고 있다. 한 달 휴가도 모자라서 회사는 휴가비로 1개월치 월급을 추가로 지급한다. 1년에 11개월을 일하고 13개월치 월급을 받는 셈이다.
직원들이 한 달씩이나 휴가를 가는데 회사 실적은 어떨까. 화이트는 1997년부터 SK텔레콤의 이동통신 ‘TTL’ 광고를 계속하고 있고 그밖에 SK텔레콤의 ‘ting’,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 등 이 회사가 제작한 광고는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화이트는 대기업 계열사가 아님에도 매출 기준으로 업계에서 10위권 이내에 든다. 화이트 관계자는 “직원 개개인이 11개월 동안 1년치 일을 해내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다”며 “일할 때는 밤샘 작업을 밥먹듯 하지만 한 달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버티며 지낸다”고 말했다. 이혜영 PR팀장은 “쉬는 만큼 일도 더 열심히 한다”며 “한 달간 여행을 갔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주말마다 가족 여행비·차량 지원
직원 가족들까지 챙기는 회사도 있다. 휴대전화 단말기 전문 업체 ‘팬택’은 직원 자녀들을 겨울 영어캠프에 보낸다. 직원 자녀 1인당 예산이 250만원 정도로 만만치 않은 비용이지만, “자녀를 행복하게 해주면 부모들은 저절로 회사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게 회사의 생각이다. 2003년에 시작한 ‘팬택가족 영어캠프’는 올해로 3번째를 맞아 1월 23일부터 2월 4일까지 강원도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진행된다. 이번 영어캠프에는 200명의 직원 자녀가 참석, 지난해까지의 100여명에서 2배로 늘었다. 홍보팀 장현지씨는 “팬택의 이직률은 1%를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볼보자동차 코리아는 주말마다 직원의 가족여행을 위해 여행비와 차량을 지원하는 ‘가족 감성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달 네 가족을 선정해 여행비 20여만원과 볼보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을 지원한다. 이관희 과장은 “신청자가 몰려 제비뽑기를 하고 있다”며 “회사가 가족까지 배려한다는 생각에 직원들의 애사심이 깊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원유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 수석연구원은 “기업이 직원들의 웰빙을 중시하는 것은 상시적인 구조조정 위기 속에 놓인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라며 “직원 개개인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와 직원 모두 득이 되는 ‘윈윈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 수석연구원은 “생산의 양보다 질이 중요한 시대가 오면서 웰빙 직장 만들기 바람은 지속될 것”이라며 “하지만 웰빙 직장 조성이 부가가치 창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한 번 불고 지나가는 유행이나 단기적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 [ sb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