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생각은 나는 사람
김인기
영희가 내게 전편(電便)을 보냈는데, 그 짧은 글의 제목이 '생각은 나는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겨우 생각이나 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의 마음에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인물이다. 영희가 많이 심심했나 보다.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글이나 쓰지. 그래도 나는 고향친구인 그를 교단에 있다고 '김 선생'으로 예우하는데, 그는 기껏 이 모양이다.
어떤 경우든 나는 편지의 제목을 '생각은 나는 사람'이라고 하진 않는다. 귀한 시간 내어 그런 사람한테 내가 편지를 왜 쓰겠느냐. 설령 내키지 않는 글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제목을 그렇게 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영희였다면, 아마도 나는 우선 화끈한 제목부터 달았으리라. 이를테면 '늘 그리운 사람'이라거나 '생각하면 눈물겨운 그대'라거나. 이왕 글을 보내기로 했으면 이렇게 과장을 하더라도 뜻이 확실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아내더러 영희가 그런 제목으로 전자우편을 보냈더라니까, 아내의 해석은 또 다르다. 그러니까 여자의 육감으로 간파를 하자면, 그게 바로 나에 대한 영희의 애틋한 정서를 반영한다는 것인데, 이러면 나는 그 해괴한 여심(女心)이 헷갈린다. 하기야, 그래 본들 내가 새삼스럽게 유부녀와 연애를 하겠느냐. 또,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그와 한다는 게 어쩐지 우습다.
자, 여기서 내가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친구인 여자'와 '여자인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누군가 이에 대한 명석한 분석을 내놓기도 하였으나, 나로선 아직도 아리송하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 보자. '내 친구인 여자'와 '내 여자인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이러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내 친구인 여자는 우정 어린 사람이요, 내 여자인 친구는 애정 어린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 친구인 여자'는 그가 여자인 게 나로선 별스런 의미도 없으나, '내 여자인 친구'는 그가 여자인 게 우선 좋은 것이다.
그러면 '생각은 나는 사람'인 나는 그에게 '내 남자인 친구'와 '내 친구인 남자' 가운데 어디에 속할까? 나는 그에게 어느 쪽에 속하든 다 좋다고 여기니까, 아마도 내한테 그는 '내 친구인 여자'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나와 좀 다를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내 남자도 아니고 내 친구도 아닌 이상한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내 아내한테는 죄가 될 소리일지 모르지만, 내한테 그가 '내 여자인 친구'가 아닌 게 도리어 서운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내 이런 발언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무엇이라 할지 내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들의 우려가 타당한 줄도 안다. 나로선 좀 섭섭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우려가 다 경험에서 나온 것이니까, 나도 의당 명심해야 할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다 정돈이 되는 것일까? 나는 이런 봉합이 때때로 수상하다. 한 걸음 더! 그러니까 상상으로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누가 인생을 함부로 말하랴. 지난 갑신년 봄에 내가 쉬이 말할 수 없는 일 하나를 겪었다. 마침 거기엔 음전한 신사 한 분이 있었는데, 일흔은 넘어 보이는 그 어른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그 분이 낯선 내게 오래 전에 헤어진 여자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여자는 혼인해서 살다 헤어진 부인이 아니다. 이제 헤어져 소식조차 끊긴 지 사십 년이 되었는지 오십 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세월이 흐르면 다 잊혀진다고 했나? 그러나 세상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 행색으로 판단하자면 그 어른은 혼인도 하여 자식 손자 다 있어 보인다. 외면으로만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선친이 반대하여 혼인을 못한 그 인연이 그리울 것도 한으로 남을 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데, 당사자는 그게 그렇지도 않아서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만약에 이게 사랑이라면 이 얼마나 끔찍한 사랑이며, 만약에 이게 예법이라면 이 얼마나 잔혹한 예법이냐.
아마도 그 분은 그 여자와 혼인하여 살지 못한 게 한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그리워 아주 잊지도 못한 게 무슨 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함께 사는 부인 앞에서라도 그렇게 펑펑 울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물론 그랬다가 부인한테 구박을 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럴 형편도 되지 못했던가 보다. 그러니까, 노년에 난데없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울지.
누가 그 어른을 동정하자면 아마도 그 끝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좀 야박하게 물어 보자. "이미 오래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그 어른의 마음에 새겨진 여인이 과연 같은 인물일까?" 이게 의문이다. 그러니까, 제 마음대로 어떤 영상을 만들어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그 여자가 아니고 그 여자를 생각하는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만약에 지금 그 양반이 예전의 그 사람을 다시 만나더라도 그게 기실은 허망한 일이다.
가을 맑은 호수 옥인 양 새파란데(秋淨長湖碧玉流)
연꽃 깊은 곳 목란배 매었네(荷花深處繫蘭舟)
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던지고는(逢郞隔水投蓮子)
혹 누가 알았을까 한나절 부끄러웠네(或被人知半日羞)
거듭 읽어도 허난설헌의 시 '채련곡(采蓮曲)'은 눈이 부신다. 비록 후대의 유학자들한테 '방탕하다'는 비방을 들었다지만, 그러나 이런 구절에서 방탕을 읽는 그 위인들의 심사가 도리어 의심스럽다. 나는 허난설헌의 그 진심이 좋다. 그러고 보면 겨우 스물 일곱 나이에 생을 마감하면서도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조선의 여인 허초희가 얼마나 아름다우냐.
그러나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아름답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기질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니 그에 대한 대응도 달라야 하는 게 당연하다. 만약에 내가 그럴 여건이 된다면, 어느 양반에게는 그 여인을 만나 회포를 풀게 하는 게 더 인간답지 않을까 싶다. 비록 내 눈에는 그런 만남이 부질없어 보이더라도, 그거야 다 당사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그래서 설령 그 분들이 동침을 한다고 해도 그래. 그렇게 평생을 그리워 하며 산 양반들인데 그 무슨 대단한 이념으로 그걸 막을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칭송하느라 아주 여념이 없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면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누구나 다 그 사랑을 그렇게 대단하게 가꿀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런 뜻에서 어느 유행가의 제목이 차라리 정확하다. 그리고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아무리 좋은 향기도 잠깐 머물러야지 오래오래 흐르면 골치가 아프다. 그러니, 사랑도 곧 심드렁해져야 오래 견딘다.' 과연 그럴 것도 같다. 세상엔 더러 허황한 신기루여서 아름다운 것도 있는 법이라니까.
너무나 아리땁고 귀여운 그대,
내 사랑, 내 즐거움이여,
종려나무처럼 늘씬한 키에
앞가슴은 종려 송이 같구나.
나는 종려나무에 올라 가
가지를 휘어잡으리라.
종려 송이 같은 앞가슴 만지게 해 다오.
능금 향내 같은 입김 맡게 해 다오.
구약성서 아가편에 나오는 글이다. 이미 오래 전이었다. 내가 이 글을 써서 어느 처녀에게 준 적이 있다. 그 당시에 그 사람은 내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존재였다. 20대 청년의 눈에 그는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곱기만 했다. 한때 나는 그 처녀와 혼인하여 함께 살 줄 알았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내가 구약성서의 그 구절을 찾아 당시의 내 좌우명이었던 '신(神)과 행(行)의 정화(精華)'와 함께 그대로 보냈는데, 말하자면 나는 사랑한다는 의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뭔가 꼬여서 우리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세월은 흘렀다. 그 사이에 나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한 생활인으로서도 나는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었고, 나이도 마흔이 넘었다. 그 사람도 이제 나이가 마흔이 되었겠구나. 한때 그 사람이 꿈에도 나타났는데, 지금 그의 모습이 꿈에서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와 혼인도 하였겠지. 꿈에 보이는 그 모습은 늘 아름다웠으나, 그 또한 나이를 이길 수는 없었으리라.
내 정성이 모자랐던 것도 아니었고, 내 뜻이 모호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실패했다. 나는 아직도 그 원인을 잘 모른다. 내 모르는 뭔가가 어긋났겠지. 그러고 보면 위의 구절에도 티가 보인다. 혹자는 그래도 신구약성서가 그나마 한글로 제대로 번역이 된 서적이라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도 오류가 있었다.
당장 '너무나'란 말은 부정의 의미와 호응해야 하니까, 위의 문장에선 우선 '참으로'로 바꿔야 할 터이다. 그리고 종려나무도 문제이다. 사전을 보면 종려나무는 야자수와 비슷하게 생겨서 잎은 있어도 가지라 할 건 없다. 그런데 나는 그걸 가지로 알고 휘어잡았으니, 아차, 내 사랑은 이래서 파탄을 맞았구나.
지금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말을 한들 다 소용이 없다. 그리고 말이 많아지면 그 이야기마저 비천해질 것만 같다. 그러니 이제는 다 잊어야지. 그래도 한때 내가 도서관에서 그 처녀의 손을 잠깐 잡아보곤 자그마치 열흘 이상이나 황홀했는데, 이제 내가 다시 그 손을 잡는다고 한들 그런 감격이 올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인터넷이란 게 신통한 구석이 있다. 그와 내가 다 같은 학교를 다닌 덕이겠지만, 거기에 그 사람의 연락처인 전자우편 주소가 보인다. 내가 아예 모르는 척 지나칠까 하다가 한 마디 하고 말았다. 십 년도 더 지난 예전에 헤어진 사람, 그것도 내가 아주 실망을 한 인격체인데, 이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리고, 설령 그 사람이 아주 고약했다 해도 그래. 다 남자가 모자라서 그랬다고 해야지, 내가 새삼스럽게 그를 힐난하랴.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썼다.
키는 165센티미터요, 생일은 6월 22일이며, 그 이름은 목련이다. 세월이 흘렀으나 내 아직도 이렇게 잘 기억하지만, 그렇기로 내 싫다고 그렇게나 외면한 사람더러 이제 다시 구질구질하게 칭얼거릴 것이냐. 내 경상도 사람이라 하여 다짜고짜 "내 아를 낳아 도!" 하랴. 하기야 내 '신(神)과 행(行)의 정화(精華)'로 살고자 했을 적에는 그게 가능했으리라. 그 때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끊임없이 물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결국 '현상의 본질과 그 미학'일 수밖에 없다고 여긴 지 이미 십 년도 더 지났다.
참으로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을 내 탓해서 무엇하리. 설령 누가 사랑이고 순정이고 하는 것들을 마구 패대기친다고 하여, 등단한 지도 이미 12년을 넘기고 있는 수필가 김인기마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분별심도 지나치면 병이려니, 이제는 나도 멋을 조금은 알아야 하리니. 이래서 나 그대에게 사랑하는 시(詩) 한 편을 보내나니, 그대도 잠시나마 먼 인연을 헤아려 읽으시라. 그러면 아마도 세상은 더 고와지리라.
고매(古梅)
조운(曺雲)
매화(梅花) 늙은 등걸
성글고 거친 가지
꽃도 드문드문
여기 하나
저기 둘씩
허울 다 털어버리고 남을 것만 남은 듯
아직은 내가 많이 모자라는 인간이다. 내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내가 섬세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사람한테 매몰찼다. 때는 지난 계미년(癸未年) 겨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잠깐 사족을 달자면, 당시에 경상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내 아를 낳아 도!'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유행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들어가고 말았다. 내한테 그 사람 속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어쩌면 그에게 나는 좀 뜨악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다시 물어 본다. 내가 다시 목련을 만나면 그는 내게 '내 친구인 여자'와 '내 여자인 친구'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아니, 그와 내가 친구로 사귈 수 있을까? 어떤 경우든 그가 내 여자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느 쪽이든 다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 가운데 하나가 된다면, 적어도 내 정서로는 내 친구라기보다 내 여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아마 그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내 언제 그와 합궁이라도 하였더냐. 그런데도 그런 가능성이 무너지면 지금 역시 서로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판단을 내린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아, 여자들은 더러 유방이나 자궁에 탈이 나고, 남자들도 비뇨기과 질환이 생길 수가 있지 않느냐. 그럴 경우 누구라도 상대에게 어떤 심리적 위축이라도 느낀다면, 그건 애정이 섞인 관계가 아니겠느냐.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상상일 뿐이다.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알 수도 없거니와 그간 세월도 많이 흘렀다. 그리고 사정이야 어찌 되었거나 그와 나는 맺어지지 못한 인연이다. 내게 그는 산 너머 찔레나무요, 강 건너 갈대밭이다. 내 다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랴. 그래서 그를 찾아 새삼스럽게 사랑이 어쩌고 하랴. 어쩌면 이런 글을 읽고도 아내는 눈물부터 글썽일지 모르는데.
한편으로 보면 인연이란 참 묘하기도 하다. 때때로 나는 그 목련이야말로 나와 아내가 부부가 되게 한 최고의 공로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가 그걸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언행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내 아내는 나란 인간의 성미를 잘 알아서 제 의사를 분명히 했다. 나는 그게 우선 좋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간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런 일로 실랑이를 벌일 여유가 없는데,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도 거듭 밝혔는데, 그는 끊임없이 핵심을 비켜 갔다. 내가 아주 기진맥진을 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의 언행은 늘 모호했다. 사안의 중대성으로 봐서 이럴 수 없다고 내가 확인을 한다. 그러면 자기는 무관심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기색이 아니어서 다시 확인을 하고자 하면, 그는 또 엉뚱한 답변이다. 나중엔 내가 이런 태도에 아주 진절머리를 냈다.
그 때만 해도 피차 어렸으니까, 지금 내가 그를 비방하는 게 적절치는 않을 것이다. 그의 진심이 어느 쪽이었던 나 또한 실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아무리 그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면 아마 그 사랑도 망할 것이다. 여자를 후리는 데는 아주 이골이 난 건달이라면 혹시 모를까? 그러면 아마도 희희낙락하며 좋아라 하겠지. 그러나 나는 아직도 누가 내게 그런 식이라면 판을 뒤엎는다.
만약에 하느님이 살피셨다면, 그 시절에 그 분이 그와 내게 내린 최고의 선물이 바로 그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가 이 세상 누구보다 훌륭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짝으로 여겼다. 그 성격이나 재능으로 봤을 때에도 우리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한 쌍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아쉽게도 너무 안이했다.
지난 계미년은 내가 아내와 혼인한 지 십 년이 된 해이기도 했다. 내가 목련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목련이 실명(實名)이 아니라는 것을, 아내도 잘 안다. 내가 예전에 이야기를 했으니까. 과연 그가 나를 많이도 외롭게 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그는 한 그루의 백목련으로 남았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한테 전편을 보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마음 상해 울 것만 같았으니까. 아내는 백목련보다는 심성이 더 애틋해 보이는 자목련과 닮았다.
그 즈음에 나는 아내한테 '혼인 십 주년을 자축하며'란 편지를 썼다. 늘 얼굴을 대하며 살아 이젠 눈빛마저 같아진 아내이다. 명색이 작가이지만, 조석으로 대면하니, 나도 아내한테 편지 쓸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면 얼마나 궁핍한 인생이겠느냐. 그래서 아내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짧으나마 한 편의 서신이라도 남기는 게 좋으리라 여겨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능연부인, 그대 숨결 느끼며 그대 눈빛 부비며 지내온 세월이 문득 꿈만 같습니다. 우리가 혼인한 지도 벌써 십 년이나 되었다니, 한편으로는 놀랍습니다. 오늘 이 날을 맞으니 못난 신랑은 당장 부끄럽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많은 약속을 하였으나 잘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 하늘 아래에서 우리 이렇게 만나 한 시절을 보내는 이 인연이 눈물겹습니다. '내 아내가 이렇게 고우니, 내가 아주 박복한 작자는 아니구나. 나도 티 없는 마음으로 그대와 더불어 정결히 늙으리.' 이런 다짐을 나는 다시 해 봅니다. 그러니 그대도 이런저런 잡사들에 흔들리지 마세요. 그러기엔 그대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여명(黎明)에 나는 그대를 위하여 차 한 잔을 내었습니다. 그대는 마치 비밀인 양 등잔에 불을 밝혔고요. 아아, 어제처럼 오늘도 침 흘린 자국 선연한 아이들의 잠든 얼굴 위로 다연(茶煙)과 기도가 아득히 젖었으리. 예, 나는 이런 능연당의 고요한 아침을 늘 사랑합니다.
'능연부인은 오늘 뭐라고 기도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적이면, 나는 가만히 웃습니다. 신앙에 대해선 늘 한 걸음 물러서는 겁쟁이가 그대의 신심을 두고 뭐라 하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애써 용기를 내어 소곤소곤 이야기하자면, 내 마음은 바로 이렇습니다.
'설령 그대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 분 보시기에 한심한 미망(迷妄)일지라도, 아마 그 분은 그대의 마음을 아껴 기꺼이 그대를 지원하리.'
능연부인. 우리들이 오늘은 혼인 십 주년을 맞지만, 언젠가 이십 주년을 맞고 삼십 주년을 맞는 날도 올 것입니다. 아이들도 다 자라 우리들 곁을 떠나 외로운 날이면, 우리들이 십 주년을 맞는 오늘 이 날이 무척 그리울지도 몰라요. 회자정리(會者定離)도 생자필멸(生者必滅)도 다 정한 이치라니, 우리들에게도 마침내 다 버리고 떠나는 임종의 날도 오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들이 안타깝다 슬프다 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당연한 듯 느닷없이 닥치는 운명을 아주 잊지도 맙시다. 다만 우리들은 오늘의 삶이 언제라도 후회나 미련으로 남지는 않도록 합시다.
이제는 우리들도 많이 성숙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다 상대의 못남을 사랑의 근거가 아니라 배척의 이유로 여기더라도,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명(無明)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벌이는 천한 소행입니다.
그대에게 감사하는 이 마음을 내 둔필로는 감당할 수 없어 무척 아쉽습니다. 그래서 쑥스러운 신랑은 그저 싱겁게 우리들의 혼인 십 주년을 그대와 함께 자축하노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내 방식으로 마음을 고요히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갑신년 봄에 내가 그만 펑펑 눈물을 쏟는 한 노인을 보고 말았다. 그러자 퍼뜩 그 사람 생각이 났다. 혹시 나도 언젠가 저렇게 울게 될까? 뭐, 그럴 리야 있으랴. 그러면 백목련은 어디선가 비를 맞으며 울고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에이, 뭐, 그렇기야!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혹시 그가 소설 토지의 인물 월선이나 베트남의 고전 취교전(翠翹傳)에 나오는 인물과 같으면 나는 어쩌지? 그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그가 그러면, 나는 그에게 야속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나도 이제는 나이가 제법 들었다. 내 비록 둔해도 세정(世情)을 조금은 안다. 그래, 육신도 감정도 다 소모품으로 전락한 시대가 아니냐. 이 와중에도 다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으나 이 세상 많은 남녀들이 그렇지도 않다. 급기야 안팎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만 갈라지기도 한다. 더러는 홀로 된 여자가 웃음을 팔기도 하며, 더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내와 살기도 한다.
설마, 설마, 그 사람이 그렇게 되진 않았겠지. 아무렴, 그 정도로 그가 나빠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사람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곤경에 처한 건 사실이다. '억장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한탄이 사방에 널렸다. 서로 모르는 터여서 저마다 무관하게 여기지만, 이것 또한 꼭 그렇지도 않으니까,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애정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은 그를 돕고 싶다. 만약에 그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나는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런 것도 인연이 되어야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새삼스럽게 사사로운 개인사를 이렇게 들먹일 것도 없어 보인다. 그냥 조용히 도우면 되니까. 그러나 작가는 불특정 다수에게 글을 쓴다. 이렇게 되면 내 이야기도 내한테서 떠난다. 글로 나타나는 사람도 새로운 생명을 얻어 독자들에게로 간다.
작가들은 참 재미난 사람들이다. '여기 돌멩이가 있다.' 이런 난데없는 문장을 주고 글을 쓰라고 해도 작가들은 즐겁다. 여기에 무슨 참고할 문헌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할지 몰라도, 작가들은 참고문헌까지 동원해서 이런 문장 하나를 잡고도 책 한 권을 너끈히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가 아니냐. 그러나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한테 이런 재능은 없었다. 그저 외국어로 그 문장을 번역하라고 하면 아주 잘 하겠지.
사람마다 다 재능은 다르다. 그러나 비록 작가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논리를 세워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쪽에선 특히 취약했다. 하기야 이 나라 교육이 이와는 인연이 멀지 않느냐. 그래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멀쩡한 불구로 만드는 꼴이 아니냐. 이제는 그가 이런 결점을 어떻게 보완했을까? 만약에 그럴 수 있었다면 그는 무척 행복한 여인이겠다.
그러나 한 남자로서 냉정하게 보면, 그가 혼인을 하였더라도, 그는 남편한테 제대로 대접을 받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이 시점에서 어울리지 않게 악담을 하는 게 아니다. 존경도 사랑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들을 부담스럽다며 회피하면 일이 좋게 되지 않는다. 그가 누구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런 발언이 조금은 망언에 속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내 판단이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아니, 나와 같이 무던한 사람이 그렇게 애를 먹을 지경이었는데, 더 말할 게 뭐 있을까.
내가 그 사람의 근황이 궁금하다. 세월이 제법 흘렀으니, 그 모습도 이제는 예전과 같지는 않겠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의 근황을 알고 직접 대면하는 게 그리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당장 내 아내가 도우면 된다. 아내에게 '그대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동생을 한 명 두시라.' 권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나보다는 나이가 어려도 내 아내보다는 많다. 어쩌면 내게 '생각은 나는 사람'이라 한 영희한테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쩐지 이런 일은 여자들한테 부탁을 해야 될 것만 같다.
아! 아니지, 이러면 여자들은 주로 쓸데없는 상상부터 하지. 아마도 나를 두고 십중팔구는 이럴 거야. '혹시 저 사람이 그 여자와 무슨 일이라도 벌이는 게 아닐까? 예전의 그 감정이 살아나면 어떻게 하지?' 하기야, 그러면 그것도 참 난감한 일이겠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뭐, 이런 표어도 있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그런 게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다. 정말 나는 이기주의자일까? 내 마음은 도리어 이렇다.
'설령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그게 정녕 자랑이고 영광이었으면 좋겠다. 바라고 바라나니, 그가 도리어 형편없는 속물로 비천하게 굴어, 내가 한때 그를 사랑했다는 것조차 두고두고 치욕이 되고, 급기야 이렇게 쓰는 글마저 후회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허난설헌은 세 가지를 한스러워 했다고 전한다. 첫째는 자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하필이면 좁은 땅 조선에 난 것이요, 셋째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라. 이게 후인이 지은 말인지 정말 그 사람의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과연 허난설헌은 멋이 있는 여인이다. 적어도 제 주체적인 정체성은 확실히 확보하고 있지 않느냐.
어느 여인이라도 허난설헌 정도만 된다면, 나는 그 어떤 염문과 추문이라도 개의치 않겠다. 그건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소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설령 그런 여인이 나와 상종하지 않겠다 하더라도 나는 무릎을 꿇고 배울 뜻이 있다. 나 또한 결함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마도 그래야 할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아내한테 언명했지 않느냐. '그대의 못남을 배척의 이유가 아닌 사랑의 근거로 여기겠노라.' 마땅하고 옳은 이야기이다.
자목련도 백목련도 다 같은 목련이다. 그래서 이럴까? 나는 때때로 동일한 성격의 벽을 만난다.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은 핵심적인 가치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것을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저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해도 그렇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저렇게나 아무 생각이 없는지 몰라. 이래서 나는 자꾸만 의아스럽다. 내 아내도 정체성 확보에 너무 무심하지 않느냐. 내가 이와 관련하여 언급을 자꾸 하니, 아내는 도리어 지루해 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하니 그만 쉽게 안심을 한다. 급기야 제 필요와 의지마저 포기하고 남들을 따른다. 그러나 진리가 다수결은 아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게 의심스럽지만, 나도 그렇게 한다.' 이건 지성의 파탄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로서나 아버지로서나 아내로서나 남편으로서나 그 노릇을 한 인간으로서 제 정체성을 확실히 확보하여 아주 당당하게 해야 한다. 그게 보기에도 좋다. 이건 당연한 소리가 아니냐.
그런데 과연 이 나라의 남녀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걸 제대로 하고 있을까? 남자는 다만 돈 버는 기계로만 보이고, 여자는 애완견인지 가정부인지…… 아, 같이 잠을 자니까, 우리는 창녀와 고객…… 내가 차마 말을 더 못 잇겠다. 부부가 이런 식이라면 이렇게나 심한 모욕이 없고, 이렇게나 참담한 현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이 땅의 사람들이 과연 이런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우냐. 내가 정말 틀렸으면 좋겠다.
내가 예전에 백목련을 사랑했던 것도 지금 자목련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백목련도 자목련도 내게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이들이 특별하지는 않고, 아주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이들에게 행운을! 그러나 이들에게도 별스러움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나와 같은 인간을 만난 게 아닐까? 그러나 이건 결코 내가 잘나서는 아니다. 나야 아직까지 자동차운전면허증도 없는 작자가 아니냐.
인생에서도 역사가 그런 것처럼 가정이 없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이렇게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백목련과 혼인을 하였더라면……' 만약에 그랬더라면 내게 자목련은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 자목련은 도저히 백목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백목련이 나를 그렇게 흔들어 자목련의 귀함을 알게 했으니, 자목련으로서도 그는 각별한 인연이다.
만약에 아직도 내게 백목련의 그림자와 향기가 남았다면, 아내는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나도 여자입니다!' 이런 항변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내가 뭐라고 하든 백목련의 향기와 그 여운을 나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내게 아주 잊혀지지는 않아서 이렇게 '생각은 나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분명한 것도 있다. 이제는 백목련이 자목련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든 이게 그렇다.
사랑에도 역사가 있다. 그게 역사인 이상 이런저런 평가도 따른다. 아름다운 역사, 위대한 역사, 부끄러운 역사, 더러운 역사, 안타까운 역사…… 그러면 나와 백목련은 어떤 사랑의 역사가 있었더냐. 서로 상처와 흔적은 남았을지언정 의지가 무너졌으니, 누구도 감히 역사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나와 백목련은 영영 서로 사랑할 수 없는가? 글쎄, 이게 과연 합당한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아주 어렵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서로 사랑을 하는 방식이 한때 내가 바랐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로 마음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 마음을 붙들어놓지는 마십시오.
저 위대한 생명의 손길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서십시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지는 마십시오.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계미년 겨울에 나는 백목련에게 '참으로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을 내 탓해서 무엇하리. 설령 누가 사랑이고 순정이고 하는 것들을 마구 패대기친다고 하여……'라 했다. 그건 진심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걸 내가 명심해야 한다. 그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아내를 상대로 참으로 귀한 부부의 인연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내 어찌 그 사람을 닮아 사랑이고 순정이고 하는 것들을 마구 패대기칠 수야 있으랴.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독자들은 잘 알 것이다. 아마 내 아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정체성의 확립,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우선 걱정스럽다. 혹시 내 이런 글 때문에 그에 앞서 아내가 엉뚱하게도 '백목련의 망령'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는 아마도 '자목련의 망령'에 시달리겠지. 그러나, 망령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의심스러운 허깨비이다.
한단침(邯鄲枕) 높이 베었네(高臥邯鄲枕)
백십성(百十城)을 돌았네(周流百十城)
깨어나니 한 꿈이라(遽然開一夢)
새벽달만 다락에 밝네(殘月半樓明)
서산대사는 이런 시를 남겼다. 그러나 한단(邯鄲)의 노생(盧生)이 실컷 영화를 누리다가 깨고 보니 꿈이더라는 이야기와 선재동자가 구법(求法)하자고 백십성(百十城)을 순례한 게 다 마찬가지라 하면 좀 심하지 않을까? 당장 그 시작부터 다르지 않느냐…… 그러나, 아서라! 이런 분별은 나와 같은 속인에게나 어울리고, 아마 스님 정도의 안목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러니, 아내여, 그대도 공연한 망상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시라.
나는 원칙을 지키며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 어찌 감히 원칙주의자라 자부하랴. 아직은 그게 지나친 자화자찬이다. 나는 소박하게 '상식을 존중하는 생활인'이라 하면 족한 인물이다. 그런데 내가 연애지상주의자가 되랴. 그리고 그 연애란 것도 그래.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연애가 어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과연 예언자의 잠언은 훌륭하다. 참나무도 삼나무도 스스로 꿋꿋하게 서야 하듯 내 사랑도 그래야 시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나를 놀라게 하는 그대가, 지엄한 아내의 이름으로, 그래도 그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아아, 그 고집을 난들 어찌하랴. 내 어찌 그대에게 해명을 한답시고 구차스럽게 떠벌리랴. 그렇다고 예전의 그 여인이 알고 보니 이러쿵저러쿵 엉터리였다고 험담이라도 하랴. 그러나 그러면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물이고, 이런 사내를 지아비로 둔 그대에게 좋을 게 뭐가 있으랴. 그러니 그대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 밥이라도 한 그릇 퍼 주느니만 못하다.
사실 나는 여자라고 아무나 다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그만인데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 해서 달리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래도 누가 자꾸 귀찮게 하면, 나는 그만 이렇게 외치고 만다. "예! 그렇습니다!" 구구하게 아니라 하는 게 번거롭기 때문이다. 아내한테도 마찬가지이다. "예! 좌청룡 우백호(左靑龍 右白虎), 참 좋지요!" 그러나 기실 그런 건 우리들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아내는 조용한 사람이다. 한 모퉁이에서 가만히 미소를 머금은 자목련이라고나 할까. 이런 아내가 내게 더 뭐라고 한다면, 나도 뾰족한 수는 없다. '이렇게 아늑한 봄날에 어디서 실바람이 부는구나.' 그저 이러다가 나는 김삿갓 시인의 시나 한 수 약간 바꿔 읊을까? 이런 소행이 문득 천한 느낌도 들지만, 그러나 이러는 게 때로는 고상하게 구는 것보다 더 미덥다. 역시 나는 몸이 무거운 동물인가 보다.
좋고 좋은 봄밤에
베개 위엔 머리가 셋
이불 속엔 여섯 어깨
입을 열어 웃을 적엔
품수품자(品) 완연하고
몸을 뒤쳐 누울 적엔
내천자(川)가 분명해라
왼편 아직 미진한데
오른편도 보살피고
오락가락 허둥지둥
좌우 양편 투덜투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