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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이와 오랜만의 만남을 앞두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늘 고생하시는 마눌님은 오늘도 설날 음식 준비하느라 큰 집에 두고,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석동리 ‘성씨고가’ 에 들렀다.
먼저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묘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자. 사진은 퍼온 것도 있다.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 선생의 묘소
화왕산에서 발원하여 창녕읍을 가로질러 우포늪으로 흘러드는 물슬천의 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마을이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다.
마을 뒷산인 부리산(浮鯉山)의 동쪽 머리에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始祖) 성인보(成仁輔)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성인보 선생은 고려 명종 때 호장 중윤을 역임하였고 고려 고종 때에 이르러 창성(創姓)한 이래 창녕성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묘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어느 해 연초에 성인보 선생은 개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동행했던 성인보 선생의 아들 문하시중 송국(松國)이 자신의 효성이 부족해서 객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자책하여 나라에서 제공한 우마차와 장례비를 마다하고, 아버지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천리 길 고향까지 내려왔다.
고향에서 가까운 현풍현 청산원(고암면 어은에 위치한 주막)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는데, 너무도 지친 나머지 깜박 잠이 들어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아버지 시신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온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혔는데 묘자리 넓이만큼 눈이 녹아있어 그 자리에 아버지를 안장하였다. 이후로 이런 연유로 호랑이가 잡아준 명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창녕성씨는 시조 성인보 선생의 손자 공필(公弼), 한필(漢弼) 대에서 두 계통으로 갈라져 6세대에 내려와서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계보를 이어왔으며, 134명의 문과 급제자, 상신 5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을 배출하였고, 이 외에 많은 석학과 사육신 성삼문 등 충신을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한다.
화왕산에서 발원한 산맥이 서북으로 달려 왕령산을 세우고 남으로 방향을 바꾸어 몸을 낮추다가 모산리에서 물슬천을 만나 멈추었다.
묘소가 있는 산을 부리산(浮鯉山)이라 하는데 이는 산의 형상이 잉어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물슬천의 물줄기와 맞닿은 산의 동쪽은 어두산이라 하는데 잉어의 머리인 셈이다. 곧 잉어가 물슬천을 만나 물속으로 뛰어드는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형국이란다. 그리고 시조묘는 물을 마시는 잉어의 입이 있는 머리 부분에 위치하였다.
물슬천 양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의 이름은 ‘어물리들’이라 하는데 이는 ‘물고기의 머리에 있는 들(魚頭)’이라는 뜻으로, 성씨 시조묘가 있는 부리산의 동쪽 기슭을 부르는 어두산(魚頭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 선생의 묘소 성인보 선생의 묘소가 있는 잉어를 닮은 부리산(浮鯉山)
성씨 시조묘를 나와서 우포늪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석동마을이 나타나는데, 길가에 여러 채의 기와집이 한 곳에 모여 있는 마을 입구의 맨 첫 집이 창녕석리성씨고가(昌寧石里 成氏古家)다.
창녕읍에서 찾아가는 길은 대지초등학교를 지나서 500m 쯤의 도로 우측에 접하여 바로 나타난다.
창녕석리성씨고가(昌寧石里 成氏古家)
창녕군 대지면 석리 322번지 : 경남문화재자료 355호(2004.7.1 지정)
고택 감상
막연히 김정일의 처 성혜림의 집이었다는 것에 끌려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우리가 갔을 땐 사람이 없어 더 널찍해 보이는 석동마을 공영주차장에 내리자, 둘째가 곧장 “쉬 매렵다” 해서 들어선 공중 화장실도 깔끔하고, 그림에 있는 양파 시배지의 상징탑은 어릴 적 내 코에 질리도록 붙어버린 양파 냄새를 떠올리며 새롭게 보였다.
내 기억엔 다마네기로 새겨진 양파, 꽃대의 껍질을 벗겨 먹던 거랑 허기진 배를 채우려 남의 집 양파를 뽑아 쌩으로 먹다가 천벌받아서 속이 쓰렸던 추억이 금방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고향이 창녕이라 무의식적 특권으로 당당히 ‘창녕성씨고가’를 들어서려는데, 두 사람이 집안에서 나오면서 위협적이지 않은 파란 색상의 얇은 철사기둥형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집 주인인양 다가서자 두 사람 중에 인도 사람 같은 외국인이 어눌하지만 유창한 한국말(?)로 "구경하러 왔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하자, "당신들 오늘 운이 좋다"며 닫으려는 문을 열어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에겐 상시 공개 하는 게 아니며, 집을 지키는 두 사람은 영원무역(요즘 제일 돈 잘 번다는 아웃도어 노스페이스) 직원으로 집 주인이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란다.
아마 성씨 성을 가진 내 친구들은 주민등록증 내보이면 그냥 통과 될 듯 싶다.
아석 고택이라 불리는 이 고택은 강릉의 선교장,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고택중의 하나란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창녕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하고 몇 번이나 놀랐다.
문안으로 들어서자 칼날 같이 반듯한 동정이 선명한 흰색 저고리의 꼬장꼬장하신 대감님도 있을듯하고, 저 편 쪽문으론 금방 예쁘게 코가 올라간 하얀 고무신에 화사한 금실 수놓은 한복입은 아씨도 눈부시게 들어설듯하고, 장난 끼 많은 도련님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모습도 보일 듯하다.
나지막하게 둘러쳐진 고즈넉한 담장 안엔 연못도 있고, 몽실몽실한 정원수용 소나무, 명필의 서예가가 한껏 멋을 내며 빗금으로 뿌리친 획 같이 가지를 늘어뜨린 운치 있는 홍송, 겨울이라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백일홍, 우리나라 정원이면 당연히 있어야할 향나무도 있었다.
정원 마당엔 빗물에 양반님네 발바닥 적시지 않도록 점점이 놓여있는 동그란 대리석, 담장 아랜 가지런한 장독대, 가끔씩 서 있는 석등, 세숫물을 담아두는 확대, 온갖 고가다운 옛 풍취들이 다 어우러져 조선시대 양반집의 일상에 내가 끼어들어 있는 듯하다.
아무튼 우리 식구가 들른 때는 우리 외에 방문객이 전혀 없어서 마루에도 앉아보고, 여기저기 여유롭게 둘러보며 주인이 된 심정으로 고풍의 정취를 마음껏 즐겨봤다.
친절한 안내인이 사진도 찍어줬다.
고택 전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인 솟을대문으로(이 문은 안채에서 소리를 듣고 손님맞이 준비를 할 수 있게 문을 열면 소리가 요란하게 나도록 만들어졌다 한다), 솟을 대문 옆엔 머슴들이 기거하는 행랑채도 붙어 있고, 문 안쪽을 바라보면 대가의 위엄을 뿜는 형세로 저 안쪽에 또 다른 대문이 보이면서 당시엔 나 같은 평민이 감히 들어서기 어려운 위세를 보인다. 그리고 대문, 중문 등에는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한 의미로 ‘지네철’을 붙였다 한다.
안채의 마당 한 가운데엔 제법 큰 바위에 음각된 석문동(石門洞)이란 글귀에서 석동(石洞)이란 지명의 유래를 알게 한다.
외부와 통하는 대문 쪽 입구에는 씻을 물을 담아두는 돌로 만들어진 몇 개의 확이 있는데, 남자가 사용하는 확은 둥글고 여자가 쓰는 확은 복숭아 모양으로 구분되어져 있는데, 이는 바깥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행실에서 눈과 귀와 입과 손을 씻어 추하고 악한 것을 없애라는 마음가짐과, 청결한 신체관리를 위한 실용성을 겸비한 것이라 한다.
곡식과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인 토담으로 지어진 2채의 고방, 그리고 마당에 놓인 절구와 절구에서 찧은 재료로 떡을 만드는 평평하면서 넓은 떡돌, 집 한 구석엔 실제 용도 보다는 멋으로 갖춰진 나무 풍구와 논농사에서 물을 길러 올리는 수차도 숨어있었는데 용케 내 눈으로 찾아냈다.
사당이 있었다던 바로 뒤편엔 절이나 능묘 등지에 세우는 석등도 있다.
후원에는 S자 형태의 연못이 있는데 이곳의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형상이어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 했다고 하며, 실제 후원 뒤편 대나무 밭의 습기 때문인지 지네가 많이 나왔다고도 한다. 또 다른 설로는 한반도를 본 땄다는 것으로 명칭도 '반도지'라 하는데, 이는 일제시대 우석 성재경 선생이 고가 바로 앞에 ‘지양강습소’를 세워 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등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정신의 발로가 아니겠냐는 것인데, 어느 게 사실인진 모르겠다.
이제 마지막 남은 후원의 또 다른 볼거리인 대나무 숲으로 가 봤다.
고택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은 은은함을 좋아한 선조들이 직접적인 햇빛보다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여린 빛을 좋아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대나무 중엔 까만 ‘오죽(烏竹)’도 섞여 있다. 그런데 내겐 이 마지막 코스가 가장 멋스러워 보였다.
정갈한 담장과 대나무 숲길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움의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느낌이다.
성씨 고택의 연혁은 1855년 아석 성규호(成圭鎬) 선생이 노모를 모시고 터를 닦아 지은 원택(元宅)인 아석헌(我石軒)을 시작으로, 석운재(石雲齋), 경근당(耕勤堂), 한반도 형상의 연못에 접한 구연정(龜蓮庭)이 지어졌다 한다. 그 후 본채와 조금 떨어진 곳에 노부가 요양하도록 지은 별채 일신당(日新堂)까지 아석의 자손들이 집을 연이어 지으면서 30채 규모의 한옥촌이 이뤄졌단다.
특히 석운재는 1863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하자 아석 선생이 관산서원의 안채를 옮겨다 지었으며, 이후에 성기학 회장이 석운재 정원에 허물어진 고택에서 나온 주춧돌을 사람이 앉기에 적당한 높이로 둥글게 세운 후 그 위에 데리석 사각 돌판을 얹어 담소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로 만들었다.
석운재(石雲齋) 경근당(耕勤堂)
경근당 안채 마루는 당시 서양 건축의 편리함을 도입하여 사방에 유리문을 달았고 실내 목욕탕까지 갖췄다. 또한 집과 집을 나누는 담장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집안 사람들이 전통 담장과 달리 낮게 꾸몄으며, 아석 선생이 기거하며 과객을 맞았다는 일신당 마루는 유리로 4면을 장식했다.
6.25때는 미군 24사단이 잠시 사령부로 사용하다가 북한군의 침입으로 후퇴하면서 보관문서를 불태우면서 집까지 태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지금도 일신당 마루 기둥엔 손도끼 투척 연습을 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는 정황상 인민군이 그랬을거라 하지만 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아석 고택은 1998년 성기학 회장의 노모가 창녕 옛집에 가고 싶다 해서 내려왔는데 집이 너무 낡아서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아석헌, 경근당, 일신당 같은 집은 보강만 했고, 불타 없어진 다른 집들은 전국 각지에서 해체되기 직전의 집을 사들여, 고재를 추스려 가져와 복원했다 한다. 그래서 다른 복원한 한옥 건물과 달리 더욱 멋스러운 고택이 되어진 것 같다. 따라서 아석 고택은 지어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현대양식이 가미되어 한옥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한국 근대 건축사의 증거가 될듯 하다.
사랑채 구연정 앞뜰 구연정 병천정사(倂泉精舍)
아석헌(我石軒) 청수당(淸修堂)
현재 아석 고택의 실제 주인인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과 그의 형 푸드웰 성기상 회장은 고택의 방마다 에어컨이나 화장실, 샤워실 등을 설치해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개량하여, 유적으로서의 한옥이 아닌 현대 삶 속에서 한옥으로 복원했다 한다.
아석 고택의 실내를 보진 못했지만 고택 실내엔 울산 먹감 머릿장(欌), 마산장, 남원 이층장, 통영장 등의 전통장이 방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아석헌 앞 창고로 쓰이던 곳은 작은 박물관으로서 가야 토기, 짚신 짤 때 쓰던 신꼴, 설피(눈신발) 등이 전시돼 있다 한다. 더 눈여겨 보면 아석헌 현판도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서화에 뛰어났던 석촌(石村) 윤용구(1853~1939년) 선생의 작품으로, 석촌은 일제가 내린 작위를 거부하고 초야에 묻힌 인사로 유명한데 이들과 함께 했던 정신세계를 보면, 이 집 주인들 역시 어떤 정신을 품은 분들인지 짐작이 간다.
일신당 마루엔 당을 지을 때 담원 정인보(鄭寅普)가 쓴, 지금은 귀한 작품이 된 일신당기(日新堂記)도 걸려 있단다.
성기학 회장은 “한옥의 독특한 매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이라며 “이곳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방이 그렇게 많아도 한 방에 빼곡히 모여 자면서 새벽까지 얘기꽃을 피우는 것을 종종 본다”고 했다.
창녕석리성씨고가(창녕성成씨아석我石고택) 관련 인물
아석 고택 내에는 아석 이후 4대의 일가가 살았는데, 모두가 부호로서 1년에 4대가 각각 적게는 4,000석에서 많게는 12,000석의 벼를 수확했다 한다
아석(我石) 성규호(成圭鎬) - 창녕군 대지면 석동리에 1855년 처음 노모를 모시고 입주한 입향조로, 1863년 병자년 기근때는 이웃 주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 한다.
성석운 - 아석의 손자로 종제 성낙안과 함께, 1920년 근대 교육기관인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열어 1920년에서 1924년까지 후학을 가르쳤다.
석민(石民) 성낙안(成樂安) - 아석의 손자로 종형 성석운과 함께,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부녀자까지도 교육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철거되고 대지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한다. 또한 1953년 일본에서 양파 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최초로 양파농사를 시작하였다.
우석(愚石) 성재경(成在慶) - 성낙안 선생의 아들로 일본 법정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소작인들에게 전답을 모두 나눠준 후,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다 낙향 한 뒤 일신당에 머물며 일본 원예책을 보고 일신당 마루의 유리를 온실로 만들어 온실농법을 시작하기도 하고, 양파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음을 알고 아버지 성낙안 선생이 들여온 양파 재배법을 발전시켜, 양파 채종과 재배기술을 확보하였다.
1942년 대지면장 재임후 춘궁기엔 면민에게 국가에서 무상지급하는 양식이라며 사비로 곡식을 나눠 주기도 하였다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양파망도 성재경 선생이 고안했다하며, 1963년에는 김성수, 하재호씨 등과 함께 경화회(자발적 새마을운동)를 창립하고, 보리 보다 소득이 많은 양파재배를 권장하는데 전념하여 창녕의 특산물로 자리잡게 하였다.
1981년 작고하기 전엔 자신이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에게 다 분배하여 나눠줬다 하며, 당시에 지어진 경화회 건물은 지금도 회원들의 활동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성기학 - 1947년 우석 성재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노스페이스로 유명한 아웃도어 의류 업체인 영원무역그룹(2012년 회계 기준 자산총액 약 1조4천억, 년간매출총액 약 1조5천억) 회장이다.
성유경(成有慶) - 아석 성규호의 증손자로서 남로당 재정국장으로 활동 하다 6·25 직전인 1948년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가 1982년 사망했다.
성혜림 - 성혜림은 1937년 성유경과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기자인 김원주의 1남 3녀중 둘째 딸로 태어나, 서울사대부속초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으로 진학했다가 아버지를 따라 1948년 월북하여 평양예술학교를 졸업 후, ‘온정령’ ‘백일홍’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살에 소설 ‘땅’의 저자이며 조선작가동맹위원장 이기영의 장남 이평과 결혼 했으며, 결혼 후 '옥돌'이라는 딸을 낳고, 이평과의 결혼 생활 중에 다시 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여 연출과를 졸업하고 영화 ‘분계선의 마을’에 출연 북한최고의 배우가 되었다 한다.
그 후 김정일이 성혜림을 만나면서 어머니를 일찍 여윈 마음에 5살 연상녀인 성혜림에게 모성애를 느끼면서 열렬한 구애를 하여 33세의 성혜림과 28세의 김정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한다.
당시 김정일은 계모와의 사이에서 권력투쟁을 하는 위험한 시기였지만, 성혜림에게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그를 관저로 불러들여 유부녀와의 위험한 관계를 가졌다. 결국 성혜림은 남편 이평과 이혼하고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하여 1971년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을 낳았다. 그러나 아버지 김일성에게 발각될 걸 두려워한 김정일은 아들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으며, 거기에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나서서 "언니는 오빠 보다 나이도 많고 한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테니 노후는 보장해 주겠으니 나가라"고 폭탄 선언을 했다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성혜림은 정신적 불안으로 신경성 질환을 앓게 되어, 1974년 모스크바에 치료차 출국하였으나 병이 심해져서 밤마다 수면주사를 맞고도 잠들지 못했다 한다. 이후로 김정일이 성혜림을 전혀 찾지 않고 김일성이 내정한 노동당 간부의 딸 김영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2002년 65세에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죽었다.
성혜림의 장례식엔 북측에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으며, 그의 시신은 모스크바의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묘비에는 ‘성혜림의 묘’라 썼고, 묘비 뒷면엔 ‘묘주 김정남’이라 쓰였다 한다.
한 때 창녕석리성씨고가(창녕성씨아석고택)가 성혜림의 생가란 소문이 나면서 아석 고택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단다.
성혜림의 생모 김원주(94년 사망)는 성혜림의 아버지인 성유경의 둘째 부인으로서, 집안의 허락을 얻지 못해 성혜림이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찾아오지도 못했다 한다. 따라서 고택과의 인연을 규정하면 성혜림에겐 생가가 아닌 본가라 해야겠다.
물계서원(勿溪書院)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는 물계서원은 성씨 시조 성인보의 아들인 고려의 시중공(侍中公) 성송국(成松國)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12년(숙종38)에 사우를 건립하여 창효사(彰孝祠)라 명명한 것인데, 1719년(숙종45) 세덕사(世德詞)라 개칭하면서 서원의 규모로 확장하였다.
고종3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폐지되어 물계정으로 개편하였다가, 1995년 복원하여 지금은 창녕성씨 21위의 위패를 봉향하고 있다.
고려 말 충신 성여완(成汝完),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 조선 개국공신 성석린(成石璘), 사육신 성삼문(成三問), 율곡이이와 친구이며 성리학의 한 학파를 일군 대학자 우계 성혼(成渾) 등이 모두 창녕성씨다.
특히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6세손인 성사제는 고려가 망하자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고 말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가면서 부인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 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며, 이제 곧 죽을 것이다. 당신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선영을 지키라”고 하여 나라와 운명을 같이했다. 또한 그 정신을 이어 받아 나온 후손이 그 유명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다.
성삼문의 결심을 나타내 보인 시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 하리라
해도 절로 고개를 돌리려 하는구나
황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 하니
오늘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가려나
첫댓글 이선생 대단히고맙소 우리조상 /유례를잘표현 해서 다음에만나면 재환이가 한턱사리다 기회를다오
설쉬고 집에는 잘 갔남? 30년만의 만남...좋은 시간이었네.
그리고 성씨 계보에 대해 그렇게 소상히 기재를 해주니 뭐라 할 말이 없네
내용 전체가 족보 및 어른들로부터 이어 전해내려오는 얘기와 똑 같으니
친구를 향토사학자로 칭해도 손색이 없겠구먼, 연구하니라 수고 많았네. 그리고 고마우이!!!
어제 티비에 비친 김영자 동무는 성혜림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는데'내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간을 살아야 했던 리유는,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 친구였고, 그녀가 5호 댁이라 불리우던 김정일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앞으로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될 김정일이 다른 사람의 부인인 성혜림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김일성도 모르는 비밀이었고,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김정일의 권위와 관련된 문제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화국에서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었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성혜림은 그리 예쁜 인물이 아니고 귀여운 여인이었다는데, 남쪽에 살았다면 어떤 인물이 되었을까?
성씨 여인 성춘향이 처럼 헤피엔딩이었으면 우리나라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인데 말이야
성씨 친구들아 이번에 이곳 둘러보고 몇몇 곳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내친구들이 부럽더라. 정말 존경할만한 조상님네의 후손이드만, 그리고 현재 '석동아석성씨고택'의 주인들도 일부 부정적인 이야기도 떠돌지만 전체적으론 부호이면서 우리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행했던 분들이고, 현재의 주 관리자 되시는 성기학 회장님도 좋은일도 많이 하시고 실제 고택 방문자도 뜻이 있는 행사면 숙소및 식사까지도 무료 제공을 했더라. 전통 한옥에서의 1박 !!!
아마 성씨 친구들 끼리 모여서 자녀들과 1박 2일로 사전에 예약을 하고 방문 한다면 장소 제공은 충분히 하지 않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