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칸 아카데미에서 퍼온글
작성자 : 청암 대성 제 목 : 제사, 차례문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양문화고급과정에서 강의한 강의초록입니다.
제사, 차례 문화
一. 들어 서는 글
一. 하고 싶은 말
․제사의 우리말은 차례 ․차례는 채우고 비운다는 결산의 뜻 ․제상위에 펼쳐진 공간, 홍동백서 ․차례는 내일을 위한 과거와 현재의 반성 ․정월 차례 마차례, 대보름은 차례 ․봉제사권, 제사는 권한 ․告祝없는 차례는 무의미 ․제물은 7가지가 적당 ․차례전에 먼저 세배부터 ․나이는 차례의 나이 ․엉등이 올리는 절은 불경
一. 맺음
一. 들어가는 글
과거를 이어 오면서 또 미래와 이어주는 역할 가운데 과거를 이어받는 구체적인 행위의 하나를 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제사라는 행위가 변질되어 단순히 죽은 이를 추모하는 정도로 생각하게끔 됐으나 제사의 본질은 과거에 대한 참회가 그 목적이었다.
옛 선조들은 자신의 과거가 자기 개인만의 과거가 아니라 집단의 과거이고, 또 선조의 과거로 끝없이 연결시키면서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정산(定算)과 참회, 반성을 하는 하나의 의식을 제사라는 형태로 만들어 이어 왔던 것이다. 수많은 세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한 방편으로 짜낸 지혜의 하나가 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정산과 참회‘라는 제사의 원래의 뜻이 변질되지 않는 한 우리의 제사 문화는 인류의 모든 문명을 덮을 수 있고, 또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민족문화를 꽃 피우게 될 것이다.
제사를 단순히 조상 숭배로 생각하는 것이나 또한 조상에 대한 추억이나 기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제사의 본질이 뒤바뀐 편견일 뿐이다.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이 따르지 않는 제사는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반성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 진다. 하나는 ‘시간적인 면‘에서의 반성이고, 또 하나는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반성이다. 때문에 제사 상위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몇가지 소출물을 제물로 올려 공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한편 제사의 주체인 신주(神主)를 내세워 그 신주에게 절을 하며 시간적인 참회라는 방편을 도출해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 나가는 지혜의 꽃이라 할 것이다.
제사는 왜 참회이어야 하는가. 반성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지 않은 제사는 왜 단순한 예법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는가. 우리 말 제사, 제례, 차례는 무슨 뜻에서 생겨난 말인가.
차례라는 말의 뿌리(語源)를 통해 그 뜻과 변질된 지금의 제사나 제례, 차례는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를 추적해 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一. 하고 싶은 말
제사의 우리 말은 차례 제사(祭祀)라는 말은 한자로 쓰니까 祭祀가 되지만, 우리말로는 「차례」 「차레」이다. 한자의 차례(茶禮)가 아니다. 한자의 차례(茶禮)는 차례라는 우리말을 한자식으로 음차(音借)한 것이라는 것이 한국학연구소의 고대언어을 연구하는 박현(朴賢)씨의 연구결과이다.
차례라는 말의 뿌리는 「마차례」에서 연유한다. 우리 말의 원형이 남아있는 몽골이나 옛 만주에서는 하늘에 올리는, 하늘과 관련해서 하늘에서 자기까지 이르는 반성에 해당하는 하늘 제사(天祭)를 마차례라 했다.
마지차례, 맞차례로도 발음된다. 그리고 하늘이 아닌,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제사는 그냥 「차례」이다.
몽고에서는 지금도 마차례(machare), 고 만주에서는 맞뜨리(machure), 우리나라에서는 마차례(mu(a)chari)라 했다. 마차례와 차례를 구분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모든 차례를 마차례로 받아 들여 「마쯔리(machuri)」로 부르고 있다.
중국인들의 제사라는 발음, 「츠러」도 차례라는 발음이 한자 발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祭祀라는 한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보다는, 제사라는 글자가 생기기 전의 발음인, 「츠」 「러」가 어떻게 해서 생겨 났을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봐야 한다. 차례, 차레와 비슷한 이 음이 동아시아 공동의 음가(音價)인 차례를 표기하기 위한 민족 나름의 음가 선택이라고 봤다.
박씨는 글자가 어떻게 상형 됐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음가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이라고 했다.
차례는 채우고 비운다는 결산의 뜻 차례라는 뜻의 차는 ‘꽉 메우다‘ ‘채우다‘라는 뜻이다. 례는 ‘비우다‘의 뜻으로 차례는 채움과 비움, 즉 채우고 비우고를 정산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대차대조표의 작성이다.
든 것과 난 것, 채운다는 것과 비운다는 것은 거래이자 왕래이다. 상대적인 결산이다. 그것을 반년이나 1년에 한번 단위로 전체가 모여서 하는 결산이다.
마, 맞은 '진정한' ‘진실한‘ ‘우두머리‘라는 옛 우리말이다. 우리 말의 마지, 맞이는 제일 위라는 뜻으로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애가 우리의 마지입니다”의 마지나 맞이는 제일 큰 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는 고대어의 치(chi)로 지도자, 위라는 뜻이다.
따라서 「마차례」의 뜻은 ‘진정한 단 한번의 가장 중요한 대차대조표, 정산을 한다‘라는 우리의 옛 말이다.
이것이 점점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리학 이후 한국 사회에는 차례의 차인, 즉 채움만 남고 비운다는 례의 뜻은 사라져 버린 반쪽의 차례로 남은 셈이 됐다.
채움의 뜻인 제(祭)를 예법이라는 형식으로 얽매어 놓고 그 본래의 뜻,정산과 반성은 온데 간데 없이 예법만을 가지고 따지는 본말이 전도된 차례로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급기야는 중국 송나라때 ꡔ주자가례(朱子家禮)ꡕ를 따를 것인가? 조선조때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예법을 따를 것인가? 또 우리의 옛 역사서인 ꡔ한단고기(桓檀古記)ꡕ 등에 나오는 우리 고유의 예법을 따를 것인가? 하는 껍질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시시비비만 남아 버렸다.
가가례(家家禮)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그 빛이 바래져 버렸다. 조선조때는 차례의 예법 하나로 사화가 일어나 대량 살육전이 일어나고 당파도 여기서 파생 됐다.
제상에 재현된 자신의 세계, 홍동백서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제상 위에 표현한 고대 선조들의 표현이다. 고대 선조들의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백미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시간적인 참회나 반성과 아울러 공간에 대한 반성이라는 형태에서 동쪽은 붉은 것을, 서쪽은 흰 것이라는 선조들의 우주관, 세계관이 나타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된 소출물을 가지고 자기들의 세계를 제사상(祭祀床) 위에 재구성하여 올려 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세계, 자신들의 우주를 작은 상위에 표현을 해 낸 것이다. 중국에서는 실제로 붉은 것은 동쪽에서 많이 나고, 흰 것은 서쪽에서 유난이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자기들이 현재 살고있는 그 집합, 그 공동체가 살고있는 공간을 제사를 올리는 상(床)이라는 작은 공간에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출물이 제상에 오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이 된다.
이것이 후대에 올수록 조율이시(棗栗梨柿)니 두동미서(頭東尾西)니 하면서 까다로운 절차가 만들어 져 남들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개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변질되고 만다.
공간적으로 반성하기 위한 자기 세계의 구현이라는 정신은 사라지고, 제사 예법만 남는 형상이 됐다.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로 남아 있는 것도, 진정한 전통의 뿌리는 사라지고, 전통의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내일을 위한 과거와 현재의 반성 태초로부터 지금까지를 반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마차례」라 했다. 그리고 일정하게 과거를 구분 지어서 반성하는 것은 그냥 「차례」라 했다.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아버지 때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의 전 시기를 시간적으로 계산해 올리겠다는 뜻이다. 그것이 인간 발전을 위한 인간 됨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 문화 실현의 방편이라는 것이 고대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 태초부터라는 마차례는 없어지고 말았다. 태초부터 이던 마차례의 형식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박현씨의 분석이다.
설을 놓고도 '삼국사기'에서는 그럴사한 전거를 구해와서 ‘설은 서러운 날‘이고, 한자로는 ‘달도일’이라는 고사 등을 끌여 붙이고 있으나 애초에 설을 개인의 집안 차원에서 지낸 적은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없었다.
설 제사는 바로 국가 제사였지 일반 개인이 지낼 수 있는 제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국가 단위에서 지낸 설제사는 서기전보다 더 전에 정월이 음력으로 10월이었을 때 였다. 지금도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의 유습이다. 12월을 섣달이라는 것은 10월인 정월에서 세 번째 달로 섣달이다.
이때 설에 올렸던 것이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동맹(東盟)」이었다. 12월 섣달에 설 행사를 하는 사회도 있었다. 「영고(迎鼓)」니 「무천(舞天)」이니 하는 것은 국가가 주관하는 설 행사였던 것이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의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문화적인 반성과 참회와 새로운 설계의 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은 개개인들이 지내는 상황으로 변했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성리학이 들어와서 모든 예법이 주자가례를 따르는 상황에서도 설 제사는 큰집에 모여서 다같이 지내는 것으로 됐다.
설 제사는 마차례, 대보름은 차례 국가가 주관했던 설 제사인 마차례를 시작으로 지역 공동체로, 또 더 작은 공동체로, 마지막으로는 자기 집안으로 내려 갔던 것이다.
정월 초하루부터 내려 가면서 정월 보름까지 계속됐던 것이다. 그래서 정월 여드렛날 정도 쯤이면 지역 공동체, 지금 같으면 도 단위에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작은 공동체, 면이나 동 단위는 대개 정월 보름이 된다. 그래서 동제(洞祭)가 대개 정월 대보름 쯤에 있게 된다 할 것이다.
동제가 정월 대보름에 있는 이유가 이같은 오랜 연원을 잊어 버렸으니 막연히 “그냥 지내니까”, “대보름이니까”로 엄버무려 진 오늘이 되어 버렸다. 마침내 대보름이 되면 이 전체의 사회적인 반성과 참회가 개인의 몫으로까지 이르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설 제사, 설 차례를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로 됐다고 할 것이다.
지금은 국가가 주관하는 제사는 없어지고, 국가적인 행사인 정월 초하루의 설 차례인 마차례가 개인이 지내는 행사가 돼 버렸다. 그것이 큰집에 모여서 지내는 습성이 돼 버린 것이다.
奉祭祀權, 제사는 권한 제사라는 것은 지내고 있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실상을 보면 그 속에는 우상 숭배가 들어있게 마련이다.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찾을 때 중요한 것은 밖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미타, 즉 자성미타를 찾으라 했다. 자기 속에 있는 참회의 내용이 빠지고 나면 결국 우상 숭배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이같은 제사가 아직까지 나름대로 가족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기능은 해왔던 것이다.
큰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막강한 권리를 뜻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국가 대표가 주관을 했다. 여드렛날에 지내는 제사는 그 나름의 작은 공동체의 대표가 주관을 했다. 이것을 차례라고 할 때, 차례는 하나의 큰 권리이자 의무가 됐던 것이다.
과거에는 그것을 봉제사권(奉祭祀權)이라고 했다. 물론 과거에 봉제사권의 그 권리에는 유형적인 재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땅과 재산을 물려 받았으나 그 개념 이전에 제사지내는 것은 하나의 권리였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무였다. 지금은 의무만 남아 있는 셈이 됐다. 물론 아직도 문중이 유지되고 있는 집에서는 권리가 유지되고 있다. 권리가 유지되니 그 권리를 가지고 상속 다툼이 되고 있기도 하다.
告祝없는 차례는 무의미 제사는 단순한 예법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례를 지내는 전날까지, 그 한해에 대한 자기 정리와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산이 중요했다. 그 결산을 가지고 반드시 고축(告祝)이 뒤따라야 했다. ‘ 이러 이러하게 살아 왔습니다!’ ‘앞으로 이러하게 살겠습니다’는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반성이었다. 자기의 조상은 자기의 속에 있다. 외부에 실존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면이다. 자기 속에 없으면 외부에 아무리 있어도 소용이 없다. 내 속에 금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없다면 밖에 있는 수 만 관의 금도 상관이 없다. 내 속에 있는 것, 그것이 보다 본질적이다. 내 속에 성스러운 것이 없으면, 성스러운 것을 받아 들일 수 없게 되어있다.
성스러운 것을 성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내 속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고축을 할 때는 내 속에 있는 제사의 대상, 그것이 한님이 되었든, 할아버지 아버지, 선조가 되었든 그 모두는 내 속에 뿌리가 있어야 한다. 내 속에 없으면 외부에 실존하든 아니든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외부에 실존하고, 실존하지 않는 것을 엄밀하게 따질 수 없는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내 속에 있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고축 없이 차례를 지낸다면 차례는 사실 귀찮은 것일 뿐이다. 명절이라 해서 식구들이 모여 즐겁게 노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놀고 흩어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을 것이다. 그 고축문을 작성하고 그 고축문을 함께 읽어야 하는 것이다.
祭物은 7가지가 적당 고축이 없이는 홍동백서든 조율이시든 아무 의미가 없다. 국가적인 천제인 마차례든 개인이 지내는 차례든 차례라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변질된 차례는 현대에 와서는 제상에 올려지는 제물로 차례의 바탕시비가 되고 있다. 제물의 갈래수가 부풀어 질때로 부풀어 져 이제는 제물이 작게 오르는 제례는 제례 취급을 못 받겠금 됐다.
지금은 하나의 기복 행위나 우상 숭배로 치부되고 있는 고사(告祀)도 옛날에는 상당히 큰제사의 하나였다. 한 집단이 과거를 반성, 청산하고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 것이 고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사상에 오른 제수는 조촐하다.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여기다 비하면 현재 일반적으로 지내고 있는 차례는 제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상 위에 올라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스무 가지가 넘는다. 권위를 자랑하는 집일수록 더 많다. 서른 가지가 넘는 곳도 있다.
과거 산중에서 수련하던 분들의 개인 차례에서는 제수가 일곱 가지를 넘지 않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수로왕 제사에도 제수는 6가지였다.
'다경'의 차의 옛일에서 나오는 남제(南齊)의 세조 무황제(武皇帝)가 남긴 조서(詔書)에서도 제수는 6가지를 넘지 못하게 했다. '가락국기' '다경' 뿐 아니라 옛날의 기록을 봐도 제수는 조촐했다. 물론 제수의 숫자에서는 국, 밥 등은 제외였다. 수저와 간장도 제외였다.
홍동백서를 하든 두동미서를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제사의 상에 올리겠다는 정신이 중요하다. 그것도 일곱 가지 이내에서. 지금은 서른 가지를 스무 가지로, 스무 가지를 열 다섯 가지로, 열 다섯 가지를 올리는 집은 열 가지로 줄이는 등 개인적인 차례는 최대한 간소화돼야 한다는 것이 대세이다.
제수가 많다는 것은 집단 이기주의가 빚어냈던 과거의 유산 일 뿐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집안을 과시하고 또 잘 되기 위해, 내 집안 차례에 만은 최대한의 제물이 올라야 한다는 무작정의 의식이 만들어 냈던 결과였다. 공동체 제사의 하나인 동제를 보면 마을 사람들이 다 먹고 즐길 수 있는 만큼만 푸짐하게 차리는 것이지, 갈래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차례 전에 먼저 세배를 차례를 지내기 전에 더 중요한 것은 세배였다. 차례 전에 가장 먼저 절을 해야 하는 첫 번째 대상은 부부가 있으면 부부간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있으면 할아버지 아버지가 먼저였다. 전체가 모두에게 서로 절을 하고 차례에 임했다.
어른들에게 먼저 세배하는 풍속은 「효」의 개념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개념이라는 것이 박현씨의 생각이다.
효의 근본은 하향(下向) 윤리에서 나온 결과라는 지적이다. 효라는 것은 가장이 가장다우면 필요 없다고 본 것이 고대 선인들의 안목이었다. 한 집안, 한 공동체의 대표가, 지도자가 지도자답지 못할 때, 상향(上向) 윤리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명절에 먼저 자식들에게 어버이가 먼저 절을 올리라는 하향윤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기도 하다.
효라는 것이 공동체에 등장했을 때는 이미 공동체의 지도자 모습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어머니가 어머니다우면 자식은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으면 이 가운데에서 중요한 공동체적 사회적 덕목은 하향적인 덕목이다. ‘어떻게 내가 지도자답게 자녀들을 대하느냐’일 뿐 일 것이다.
‘어떻게 내 자녀들이 나를 지도자처럼 모셔주느냐’는 것은 효를 핑계로한 상향 윤리의 요구일 뿐이라는 것이 고대 선인들의 생각이었다.
차례에서도 제상을 다 차려놓고 나서 그 앞에 먼저 절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끼리 서로 절을 올리는 것이 제사의 출발이다. 열 명이 이 반성의 무대에 참여해서 같이 섰다면, 그 열 명이 서로 절을 올려야 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다음에 차례에 들어 갔던 것이다.
이 차례는 신라때 까지 만도 유지됐던 한사람이 반대해도 결정을 볼 수 없었던 화백(和白)제도의 결정판이라고 했다. 모든 화백회의의 핵심은 차례에 있었다. 차례에 앞서서 모두가 같이 절을 하고, 번갈아 가며 절을 하며 합목(合目)을 본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차례를 올리고, 차례를 지내고 나서 화백회의를 주재했다.
고축은 차례를 대표하는 대표가 하는 것이다. 이 대표가 올린 고축의 내용에 대해서 서로가 절을 나누었던 그 마음을 가지고 국가사를, 지역사를, 가정사를 논의했던 것이다.
나이는 차례를 지낸 숫자 1년에 한번씩이라도 진정한 차례를 지낸다면 사람이 바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람이 나이를 먹는 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 나이라는 우리말의 뿌리(語根)이다.
나이라는 말의 나는 ‘땅’을 뜻하고, 이는 ‘반영’, ‘계승’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우리의 옛 말이다.
「이」는 우리의 고어에서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장음(長音)일 경우에는 붉다, 중음(中音)일 경우에는 살다, 단음(短音)일 경우에는 잇다로 된다. 현재의 우리말에 다 녹아 있는 말이다.
이꽃은 붉은 꽃이고, 현재 쓰고 있는 잇몸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원래 이(齒)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잇몸을 이라 했다. 현재 쓰고 있는 이(齒)는 잇발이다. 이빨이라는 말은 정체 불명의 말일 뿐 잇발이라 해야 맞다. 잇몸이 이이다. 잇몸이 붉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가 이빨이고, 잇몸은 별도로 잇몸이 돼 버렸다.
따라서 나이는 땅에서 살고 있는, 땅에서 생명을 잇고 있는, 땅의 나이테이다. 나이라는 것은 나무에 있어서 테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하나 하나 쌓여 가는 것이다.
차례를 진심으로 올리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이 바로 인간 완성의 날이기 때문이라 했다. 자신에 대한 정산과 반성, 참회라는 차례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차례를 지내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다.
엉등이를 든 절은 不敬 절 할 때, 엉등이를 치켜 드는 것은 불경이라고 했다. 반드시 응등이는 종아리에 붙여야 했다.
어떤 경우든 차례에서 절을 할 때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해야하고 궁둥이가 땅에 닿은 머리보다 더 올라오면 안 된다. 그 상태를 복지(伏地)라 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겠다는 표현인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겠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절을 하면서 한꺼번에 두 손을 바닥에 턱! 하고 내리는 것도 불경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예법이던 간에, 양외 동서를 막론하고, 손은 0.1초 차이라도 순서가 있다. 동시에 내려가는 것 같아도, 왼손이 먼저든 바른손이 먼저든 눈에 보이지 않는 순서가 있어야 했다. 손바닥 또한 반드시 손가락과 손끝은 땅에 닿아 완전히 붙어야 되나, 손바닥 속까지 바닥에 붙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봤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버릴 때, 모든 것을 적막하게 하되, 그 가운데서 성성함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호흡을 하여 모든 생명이 멈추어 있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서 성성한 한 기운이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을 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되, 그 본성이 죽지 않을 만큼의 받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완전히 엎드려 땅에 붙은 것 같아도 생명성이 없고 성성함이 없는 것과 성성함이 있는 것은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3천 배를 한다는 둥, 백 팔 배를 한다는 둥, 그것은 속도전일 뿐이다. 단 한 번을 하더라도 자기가 앉으나 앉지 않는, 누우나 눕지 않는 좌이부좌(坐而不坐) 와이불와(臥而不臥), 그것이 바로 절이라 했다. 움직이는 모든 순간을 자신이 알고 있으면 앉으나 앉지 않고, 엎드려도 엎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듯… 속도전으로 절을 하는 것은 운동일 뿐이다. 운동으로 치면 그것만큼 부작용이 많은 운동도 없다.
一. 맺음 우리 문화의 뿌리는 차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례의 근본을 잊어 버리고 단순히 제사만을 지내야 한다면 아무른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홍동백서를 하든 무엇을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제상에 올리겠다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차례의 원래 목적대로면 제수는 결코 많을 이유가 없다. 여러 가지 고전을 참작 해서라도 6~7 가지 정도면 무난할 것 같다. 개인적인 차례는 최대한 간소화돼야 한다는 것도 지금 시대의 대세이다.
지금은 과거처럼 농경사회가 아니고 무차별적인 대상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과잉 대량생산되는 산업자본주의의 최후기 단계여서 자기가 생산한 것을 상위에 올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그 상징성은 차례의 바탕에 두어져야 할 것이다.
수천년 조상들이 이어 온 차례의 근본을 이해할 경우 우리의 차례는 세계의 어떤 문화와 어떤 종교에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극소수의 특이한 사람들을 빼고 나서는 차례에 거부감을 갖일 수 없을 것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을 덮을 수 있고, 덮어낼 수 있는데다 그것을 담아낼 수 있는 큰그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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