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는 918년 태조 1년으로부터 10대 정종(靖宗, 1035∼1046)까지인 약 128년간을 말하며 이 기간에 대체로 토기공예로부터 도자공예로 전환하여 청자 생산이 시작된다. 10세기 후반으로부터 도자공예로 전환하여 청자 생산이 시작된다. 10세기 후반으로부터 11세기 전반경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이를테면 청자, 백자의 발전 시기이다.
918년 고려와조가 출발하였다고 하나 후삼국이 병립된 상태였고 정치적으로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내란기였다.
그러나 오대(五代)의 새로운 문물이 도래되고 특히 후백제의 견훤은 중국 오월(吳越)과의 교류를 빈번히 하였으므로 월주(越주州) 지방의 청자 기술이 도입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아마도 서남 해안 일대의 초기 청자 가마터의 분포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935년과 936년에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병합한 고려는 문물제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고 4대 광종(光宗, 950∼975)까지는 정책적인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성종(成宗, 982∼997)대에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안정되어 관리를 지방으로 비로소 파견하기 시작하여 중앙집권적인 전제왕권이 강화되어 가낟.
이와 같이 후삼국의 병존 시기인 10세기 전반은 여전히 통일신라 토기 계통인 회청색 경질토기(硬質土器)가 낮은 굽의 일상용기의 형태로 변형되어 새로운 기술상의 변화를 보이는 한편 회유(灰釉)의 기술이 계속 개발되어 갔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뒷받침하는 예가 울릉도 천부동 고분 출토의 주름무늬작은항아리, 방형민무늬편병, 긴목병등(도 152)이며 이와 유사한 형식의 경질토기를 생산했던 가마터로는 경주 근방뿐만 아니라 보령군 진죽리와 영암 동구림리 등이 알려져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9세기 후반∼10세기 초반경 청자에 선행하여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아 온 인천 경서동의 녹청자(도 208)와 해남 진산리의 녹청자편(綠靑磁片)(도 209)은 조직 녹청자들이다.
수도인 개경(開經)에 상납하던 것이 아니고 기타 지방에 공급하던 11세기 중엽경의 일종의 지방가마로 보는 의견이 최근에 나오고 있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미발달된 회유의 시유 방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하여간 후삼국 통일 이후의 국내 사정과 고려 귀족사회의 안정은 문화적인 욕구가 더욱 늘어나는 반면 생활공예품의 기술도 항상 정착되어 갔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순회4년」명항아리(도 210)로 굽 밑에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이 음각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절대 제작 연대가 있으므로 10세기 후반의 고려도자의 양상과 이 항아리의 용도를 알수 있다. 또한 최길회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 항아리는 입이 넓고 곡선의 굴곡이 완만한 몸통을 가지고 있으며 태토는 백토에 가까우나 유조(釉調)는 백자도 청자도 아닌 엷은 황,갈,녹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시유 기술은 아직 익숙하지 못해 흘러내린 흔 것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고급 장석유의 기술이 정착하지 못한 기술상의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태묘에서 쓰기 위해 만든 항아리이므로 당시 최고의 기술을 대표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하여 제작자의 이름을 새겼을 것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량한 시유 상황은 고려도자의 기술이 아직은 미숙한 단계였음을 말해 준다.
토기나 자기의 차이는 태도에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유리질화하는 표면 유약에 있다.
자기유약은 저화도에서 녹는 연유계(鉛釉系) 녹색유가 아니고 섭씨 1200도 이상에서 녹는 고급의 장석유(長石釉), 즉 화본과(禾本科) 식물의 순수 잿물에다 장석이ㄷ나 석영(石英)을 갈아넣은 유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7세기경 이후부터 회유(灰釉)의 개발이 이루어져서 8세기 이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으며 10세기 전반경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토기 위에 회유가 시유된 예가 울릉도 고려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유약 사용의 기술 토대 위에 토기 태도 대신에 자기질 태토를 사용하고 토벌구이한 그룻 위에 회유가 기본인 장석유를 시유하면 자기가 된다.
그러나 이상적인 정자는 단순한 장석유의 시유가 아니라 철반의 함량이 적절한 태토와 유약이 그 관건이며 또한 장석이나 석영을 어떤 비율로 재어 혼합하느냐가 기술의 요점이므로 고려시대 전기간 동안 꾸준한 노력이 경주되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순화4년」명항아리는 아직 그 적절한 기술이 정착되지 못했던 때의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에 속하는 청자와 백자 가마터로는 경기도의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군 이동면 서리, 충남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전북의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전남의 강진구 대두면 용운리,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마터의 공통된 특징은 무수한 원통 M자형 갑발로 거대한 퇴적층이 이루어져 있고 도편의 대부분은 민무늬이며 해무리굽 양식의 완, 얇은 내화토 받침이 특징이다. 유식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 등을 띠며 유빙열이 없다.
밖으로 벌어진 대접, 접시, 완, 항아리 등의 생활용기의 기종이 다양하게 보인다. 초기 후반부에는 국당초무늬가 시문되기 시작하며 중국의 임여요(臨汝窯), 요주요(耀州窯) 계통의 보상당초 압출무뉘가 민무의와 함께 반출되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의 고려백자 가마터로서 해무리굽백자(도 211)가 반출되며 태토나 유약은 대체로 미숙한 상테여서 잡물이 섞이고 유조는 얿은 황갈색을 띤 것이 많다.
이 가마터는 청자의 발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백자를 제작하였든지 아니면 조금 늦게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용인이라는 내룩 지방에 유일하게 백자가마가 설치되었던 것은 개경(開經)과 관계가 있는 특수 제작 조건을 갖춘 지역이었던 까닭으로 간주되다.
성종 11년(993)부터 거란의 칩입을 받은 고려는 국가의 일대 위기를 겪는다. 1019년의 거란과 평화조약이 체결되지만 안으로는 대장경 조판 사업을 벌여 정신적인 무장을 하고 밖으로는 나성(羅城), 천리장성(千里長城)등을 축조하여 거란 침입에 대처한다.
바로 이 시기가 성종 이후 목종(穆宗, 998-1009), 현종(顯宗, 1010-1031), 덕종(德宗, 1032-1034), 정종년간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고려도자의 기술은 10세기의 기술을 조금씩 발전시켜 본궤도에 올라가는 발전 시기이다.
이러한 11세기 전반의 양식을 파악한 절대편년 자료는 알려진 바 없으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1983년 영광 원자력발전소의 상수원 취수댐을 건설하지 위해 생긴 아산댐 수물 지구에서 있었던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한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의 청자 가마터의 발굴은 매우 중요한 단서를 주었다.
즉, 발굴 당시 가마와 관계있는 건물 터 주변에서 태평임술 2년 명평와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발굴한 가마터 일대는 40m*80m 범위에 갑발과 가마벽편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의 구릉이 모두 네 개가 있으며 퇴적층과 최적층 사이가 가마자리이므로 적어도 3-4개의 가마가 나란히 걸려 있으리라고 보았다.
이중 하나가 발굴된 것으로 그 규모는 파괴되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시대가 각각 다른 가마가 3개 겹쳐 있다. 가장 상층 가마의 길이는 14m, 폭 1.1의 지상가마로 판명되었다. 이와 같은 규모와 태평임술2년명평화편의 수집으로 용계리 청자 가마터의 활동 시기는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고 보고서에 언급하고 있다.
용계리 출토의 기종은 접소(도 213), 꽃모양 접시(도 214), 대접(도 215), 뚜껑(도 216), 큰사발(도 217), 합 뚜껑(도 218), 병 항아리 잔, 잔받침, 주전자, 등잔 등 다향하며 특히 완 굽은 땅에 닿는 면적이 넒은 소위 해무리굽인 것이 특징이다.
해무리굽 양식은 중국 월주요 청장에서 연향받았으리라고 본다. 뚜껑있는와, 편병, 유병 등은 안압지 출토의 토기 기형과 비슷하며 잔받침, 주전자, 향로등은 11세기 후반-12세기 지형의 선구적인 것으로 주목된다.
무늬는 임무늬가 대부분이고 음각 기법과 양각 기겁이 모두 있으며 음각 기법으로는 구름부늬, 연판무늬, 앵무무늬, 초화무늬, 수목무늬등이 양각기법으로는 연판무늬가 있다.
유조는 아직 비색청자로 잘번하지 못하고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 등을 띠고 있다. 태토는 백색에 가까운 회백색이고 비교적 치밀하며 굽달리에는 얇은 내화토를 4-6개 받쳐 포개어 군 것이 특징이다.
가마속의 도구로는 내화토로 만든 원통M자형 갑발이 특징을 이루는데, 중국 절강성 일대의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갑발과 유사하여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갑발의 측면과 상면에 1-7개의 공기구멍이 뚫린 것이 특징이며 특수한 기호가 음각되기도 한다. 이밖에 사발모양갑발, 갑발받침 등도 출토되며 한편으로는 연질토기편들이 수집되는데 주로 작업용기였을 것이다.
사실상 11세기 전반경까지만 해도 고려의 도자 기술은 중국에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양산 단계도 아니었다.
송사 고려전 대중상부8년조에 고려의 어사민관시랑 곽원이 송에 가서 고려의 사정을 말하는 가운데, "민가의 그릇은 모두가 동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점으로 보아 대개는 동기(銅器)가 보편적이었으며 청자는 상류층만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청자의 생산은 특수 행정구역으로서의 소(所)에서 생상을담당하였으며 신라 이래 수공업 생산집단으로서는 가장말단이 행정구역이며 국가의 보호 내지는 강력한 제재 아래에서 생산이 이루어졌음이 고려시대 고창현의 도성(陶成)과 덕암(德 ) 2개의 소의 존재를 통해 파악된다.
이상에서 고창 용계리 초기청자 가마터의 발굴을 통해 1022년 전후의 양상이 파악되었지만,용계리의 요업(窯業)이 언제 시작되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그 상한과 하한은 명확하지 않다. 발굴보고서에서도 언급 했듯이 대체로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으리라고 생각 되므로 초기 후반경의 고려도자의 발전 상황을 말해 주는 대표적 유적지로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