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숲은 저 홀로 정정하다 / 고재종
쑥대밭 된 희망을 끌고 뒷산에 오르는데 눈발 한점 없이 쟁명한 소한 바람 하나는 온통 쟁쟁한 울음이도다
텅 빈 들길을 지나 이윽고 들어선 산 초입엔 성성하던 백발 죄다 뜯기고 긴 꽃대궁과 잎새만 바싹 벼린 바람의 날에 씻기고 있는 억새밭 그곳에서 장끼와 까투리 앓는 소리를 듣는다 그 사랑자리가 꼭 살 베이는 억새밭이어야 했는지 다만 메마른 것은 늘 메마른 바람을 부른다
좀 더 올라 떼찔레며 칡덤불 얼크러진 그곳에 우수수 쏟아진 붉은머리오목눈이떼 그들이 콕콕 찍는 빨간 열매는 그 무리에 비하면 양이 너무 적겠다 새들에게도 겨울양식은 늘 부족할 것이다 새야 새야 그러나 저 빽빽한 잡목숲에 아직 손가락만한 크기의 어린 떨기나무들은 발가벗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회초리도 휙휙 후리며 겨울을 잘 나고 있다
도리깨를 만들던 간부태나무, 열매기름을 짜서 석유 대신 쓰던 산초나무, 잎을 찧어 냇물에 풀어 그 독으로 고기를 잡던 때죽나무, 김치에 넣어 향을 내던 잰피나무, 싸리비 매던 싸릿대, 열매의 빨간 빛이 너무 좋던 마가목과 참빗살나무, 깨금나무, 정금나무, 갈매나무랑 이름이 반짝이던 나무들도 그 이름까지 다 벗어버린 정갈함으로 바람에 씻기고 있다
그때 마침 따다다다닥 따다다다닥 소리 들려 고개 번쩍 드니 아아 거기 오동나무를 온통 구멍내고 있는 청딱다구리여 너 이 치운 날에도 부지런히 일하는도다 너 일하는 소리 있어 숲도 비로소 이 세상이다
네 소리에 홀려 걷다보니 바스락바스락 이윽고 가랑잎 속에 푹푹 발 빠지는 걸 몰랐다 참나무숲인 걸 몰랐다, 바스락거리는 것은 발 밑만이 아닌 숲 전체인 것이니 갈참 굴참 물참나무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들 대개는 황갈잎 추하게 달고 한없이 바스락거리며 숲속의 정정한 고요를 여지없이 흔들고 있는 겨울숲에도 욕심으로 타락한 것들 너희다
아니다 아니다 참나무밭엔 돌 보지 않은 무덤들 하나 둘 흙무더기로 주저앉은 무덤들 또또 애장무덤들 많아서, 어쩌면 그 슬픔으로 저 참나무잎들 참말로 떨어지지 못하고 우는도다 오호 그래서 죽음은 서러운 것이다 어느 무덤 둘레에 심은 산수유나무의 따내지 않은 그 열매를 쪼으고 있는 곤줄박인가 어친가 하는 그 새도 묻힌 자의 한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삐비비비 우는 소리에 저승내음이 묻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 순간 새하얀 나라에 들도다 내 어릴 적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개간하다 돌자갈 많아 버린 그 개간지터에 심은 은사시나무떼 무던히 하늘 찌르게 자라서 그 시원히 벗어버린 알몸들이 새하얀하다 그 하얀 몸이 황갈색 조선숲 속의 이방인 같다 사람은 어리석어 숲속에다도 부조화를 연출했도다
이윽고 이윽고 나는 청솔모를 쫓아간다 한 열마리가 되는 청솔모떼가 쏜살같이 나타나 그 뒤를 허억허억 쫓았으나 청설모는 그만 나무와 나무 위로 몸을 날리며 사라지고 내 영혼은 마침내 웅엄한 교향악 속에 들었도다
머언 광야를 달려온 듯 웅웅대는 청솔바람소리 그 장엄의 소리는 꼭이 시원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니고선 저러할 수 없는 청솔바람소리
그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엔 쏴아쏴아 지친 몸에 찬물 쏟아붓는 소리이다가 솨알솨알 쑥대밭된 희망을 빗질하는 소리이다가 급기야 부리부리한 눈 부릅뜨게 하여, 어느 먼 정신에게로 뜨거이 치닫게 하는 청솔바람소리
나 그 솔숲에 강렬한 경건함으로 서 있노라니 겨울숲은 다 벗어버리고 저 홀로 정정하다 겨울숲은 울음 깊어 저 홀로 성성하다 겨울숲은 제 품엣것들 모두 제 삶으로 엄정하여 나 그만 쩡쩡 추운 겨울숲에서 온몸 달아오른다
그 뜨거움에 겨워 계곡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뭔가 기척을 느껴 돌아보니 거기 웬 꽃사슴 한마리가 나와 눈을 딱 마주친다 저기 언덕 위 농장에서 뛰어나왔는지 웬 꽃사슴 한마리가 도망칠 줄도 모르고 어쩌자고 눈을 데굴데굴 굴려 나에게 웃는다 사람이 마음 씻으면 꽃사슴하고도 웃는다
산 내려오는 길 아이처럼 싱싱해져 나 홀로도 경건하게 깊어진 뒤 싱싱해져 쟁명한 하늘 쟁쟁하던 바람도 그윽해졌도다
뼈다귀들 나무 사이로
/이성부
겨울에야 옷 벗어 제 속내를 드러내는 뼈다귀들 나무 사이로 더더욱 옷 껴입은 내가 힘겹게 간다 옷 벗은 나무는 다만 저를 단련시켜 다음에 올 봄나들이 몽글리는 것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이마의 땀 닦고 겉옷 하나 벗고 천천히 옛이야기 찾는 길 오르기로 한다 이 산허리 칠부능선쯤에서 숨죽여 엎드려서도 눈빛 타올랐던 사람들 얼음들어 손가락 발가락 푸르딩딩 육신은 찢겨나가도 뜨거운 마음 더욱 사무쳐 오늘은 뼈다귀들 영혼으로 바람 불러 내 시린 발걸음 더디게 만든다 사랑도 옷을 벗어 더 튼튼해진 몸 터질 듯 쓰러질 듯 버티고 서서 나에게 손짓하는 나무들 사이로 한 깨달음이 간다 단단히 감싸놓은 내 슬픔의 덩어리를 내가 짊어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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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짐승의 등허리같은 방화선 따라 걷는 몽.가.북.계 산행길이 좋았습니다. 겨울 속에 있는 봄 날 산행이라 해야 할까? 뭐, 그런 산행이었는데, 많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셔터를 눌러대는 형님! 애 많이 쓰셨구요, 건강하십시오
좋은데 다녀오셨네요...늘 건강하시길 기원하니다...사진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