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팔장(第八章)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제일절 칼빈주의 개혁파(改革波)의 독특한 교리(敎理)
구원 서정 론에서 이미 말한 대로 로마교회와 루터파와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성려의 구원은혜는 인간의 신앙과 행위 여하에 따라 상실될 수 있음을 주장 하는 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I, 로마교회
로마교회는 트렌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였다. “만일 한번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그것을 유지하기만 하면 은혜는 상실될 수 없다. 그러나 타락하고 범죄 하면 결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저주 가운데 떨어진다.”
II, 루터파
루터파는 구원 서정 가운데 최종단계로 보존을 말하나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생활 여하에 따라 구원이 좌우된다.
벌콮(Louis Berkhof) 교수는 이 사실에 대하여 “루터 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신앙의 계속된 활동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또한 참된 신자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떨어질 수 있다고 추측함으로써 또 다시 이것을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였다.
III, 알미니안 주의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참 신자들의 견인은 선택의 결과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새 언약의 조건이다. ... 이 조건은 사람이 그의 결정적 선택과 칭의에 앞서 반드시 그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성취해야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항론파는 신앙을 구원의 근본적 요소인 은혜로 보지 않고 성도들이 능히 배교할 수 있다는 관념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중생한 신자들이 능히 또는 자주, 최종적으로 칭의 받을 신앙으로부터 타락한다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제이절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敎理)의 진술(陳述)
I, 성도의 견인 교리가 뜻하지 않는 것.
[1] 신자의 신앙생활과 관계없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잘못 이해하여서 선택받은 사람은 그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든지 결국 구원받는다는 교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견인교리는 그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원을 위하여 신자들에게 참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조한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우리가 시작할 때에 학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4).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요15:6).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야고보는 또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약2:26)고 하였다. 죽은 믿음으로 구원은 이루어 질 수 없고 따라서 신앙이 생활 속에 행동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면 즉 참되고 성실한 신앙 활동이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2] 믿다가 타락하는 자들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1) 성경은 외형상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하여 구원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말한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제자이었으나 제 곳으로 갔고(행1:25). “어떤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으며”(딤전1:19). 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4:10). 그러나 이들의 신앙은 참된 구원적 신앙이 아니라 일시적 신앙이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이런 일시적 신앙을 가졌다가 결실치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지적하셨다.(마13:20-23; 막4:5-17 참조).
2) 성경은 일시적 신앙만으로도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변모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히6:4-6)가고 하였다. 이 말씀은 자칫 참 신자가 타락하여 구원 은혜를 상실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잘못 인용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본문이 그런 뜻일 수 없음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참 믿음으로 칭의 된 자는 결코 정죄 할 자가 없다(롬8:33 참조).
히6:4-6은 외적 소명만 받은 자로 보는 것은 개혁파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도 본문이 보이는 영적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박윤선 박사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진정한 중생의 은혜를 받은 후 아주 타락하는 법이 없으니 이는 성경이 확언하는 바이다(눅22:3; 요6:39,40; 10:28,29; 17:2,6,11,12; 롬8:30, 11:29; 빌1:6; 살전5:23; 살후3:3 벧전1:4,5; 요일3:9).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모이는 자들 중에 택함 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어떤 정도까지 은혜를 주시어 그 진정한 자녀들과 섞여 있게 한다.”고 하였다. 구원받지 못한 자로서 이런 참 신자의 외양(外樣)을 어느 정도까지 가질 수 있는가? 우리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고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참 신자가 되지 못하였으면서도 심지어는 선지자 행세까지 할 수 있고 이적까지 행할 수 있단는 것이다. 가룟 유다에게서 우리는 그런 실례를 본다. 그는 한때, 주님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받아 행하였다(마10:1-8 참조).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처럼 일시적인 신앙만으로도 외형상 상당한 수준에 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을 보고 참된 구원적 신앙을 가졌으나 결국 멸망의 자리에 떨어진 것이라는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II, 성도의 견인 교리가 뜻하는 것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써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Chap. X V II. Section I.)
[2] 신학자들
1) 벌콮(Louis Berkhof)교수는 “성도의 견인 교리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의 상태에로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떨어질 수 없으며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 훅스마(Herman Hoekaema)교수는 “개혁파 신학자들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분명히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며 은총으로부터 최종적인 또는 완전한 배교(背敎)나 타락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통치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모든 구원 역사(役事)에 힘입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 역사는 신자들을 가두어 두거나 봉쇄하지는 않으며 그들의 의무나 이성적 도덕적 성질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유지케 한다”고 하였다.
3) 죤 머레이(John Murray) 교수는 “견인의 교리는 신자들이 <견딘다>(persevere)는 교리이다.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 <견딤>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말은 성부의 유효적 소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그 성도들은 끝까지 신앙을 유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 한다”고 하였다.
4) 스트롱(A.H.Strong) 교수는 “성경은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계속적인 역사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은 은혜의 상태를 틀림없이 계속 유지할 것이며 마침내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고 하였다.
5) 팔마(Edwin Palmer) 박사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한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 받는다는 교리이다. ...성도의 견인이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믿을 것을 강조한다. ...이는 성도의 보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성도의 견인은 사람이 무엇을 행함에, 보전은 하나님의 활동에 강조점을 준다”고 하였다.
이상에 여러 설명들을 종합하여 보면, 성도의 견인 교리는 유효적 소명을 받고 한번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앙을 갖게 된 신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성령의 구원 은혜를 거두지 아니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앙에서 완전 타락하거나 배교(背敎)할 수 없다는 교리이다. 물론 참 신자도 한 때는 범죄하고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나 그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이며 중생된 자라고 하면 하나님은 징계를 통하여서라도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와 신앙을 다시 갖게 하실 것이라는 교리 이다.
제삼절(第三節) 성경적(聖經的) 증명(證明)
이사야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사야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을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2: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마태복음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이와같이 이 소자 중에(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36; 요5:24; 요6:35-40; 요6:47; 요10:27-30; 요17:11, 12, 15; 롬5:8-10; 롬8:1; 롬8:29-30; 롬8:35-39; 고전1:7-9; 고전10:13; 고후4:14,17; 엡1:5,13,14; 엡4:30; 골3:3,4; 살전5:23,24; 딤후4:18; 히9:12,15; 히10:14; 히12:28; 벧전1:3-5; 요1서 2:19,25; 요1서 5:4,11-13,20; 유다서1; 유다서 24,25; 참조.
제사절(第四節) 견인(堅忍) 교리에 대한 이의(異義)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로마 교회는 견인 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대를 한다.
I, 인간의 자유와 모순
이들은 주장하기를 개혁파는 성도의 견인을 사람의 활동으로 보지 않고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로 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영적인 선에 있어서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떨어져 있음을 간과한 데서부터 생긴 오류이다. 인간은 영적인 선으로 나아가려 하여도 나갈 수가 없다. 오히려 성령께서 그들을 감화시킴으로서 인간은 그의 자유의지로 영적인 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죄악으로 속박 당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해방시켜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한다.
II, 태만과 방종으로 인도
성도는 결국 구원받는다는 견인 교리는 그 성도로 하여금 신앙에 열심을 잃고 태만과 방조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반대는 견인 교리를 바로 알지 못한데서 생기는 오류이다. 견인교리는 성령의 계속적인 협력으로 인간은 그의 신앙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구원은 인간이 믿어서 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하느냐 못하느냐하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에 달린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가 참되고 충성스런 신앙생활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인 교리는 태만과 방종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고무케 한다.
III, 성경에 위배된다고 함
[1] 배교에 대한 경고
성경에 배교에 대한 경고가 있다고 주장한다. (마24:12; 골1:23; 히2:1; 6:11; 요일2:6).
그러나 이 경고들은 견인교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객관적 요소로서 “말씀”을 가지고 계속 우리 신앙을 위하여 경고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우리 의식 속에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을 유지하며 점점 성화된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생활은 신자의 심령 내부에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일시적 신앙인들 곧 불택자들은 이 성령의 역사를 받음으로 끝까지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2] 성화의 권면
성경은 성화의 길로 진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끝까지 견인할 것이 확실하다면 이런 권면이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성화를 이루어 간다. 권면의 말씀은 성화의 객관적 방편이다. 피택자는 바로 그 권면을 받아들일 것이고 불택자는 그 권면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후자에게는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3] 배교(背敎)한 자들
성경은 실제적으로 배교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딤전1:19,20; 딤후2:17,18; 4:10; 벧후2:1,2; 히6:4-6).
그러나 이 사람들은 택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들은 참 중생자가 아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
제구장(第九章) 영 화(榮 化)
제일절(第一節) 개 념(槪 念)
I, 좁은 의미의 영화
죤 머레이(John Murray)교수는 성도의 영화를 부활의 상태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영화란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이 들어가서 축복의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육체를 떠난 그들의 영혼 편에서 보면 그들은 완전 성화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즉시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몸을 떠나는 것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고후5:8 참조). 영광스런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은 죄의 어떤 오염(汚染)도 내포할 수 없다. ...육체를 떠난 성도의 영혼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다(히12:23). 소요리문답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자들이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혜택(惠澤)은,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여지며 그 즉시로 영광에 들어가고 그리스도에 연합되어 부활할 때까지 육체는 그들의 무덤에서 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을 때 그 변화가 아무리 영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또 그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아무리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할지라도(빌1:23 참조). 이것은 그들의 변화는 아니다. 이 상태는 신자의 소망과 염원의 궁극(窮極) 목표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보장하신 구속은 다만 죄로부터의 구속뿐만 아니라 모든 그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속이다.
죽음은 죄의 삯이고 신자들의 죽음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은 아니다. 최후의 적(敵)인 죽음은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는 죽음 그 자체의 파괴로 생각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아니할 것을 입을 때”(고전15:54) 나타나게 되는 그 영광을 신자들이 죽을 때 들어가게 되는 축복의 상태로 대치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욕을 돌리며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의 독특성을 깎아내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죽음과 관련하여 이러한 선입견(先入見)을 갖게 되면 사랑과 소망이 삐뚤어지게 될 것이다.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롬8:23). 이것이 영화이다.(John Murray).
II, 넓은 의미의 영화
헤르만 카이퍼(Herman Kuiper)는 성도가 부활할 때에 가지게 될 영육 간에 완전 성화의 상태만을 영화로 보지 않고 성도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도 영화라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상으로 영화라는 명사는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죄의 세력과 부패로부터 나누어진다. 성도가 죽을 때 영혼의 영화와 부활 때 육체의 영화가 그것이다.”
우리는 위에 두 견해가 본질상 모순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헤르만 카이퍼도 좁은 의미의 영화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를 다 취하여 경우에 따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제이절(第二節) 시 기(時 期)
I, 영혼(靈魂)의 영화 시기(時期)
[1] 영화는 즉각적 변화이다.
영화는 중생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즉각적 변화이다. 중생은 성화의 출발점이요 영화는 성화의 도착 지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출발ㅈ머과 도착 지점은 일정 기간이 아니요 한 순간인 것이다. 성경은 사후 성도의 영혼이 즉각적ㅇ로 완전 성화된다는 직접적인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매우 밝은 빛을 ㄷ너져 주고 있다. 완전 성화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는데(계21:27 참조).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강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영혼의 즉각적인 완전 성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사역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성도가 임종시에 즉각적으로 완전 성화된다고 하였는데 그 일을 누가 이루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자가 기진 맥진한 임종의 시간에 자력으로 그 영혼을 눈같이 희어지도록 급격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 다한 지점에서 성령이 역사하시어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모든 죄악과 그 성향을 완전히 뿌리 뽑아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II, 육체(肉體)의 영화의 시기(時期)
신자의 임종시에 영혼은 완전 성화되어 천국에 이르나 육신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썩음을 당하게 된다. 이제 육체는 언제 완전히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화로운 몸이 될 것인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도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떼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15:51-54).
이 성구에서 우리는 육체의 영화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1] 육체의 영화는 부활의 때에 이루어진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부활의 사건으로 육체의 영화는 이루어진다. 그 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2] 죽은자가 영화된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부활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 당시에 죽은 자 들 가운데 많이 살아났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머27:52). 또 죽은 나사로는 다시 살아서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요11:43-44).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이루어질 성도의 부활과는 다르다. 세상 종말에 성도들의 부활은 썩지 아니할 육체, 곧 영화로운 부활할 것이다.
[3] 살아있는 자도 영화된다.
죽은자의 육체 뿐만 아니라 “우리도 변화하리라” 즉 살아있는 자들도 영화된다. 현재 우리의 육신은 성도라 할지라 할지라도 잔존죄(殘存罪)가 있으며 따라서 질병과 나약함과 썩어질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날에 변화된 육체는 죄와 및 그 결과로부터 완전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육체가 될 것이다.
[4] 영화의 상태는 그리스도와 유사할 것이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빌3:20), 21)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성도의 영화된 육체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성경은 부활하신 주님의 육체와 흡사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은 부활 이전과 동일성을 유지하여 도마와 제자들이 보알 알 수 있었으나 또 쉽게 알아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으며(눅24:16), 활동에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면서(요20:19; 행1:9,10) 음식을 잡수시었다(눅24:30). 성도의 육체도 부활 후에 이와 같을 것이다. 그 육체는 다시 사망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할 것이다(계21:4).
[5] 즉각 변화이다.
“마지막 날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고전15:51). 영혼의 영화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변화는 즉각적이다. 순식간에 홀연히 임할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완전히 하나님의 역사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제삼절(第三節) 관련된 사건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화는 단순히 그들 자신에게만 국한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을 가지고 있고 또한 모든 피조물이 새롭게 되는 사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성도의 영화는 전 우주적(宇宙的) 의미를 갖는 것인 바 죤 머레이 교수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I, 영화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나 볼 수 있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재림하실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지 않고 있다. 이 일은 오늘날의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태도는 베드로 사도가 그의 독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우리 주님의 동정녀(童貞女) 탄생(誕生)에 관해서 의심을 품는 것이나, 대리적(代理的) 속죄(贖罪)를 부정하거나, 또는 우리 주님의 육체적 부활 교리를 배척하는 태도는 다같이 결국 구름타고 오실 영광스러운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불 신앙적 태도들이다. 그리고 이런 불 신앙적 태도는 특히 주님이 육체로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데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만일 이러한 확신과 기대가 미래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신자들의 소망은 죄에서 완전 해방된 구원을 위하여 두 번째 로 다시 오실 구주의 강림에 그 중심을 둔다. 바울은 이 사실을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이라고 말했다(딛2:13). 보지 못하고 믿으며 사랑하는 주를 아는 신자들은 말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영광스런 소망은 주님의 재림과 너무나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을 위한 영화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영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화이다. 그리스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과 확신 가운데서 소망을 갖게 하는 이 영화는 빼앗겨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벧전 4:13).
II, 영화는 피조물의 새롭게 하심과 관련되어 있다.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는 것은 신자들 뿐만 아니라 피조물 그 자체까지이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케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8:20). 그러나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그러면 언제 피조물의 이 영광이 실현될 것인가? 바울은 우리를 의심의 상태에 놓아 두지 아니한다. 그는 우리에게 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그 탄식(歎息)과 고통(苦痛)이 끝나는 시기는 바로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롬8:23)받는 때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곧 신자들만 그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져다 줄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즉 그 기다림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리는 다른 곳에서 새 하늘과 새 당이라고 표현된 것과 동일한 진리를 가리킨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그리고 또 베드로는 이것은 신자들이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우주적(宇宙的) 갱신(更新)과 결부시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말하고 있다(벧후3:12).
그러므로 우리가 영화를 생각할 때 우리만 받는 좁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자들의 영화를 생각함에 있어서 새롭게 된 우주,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때 우주는 모든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거기에는 더 이상 저주(詛呪)가 없고 모든 것들을 바르게 하고 완전케 하는 의가 충만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21:27).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인 우주(宇宙),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허무한데 굴복하였으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으며,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다. 그러나 그들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부터 해방될 것이며 그 해방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완성과 때를 같이 하게 될 것이다. 이 양자(兩者)는 시간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같은 소망 안 에서 상호관련을 갖고 일어날 것이다. 영화는 전우주적인 복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이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4,28).
구원론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