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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23 / 심문식
왕오천축국전
1. 해제
1908년 3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며 탐험가인 폴 펠리오(Paul Pelliot)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천불동(千佛洞)에서 필사본(筆寫本)의 각종 경전(經典)을 비롯하여 고문서 ·불화(佛畵) 등 값진 문화재 29상자를 꺼냈다. 그는 그것들을 프랑스로 가져가 곧 연구에 착수하여, 정리 조사하던 중 앞 뒤가 잘려진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筆寫本)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이 겨우 230줄에, 한 줄은 30자 내외, 총 6천 여 글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이었다. 그는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 인도방면을 여행한 구도승(求道僧)의 기행문임을 알았다. 그는 전부터 이용하던 당나라 스님 혜림(慧林)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제 100권 속에 있는 <혜초왕오천축국전(慧超往五天竺國傳)>에 보이는 낱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간파, 곧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없어진 줄로만 알고 있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에 틀림없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발표가 있자 다음해인 1909년에는 청나라 학자 나진옥(羅振玉)이 그의 <돈황석실유서(敦煌石室遺書)> 제 1책 속에 이것을 영인해 넣어 교록찰기(校錄札記)를 붙여 잘못을 바로잡고 설명을 붙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일체경음의>에 나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일부라고 단정했다. 그렇게 하여 이 책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세인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그 뒤 1911년에 일본인 학자 후지다(薦圈獲八)는 나진옥의 영인본을 기초로 하여, 법현(法顯)의《불국기(佛國記)》, 송운(宋雲)의《행천축기(行天竺記)》, 현장(玄業)의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의정(義淨)의《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 등 인도 기행문을 비롯하여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등 여러 역사서와 서양 학자들의 연구물까지 두루 참조해서 본격적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서인 《혜초왕오천축국전전석(慧超往五天竺國傳箋釋)》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작자 혜초에 대해선 개략적인 내력도 모르고 중국인 승려로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1915년에 일본인 학자 다카스키가 《해초전고(慧超傳考)》를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혜초가 중국인 승려가 아니고 신라의 스님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그 후 부분적인 연구가 여러 학자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나, 또 하나 두드러진 일은 1938년에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W. Fuchs)가《왕오천축국전》을 독일어로 번역해 냈는데, 이것이《왕오천축국전》의 최초의 번역본이다.이렇게 국외에서 이《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 내지는 번역이 활발해지자,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부록에다 그 원문을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여 발행함으로써 쉽게 원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2. 여행경로
최남선은 그 해제에서 '법현의《불국기》는 육지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오고 현장의《서역기》는 육지로 갔다 육지로 돌아온 기록이며, 의정의《남해기귀전》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돌아온 기록인데 대하여 이 혜초 스님의《왕오천축국전》은 바다로 갔다가 육지로 돌아왔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혜초는 중국의 남쪽 광주(廣州)에서 바다로 배를 타고 남지나해를 돌아 동부 인도로 들어가 먼저 나체(裸體)의 나라를 구경하는 데서부터 기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곧 이어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곳을 지나 동쪽으로 왕사성(王舍城) 곧 불교 역사상 가장 먼저 절을 세운 곳을 유람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부처님이 도를 이룬 부다가야를 거쳐, 서북쪽으로 발을 돌려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간다. 이 중천축국의 4대 영탑(靈塔)을 구경하며 부처님의 탄생지인, 지금의 네팔 룸비니까지 가서 보고, 다시 남천축국(南天竺國)으로 가서 두루 구경한 후 여기서 다시 서북으로 방향을 돌려, 서천축국을 둘러 동북쪽으로 북천축국 자란다라국을 방문한다.
여기에서 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금의 파키스탄인 탁샬국을 지나 신두고라국(新頭故羅圍)까지 순례하고 다시 북천축국에서 북향하여 지금의 캐시미르 지방인 가시미라국(迦葉彌羅國)을 구경하고 북쪽의 대발률(大勃律) ·소발률(小勃律)을 순례한 후 다시 가시미라국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지금의 파키스탄의 간다라국을 지나 북쪽으로 우디아나국(烏長國)과 구위국(指衛國)을 순례하였다. 그리고 다시 간다라국으로부터 서쪽으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람파카국(賢波國)을 지나 서쪽으로 카피스국을 경유해서 다시 자불리스탄국을 거쳐 바미얀국(犯引國)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크스탄의 접경지대인 토하라국(吐火羅國)으로 간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페르시아(波斯)를 지나 현재의 시리아인 소불림국(小拂臨國)과 동로마제국인 대불림국(大拂臨國)에 관한 풍문을 듣기도 했다.또 토하라국 북쪽, 지금의 소련에 해당하는 곳의 안국(安國) ·조국(曺國) ·사국(史國) ·석라국 ·미국(米國)·강국(康國)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곧 안국 ·조국 등의 나라에서는 불교는 모르고 조로아스터교를 믿으며,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또 토하라·카스피·바미얀·자불리스탄 등에서는 형제가 몇 명이 되든지 공동으로 하나의 아내를 갖는 다부일처 풍습 등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토하라국에 오래 머물면서 서쪽 ·북쪽의 여러 나라의 진기한 풍습을 듣고, 다시 동쪽으로 길을 향해 지금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했던 와칸국(胡蜜國)을 지나고 다시 북쪽으로 삭니아국(識匿國)을 거쳐 총령을 지나 지금 중국의 땅인 총령진 곧 커판단국(渴飯檀國)에 도착한다.그는 다시 동쪽으로 카시가르(疏勒)를 지나 쿠차국(龜玆國), 곧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있는 현재의 쿠차(庫車)에 도착한 때가 727년 11월 상순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동쪽은 누구나 다 아는 중국 본토이니 더 기술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수 만리 장정(長程)의 여행 길이건만 비교적 기술이 간략하여 펠리오의 말대로 법현의《불국기》같이 문학적 가치도 없고 현장의《대당서역기》만큼 정밀한 서술도 없지만 그런대로 8세기 전반기의 인도 불교의 상황을 전해주며 지금의 캐시미르·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터어키·중앙아시아 등의 풍속 · 지리 ·역사 등을 알려주는 등 서역사(西域史) 연구에 있어서는 다른 것과 비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은 지금 프랑스의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혜초 자신이 8세기에 살아 있을 때 직접 친필로 쓴 사본이 아니고 9세기에 남의 손에 의해 베껴져 거의 천년 동안 동굴 속에 숨기어 있다가 햇빛을 본 지가 90여년 밖에 안되지마는 우리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3. 혜초
혜초는 신라의 스님으로 성덕왕 3년(704)에 태어났다. 719년 그의 나이 16세 때에 당나라 광주(廣洲)에서 인도의 승려 금강지(金剛智 : Vajrabodhi, 671~741) 와 불공(不空 : Amoghavajra, 705~774)를 만나 금강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도했다.723년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로 구도의 여행을 떠나 바닷길로 동천축국으로 들어갔다. 4년만인 727년 11월 당의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로 돌아온 혜초는 그후 당의 수도 장안에 머물다가 733년 정월부터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인 금강지를 모시고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譬千鉢大敎王經)》 을 8년간 연구했다. 740년부터 금강지는 이 경전을 한역하였고 혜초는 이를 필사했다. 그러나 다음해 가을 금강지가 입적하자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 이후 혜초는 불공에게 수학하였고 불공은 774년 5월 유서에서 혜초를 6대 제자 가운데 2인자로 유촉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밀교는 금강지- 불공- 혜초로 정통을 이었다. 혜초는 780년 오대산(五臺山)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불경을 번역하다가 787년 입적하였다.
4. 돈황(敦煌)
중국의 북경(北京)에서 서쪽으로 곧게 비행거리로 4천 킬로 지점, 감숙성 서북쪽에 돈황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한무제(漢武帝)때 장건이 개척한 이래로 남북조(南北朝) ·당(唐) ·송(宋) ·원(元) 시대까지 곧 해상교통이 열리기 전까지는 서역(西域)과의 중요한 통로로, 동쪽 중국 본토의 비단·도자기 ·비취 등의 귀중품이 서쪽으로, 서쪽의 명마(名馬) ·보옥(寶玉)·융단 등은 동쪽으로, 낙타와 호족(胡族)들의 등에 실려 드나들던 곳이고, 이곳을 통하여 멀리는 오늘날의 인도·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터어키·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내왕했다. 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문화가 들어온 것도 이 돈황 근처의 사막을 통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5세기의 구마라습과 법현(法顯), 7세기의 현장, 8세기의 혜초·오공(悟空) 등의 명승도 모두 이 돈황 지방을 지나 여행하였고, 13세기의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그 후의 많은 서양의 탐험가들도 모두 이 돈황 근처를 통과했었다.
이 돈황으로부터 동남쪽 약 27킬로 지점에 명사산(鳴沙山)이 있다. 이 산은 거의 모래 산으로 동쪽에는 천불동(千佛洞), 서쪽에는 돈황, 서남에 해당하는 당하구(當河口)까지 동서 20∼30킬로 정도로 펼쳐져 있다. 이 산은 일명 신사산(神沙山)이라고도 하는데,"위로부터 모래가 흘러내려 바람에 따라 이동하므로 산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 “사면이 모래 언덕으로 산등이 칼날 같아 올라가면 울리는 소리가 나며 발로 밟으면 허물어지고 바람이 불면 다시 원상태로 되어진다. "는 등의 기록이《돈황록(敦煌錄)》을 비롯한 기타 고서(古書)에 보인다. 그리고 또 이어, “이 산 속에는 한 샘물이 있는데 넓이가 약 10묘 가량 되고 모양이 그믐달 같아 월아천(月牙泉)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나오는 샘물은 차고 달다. 이 샘물은 옛날부터 모래에 파묻히는 일이 없다. 지금 이 샘물가에는 몇 채의 절이 있어 이 물을 바라보는 낭하(廊下)에서 방문객이 쉬며 차를 마실 수가 있다. " "단오날 이 돈황 근처 사람들이 모두 이 산에 올라가 액을 막기 위해 모래를 타고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세차게 미끄러지므로 그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마치 벼락치는 소리같이 들린다. "는 등의 기록도 《돈황록》에 있다.
이러한 전설이 있는 이 명사산 동쪽 끝 절벽에 약 1.6킬로미터에 걸쳐서 석굴이 있는데 그것을 멀리서 보면 꼭 벌집과 같으며, 이 석굴의 이름을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부른다. 천 개의 부처를 모시는 석굴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5∼6백 개 밖에 남아 있지 않고 그 중에서도 벽화(壁畵)와 소상(型像)이 들어 있는 석굴의 총수는 현재 알려진 것이 474개로 이것은 곧 우리 나라 경주의 석굴암이 474개가 모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들이 만들어진 연대를 시대별로 보면,위(魏) 22 수(隋) 90 당(唐) 206 오대(五代) 2서하(西夏) 3 원(元) 8 청(淸) 5 불명(不明) 5이며, 소상의 수 만도 2,414체(體)나 된다.그러나 천불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속칭(俗稱)이고, 본래는 막고굴(莫高窟,漠高窟)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은 당나라 때 문헌에서부터 이런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많은 석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그 개창(開創)에 대하여는 당나라 이회양(李懷讓)이 쓴 중수막고굴비(重修莫高窟碑)에,“진(秦 :五胡十六國의 하나, 곧 前素) 건원(建元) 2년(366)에 낙준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계행(戒行)이 매우 깨끗하고 심성(心性)도 괄담무욕하여 임야(林野)에서 수업(修業)을 하다가 우연히 이 산으로 와서 보니 금광(金光)을 발하는 천불(千佛)이 있는 것 같은 장관(壯觀)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는 이 산에 하나의 석굴을 파게 되었고, 그 뒤 법량선사(法良禪師)라는 스님이 또 동쪽으로부터 이 산으로 와서 낙준이 파 놓은 석굴 옆에 다시 하나의 석굴을 파고 절을 창건하였다. 그러므로 두 스님이 여기에 석굴을 판 것이 이 천불동의 시작이었고, 그 뒤를 이어 관원(官員)이었던 건평(建平)과 동양(東陽)이 또 석굴을 파게 되었으므로 낙준과 법량이 여기를 개산(開山)하고, 건평과 동양 두 분이 그 유업을 이은 것이다. 그 뒤로 4백년이 지나 지금(唐나라 때)에는 합계 천여개의 석굴이 있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또 펠리오가 현재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사주성토경(沙州城土鏡)에는,“영화(永和) 9년(353년)에 개창(開創)되었다.”고 하였다.그리고 당나라 때에 씌여진〈막고굴기(莫高窟記)〉에는, “색정(索靖)이 벽에다 선암(仙巖)이라고 제호(題號)를 붙였다.”
는 귀절이 있는데, 색정은 진(晋) 혜제(惠帝) 테안(太安) 말년(303)에 죽었다. 이 천불동이 처음 시작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런 기록 등으로 보아 늦어도 4세기에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는 개창자 낙준·동양이 만든 석굴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근년 돈황문물연구소(敦煌文物硏究所)의 조사에 의하면, 초창기에 만들어진 석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미 옛날에 붕괴되었거나 후세에 고쳐졌을 것이라 한다.그러므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그 양식(樣式)으로 보아 제일 오래 된 것은 북위 시대의 것이다. 제작 연대가 굴 안에 적혀져 있는데,“북위(北魏) 정광(正光: 孝明帝年號) 연간(520∼524)" “서위(西貌) 대통(大統: 文崙 年號) 4· 5년(538 · 539)"등의 것이 가장 오랜 것이다. 그러니 결국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서 이룩된 것이 현존하는 최고의 것이다.그 후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수리되었다.
5. 고서(古書)의 발견
이렇듯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거의 천 개의 석굴이 뚫려있는 이 천불동에서 대규모 고서가 1900년에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른바 돈황 고서(古書)의 발견이다. 19세기 말경에 왕원록이라는 한 도사(道士)가 이 천불동 막고굴로 왔다. 그는 호북성(湖北省) 마성현(麻城絲) 사람으로, 처음에는 숙주(肅州) 순방군(巡防軍)의 병졸이 되었으나 제대하고 도사가 되어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 그는 1900년 5월 26일에 인부를 사서 이 막고굴 북단(北端)의 제 16호 굴, 곧 지금의 장경동(藏經洞)을 수리하는 중 입구 부근의 벽 아래쪽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그 밑에 있는 모래를 치워버리니 이상한 소리를 내며 벽이 점점 더 갈라졌다. 왕도사는 귀를 벽에다 대고 두드려 보니 속이 빈 소리가 나자 그들은 그 벽을 헐었다.벽을 헐자 다음에는 조그만 문이 드러나고 그 안에는 방대한 경권(經卷)·문서(文書) ·회화(繪畵) 등으로 가득찬 작은 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년에 소개된 색다른 발견 경위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곧 왕도사가 이 막고굴에 도착한 후, 그는 양모(楊某)라는 사경생(寫經生)을 한 사람 고용했었다. 그런데 이 사경생이 일하는 장소가 우연히도 제 151 굴이었다.양은 여기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벽에 대고 유유히 담배를 피우면서 불경을 베끼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담배 연기를 등진 벽의 갈라진 틈에 다 불어 넣으면서 일을 했었다. 1899년 어느날, 여전히 담배를 피우면서 한 모금의 연기를 갈라진 틈에다 불어넣으니 연기가 안에서 쭉 빨아들이듯 들어갔다. 이상히 여겨 일어나 벽을 두드리니 속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므로 그는 매우 이상히 여겨 왕도사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이에 왕도사는 양생과 더불어 그 벽을 헐어 내니 안에는 조그마한 문이 있고 문 앞은 진흙으로 발라져 있어 그들은 진흙을 털어내고 문을 여니 작은 통로가 나타나며 사방 3미터 정도의 작은 방이 있고 그 안에 흰 베로 싼 무수한 짐 뭉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돈황 고서의 발굴 날짜가 전기한 1990년 5월 26일 설과 위에서 보인 1899년설, 또 사치류(謝稚柳)의 《돈황예술서록(敦煌藝術敍錄)》에는 1900년 4월 27일로 되어 있어, 결국 세 가지 설이 있게 된다.왕도사는 이 보고(寶古)를 발견한 후 그 중의 몇 권을 돈황에 사는 여러 지식인들에세 보여 감정을 의뢰했으나 아무도 잘 모르고, 또 현재 유행하는 여러 책들과 별다른 것이 없다고 도외시했었다. 특히 돈황현의 지사(知事) 왕종한(汪宗瀚)도 이 보고를 받고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약 3년쯤 지나 소주(蘇州)의 섭창치(葉昌熾)가 감숙성의 장학사가 되어 와서 소문을 듣고 대단한 관심을 나타내어 지사에게 조사를 의뢰하니 왕종한 지사는 이 석실(石室) 유서(遺書)의 개요(槪要)와 함께 견본으로 송나라 건덕(乾德) 6년(968)의 명(銘)이 있는 수월관음상(水月觀音像)과 사경(寫經)의 두루마리본(本)과 불경 조각 등을 보냈는데, 섭창치는 그 중 사경(寫經)이 당나라 때 것임을 알아내고 곧 감숙성 현청에서 이 많은 고서들을 운반해다가 보관해 줄 것을 건의했다.그러나 감숙성에서는 이 고서들의 포장비와 운반비가 엄두가 안 난다고 하여, 1904년 3월 왕종한 지사는 왕도사에게 전부 점검하여 그대로 봉해 두라고 명령을 내리므로 왕도사는 벽돌로 이 보고(寶庫)의 입구를 봉해버렸다. 그러나 왕도사는 이 고서의 가치를 알아내고자 약간의 경권(經卷)을 가지고 주천(酒泉)으로 가서 당시 안숙도(安肅道) 도지사인 만주 사람 정동(廷棟)에게 보였으나 정동도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어 무관심하였다.
이렇게 왕도사가 돈황 고서를 알아내고자 이리저리 다니며 감정을 의뢰하는 동안에 이 고서 발굴의 소문은 널리 퍼져갔다. 때마침 중앙아시아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각국에서는 탐험대를 다투어 보냈으며 특히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이 지방에 대한 암투가 가장 컸다. 그리하여 각국의 탐험대가 이 지방의 지리적·군사적·역사적·고고학적 조사를 위하여 몰려왔는데 가장 먼저 온 것은 러시아 탐험대였다. 1905년 10월, 러시아의 오브루체프가 도착했다. 그는 지질학자로 이 근방의 지질을 조사하러 왔다가 돈황 고서 발견의 소문을 듣고 달려와 왕도사를 만났다. 그는 가지고 온 승복(僧服)의 옷감, 선향(線香), 등잔에 쓰는 기름, 구리로 만든 식기, 특히 러시아제의 스테아린초 등의 물건 여섯 보따리와 이 돈황 고서 두 보따리를 바꾸었다. 그때 그가 가져간 고서는 사본(寫本)으로 두루마리인데 중국·몽고·티벳·산스크리트 ·터어키·중앙아시아·바라문 등의 말로 씌어진 잡다한 내용의 것이었으며 불화(佛畵) 등도 있었다 한다.
그 후 1906년부터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A.Stein)이 영국 인도총독부의 요청으로 두번째로 중앙아시아 탐험길에 나서, 1907년 3월 천불동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 도착하자 소문으로 들은 이 고서를 찾았다. 곧 왕도사를 만나 교묘한 수단으로 그를 이곳에 유인하여 7일 간에 걸쳐서 사경류(寫經類) 20상자(사본 3천권, 기타 6천권)와 회화류(繪畵類) 5상자(그림 500장, 공예품 160개) 합계 25상자를 마제은(馬締銀) 4천 매라는 적은 금액으로 사서 인도를 경유해서 런던으로 보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프랑스의 펠리오도 1906년 여름부터 중앙아시아의 탐험길에 올랐다. 그는 당시 프랑스령 인도지나, 곧 지금의 베트남의 하노이에 있는 원동박고학원(遠東博古學院) 교수로 있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명을 받고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서 1907년 12월에 돈황에 도착했다. 그도 천불동에서 고서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곧 왕도사를 매수하여 영국의 스타인이 가져간 나머지 중에서 일일이 조사를 하여 사경류(寫經類) 1500백 여 권 24상자, 회화·직물류 5상자, 합계 29상자를 헐값으로 사가니 1908년 3월 3일부터 20여일 사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물건들을 곧장 프랑스로 보내고 자기는 그 해 7월에 돈황을 떠나 동쪽 서안(西安)으로 가서 1개월 묶은 뒤 정주(鄭州)를 거쳐 10월 21일에 다시 하노이에 안착했다. 그는 1909년 5월 21일에 다시 하노이를 출발, 여름에 다시 북경에 도착했다. 그가 이번에 북경에 온 것은 파리 국민도서관을 위하여 한적(漢籍)을 사러 온 것이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자 그가 돈황에서 가져간 일부의 고서를 중국 학자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돈황 고서가 북경에도 알려지고 세계적인 문제로 토픽 뉴스가 되었다. 이리하여 북경의 중국 학자들은 속속 펠리오의 숙소로 찾아와 그 돈황 고서를 구경하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고, 동시에 중국인 학자들은 그 해 9월 4일 호텔에 모여 펠리오에 대한 환영회를 개최했다. 그때 중국 참석자 중에는 보희(寶熙), 서방(徐辯) , 참사(參事) 강한, 오인신(吳寅臣), 장보, 동강 등 주요 인사들만이 참석했으나 나진옥(羅振玉)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환영회 석상에서 펠리오는 답사를 통하여 자기는 국가를 위하여 연구차 파견되었다가 우연히 보물을 얻었을 뿐이요, 현물은 프랑스 정부에 있지만 학문은 세계 공동의 것인 만큼 등사를 희망하는 분에게는 언제든지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는 9월 11일 저녁에 북경을 떠나 러시아를 경유해서 10월 24일 파리로 돌아갔다. 그가 프랑스에 도착하자 프랑스의 각 회의, 각 단체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특히 그 해 12월 10일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아시아 협회와 지질학회 공동주최로 열린 환영회에는 무려 4천명이나 되는 청중이 모여 소르본 대학 대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펠리오의 돈황 고서 발견은 세계적 문제로 대두되어 프랑스·중국·일본 등에서는 대대적으로 돈황학(敦煌學)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학문분야가 전개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먼저 스타인이 가져간 고서는 런던의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 지하실에 방치된 채 미처 정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 돈황학 붐은 좀 늦게 일어났다. 이렇게 세계적인 화제로 돈황 보고서가 등장하자 청국 정부에서는 아무리 국제 정세가 긴박해도 그 값진 문화재를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 하여 1910년 이성탁(李盛鐸) ·유정침(劉廷琛) 등 고관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돈황에 남아 있는 고서를 모조리 북경으로 가져오게 했다. 그 수량은 5∼6천 권은 되었으나 대개가 불경(佛經)뿐 알맹이는 거의 영국과 프랑스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실어오는 도중 좋은 것은 전부 빼돌려졌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도중에 없어진 고서는 북경으로 옮기자고 건의했던 이성탁 ·유정첨 등의 짓이었다.뒤에 이 사실을 안 학부시랑(學部侍郎)으로 만주인(滿洲人)인 보희(寶熙)는 곧 황제에게 상주하려 했으나 때마침 신해혁명이 일어나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일본은 1912년 2월에 오오다니(大谷光瑞) 탐험대의 요시카와(吉川小一郎)와 다치바나가 돈황에 와서 중국정부가 가져가고 왕도사가 숨겨두었던 나머지 고서 가운데 오백여 권의 사본을 가져갔다. 그 후 또 1914년에는 영국의 스타인이 다시 왕도사로부터 사경(寫經) 570여 권 5상자와 기타 자수(刺編) ·직포(織布) ·회화류 등을 싼 값으로 사갔다. 또 그 사이 1909∼1910년과 1914∼1915년 두 번이나 러시아 고고학자 올덴부르크가 벽화 10여 장을 뜯어갔고, 또 1924년에는 미국 예일 대학으로부터 조사대로 파견된 워어너(L.Warner)박사 일행이 또 벽화 20여 매와 불상(佛豫) 몇 개를 가져갔다 한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현재도 스타인 ·펠리오 ·오오다니 세 사람을 중국 문화재 3대 도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11세기에 서하(西夏)의 침략을 받아 비장되었던 천불동의 막중한 문화재는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이 보물들은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송대에 이르는 유교 ·도교 ·불교의 각 경전, 각종의 필사본 문서, 서역 ·인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의 문자, 기타 불화·판화·탁본·자수물·염직포 등 기왕에 없어졌던 많은 문화재는 실로 값으로 치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이 돈황 천불동 석굴에서 나온 문화재, 특히 고문서 중 펠리오가 가져간 것들이 가치가 특히 컸다. 그는 한문에 능한 고고학자이므로 직접 굴 속에 들어 박혀 일일이 읽어가며 가장 가치가 있는 것만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가져간 그 문헌 중에 혜초가 지은《왕오천축국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펠리오는 1908년 3월에 이것을 천불등에서 가져간 뒤 프랑스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라고 만 밝혔을 뿐 그 동안의 경과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왕오천축국전 본문(해석)
(1) 쿠시나가라
한 달 뒤에 구시나국(지금의 Kasia 로 부처가 사망한 곳)에 도착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이다. 성은 황폐해져 사람이라곤 살지 않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 선사(禪師)가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매년 8월 8일이 되면 남자 스님들과 여승 ·도인(道人)과 속인(俗人)들이 모두 그 곳에 모여 대대적으로 불공을 드린다. 그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보고 이 날을 당하여 불교를 믿으려고 마음먹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 탑 서쪽에 한 강이 있는데 이라바티수(淨羅努底水: Airavati)라 한다. 남쪽으로 2천리 밖을 흘러 갠지즈 강으로 들어간다. 그 탑이 있는 사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매우 황량한 숲만이 우거져 있다. 그러므로 그 곳에 예배를 보러 가는 사람은 물소와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다. 이 탑의 충남쪽 30리에 절이 하나 있다. 이름이 사반단사(沙般壇寺)이다. 거기에는 30여 채의 집이 있고 그 중 세 집이나 다섯 집에서 항상 그 탑을 청소하는 선사(禪師)를 공양한다. 지금도 그 탑에서 공양하고 있다. (아래는 없어졌음)
(2) 파라나시
이 절 안에는 하나의 금동상과 5백의 독각상(獨覺像)이 있다. 이 마가다(Magadha ; 고대 인도의 강대국)나라에는 오래 전에 왕이 한 분 있었는데 이름이 실라디탸였고 그가 이 불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겸하여 금동(金銅)으로 된 법륜(法輪)을 만들었는데 그 바퀴의 원주(圓周)가 30여보(步)나 된다. 이 성은 갠지스 강을 굽어보는 북안(北岸)에 위치하고 있다. 곧 이 녹야원(鹿野苑 : Mrgadva)·구시나(Kusinagara)·사성(舍城 : Raja-grha)·마하 보디(Mahabodhi)의 네 영탑도 마가다국 경계 안에 있다. 하루는 파라나시국(Varanasi ; 지금의 Benares로 힌두교의 성지가 되었다)에 도착하다. 이 나라도 황폐되었고 왕도 없다. (아래는 없어졌음) 저 다섯 명(부처와 함께 수행한 다섯 사람)이 함께 부처의 설교를 들었으므로 그들의 소상(壟像)이 탑 안에 있다. (아래는 없어졌음) 위에 사자상이 있는 저 돌기둥은 다섯 아름이나 되며, 거기에 새긴 무늬가 매우 아름다웠다. (아래는 없어졌음) 탑을 세울 때 이 돌기둥도 만들었다. 이 절의 이름을 달마카크라(Dharmachakra)라 한다. (아래는없어졌음) 이교도가 옷을 입지 않고 몸에는 재로 칠하고 대천(大天)을 섬긴다. 이 나라(파라나시국)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마하보디사에 도착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내 본래의 소원에 맞아 매우 기쁘므로 내 어리석은 뜻을 대략 서술하여 오언시(五言時) 를 짓는다 보리수가 멀다고 근심하지 않는데어찌 녹야원이 멀리요다만 매달린 것 같은 길이 험함을 걱정할 뿐이미 바람이 휘몰아침도 생각하지 않도다.여덟 탑은 참으로 보기 어려우니 어지러이 오랜 세월에 타버렸다.어떻게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오늘 아침에 눈으로 본다.
(3) 중천축국
이 파라나시국으로부터 보름쯤 걸려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왕이 사는 성(城)에 도착하다. 이름이 카냐굽자(Kanyakubja)다. 이 중천축국의 경계는 매우 넓어 백성들도 많고 번잡하다. 왕은 9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졌고 기타 대 수령(大首領)들도 각각 3백이나 2백 마리씩의 코끼리를 가졌다. 그 나라 왕은 항상 스스로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싸움을 하는데 이웃 나라와 교전하면 이 중천축국의 왕이 늘 이긴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들은 스스로 코끼리가 적고 군사가 적음을 알아 곧 강화를 청하고 매년 공물(貢物)을 바치고 서로 대진하여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의복 ·언어 ·풍속 ·법률 등은 다섯 천축국이 서로 비슷하다. 다만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시골 백성들의 언어가 좀 다르다. 벼슬아치의 종류는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다. 이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목에 칼을 씌우고 매를 때리는 형벌과 감옥이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리고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 위로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매를 날리며 개를 몰아 사냥하는 일을 보지 못하겠다. 도로에 도적이 많다. 물건을 빼앗고는 곧 놓아주며 다치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다치는 수도 있다.
토지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이 없다. 음식물로는 쌀 양식과 떡 ·보리가루 ·버터 ·우유 등이 있는데 간장은 없고 소금이 있다. 모두 흙으로 만든 남비로 밥을 지어 먹고 쇠솥 등은 없다. 백성은 별도의 부역과 세금을 감당하지 않고 다만 곡식 다섯 섬만 왕에게 바치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운반해 가고 논 임자가 보내지는 않는다. 그 나라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고 부자는 적다. 왕과 벼슬아치의 집안 및 부유한 사랑들은 전포(龍布:모직물로 된 천의 일종)로 만든 옷 한 벌을 입고, 기타 사람들은 아래옷 한 가지만 입으며, 가난한 사람은 그나마도 반 조각을 걸친다. 여자들도 그렇다.
그 나라 왕이 관청에 나와 앉으면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와서 왕을 사면으로 둘러 싸고 앉는다. 그런 뒤에 각기 도리(道理)를 논하는데 소송이 분분하여 매우 시끄러워도 왕은 듣고만 있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천천히 판정하기를 "네가 옳고, 네가 틀렸다." 하면 모든 백성들은 왕의 이 한 마디 말을 결정적인 것으로 알고 다시는 거론하지 않는다. 그 나라 왕과 수령들은 불교를 매우 공경하여 믿는다.
만약 사승(師僧)을 대하게 되면 왕과 수령들은 땅바닥에 앉으며 의자에 앉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또 왕과 수령들은 외출하여 다른 곳에 갈 때에도 자기의 의자를 가지고 따라오게 하여 그 곳에 도착하면 곧 자기의 의자에 앉고 남의 의자에 앉지 않는다. 절과 왕의 궁전은 모두 3층으로 짓는다. 그리하여 제 1층은 창고로 쓰고, 위의 두 층에 사람이 거주한다. 여러 수령의 집들은 모두가 초가(草家)로 중국 사람들의 집과 같이 빗물이 추녀로 쏟아지도록 지어진 것이며 또 단층이다.
그 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으로는 전포·코끼리·말 등이며 그 땅에서 금과 은은 생산되지 않아 외국으로부터 들여온다. 또 낙타·노새·당나귀 ·돼지 등의 가축도 기르지 않는다. 그 곳의 소는 모두 흰데 일만 마리 중에 혹 한 마리 정도가 붉거나 검은 것이 있다. 양과 말은 아주 적어 왕만이 2∼3백 마리의 양과 6∼70필의 말을 소유하고 있다. 이 밖에 수령과 백성들은 모두 다른 가축은 기르지 않고 소만 기른다. 우유와 버터를 짜 먹기 때문이다. 그 곳 사람들은 착하여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 가게에서 고기 파는 곳을 볼 수 없다. 이 중천축국에서도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하여진다. 또 이 중천축국 경계 안에 4개의 탑이 있는데 갠지즈 강 북안에 그 중 3개의 큰 탑이 있다.
첫째 탑은 사위국( Savasti)의 기원정사 안에 있는데 절도 있고 스님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 둘째 것은 비야리성의 암라원 안에 있다. 탑은 남아 있으나 절은 황폐되고 스님은 없다. 셋째 것은 가비야라국에 있는데 곧 이 곳은 부처가 태어난 성(城)이다. 무우수(無憂樹)가 있다. 그 성은 이미 황폐되어 탑은 있으나 스님은 없고 백성도 없다. 탐은 이 성의 번 북쪽 끝에 있는데 숲이 거칠게 우거져 길에 도적이 많다. 따라서 그 곳에 예배 보러가기는 매우 어렵고 힘들다. 네째 것은 삼도보계탑(三道寶階塔)이라고 한다. 중천측국(中天竺國)의 왕이 사는 성 서쪽 7일 동안 걸어갈 거리에 있는데 두 갠지즈 강 지류 사이에 있다. 이 곳은 부처님이 도리천으로부터 삼도보계 (三道寶階)를 밟고 내려와 염부제(閻浮提)로 내려온 곳이다. 탑 왼쪽은 금으로, 오른쪽은 은으로 장식하고 가운데는 유리를 박았다. 부처님은 가운데 길에 범왕(梵王) 왼쪽 길에, 제석(帝釋)은 오른쪽 계단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내려온 것이 바로 이 곳으로 탑을 세웠다. 절도 있고 스님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
(4) 남천축국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부터 남쪽으로 3개월 남짓 걸어가면 남천축국(南天竺國)의 왕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그 나라 왕은 8백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 영토가 매우 넓어 남으로는 남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서해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북천축국·서천축국·동천축국의 경계에 접한다. 의복·음식·풍속은 중천축국과 비슷하나 언어가 좀 다르다. 토지는 중천축국보다 덥고 그 곳에서 나는 물건으로 전포·코끼리·물소·황소가 있다. 양도 조금은 있으나 낙타·노새·당나귀 등은 없다. 벼 심은 논은 있으나 기장·조 등은 없다. 그리고 솜과 비단류는 천축국 어디에도 없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 (首領)·백성들은 불교를 매우 공경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모두 행하여 진다.
그 곳 산속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야차신(夜叉神)을 시켜 지은 것이고,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산을 뚫어 기둥을 세우고 3층으로 누각을 세웠는데 사방이 3백여 보(步)나 된다. 용수(龍樹)가 살아 있을 때는 그 절에 3천 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있었고, 혼자 공양하는 쌀이 15섬이나 되며 매일 3천 명의 스님들이 먹어도 쌀이 모자라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절도 황폐되어 중도 없다. 용수는 나이가 7백 세나 되도록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 때 나는 남천 축국의 여행길에 있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오언시(五言時)로 읊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나는 편지를 봉하여 구름편에 보내려 하나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돌아보지도 않네.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누가 내 고향 계림(鷄林)으로 나를 위하여 소식을 전할까?
(5) 서천축국
또 남천축국으로부터 북쪽으로 두 달을 가면 서천축국의 왕이 사는 성에 도착한다. 이 서천축국의 왕도 5∼6백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전포와 은 ·코끼리 ·말·양·소 등이다. 그리고 보리 ·밀 ·콩 종류 등도 많이 생산되며 벼는 아주 적다. 음식은 대게 떡 ·보리가루 ·우유 ·버터 등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에는 은전(銀錢)과 전포를 사용한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이나 백성들도 불교를 매우 숭상한다. 절도 많고 중도 많은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땅은 매우 넓으며 서쪽으로 서해에 이른다. 그 나라 사람은 대체로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이 다른 네 천축국이 이 나라만 같지 못한 점이다. 또 목에 칼을 씌우는 형벌이나 곤장을 때리는 형벌이나 감옥에 가두는 일과 사형에 처하는 형벌 등이 없다. 지금은 대식국(Arabia)의 침략을 받아 나라의 태반이 파괴되었다. 또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외출할 때 야식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 도착하는 곳에서 곧 얻어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령들은 외출할 때 스스로 양식을 가지고 가서 먹고 백성들이 바치는 음식을 먹지 아니한다.
(6) 북천축국
또 이 서천축국으로부터 북쪽으로 3개월을 가서 북천축국에 도착한다. 이름이 자란다라라는 나라다. 왕은 3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산을 의지하여 성을 만들어 거주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점점 산이 많다. 나라가 협소하고 군대가 많지 않아 항상 중천축국 및 가시미라국(逃葉漏羅國)에 자주 먹히므로 산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품속과 의복과 언어가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다. 땅이 중천축국 등과 비교하여 좀 추우나 서리나 눈은 없고 바람이 좀 차가울 뿐이다. 그 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는 코끼리 ·전포 ·벼 ·보리 등이고 당나귀와 노새는 적다. 그 나라 왕은 말 100필을 가졌고, 수령은 4∼5마리를 가졌으며, 백성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나라 서부지방은 평평한 하천지방이고 동쪽으로는 히말라야산에 가깝다. 그 나라 안에는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또 한 달이 걸려 히말라야산을 지나니 동쪽에 한 작은 나라가 있다. 이름이 수바르나고트라(Suvarnagotra)다. 티베트의 통치를 받고 있다. 의복은 북천축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다르다. 땅이 매우 춥다. 또 이 자란다라국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한 달이 걸려 탁샬국(Takshar ; 지금의 편잡 지방)에 도착하다. 언어가 좀 다르지만 대체로는 비슷하다. 의복·풍속·생산물 ·절기(節期) ·기후가 북천축국과 비슷하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모두 행하여지고 있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 ·백성들이 모두 불교를 매우 숭상한다.
또 이 탁샬국으로부터 서쪽으로 한 달을 가니 신두고라국(新頭故羅國)에 도착한다. 의복·풍속· 절기·기후가 북천축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좀 다르다. 이 나라 사람들은 우유와 버터를 짜서 먹는다. 왕과 백성들은 불교를 매우 숭상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다. 곧 〈순정이론(順正理論)〉을 만들어낸 중현(衆賢 : Samghabhadra) 대사가 바로 이 나라 사람이다. 이 나라에도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하여지고 있다. 그리나 지금은 대식국(Arabia)에게 침입을 당하여 나라의 태반이 파괴되었다. 이 나라를 비롯하여 다섯 천축국의 사람들은 대체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 다섯 천축국을 편력할 때 취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비록 마셨더라도 기운을 차릴 뿐 노래 부르고 춤추며 떠들고 방탕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또 북천축국(자란다라)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이름이 다마사바나(Tamasavana)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여기에 와서 설법을 하여 사람과 하늘을 널리 제도(濟度)하신 곳이다. 이 절의 동쪽 시냇가 곁에 하나의 탑이 있는데 부처님의 머리털과 손톱을 이 탑 안에 보관하고 있다. 여기에는 3백여 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절에는 부처님의 치아와 뼈와 사리 등을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7·8개 장소에 절이 있는데 각각 5∼6백 명씩의 스님들이 안주(安住)하며 법도 닦기를 매우 좋아한다. 또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도 불교를 매우 공경하여 믿는다. 또 산 속에 한 절이 있는데 이름이 나가라다나(Nagaradhana)다. 거기에 한 중국인 스님이 있었는데 이 절에서 죽었다. 거기에 있는 고승의 말에 의하면 그 중국인 스님은 중천축국에서 왔고 삼장성교(三藏聖敎)에 밝고 정통하였으며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곧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매우 슬퍼져 문득 네 운자(韻字)를 써서 그의 저승길을 슬퍼했다. 고향 집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객지에서 보수(寶樹)는 꺾였구나.신성한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이 이미 재가 되었구나.그대의 소원 못 이룸이 못내 섧구나.누가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알 것인가 ?부질없이 흰 구름만 돌아가네.
(7) 가라
또 여기(자란다라)에서 북쪽으로 15일을 가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가라국(迦羅國)이다. 이 가미라국 (迦彌羅國)역시 북천축국에 속하나 이 나라는 좀 크다. 왕은 3백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산 속에 산다. 도로가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아니한다. 백성은 매우 많으나 가난한 자가 많고 부자는 적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과 여러 부자들은 의복이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다. 이 외의 백성들은 모두 담요로 몸의 추한 곳을 가렸을 뿐이다. 그 땅에서 생산되는 것으로는 구리 ·철 ·전포 ·담요 ·소 ·양이 있고 코끼리도 있으나 말은 적고 멥쌀과 포도도 조금 생산된다. 땅이 매우 추운 것이 이미 앞에서 말한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가을에는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내린다. 여름에는 장마비가 많이 내리고 온갖 풀들이 푸른 잎으로 아로새겨지다가 겨울이 되면 모두 말라버린다. 냇물이 있는 산골짜기는 좁고 작다. 남북으로 5일 동안 가서 다시 동서로 하루 동안 걸어갈 거리에서 그 나라의 땅은 다하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인다. 집들은 모두 널빤지로 지붕을 하였고 짚이나 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 ·백성들은 불교를 매우 공양한다.
나라 안에 한 용의 연못이 있어 그 연못의 용왕(龍王)은 매일 천 명의 나한승(羅漢僧)을 공양한다. 비록 누구나 그 나한승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본 자는 없으나 제일(齋日)이 지나면 떡과 밥이 물 속으로부터 어지러이 위로 떠올라온다. 이로 보아 지금까지 공양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왕과 대수령은 외출할 때 코끼리를 타고 작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걸어 다닌다. 그 나라 안에는 절도 많고 스님도 많은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하고 있다.
다섯 천축국의 법에는 위로 국왕과 왕비와 왕자로부터 아래로는 수령과 그들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그 능력에 따라 각자 절을 짓는데 따로따로 짓고 함께 짓는 법이 없다. 그들은 말하기를 '각자의 공덕(功德)인데 어째서 반드시 함께 지을 필요가 있느냐.' 한다. 이는 그럴 듯한 말이다. 나머지 왕자들도 또한 그러하다. 대개 절을 지어 공양하는 것은 곧 마을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요,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헛되게 절만 지어 놓고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어주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 외에 그 나라 법에는 왕과 왕후도 각각 따로따로 마을의 백성을 가지고 있고 왕자나 수령도 각기 백성을 소유하고 있다. 보시는 자유이고 왕에게 허락을 받지 아니한다. 절을 짓는 것도 그러하다. 반드시 지으려면 곧 짓는 것이고 왕에게 묻지도 않고 왕도 감히 막지 못한다.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만약 넉넉한 백성이면서 마을에 보시를 못했다면 함께 절을 지어 스스로 경영하여 얻는 물건으로 삼보(三寶)에게 공양하기도 한다. 이 다섯 천축국은 사람을 팔지 않고 노비도 없으며, 요컨대 백성과 마을에 보시하는 것뿐이다.
(8) 티베트
또 가시미라국 동북쪽으로 산을 사이에 두고 15일 동안 가면 거기가 대발률국(大勃律國)·양동국 (楊同國)·사과자국(지금의 네팔)이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티베트에 예속되어 있는데 의복 ·언어 · 풍속이 각각 다르다. 그들은 가죽옷 ·모직옷 ·가죽신 ·바지 등을 입고 있다. 땅이 좁고 산천이 매우 험하다.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불교를 숭배한다. 그러나 동 티베트에는 도무지 절이라곤 없고 불교도 알지 못한다. 그 땅은 호족(胡族)이 사는 곳으로 믿어진다. 이 동토번국 사람들은 순전히 얼음의 산, 눈에 덮인 산, 눈에 덮인 강가나 계곡에서 전포로 만든 천을 치고 산다. 성곽(城廓)이나 집이 없으며 그 거처하는 장소가 돌궐과 비슷하다.
물과 초원을 따라 거처하고 왕은 비록 한 곳에서 사나 성이 없고 그도 전포 천막을 치고 살며 일을 본다.그 나라에서는 양·말·야크(티베트에 사는 소)·담요·베 등이 생산된다. 옷으로는 털옷·베옷· 가죽옷을 입는데 여자들도 그렇다. 이 나라는 매우 추운 것이 기타의 나라와 같지 않다. 각 가정에서 는 항상 보리가루를 먹고 떡과 밥을 먹는 일이 드물다. 국왕이나 백성들은 모두 불교을 알지 못하고 절도 없다. 그 나라 사람은 모두 땅을 파서 구들을 놓고 자므로 침대가 없다. 사람들은 매우 까맣고, 흰 사람은 드물다. 언어가 여러 나라와 같지 않고 대개 이를 잡아 먹기를 좋아한다. 털옷을 입으므로 이가 많기 때문이리라. 이만 보면 잡아 입에 털어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9) 소발율
또 가시미라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사이에 두고 7일을 가면 소발률국(小勃律國)이 있다. 이 나라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 의복 ·풍속 ·음식 ·언어가 대발률국(大勃律國)과 비슷하다. 전포옷과 가죽신을 착용하고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머리에는 털수건 한 장을 둘렀다. 여자는 머리를 기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는 적다. 산천이 협소하여 논밭이 많지 못하다. 그 곳 산은 메말라 원래부터 나무나 온갖 풀이 없다. 거기 대발률국은 원래 소발률국의 왕이 살던 곳인데 티베트가 침략하고 도망하여 소발률국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수령이나 백성들은 거기 대발률국에 그대로 있고 소발률국으로 따라오지 않았다.
(10) 간다라
또 가시미라국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산을 사이에 두고 한 달을 가면 간다라(Gandhara)에 도착한다. 이 나라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족이다. 그리고 그 곳의 토착인은 오랑캐 족이고 바라문(姿羅門)의 종족도 있다. 이 나라는 전에 카피스(Kapis)왕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런데 돌궐(突厥)의 왕 아야(Barhategin)가 한 부락의 병마를 거느리고 카피스 왕에게 투항하였다가 후에 돌궐족의 군대가 강해지자 도리어 카피스왕을 죽이고 스스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간다라국 국내에서도 돌궐왕이 패왕이 되었고, 이 나라 이북에 있는 나라도 돌궐의 패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백성들은 모두 산속에 사는데 그 산들이 모두 타서 풀도 나무도 없다. 의복 ·풍속 ·언어 ·절기가 다른 나라와 다르다. 옷은 가죽 ·털 ·전포로 된 웃옷과 가죽신 ·바지를 입는다. 토지는 보리 · 밀을 재배하기에 적당하고,기장·조 ·벼는 전혀 없다. 사람들은 대개가 보리가루와 떡을 먹는다. 다만 가시미라국· 대발률국·소발률국·양동국 등을 제외하고, 곧 이 간다라국을 비롯하여 다섯 천축국과 곤륜국 등의 나라에는 모두 포도가 없고 고구마만 있다. 이 돌궐왕은 코끼리 다섯 마리를 가지고 있고 양과 말은 헤아릴 수가 없으며, 낙타 ·노새 ·당나귀 등도 매우 많이 소유하고 있다.
중국 땅인데도 오랑캐가 흥성하여 (원문의 다섯 글자 빠졌음) 돌아 지나가지 못한다. 남쪽으로 향하면 도로가 험악하며 겁탈하는 도적이 많다. 이 북쪽으로 가면 악업(惡業)을 하는 자가 많아 시장과 가게에는 짐승을 도살하여 고기를 파는 곳이 많다.이 나라 왕은 비록 돌궐족이나 불교를 매우 공경한다. 왕을 비롯하여 왕비 ·왕자·수령들은 각각 절을 만들어 삼보를 공양한다. 이 나라 왕은 매년 두 번씩 무차대재(無遮大齋)를 연다. 그리하여 몸에 지닌 필요한 물건과 아내나 코끼리·말들까지도 모두 시주(施主)한다. 그러나 아내와 코끼리는 스님들로 하여금 값을 매기게 하고 그 값만큼 왕은 대가(代價)를 내어놓는다. 이 외에 낙타·말·금· 은·옷가지 ·가구(家具) 등은 스님들로 하여금 직접 매각처분하여 이롭게 쓰게 한다. 이것이 이 나라 왕이 북쪽 돌궐족과 같지 않은 점이다. 아녀자들도 그리하여 각각 절을 짓고 재를 올리며 시주를 한다.
이 성(城)은 인더스강을 굽어보는 북안(北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으로부터 서쪽으로 3일 동안 가면 큰 절이 하나 있다. 곧 천친보살(天親蓄龍)과 무착보살(無着蓄龍)이 살던 절이다. 절의 이름은 카니시카朧滯歌-述臘色逃: Kaniska)다. 이 절에는 하나의 큰 탑이 있는데 항상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절과 탑은 옛날에 카니시카왕(葛諾歌王)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왕의 이름을 따라 절의 이름도 지어진 것이다. 또 이 성 동남쪽에 마을이 있는데 곧 부처가 과거에 시비카왕(尸見逃王 : Sivika)이 되어 비둘기를 놓아 보냈던 곳이다. 절이 있고 스님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부처가 과거에 머리와 눈을 던져 다섯 야차(夜叉)에게 먹였다는 곳도 이 나라 안에 있다. 곧 이 성의 동남쪽에 있다. 그 곳에도 절이 있고 스님도 있어 지금도 공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라에는 대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11) 우디아나
또 이 간다라국으로 정북향의 산으로 들어가기 3일을 하면 우디아나(Udyana)국에 도착한다. 그 곳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우디아나(蠻地引那)라고 부른다. 이 나라 왕도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여 공양하고 조그만 몫을 자기 집에 남겨두어 의식(衣食)에 사용한다. 또 재(齋)를 올려 공양하는데 매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은데 스님의 수가 속인(俗人)의 수보다 약간 많다. 오로지 대승불교만 행하여진다. 의복·음식· 풍속이 간다라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다르다. 그 땅에는 낙타·노새·양·말·전포 등이 풍족하다. 기후가 매우 춥다
(12) 구위
또 우디아나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산으로 들어가 15일을 가면 구위국(拘衛國)에 도착한다. 그 곳 사람들은 스스로 사마라자국(SamaRaja)이라고 한다. 이 나라 왕도 삼보를 공경하여 믿는다. 절도 있고 스님들도 있다. 의복과 언어가 우디아나국과 비슷하다. 전포로 만든 웃옷과 바지 등을 입는다. 양·말 등도 있다.
(13) 람파카
또 이 간다라국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산으로 들어가 7일만에 람파카국(Lampaka)에 도착한다. 이 나라에는 왕이 없고 대수령(大首領)이 있는데 간다라국의 통치하에 있다. 의복과 언어가 간다라국과 비슷하다. 절도 있고 스님들도 있는데 삼보를 공경하여 믿고 대승불법이 행하여진다.
(14) 카피스
또 이 람파카국으로부터 서쪽 산속으로 8일 동안을 가면 카피스국(Kapis)에 도착한다. 이 나라도 간다라 왕의 통치하에 있는데 이 나라 왕은 여름에는 카피스로 와서 서늘함을 따라 살고, 겨울에는 간다라로가서 따뜻함을 따라 산다. 그 곳 간다라는 눈이 안 오므로 따뜻하고 춥지 않다. 그러나 카피스국은 겨울에는 눈이 쌓인다. 이는 춥기 때문이다. 이 나라 토착인은 오랑캐족(胡族)이고 왕과 군대는 돌궐족(突厥族)이다. 의복 ·언어 ·음식이 토하라 (吐火羅國 : Tuhkhara) 국과 대동소이하다. 남자·여자 할 것 없이 모두 전포나 베로써 만든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남녀 의복의 차별이 없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나 여자들은 머리를 기르고 있다. 이 나라에는 낙타·노새 ·양·말·당나귀·소·전포·포도·보리·밀·울금향(蠻金香) 등이 생산된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삼보를 공경하여 믿는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다. 백성들 집에서는 각각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 다. 그 곳 큰 성안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이름이 사히스(Sahis)이다, 그 절 안에는 부처의 머리카락 ·뼈 ·사리 등이 보관되어 있다. 왕을비롯하여 벼슬아치·백성들이 매일 공양한다. 이 나라에는 소승 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그 곳 주민은 산속에 살고 있으나 산마루에는 초목이 없어 마치 그 산이 불에 탄 것 같다.
(15) 자불리스탄
이 카피스국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면 자불리스탄국(Zabulistan)에 도착한다. 그 곳 사람들은 스스로 부르기를 자불리스탄이라고 부른다. 그 곳 토착인은 오랑캐족이고 왕과 군대는 돌궐족이다. 그 곳 왕은 곧 카피스왕의 조카다. 스스로 한 부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나라에 와서 살면서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도 않으며 그의 숙부에게까지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 나라 왕과 수령은 비록 돌궐족이나 삼보를 매우 공경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한 위대한 돌궐족 수령으로 이름이 산타칸(Satarkhan)이란 자가 매년 한 번씩 금과 은을 무수히 사용하여 재(齋)를 올리는데 그 곳 왕보다도 더하다. 의복·풍속·생산물이 카피스 왕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각기 다르다.
(16) 바미얀
이 자불리스탄국(謝麗國)으로부터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바미얀(犯引國 : Bamiyan)에 도착한다. 이 나라 왕은 오랑캐족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고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여러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 한다. 의복은 전포로 만든 저고리와 가죽·담요 등으로 만든 저고리 등을 입고 있다. 그 땅에는 눈이 오고 매우 춥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부분 산을 의지하고 산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이나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와 자불리스탄국 등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있다. 풍속은 대체로 카피스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도 많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17) 토하라
이 자불리스탄국(謝麗國)으로부터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바미얀(犯引國 : Bamiyan)에 도착한다. 이 나라 왕은 오랑캐족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고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여러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 한다. 의복은 전포로 만든 저고리와 가죽·담요 등으로 만든 저고리 등을 입고 있다. 그 땅에는 눈이 오고 매우 춥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부분 산을 의지하고 산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이나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와 자불리스탄국 등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있다. 풍속은 대체로 카피스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도 많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18) 페르시아
이 자불리스탄국(謝麗國)으로부터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바미얀(犯引國 : Bamiyan)에 도착한다. 이 나라 왕은 오랑캐족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지 않고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여러 나라가 감히 침범하지 못 한다. 의복은 전포로 만든 저고리와 가죽·담요 등으로 만든 저고리 등을 입고 있다. 그 땅에는 눈이 오고 매우 춥다. 그래서 주민들은 대부분 산을 의지하고 산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이나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한다.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와 자불리스탄국 등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있다. 풍속은 대체로 카피스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도 많다. 그러나 그 나라의 언어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19) 대식국
이 페르시아국으로부터 북쪽으로 10일간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대식국(아라비아)에 도착한다. 그 나라 왕은 본국에 살지 않고 소불림국(小拂臨國 ; 지금의 시리아)에 살고 있다. 이는 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 나라는 다시 산으로 된 섬에 가서 사는데 살 만한 곳이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곳을 버리고 그 곳으로 간 것이다. 이 나라에는 낙타·노새·양·말과 전포와 털로 된 양탄자 등이 생산되는데 보물도 출토된다. 의복은 가는 실로 짠 전포로 넓은 저고리를 입는데, 그 저고리 위에 또 하나의 전포 조각으로 깃을 붙여 제쳐서 그것을 웃옷으로 삼는다. 왕과 백성들의 옷이 한 가지 종류로 구별이 없으며 여자들도 넓은 저고리를 입는다. 남자들은 머리를 깎았으나 수염은 남겨두었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음식을 먹는데도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공동으로 한 그릇에서 먹는데 손에 젓갈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보기 싫다. 그러나 그들은 손으로 살생을 해서 먹어야 무한한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 나라 사람은 살생을 좋아하고 하느님을 믿으나 불교를 알지 못한다. 그 나라 법에는 무릎을 끓고 절하는 법이 없다.
(20) 동로마제국
또 소불림국(小佛臨國) 서북쪽에 대불림국(大佛臨國 ; 동로마 제국)이 있다. 이 나라 왕은 군사가 강하고 많아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대식국이 여러 차례 정벌하려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돌궐족도 침범해 보았으나 이기지를 못했다. 그 나라에는 보물이 많고 낙타·노새·양· 말·전포 등의 물건이 풍족하다. 의복은 페르시아나 대식국과 비슷하며 언어는 각기 다르다.
(21) 중앙아시아
또 이 대식국 동쪽에는 오랑캐 나라(胡國)가 있는데 안국(安國).조국(曺國)·사국(史國)·석라국 ·미국(米國)·강국(康國) 등이 그것이다. 그 각 나라에는 비록 왕이 있으나 모두 대식국의 통치하에 있다. 나라가 협소하고 군사가 많지 못하여 스스로 보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낙타·노새 ·양·말·전포 등이 생산된다. 의복은 전포로 만든 저고리 ·바지 ·등과 가죽옷을 입고 언어는 여러 나라가 각기 다르다. 또 이 여섯 나라는 모두 조로아스터교를 섬기며 불교를 알지 못한다. 다만 강국(康國)에만 하나의 절과 한 사람의 스님이 있으나 또한 불법을 해득하여 공경할 줄을 모른다. 이들 오랑캐나라에서는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횐 털모자 쓰기를 좋아한다. 풍속은 매우 고약하여 혼인을 서로 뒤섞여 하여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폐르시아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또 토하라국(吐火羅國)을 비롯하여 카스피국·바미얀국(犯引國)·자불리스탄국(謝麗國)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거나 다섯 명이거나 세 명이거나 두명이거나 함께 하나의 아내를 맞이한다. 그리고 각기 하나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계(家係)가 파괴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2) 페르가나
또 강국(康國)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곧 페르가나국(Ferghanah)이다. 그 곳에는 두 왕이 있다. 아무다리야(Amu Darya)라는 큰 강이 복판을 뚫고 서쪽으로 흐르는데 남쪽에 한 왕이 있어 대식국에 예속되어 있고, 강북쪽에도 한 왕이 있어 돌궐의 통치를 받고 있다. 그 나라에서도 낙타·노새·양·말·전포 등이 생산된다. 의복은 가죽옷과 전포옷을 입고 음식은 대개 떡과 보리가루를 먹는다. 언어는 각기 달라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불교를 알지 못하여 절도 없고 스님도 없다.
(23) 코탈
또 이 페르가나국으로부터 동쪽에 한 나라가 있는데 코탈국(Khothal)이라 한다. 이 나라 왕은 원래 돌궐족이나 그 땅의 백성의 반은 오랑캐족이고 반은 돌궐족이다. 그 땅에서는 낙타·노새·양·말·소· 당나귀·포도·전포·담요 등이 생산된다. 의복은 전포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언어는 반은 토하라어이고 반은 돌궐어이며 또 반은 그 나라 본토 말을 쓰고 있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이나 백성들은 삼보를 매우 숭상한다.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소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는 대식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다른 나라들이 비록 이 나라를 독립국이라고는 말하나 중국의 1개 큰 주(州)와 비슷하다. 이 나라의 남자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24) 돌궐
또 이 오랑캐 나라로부터 북쪽으로 가면 북해(北海)에 이르고 서쪽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며 동쪽으로 가면 중국에 이르는데, 모두 돌궐족이 사는 경계다. 이들 돌궐족은 불법(佛法)을 몰라 절도 없고 스님도 없다. 의복은 가죽옷과 전포 저고리를 입는다. 그리고 고기를 먹는다. 성곽(城廓)에 거처하지 않고 전포로 천막을 쳐서 집으로 사용한다. 거처를 마음대로 하여 물가와 초원을 따라 이동하며 다닌다. 남자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언어는 여러 나라와 같지 않고, 그 나라 사람은 살생을 좋아하고 선악을 모른다. 그 땅에는 낙타·노새·양·말 등이 풍족하다.
(25) 와칸
또 토하라국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와칸(胡蜜 : Wakhan)의 왕이 사는 성에 도착한다. 마침 토하라국에 있을때 서역으로 들어가는 중국 사신을 만났다. 그래서 넉 자의 운자(韻字)를 써서 오언시를 지었다. 그대는 서역이 먼 것을 한탄하나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이 먼 것을 한하노라.길은 거칠고 굉장한 눈은 산마루에 쌓였는데험한 골짜기에는 도적떼도 많도다.새는 날아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기를 어려워 하도다.평생에 눈물 흘리는 일이 없었는데오늘만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겨울날 토하라(吐火羅)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감회를 오언시로 서술했다.차가운 눈은 얼음과 겹쳐 있는데찬 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큰 바다는 얼어 편편한 단(壇)이요.강물은 낭떠러지를 능별하며 깎아 먹누나.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어지고우물엔 서린 뱀같이 얼음이 엉키어 있도다.불을 가지고 땅끝에 올라 노래를 부르니어떻게 파미르 고원을 넘어갈 것인가? 이 와칸 왕은 군사가 적고 약하여 스스로 보호할 수가 없기 때문에 대식국의 통치를 받고 있으며, 해마다 세금으로 비탄 3천 필을 가져다 바친다. 주거지가 산골짜기라 처소가 협소하다. 백성들은 가 난한 사람이 많고 의복은 가죽옷과 전포 저고리를 입는다. 왕은 엷은 비단옷과 전포를 입는다. 음식은 오직 떡과 보리가루뿐이다. 기후는 매우 추운 것이 다른 나라보다 심하다. 언어도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양과 소가 생산되나 매우 작고 크지 않다. 말과 노새도 있다. 스님도 있고 절도 있는데 소승불교가 행해지고 있다. 왕을 비롯하여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부처를 섬기어 다른 종교에 귀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다른 종교가 없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산 속에 사나 거기 산에는 나무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풀도 없다.
(26) 삭니아
또 와칸국 북쪽 산속에 아홉 개의 삭니아국(Saknis)이 있다. 아홉 왕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거주하는데, 한 왕만이 와칸왕에게 예속되어 있고 기타는 각각 독립해 있어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이 근처에 두 굴에서 사는 왕이 있는데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安西)까지 사신을 보내며 연락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 곳의 왕과 수령은 전포와 겹으로 된 모직물과 가죽옷을 입고 기타 백성들은 가죽옷에 담요 저고리를 입고 있다. 기후가 눈으로 덮인 산속에 사는데 이것이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양·말·소 ·당나귀가 있다. 언어는 각기 달라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그 곳 왕은 항상 2백 명부터 3백 명까지의 백성을 대파밀천(지금의 Parmir 강)으로 보내어 풍족하게 사는 오랑캐 족을 쳐서 물건을 약탈해 오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비단을 빼앗아다가 창고에 쌓아두고는 못 쓰게 되도록 내버려두며 옷을 만들어 입을 줄도 모른다. 이 삭니아국(識匿國)에는 불법(佛法)이 없다.
(27) 쿠차국
또 이 와칸국으로부터 동쪽으로 15일을 가서 파밀천(播蜜川)을 지나면 곧 총령진에 도착한다. 여기는 곧 중국에 속해 있다. 그래서 군대들이 지금 방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는 옛날에 비성왕국 (襲星王國)의 영토였다. 그런데 그 나라 왕이 배반하고 티베트로 도망을 했으므로 지금은 이 곳에 백 성들이 없다. 외국인은 커판단국(渴鈑檀國)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총령이라고 부른다. 또 이 총령으로부터 한 달을 걸어 들어가니 카시가르(현재의 신강성에 있다)에 도착한다. 외국인은 카시기리국(Kashigiri)이라고 부른다. 여기도 중국 군대가 수비하고 있는데,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소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부추 등을 먹으며 그곳의 토착민은 전포로 된 옷을 입는다. 또 이 카시가르로부터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쿠차국(현재의 신강성에 있다)에 도착한다. 곧 안서대 도호부(安西大都護府)로 중국 군대가 대대적으로 모인 곳이다. 이 쿠차국에는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 며 소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파·부추 등을 먹으며, 중국인 스님은 대승불법을 믿고 있다. 또 안서(安西)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까지 2천리를 가면 역시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절도 많 고 스님들도 많은데 대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모두 중국의 땅이다. 누구나 다 잘 알기에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개원(開元) 15년(727) 11월 상순(上旬)에 안서(安西 :庫車)에 도착했는데, 그 때 절도대사(節度大使) 조군(趙君)을 만났다. 또 안서(安西)에는 중국인 스님이 주지(住持)로 있는 두 절이 있는데 대승불법을 행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운사(大雲寺) 주지 수행(秀行)은 설교(設敎)를 잘 하는데 전에는 장안의 칠보대사(七寶출刻)의 스님이었다. 또 대운사 유나(維那)는 의초(義趨)라는 스님인데 율장(懼藏)을 잘 해석한다. 옛날에 는 서울 장안의 장엄사(莊嚴寺)의 스님이었다. 대운사 상좌(上座 : 계급이 높은 스님) 명운스님은 위대하고 훌륭한 주지(住持)로 매우 도심(道心)이 있고 공덕 쌓기를 즐겨한다.
또 용흥사 주지 법해(法海)는 비록 중국사람이나 어려서부터 안서(安西)에서 자랐다. 그러나 학식과 인품이 중국 본토인과 다르지 않다. 호탄에도 한 중국 절이 있는데 이름이 용흥사(龍興寺)다. 한 중국인 스님이 있는데 이름이 ○○다. 그는 이절의 주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주지(住持)다. 그 스님은 황하(黃河) 북쪽 기주(현재의 하북성) 사람이다. 카시자르(疏勒)에도 중국 절로 대운사(大雲寺)가 있는데 한 중국 스님이 주지(住持)로 되어 있다. 그는 곧 감숙성 사람이다. 또 안서(安西 : 庫車)로 부터 동쪽으로 가면 옌지국에 도착한다. 여기에도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 다. 왕도 있는데 백성들은 오랑캐며,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다. 소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위에 7자가 빠졌음) 이것이 곧 안서(安西) 사진(四鎭)의 이름들인데, 첫째 안서(安西 : 庫車), 둘째 코탄(于*),셋째 카시가르(疏勒), 네째 옌지(焉香)이다. (아래는 없어졌음) (위는 없어졌음)그들은 중국의 법을 따라 머리에 두건을 둘렀고 바지를 입었다. (아래는 없어졌음)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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