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담긴 <타인의 삶>
김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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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의 절절한 감정 고백인 사랑하는 순간을 미행당했다면? 그건 분명히 인권유린이고 모독이며 최소한의 자유까지 박탈당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 진실한 모습을 훔쳐본 한 냉혈한의 피가 뜨거워졌다면 그 또한 모순이면서 한편으론 보람이라 하겠다.
“나는 5년간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
영화 <타인의 삶>의 주인공인 비밀경찰 비즐러가 한 말이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사회주의의 적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안전기구의 중대한 요원이었다. 즉 사회주의 지식계급을 감시하기위해 존재하는 기관의 한 세포였던 셈이다. 국가안전기구가 만든 가장 두툼한 파일은 작가와 배우 그리고 예술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인상은 메마르고 차가웠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깡마른 체구에 언제나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 듣고 움직일 뿐 도무지 사람냄새라곤 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탐욕스러운 문화부장관으로부터 서방세계에서 유일하게 잘 읽히는 작가 ‘드라이만’의 행적을 미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작가 드라이만에겐 아름다운 연극배우인 아내 크리스타가 있었다. 두 사람의 삶을 도청하던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진솔한 삶과 예술인으로서의 열정에 매료되기도 했지만, 한편 자신에게 내린 임무가 지극히 사적이고 비인간적이란 것을 알고 동요가 시작된다. 즉 드라이만의 부인인 여배우 크리스타에 대한 계략임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만의 은밀한 사랑을 몰래 듣게 됨으로서 버려진 듯 홀로된 자신의 폐쇄된 삶을 돌이켜 보면서 자신도 따뜻한 인간이 되길 갈망한다. 미행을 하기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드라이만의 집 위층 텅 빈 다락방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작가와 배우의 애정행각을 꼼꼼하게 도청하며 자신의 감성에 불을 지펴나가는 것이다.
비밀경찰 비즐러는 연극이나 문학과 같은 예술세계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다. 잿빛 하늘이 낳은 웃음이라곤 없는 냉소적인 그가 두 사람의 삶을 훔치면서 미행은 접어두고 그들을 도우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가는 장면에서 나는 희열을 느꼈다. 드라이만이 그의 맨터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아노로 연주하는 ‘영혼의 소나타’를 듣고 비즐러가 흘리는 한 줄기 눈물. 그건 예술만이 풀어낼 수 있는 고귀한 산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즐러는 자신의 직업에 환멸을 느끼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맞는다. 승강기 안에서 만난 꼬마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다.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비밀경찰은 나쁜 사람들 이레요”
꼬마에게까지 자신의 직업을 모멸 받은 비즐러는 일반인의 틈에서 쉼을 얻기 위해 허름한 술집에 들렀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 여배우 크리스타를 만난다. 이념만으로 똘똘 뭉쳐진 그가 크리스타의 곁으로 다가가 “나는 당신의 관객입니다.”라고 팬임을 고백한다. 사회주의의 삼엄한 분위기에 절여진 비즐러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고, 모든 것을 알아야한다는 비밀경찰의 독선이 무너지는 찰나였다.
영화 전반부를 이끌어왔던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일상을 넘어서면 후반부에는 드라이만이 동독의 과도하게 높은 자살률을 폭로하는 수필을 쓰서 서독의 ‘미러’지에 발표함으로서 긴장되는 줄거리로 이어진다. 잘 생긴 얼굴에 카리스마까지 겸비한 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친구들은 동독 건국 40주년을 기념하기위한 연극을 쓰는 척 가장한다. 이념 때문에 작가가 소신껏 글을 쓰지 못하는 그들을 들여다보는 비즐러는 자신이 믿었던 사상과 이념이 틀린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그들 부부를 돕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도 늘 들킬까 은밀하게 조심을 하며 진행을 해나간다.
어느 날 드라이만이 몇몇 지인들과 공모하여 도청실태를 서독의 신문사에 넘겨주기 위해 필요했던 19센티미터의 타자기를 숨겨두는 장면에선 사랑하는 아내마저 믿을 수 없는 사회주의의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마침 들어오는 아내에게 그 장면을 들켰으나 크리스타는 못 본 척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며칠 후 크리스타는 국가정보부로 불려갔고 목숨과 연극 활동을 구걸 받는 조건으로 폭로하고 만다. 그 사실을 심문과정에서 먼저 알게 된 비즐러는 국가정보요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드라이만의 집에 잠입해 타자기를 빼돌려 줘서 가슴이 울컥 헸다. 그토록 냉혈한이던 그가 사람냄새를 물씬 맡게 하다니! 그러나 크리스타는 남편을 본의 아니게 고발한 죄책감에 거리로 달려 나와 차에 몸을 던지고 만다. 급브레이크 밟는 경적소리에 밖으로 나온 드라이만이 숨진 아내를 안고 애절하게 울던 장면······. 지금도 스크린에 비친 동독의 음산한 거리에서 오열하는 드라이먼의 표정이 눈앞에 선연하다. 인권을 짓밟던 사회주의 체제가 한없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안전한 자유와 창작활동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연극 활동을 위해 문화부장관과 어쩔 수 없는 잠자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남편에게 “나 좀 안아줘”하던 그녀는 끝내 가고 말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5년 후, 드라이먼은 자신과 아내에게 벌어진 무시무시한 도청의 근원지를 찾아 나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청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하지만 도와준 사람이 바로 감시자란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란다. 우편배달부로 전락한 비즐러를 찾아 나선 드라이만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초라한 모습으로 우편물을 배달하지만 그때야말로 비즐러에게서 고귀한 향기가 나는 듯했다. 사실 비즐러를 감동시킨 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눈과 귀로 통해 본 진실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펴낸 신작을 책방에서 펴들고 생전 처음 환희에 찬 눈빛을 보인다. 그 책의 표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책을 비즐러에게 헌정 합니다. > 드라이만 백.
그러나 스크린에서 미움을 받다 참회한 울리히 뮈헤(비즐러)는 지난 해 여름 위암으로 타계했다 한다. 실감나게 배역을 해내던 그분의 명복을 빌고 싶다.
- <부산 여성> 제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