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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 청년의 힘으로! 까페(http://cafe.daum.net/cafe200004address)
어린시절
나는 1924년 봄, 대구시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위안부 시절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줄곧 대구에서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고향은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이며, 지금도 그곳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요즘 들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아버지는 집에 가끔씩 들르시곤 했었다. 그러다 내가 여덟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돌아오셔서 그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상해,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느라고 집에도 못 오시고 결국 병을 얻어 돌아가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만 어렴풋히 생각날 뿐이다.
형제자매들은 딸 둘, 아들 둘로 나이차가 많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에는 나보다 아홉살이 많은 오빠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세살이 되어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았다. 이 3명이 외에는 혈육이 더 있는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야 시집간 호점이 언니가 있는 것을 알았다. 호점이 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집을 간 제일 맏이 언니였다. 그 언니의 주소를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알려준 것이다.
집안살림은 어머니가 모두 맡아 하셨다. 끼니는 가끔씩 시골에 있는 외가에서 실어오는 곡식 외 어머니의 침모질 등의 품팔이로 이어나갔다.
나는 한번 본 것은 잊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편이었는데도 집이 어려워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남자들이나 다니던 집 근처에 있던 서당에서 어깨 너머로, 그리고 야학에도 다니면서 한자나 한글, 일본어 등을 깨우쳤다. 공부에 대한 욕심은 상당히 많았다. 어떻게든 공부하고 싶어 안달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다. 열세살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 쪽인지 아버지 쪽인지 잘은 모르지만 일본에 살던 먼 친척 부부가 우리 고향을 방문하였다. 그때 그들은 어머니에게 심부름이나 시키면서 친딸처럼 학교도 보내주고 좋은 사람 만들어 시집도 보내준다며 나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공부를 못 시켜 항상 가슴 아파하던 어머니는 두말없이 승락해주었다. 나 또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들 친척을 따라 일본으로 향했다. 친척 집은 후꾸오카현의 오오무타에 있었다. 친척은 많은 인부들을 데리고 고물장사를 했다. 막상 내가 가자 친척은 내 댕기머리를 무조건 단발로 잘라버렸다. 댕기머리를 잘라 서운해하는 내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친척들은 학교는 보내주지 않으면서 매일 설겆이, 빨래, 청소를 시키고 자신들의 아이들만 돌보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한 여섯 달 정도를 이렇게 보냈나보다. 나중에는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어야 되나싶어 분하기까지 했다. 하여 나는 고물장사들에게 심부름하여 얻은 돈을 모으면서 집으로 올 수 있는 방법들을 알아가지고는 친척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돌아와버렸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계속 서당이나 야학에 다녔다. 그 당시 이런 공부들은 남자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대 글을 깨쳤기 때문에 사는 데 조금은 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나는 대구에서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슬리퍼공장에도 한두군데 다녔다. 왕골로 만드는 이 슬리퍼는 병원 납품용으로 무척 질겼다. 이 당시 집에서 출퇴근했으며 월급은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갔다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직접 번 돈을 드릴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도록 마음이 뿌듯하였다. 그러나 공장일도 항상 있지는 않아서 종종 집에서 놀았다. 이때 나는 동네 뒷산을 자주 올랐다. 뒷산 가까이에는 화장터가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나보다 두 살 아래인 하루코네 식구가 화장터를 지키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뒷산을 오르내리다가 하루코하고 친구가 되었다.
하루코네 가족은 모두 일본 이름을 쓰는 조선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화장터에서 시체 태우는 일을 했다. 시체를 사르기 전에는 항상 졔사를 지냈다. 나는 하루코와 같이 놀다가 자주 제물을 얻어 먹었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귀하던 때였지만 하루코네 집에만 오면 이렇게 배를 채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살이 되었다. 그해 늦가을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꼬네 집에 가서 놀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일본 헌병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라고 생각되는 데 거기에는 내 또래의 또 다른 여자애 1명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우리는 저녁도 먹지 않고 그 사무실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쪼그리고 새우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헌병은 우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우리를 역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기차이름은 아까쯔끼(曉)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타고 이틀 정도를 계속 북쪽으로 갔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내리면서 안동이니 봉천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와 같이 가던 남자들은 도중에 바꿔지기도 했다. 중국에 와서는 처음에 우리랑 같이 오던 남자는 어디론가 가고 그후에는 중국말을 하는 남자가 우리와 내내 같이 갔다. 나는 이들이 형사인가 싶기도 했지만 정확히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들은 우리에게 식사하라고 도시락이나 김밥을 주었고 밤에는 먹고 싶은게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만주에서의 위안부 생활
저녁녘이 되어 우리는 당시 북만주 도안성(逃安城)이라는 곳에 내렸다. 여기에서 같이 온 남자는 우리를 군용트럭이 있는 데로 데려다 주고는 갔다. 트럭에는 군복을 입은 군인이 3명 있었다. 군인들은 모두 운전대 앞에 앉았고 우리 둘은 뒤에 타고 갔다.
트럭을 타고 한참 갔다. 트럭은 마을과 허허벌판을 지나 외딴집 앞에 와서 멈추었다. 우리가 내리자 많은 여자들이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다. 모두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서른대여섯 먹은 남자와 여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이 여자들을 관리하는 사람들로 우리는 이들을 언니, 아저씨라고 불렀다.
먼저 온 여자들은 20명 가량 됐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여자들이 많을까?' 하고 궁금해 하면서도 피곤하기만 하여 그날은 곧장 잤다. 다음 날 나는 여자들에게 '이곳이 뭐하는 데냐?'고 물었다. 그러자 누가 ?너희들은 돈 받고 안 왔냐??고 물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고 붙들려왔다?고 했더니 그 여자는 큰일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내가 ?왜 그러는 데요?? 하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여기는 위안소로 군인들 받는 데다?라고 했다. 내가 ?군인들 받는 데면 받는데지 우리와 무슨 상관있냐??라고 했더니 그 여자는 아주 답답해하면서 ?군인들이 자는 곳이다?라고 했다. 그 여자들의 설명이나 안타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군인들이 자면 잤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온 지 사흘이 지나자 주인은 나와 일행에게 각각 방 하나씩을 주었다. 거기에는 이불 하나 요 하나 그리고 베개 둘이 있었다. 이날부터 우리는 군인들을 받았는데 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여자들이 왜 그토록 안타까워 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때 정조를 빼앗겼다.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차서 까무라치고 울기만 했다.
소련과 국경지역이라고 하던 이곳 북만주 도안성은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자나 옷은 모두 털로 만든 것이었다. 내 방은 두 줄로 쭉 들어서 있는 방 중에 하나였는데 겨울이 되면 벽에도 얼음이 두껍게 얼어 방 양쪽 가에는 도랑을 파서 괸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정말 많았다. 어떤 ?는 하루에 20명 내지 30명은 상대했었던 것 같다. 그 근처에서 위안소는 우리밖에 없었던 것 같고 사병이나 장교들은 여가가 있을 ?마다 오곤 했다. 높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긴밤은 주로 장교들만 자고 갔다.
군인들이 팁을 주어 푼돈을 쓰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군인들이 우리를 ?리거나 주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군인들이 사꾸를 사용했기 때문에 내가 있는 동안 임신한 사람은 없었다. 군인들을 상대하는 일 외에도 우리는 군인들의 각반도 쳐주어야 했다.
이곳 북만주에서의 생활은 어느 정도 자유스러웠다. 식사는 관리인이 만주사람 둘을 데리고 조선식으로 해주었다. 비록 고정 월급은 없었지만 관리인은 우리에게 한 달에 1번씩 중국 돈을 조금 주었다. 우리는 이럴 때면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단체로 시내에 나가 옷이나 신발을 사거나, 영화구경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갈 생각을 못했다. 도대체 여기에서는 달아날 데가 없었던 것이다.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는 김계화와 대구에서부터 같이 간 후미코의 이름이 생각난다. 위안부 생활을 거의 10년이나 5년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헌병에게 잡히기 전부터 이미 후미하라라는 성씨를 쓰고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는 이름을 당시 유명한 영화를 보고 거기 나오는 배우 다케오토 나미코의 이름을 따서 나미코라고 지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참 많이 불렀다. 괴로움 중에서도 웃을 일이 있거나, 외롭고 가슴 답답할 ? 우리끼리 모여 앉아 때로는 혼자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바샹아 유꾸유구 (가사의 뜻이 평범하면 삭제합시다)
유가제니 아오이 야나기이노
샤사야끼바
이도시 고노미와 도꼬마데모
기메따 고꼬로와 가와라세누...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나는 물건을 관리하는 장교를 사귀었다. 나는 정당하게 노력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군인들 가운데 힘있는 사람과 친해 놓으면 힘이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갖은 아양을 다 떨며 이 물품담당자에게 신발 각반도 자주 준비했다가 매어주기도 하고 ?로는 1번씩 시내에 나갈 ?마다 맛있는 것을 사서 주기도 하고 아예 음식거리를 사다가 우리가 식사하는 곳에서 장만하여 대접도 했다.
온 지 한 1년쯤 지나 9월이었다. 이? 물품담당자는 나보고 위안소 밖에서 살림을 차리고 같이 살 것을 제안해왔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내가 끌려올 ? 우리 어머니가 아파 돌아가시려 하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러니 당신이랑 같이 살기 전에 먼저 조선에 다녀오게 해달라. 같다 와서 꼭 같이 살겠다?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런 말을 하면서 애걸하는 나에게 그는 정말 돌아오겠느냐고 몇 번이나 다짐하듯 묻더니 조선을 다녀올 수 있는 증명을 떼주었다.
고향에 다니러 왔으나
북만주 도안성을 떠나올 때 내 주머니 안에는 군인들이 팁으로 준 돈이 조금 있었다. 우선 나는 대구로 가기 전에 금천역에서 내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일러준 우리 혈육의 가장 맞이인 호점이 언니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한 언니 주소는 함경남도 금천군 서북면 하암리 내동이고 형부이름은 김영찬씨였다. 나는 금천에 내려 선물을 산 후 무조건 택시를 대절하여 언니집으로 향했다.
내동까지 가서 나는 동네사람에게 형부 이름을 밝히면서 우리 언니에게 통지해주기를 청했다. 동네사람은 밭일하러 갔던 언니를 부르러 갔고 그후 언니는 멀리서부터 한참이나 손을 흔들며 뛰어와 네가 옥주냐며 부등켜 안고 울었다. 처음에는 이게 우리 언니인가 싶어 머뭇거리던 나도 펑펑 울음을 쏟았다. 비록 처음 본 언니었지만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주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어 언니가 보고 싶어 대구에서 온 거라고 속여 말하였다.
나는 언니네 집에서 너무 즐겁게 지냈다. 아무리 누가 좋다 나쁘다 해도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이라고는 피붙이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지금까지 나와 언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언니 집에서 한 열흘쯤 지낸 후 대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로는 남의 집살이도 하면서 ?로는 하는 일 없이 놀면서 한 1년 지냈다.
다시 남방으로
대명동 집 근처에는 우연히 알게된 친구 한 명이 있었다. 1942년 7월초 그 친구는 ?돈을 많이 주는 식당에 가려는 데 너도 안 가겠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이미 버린 몸이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어찌됐든 돈이라도 많이 벌자 다짐하며 곧장 수락했다. 그 친구는 ?그럼 내일 보자?고 했다. 다음 날 나는 식구들 모르게 집을 빠져나와 그 친구와 같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어떻게든 돈을 꼭 벌어 우리 ?문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다.
부산에 갔더니 역전에는 두 남녀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조선인이었는데 남자는 마쓰모도(松本)라고 하는 사람으로 나중에 보니 우리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우리와 같은 위안부로 그저 남자를 따라 나왔던 것 같다. 이 둘은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를 어느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열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와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만주에서 1년 동안 같이 지낸 김계화를 다시 만났다. 나는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면서도 정말 놀랬다. 그래서 그에게 대체 어찌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 애는 팔자가 나빠서라며 울었다. 하루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나오면서 보니 그 여관이름이 ?갑을여관?이었다.
우리 18명은 1942년 7월10일 부산항에서 배를 탔다. 배는 군용으로 예닐곱 척이 함께 떴는데 우리가 탄 배는 맨 마지막에 위치했다. 내 기억으로는 나와 같은 여자들이 3,4백 여명도 넘게 배 안에 가득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일행 18명은 한 조가 되어 같이 생활했는데 이런 조들이 수많이 있었다.
우리가 탄 배는 한 두어 달 항해했다. 많은 여자들은 처음부터 배멀미를 하면서 맥을 못추스렸다. 하지만 나는 돈 벌겠다는 각오가 단단해서였는지 천성이 그랬는지 가는 동안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해서 나는 항해 동안 우리 조원들의 식사준비를 도와주거나 여자들의 토사물을 치우고 그리고 정신 잃은 여자들의 등도 두드려주면서 보냈다. 그러면서 나는 다른 조 여자들을 만나면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여자들은 식당에 돈 벌러 간다고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만 싱가포르를 거쳐 버마의 랑군에 도착하였다.
남방에서의 위안부 시절
랑군에 도착하자 배는 닻을 내렸다.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이제 다 왔다면서 배에서 내려 각 조별로 모이라고 하였다. 배에서 내리자 저 편에 많은 트럭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우리들은 각 조별로 모이고 관리자들은 그들끼리 모였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제비뽑기가 끝나자 우리 조 관리자는 만다레로 가기로 결정된 것을 알려주었다.
그후 저 편의 트럭 1대가 우리 곁으로 왔다. 우리가 다 타자 트럭은 만다레를 향해 내닫기 시작했다. 트럭은 외딴 2층집 앞에서 멈추었다. 관리자는 우리가 다 내리자 모두 2층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2층은 가운데 빈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방이었다. 방의 수는 열두어 개는 되어 보였다. 이 집은 전체가 다 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는데 좀 낡아보였다. 이후 우리 여자들은 2층을 사용했다. 1층에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관리자가 생활했다. 그리고 우리들도 버마 여자가 만들어주는 식사를 하기 위해 1층에 내려가곤 했다.
하루 쉬고나자 다음 날 10여명의 군인들이 나무들을 트럭에 가득 싣고와서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 공사로 2층은 개조되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처음 갔을 때 2층은 가운데 공간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열두어 개 방들이 두 줄로 길게 있었던 것인데, 그 수가 우리 여자들보다 부족하자 중간에가다 방 한줄을 더 만들었던 것이다.
군인들은 하루만에 2층공사를 하고 갔다. 그들이 간 후 관리자는 우리에게 방 하나?을 따로따로 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지 3일째부터 군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왔고 우리는 이들을 받아야 했다. 나는 식당에 간다고 나설 때부터 이미 버린 몸이라 돈이나 왕창 벌어야겠다고 각오했었다. 한편 설마 그일일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막상 이곳에 와서 군인들을 받게 되자 내가 또다시 만주에서처럼 이리 되는구나 싶은 생각으로 가슴이 미어져왔다.
만다레에는 우리 외에 다른 위안소는 없었다. 그곳의 부대는 내 기억으로 ?비르마 하껭 다데하센 요이하꾸 마루마루 부다이의 시단시레부?로, 우리말로는 ?버어마 파견 8400부대 사단 사령부?였다.
정말이지 군인들이 많이 왔다. 또 이곳에는 우리에게 배속된 부대외에도 마루사라는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도 가끔 우리에게 위안을 받기 위해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한 군인이 내 방에 들어와 눈물을 그렁거리며 울고 있었다. 왜 그러냐니깐 자기도 조선인이라면서 마루사부대에 있는데 이 부대에는 50명 중에서 3,40명은 조선인이라면서 강한 부대라고 말을 했다. 이 조선군인들도 일본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군표나 사쿠를 가져와 사용했다.
대개 아침을 먹고 9경부터 군인을 받았는데 때로는 군인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졸병들이 오후 4시경에 부대로 들어가면 그후 장교들이 와서 10시 정도까지 있다가 갔다. 그 이후는 긴밤 손님이 들어왔다.
군표는 갈색으로 된 표로 군인들 계급에 따라 가격이 달랐는데, 졸병은 1원 50전, 하사관급 2원, 장교 2원 50원이었다. 긴밤은 장교들만 자고 갔는데 이때는 아마 3,4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군표는 모두 다 관리인이 직접 관리했다.
세면장은 공동이었다. 날씨가 따뜻한 곳이어서 우리는 요와 담요만을 가지고 생활을 했다. 옷은 블라우스, 원피스 등의 양장과 몸뻬를 입고 있었다. 관리인은 버마 사람들을 두고 우리에게 식사를 해주었는데 주로 밥은 안남미였다. 가끔씩 고기국을 먹기도 했으나 산에서 캐온 풀로 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나는 창씨성인 후미하라를 그대로 사용하고 이름은 요시코라고 직접 지었다. 만다레에서부터 나는 물품을 관리하는 혼다미네오와 차츰 가까워졌다. 북만주에서부터 이런 사람과 사귀면 여러 가지로 이로운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문에 내가 애를 써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7∼8개월 정도 머물렀었던 것 같다. 사단사령부가 아끼아부로 이동을 하자 우리도 따라갔다. 아끼아부로 가면서 처음에 우리는 군용트럭을 탔다. 그후 섬이 많은 뿌연 황토색의 바다를 건널 ?는 다이하쭈라는 배를 타고 건넜다. 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자주 폭격을 가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폭격을 피해 아무 섬에나 내려서 몸을 피하곤 했다.
섬에 내리면 낯선 부대의 군인들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도 위안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상부에서 허가가 나면 우리는 이들을 위해 1주일이든 보름이든 머물러 있곤 했다. 머물 ?는 그들 초소 곁에 있었으며, 그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잠도 잤으며, 또 폭격이 있을 ?는 그들과 같이 정글에 숨기도 했다.
아끼아부에 도착하여 우리는 1년 정도를 3층집에서 살았다. 이곳에는 일본인과 중국인 위안부들도 있었는데 기거하는 데는 각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국인 위안부들만 살았던 우리 집에는 병사들이나 하사관이 주로 드나들고 일본인 위안부들은 장교들을 상대했다. 일본인 위안부들 중에는 기생 출신들이 많았는데 나이가 서른살쯤 돼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 위안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시내에 나가면 가끔 마주치기도 했지만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생활은 장교를 상대하지 않는 것 외에는 만다레와 마찬가지였다. 이후 남방에서의 생활은 거의가 다 비슷비슷 했었다. 우리가 아끼아부에 온 후 얼마 있다가 다시 혼다 미네오(누구인지???)도 왔는데 그를 보자 반가웠다. 그는 계속 우리가 있는 부대에 속해 있어 해방이 될 때까지 항상 우리와 같이 어울렸다.
이후 우리는 아끼아부에서 ?다이하쭈?를 타고 나와 랑군 쪽으로 들어가는 뿌로무에서 한 4∼5개월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한국인 위안부들만 있었다. 뿌로무에 와서 지금까지 조선에서부터 같이 있었던 관리인 남자가 말도 없이 어디로 가버렸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갈수록 전쟁이 위험해지니까 도망간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부터 군인들이 우리를 직접 관리하였다. 여기에서는 밥도 군인이 해줬고, 군표도 군인들이 직접 받았다.
뿌로무에서의 생활을 마친 후 우리는 군트럭을 타고 랑군에 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우리는 군인들이 직접 알선해준 ?랑군 가이깡(會官)?이라는 이름의 위안소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은 일본인 남자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우리보다 먼저 온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어 우리까지 합해 30명 정도가 같이 있었다. 위안부들이 많아져서 생활은 좀 쉬워졌으나 짓궂은 군인들은 더 많았던 것 같다. 술 먹고 와서 1시간도 넘게 추군대어 배창자가 나오도록 아프게 하는 군인도 있었다.
한번은 술에 취한 군인이 들어와서 칼을 ?어 죽이려 해 처음에는 ?너희들을 위안하려고 온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살살 달래다가 그가 쥐었던 칼을 놓자 그 칼을 들어 무조건 가슴을 찔러버린 적도 있다. 그 군인은 피를 흘리면서 차에 실려나갔고, 나는 헌병대에 불려가 군정재판을 받았다. 이?는 어느 정도 하던 일본말도 나오지 않아 우리말로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그후 1주일 만에 풀려나와 군인들을 다시 상대했다.
이런 일들이 있고 나서 나는 그곳에서 사귄 쯔바베라는 친구와 만주에서부터 알았던 김계화 등이랑 같이 귀국을 하려고 노력해봤으나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랑군 가이깡에서 서너 달 머문 후 우리는 기차를 타고 태국으로 이동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한 일도 하지 않은 채 대기소에서 한달보름 동안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군용트럭을 타고서 아유타야라는 곳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군인환자들을 간호해야 했다. 처음에는 하루 두세 시간씩 맥재기, 주사놓기, 얼음찜질 등의 간호교육을 받았다. 군인간호를 넉 달하다 해방을 맞았는데, 그 이후에도 서너 달은 더 머무르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급장으로 지냈다.
이? 우리는 위안부 노릇을 하지 않았다. 아무 보수도 없었으나 우리는 매우 열심히 간호를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외 생각나는 일들
3년 4개월 정도 있으면서 우리는 1년 정도 머문 아끼아부에서의 생활 외에 만다레, 뿌로무, 랑군, 태국, 아유타야 등을 몇개월씩 전전하였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위안부 생활 내내 조센삐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성병검사는 1주일 마다 있었고 군인들은 사쿠를 사용했다. 나는 군인이 사쿠를 하지 않으면 그 군인의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 차버리면서 거부하거나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헌병에게 신고해버렸다.
당시 아이를 낳은 동료도 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어디사는지 알고는 있지만 신고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 신고를 권유하지도 못하고 있다.
아끼아부에서의 일들이 몇 가지 기억난다. 한번은 술을 먹고 내 신세가 처량하여 3층에 올라가 떨어져버린 적도 있다. 팔로 머리를 감싸쥔 채 떨어졌는지 왼쪽 팔 어깨쭉지뼈가 나가버렸다. 군인들이 와서 치료한다고 왼손을 잡아당겨버려 나는 기절했는데 이후 병원에서 기부스한 채로 3개월이나 있기도 했다.
또 집에 있는 어머니랑 식구들이 몹시 보고 싶고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군부대에 찾아가서는 떠나올 때 어머니가 아팠었다며 편지라도 할 수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군에서는 편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어 나는 야전우체국에 가서 집에다가 편지를 써보냈다. 그후 집에서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라는 전보가 왔다. 조금 더 있다가는 아예 '어머니가 죽었다'는 전보가 왔다. 그래서 나는 다시 군부대에 들어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장사비용으로 돈을 부치겠다고 부탁하여 돈 얼마인가를 집에다가 부치기도 했다. 그후 태국의 대기소에 있을 때도 나는 우리 집에다 버마돈 5천원을 부쳐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내 통장에는 돈이 상당히 많았는데 버마 어디에선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당시 돈을 부칠때 군인 하나가 다 부치라고 말을 했지만 나도 고향에 돌아가면 내 살 궁리 해야지 싶어 놔두었던 돈이었다.
사실 돈에 대한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돈을 모으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아끼아부에 있을때 장교들은 내게 일본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한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생일파티나 송별연을 할때 는 조선 사람 중에서는 후미하라 요시코밖에 없다면서 나를 일본인 위안부들과 함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정해진 장소로 가서 술도 따라 주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는데 1주일에 두세 번은 이런 일이 있었고 그럴때 마다 꼭 나는 불려갔다. 잘 상대해주면 이들은 팁을 꼭 주었고, 나는 이 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
나는 그리 예쁜 편은 아니었으나 '귀엽게 생겼다'며 단골 장교들이 가끔 내 방에 뒷문으로 들어와 자고 갔는데 이들이 오면 병사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장교들이 주는 돈도 쓰지 않고 모았다. 이렇게 모은 돈 외에도 술이나 담배도 공짜로 얻는 경우가 많아 나는 돈이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야전은행에 저축을 했다. 그리고 그후에도 나는 돈만 생기면 통장에다가 넣곤 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가 발행지였던 그 통장을 잃어버리고 나서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이런 일 외에도 만다레에서 아끼아부로 가던 도중에서 일어났던 일도 잊을 수 없다. 한 언니가 폐병이 들어서 어느 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다른 조원들이 아끼아부를 향해서 떠난 후 내가 자원하여 언니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와 함께 있게 된 후 열흘이 지나 숨을 거두었다. 군인들이 가까이하기 꺼려해서 내가 직접 이 언니를 화장시켜 뼈를 가까운 바다에 띄워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향에 전할 수 있겠거니 싶어 머리 부근의 연한 뼈 몇 개를 빻아 보관했다. 그후 계속 이동하면서 이 뼈가루를 넣은 주머니는 일어버리고 말았다.
해방을 맞이하여
아유타야에서의 생활을 끝낸 후 우리는 군용트럭을 타고 태국에 있는 수용소로 갔다. 수용소로 가기전 정이든 혼다미네오는 같이 일본으로 갈것을 바랬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수용소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있었다. 건물은 큰 학교터 같아 보였는데 한복판에 공터가 있고 큰 건물들이 많았다. 여기에 가끔씩 미군들이 지프차를 타고 왔다. 우리는 수용소에서 모두 같이 생활했다.
얼마 지나 우리는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갔다. 배 안에서는 내릴 ?를 준비하며 태극기를 만들기도 하면서 참으로 분주하였다. 그러나 호열자가 발생했다는 소문 속에 배가 묶여 인천바다 한복판에서 보름 정도 머물러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온 몸을 소독한 후 내렸다. 이때 우리는 짧은 머리애 몸?를 입고 일본식 게다를 신고 있었다.
우리가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며 나오자 사람들이 북, 꽹과리를 치면서 반겨주었다. 확성기에서는 ?조선 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뭉클하였다.
우리는 배에서 내리면서 1,000원을 받았다.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고향으로 갔다. 집에 가자 돌아가셨다던 어머니는 살아게셨다. 어머니는 내가 연락을 하던 당시 자신이 죽었다고 전보를 치면 돌아오겠거니 싶어서 그런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조국에 돌아와서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하루는 외숙모가 집에 와서 양반집에서 너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없다면서 야단을 했다. 어찌됐건 나는 이후 일가 친척들에게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이것이 하도 서러워 울기도 많이 했으나, 이제는 네 것은 네가 먹고 내 것은 내가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는 배짱으로 이런 일에는 아예 신경을 안 쓰기로 했다.
돌아온 지 1년 후에 어머니는 나를 달성 권번에 보내줬다. 내 나이 스물두살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틈틈이 기생질도 했다.
권번을 졸업하고 유곽에 있던 나는 대구에서 조선공작주식회사를 경영하던 김씨를 만나 결혼했다. 김씨는 나보다 여섯살이 많았는데 부인은 이미 죽었고 딸 하나를 출가시킨 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결혼하고 나는 전처의 아이들 둘을 기르면서 6년쯤 살았다. 그러나 남편은 사업이 망해버리자 아무 대책 없이 자살을 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생질을 하여서, 아이들과 친정어머니를 모셨다.
이때가 내 나이 서른두살이었나보다. 기생 노릇을 하면서 나는 제과공장을 하는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처음에 나와 나이가 같다고 속였는데 나중에 살다보니 나보다 3살 연하였다. 그리고 부인도 있고 딸 하나에 아들이 넷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아주 잘 이해해주어 내가 하는 일에 군말이 없었다. 그와 살면서 친정어머니도 계속 모셨고, 전남편의 아이들이 자립할 수 있을 대까지 보살피고 시부모 제사도 전남편 아들이 자립할 대까지 지내주었다. 그리고 사십이 넘으면서 나는 이 남자의 아들을 데려다가 키웠는데, 지금도 이 아이는 내 아들노릇을 하고 있다.
정말 나는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이 아프다. 그리고 한때는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렇게라도 내 살아온 것을 다 풀어버려 맘이 놓여진 것인지 자기도 하고 조금씩 먹기도 한다.
작년에 젊은 시절 권번에서 알았던 이씨가 권하여 맨처음 이 사실을 신고할 때만해도 만주 이야기는 밝히지 않았다. 그때는 창피스러운 일을 뭐 전부 다하랴 싶어 남방 갔다온 이야기만 했었다. 하지만 일본이 저리도 무례하고, 또 이미 내 이야기가 텔리비전을 통해서도 다 알려지고 있는데 무엇을 숨기랴 싶어 이제는 만주에 갔던 일까지 다 말해버리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만주의 1년, 남방의 3년 세월 그리고 돌아와 집안에서 냉대받던 일들하며 살기 위해 급급해야 했던 젊은 시절. 왜 내가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가? 어렸을 때는 남들에게 똑똑하다고 칭찬도 많이 듣고 귀여움도 받았던 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