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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제 度도
5. 거미의 실수 1
재섭이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에 맞추어 그레이스 그라비우스는 플로리다행 비행기 편을 예약해 놓았다. 퇴원수속을 마친 그레이스 그라비우스가 병실로 들어오며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었다.
“건강을 회복할 수 있어서 기뻐요.”
“모두 그레이스의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 인사는 생략해도 될 만큼 우리 사이가 가까운 줄 알고 있었어요. 혼자만의 착각이었나요?”
그녀의 말이 재섭을 찔렀다. 재섭이 입원해 있는 동안 거리감을 유지하기엔 너무 가까이 그녀는 그에게 다가와 있었다. 그레이스가 재섭의 속마음을 탐색하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눈부셔서 그랬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에 그랬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진실을 받쳐 그를 구완했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남자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려면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그레이스 그라비우스는 얼굴 가득히 떠올렸던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꼼짝 못하도록 얽어맬 거미줄을 하나 준비 중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거미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명랑하게 말했다.
“재섭씨, 나 오늘 플로리다에 갔다가 일주일 후에 돌아와요. 아빠의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거예요.”
“아, 네.”
“병원에서 나가는 길로 재섭씨와 점심 식사를 하고, 곧바로 공항으로 가야 해요.”
“그럼 서둡시다.”
병원 주차장에 그레이스 그라비우스의 벤츠가 세워져 있었다. 그녀가 자동차 키를 재섭에게 내밀었다.
“운전하실 수 있겠죠?”
“이젠 환자가 아닙니다.”
차안으로 들어갔을 때 시트에 놓아두었던 꽃다발을 들어 재섭에게 주면서 그레이스가 말했다.
“퇴원 축하해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까지 구석구석 신경을 쓸 만큼 섬세한 여자였던가.노란 색 튤립 다발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그러나 꽃다발쯤은 변죽을 올린 것에 불과하였다. 그레이스는 재섭을 위해 바다위에 떠있는 레스토랑의 특별석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플러싱과 라과디아 공항 사이의 대서양과 면해있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는 그 해상 레스토랑은 유람선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써 동화속의 궁전처럼 화려하면서도 안락한 공간이었다. 재섭은 자신이 살고 있는 플러싱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이런 별천지(別天地)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곳은 야채가게를 다니는 사람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웨이터가 샴페인부터 대령했다. 그 뒤를 바이올린과 첼로와 비올라를 든 트리오가 따라와서 축하의 노래(Clebration Song)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트리오가 ‘고향의 봄’에 이어 ‘가고파’와 같은 귀에 익은 선율을 토해냈기 때문에 재섭은 일순간 뉴욕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이르켰다. 그러나 뮤지션이나 레스토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동족(同族)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레이스뿐이었다. 서양인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듣는 한국 동요와 가곡은 여인의 손길보다도 더 따뜻하게 다가와서 아팠던 육체와 고단했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미국출신 뮤지션들이 한국곡을 유연하게 연주하기 까지는 많은 연습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즉흥적인 부탁을 받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적이도 열흘 이전에 재섭의 퇴원을 대비한 이벤트를 기획했을 것으로 여겨졌다. 거액의 개런티가 지불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꽃다발보다 더 큰 그레이스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재섭은 고맙다는 말 대신 잠자코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다시 한 번 퇴원을 축하 드려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샴페인을 한 모금씩 마셨다. 메인 디쉬는 랍스터였다. 해상 레스토랑에서 자신있게 내놓은 그 요리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것이었다. 재섭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초를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사실은 퇴원하면서 그레이스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그건 플로리다에 다녀오신 뒤로 미루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실려고 했는데요?”
“우선 다녀오십시오. 다시 만나면 그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어떤 형식으로든 병원비를 갚겠다는 요지의 말을 하려다가 미루는 것으로 받아 드렸다. 재섭씨는 하여튼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른다니까. 그레이스는 눈을 흘기려다가 자기 속마음을 그런 식으로 들키는 것이 싫어서 더 이상 그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기로 한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두 사람은 라과디아 공항으로 향했다. 차안에서 그녀가 말했다.
“재섭씨, 부탁이 두 개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내가 뉴욕에 없는 동안 트럼프 타워의 아파트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첫 번째 부탁이에요.”
“그레이스의 아파트에 말입니까?”
“비워 두기가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그래요.”
완벽한 시큐리티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도둑이 들 염려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확률보다도 적은 곳이었다. 도적맞을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플러싱의 허름한 아파트로 재섭을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이 들어있는 제안이었다. 그것을 모를 재섭도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베푸는 호의를 무시할 수도, 무조건 수용할 수도 없는 것이 재섭의 입장이었다. 우선은 동숙(同宿)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의 말을 따라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재섭에게 트럼프 타워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 준 다음 두 번째 부탁을 하기 위해 우선 질문부터 했다.
“재섭씨, 제가 사준 옷과 시계와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요?”
“마음에 듭니다.”
“그럼 왜 입지도 차지도 끼지도 않아요?”
“선물을 받았던 날 저녁부터 아프기 시작했어요. 의식을 차려보니 병원에 누워있더군요. 그 후 지금 퇴원하는 길 아닙니까?”
“제가 드린 선물을 아파트에 두셨어요?”
“네.”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섭씨를 앰뷸런스에 옮겨 싣고 경황없이 그곳을 떠나느라고 문단속을 못했었는데……”
“아파트 안으로는 어떻게 들어갔던 겁니까?”
“관리인에게 부탁해서 그가 가지고 있던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어요.”
“그럼 관리인이 그레이스가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떠난 뒤에 문단속을 했을 겁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서 훔쳐갔다면 똑같은 것으로 다시 사드릴테니까 어쨋튼 저의 선물을 푸대접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시계도 차고 반지도 꼭 끼고 다닌다는 약속을 해 주세요. 그게 제 두 번째 부탁이에요.”
야채가게를 다니는 직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것들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런 곳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말한 것이었다. 선물을 사랑해 달라는 말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가 돼 달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거기에 대한 가부(可否)를 말할 수는 없었다. 플로리다에서 돌아 왔을 때 한국에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러고도 자기 일을 도와주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리라. 그레이스의 오른팔이 되어 최선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잠자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레이스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차는 그 동안 재섭씨가 쓰고 계세요.”
“특별히 차를 사용할 일이 없습니다. 트럼프 타워의 주차장에 갔다 세워 두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이 차가 부담스럽지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봉투를 하나 꺼낸 다음 말했다.
“그럼 편하게 쓸 수 있는 재섭씨의 차를 하나 사세요.”
그녀는 병원비를 내주고 꽃다발을 선물하고 레스토랑에서 한국의 선율을 들으며 맛난 요리를 즐길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에 이은 또 하나의 선물 보따리를 안기려 하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수입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서 사용하기 편하도록 현금을 조금 준비했어요.”
“특별히 돈 쓸 일 없습니다.”
“퇴원 선물로 차를 한 대 사드리고 싶었어요.”
“미국의 다른 곳과는 달리 뉴욕에서는 차없이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차가 있어야 미국 생활을 미국 생활답게 할 수 있어요.”
“때가 되면 제 능력으로 사겠습니다. 지나치게 그레이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는 것도 예상했어요. 그렇지만 이건 아무 조건이 없는 그레이스의 순수한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릴께요..”
그녀는 현금이 들어 있는 봉투를 재섭의 상의(上衣)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것을 꺼내서 돌려주려는 재섭의 손을 잡고 그레이스가 말했다.
“아무 조건이 없는 거라고 했잖아요. 플리스……”
선물을 주는 쪽에서 애원을 하게 만든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재섭의 손을 잡은 다음 그의 상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섭은 봉투를 놓고 손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당장 차를 살 생각은 없었다. 그레이스가 플로리다에서 돌아온 후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 선물은 자기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레이스가 함께 일해 줄 것을 원해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사만은 먼저 정중하게 해 둔다.
“정말 여러 가지 감사합니다. 너무 폐를 끼치고 있군요.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돈의 일부는 차를 구입할 때 다운페이 용도로 쓰시고, 나머지는 용돈하세요. 그레이스는 그냥 부자가 아니에요. 돈은 문제가 안 되니까 은혜랄 것도 없어요.”
세계 랭킹에 올라 있는 대부호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런 부자일수록 단 한 푼의 돈이라도 헛되게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부자들은 돈을 지키고 늘이는 일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 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한 푼도 헛되게는 쓰지 않는 철칙을 공통적으로 갖추게 된다는 것이 재섭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스에게도 이것은 결코 작은 선심은 아닐 듯싶었다. 그레이스는 재섭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이것저것 시시콜콜하게 다 신경을 써서 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재섭은 한없이 붕 떠오르는 희열과, 그렇게 떠오른 마음에 납덩이가 놓이는 아픔을 동시에 느꼈다.
벤츠가 라과디아 공항으로 진입했을 때 그레이스가 속삭였다.
“그럼 일 주일 후에 만나요. 오기 전에 전화 드리면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실 수 있겠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빌겠습니다.”
그녀는 재섭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댄 후에 그의 품으로 상체를 묻었다. 그 정도의 접촉은 미국에서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 친구 간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고 여긴 재섭은 무반응으로 일관 할 수가 없어서 그녀의 등위로 자신의 팔을 감싸듯 올려놓았다. 어정쩡하기는 해도 그러고 나니 영락없이 포옹의 형태를 갖춘 격이 되었다. 그레이스의 가슴에 발동기가 내장되어 있었던 듯 쿵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포옹에서 풀려나는 그레이스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로 변해 있었다. 당황한 그녀는 서둘러 그 자리를 모면하는 방법으로 카도어를 열었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재섭에게 말이 아니라 어서 차를 출발시키라는 수신호(手信號)를 보냈다. 차가 밀리는 곳이어서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는 벤츠와 더불어 멀어져 가는 재섭을 지켜보다가 대합실 안으로 들어갔다.
라과디아 공항을 빠져나온 벤츠는 플러싱 쪽으로 방향을 잡고 그랜드 센추럴 파크웨이(Grand Central P'kway)로 진입했다. 오랜만에 대하는 거리는 생동감 있게 비쳤다. 하늘은 맑았다. 오후의 햇살이 고즈넉이 내리면서 차창에 와 부서졌다. 꽃샘바람이 불고 있었다. 땅은 아직도 얼어 있었지만 지층(地層) 안쪽으로부터 올라오는 봄기운은 머지않아 그 언 땅을 녹일 것이고, 나무는 힘차게 수액(樹液)을 빨아올려 앙상한 가지에 잎사귀를 만들게 될 것이다. 새로운 봄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재섭의 마음속에 봄의 화신(花信)보다도 더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급성 폐렴은 방치했을 때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무서운 병이었다. 그녀는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재섭을 구했고, 그의 내부에 어느 때부터 도사리기 시작한 그늘을 몰아 내주기 위해서 세심한 신경을 써 주었으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내 주고 있었다.
그레이스의 순수한 열정은 용광로 같았다. 거기에 그냥 함께 뛰어들어 잔해 없이 녹아들고 싶었다. 아내를 배신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은 이성이었고, 감정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녀의 부와 따뜻함과 사랑 속에 빠져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이성이 감정을 이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유혹은 달콤하고 강한 흡인력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망둥이가 뛴다고 꼴뚜기까지 따라 뛰려다가는 어물전 망신만 시키는 법이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해야 하리라. 벤츠는 미상불 안락하고 안전했으며, 운전자로 하여금 더없는 만족감을 주지만 언감생심 자신이 탐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재섭은 들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했다. 벤츠는 뉴욕 메츠의 홈구장 앞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노던 블러바드(Northern Blvd)로 바꾸어 탔다. 거기서 플러싱은 지척이었다.
제섭의 아파트는 플러싱 38애비뉴 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붉은 벽돌의 5층 건물이었다. 축조된 지 거의 백년에 가까운데 낡았다기 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잘 관리된 아파트였다. 박정희 시대에 지어진 한국의 아파트는 20년만 되면 허물고 재개발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기술이 미국에 뒤떨어진 다기 보다 지나치게 빨리 짓고, 재료를 나쁜 것으로 사용한 결과일 것이다. 금방 지었을 때 겉보기에는 번드름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여서 백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철골이나 수도관의 수명이 끽해야 20년밖에 안되니까 재개발을 하는 것이었다. 졸속 경제개발은 2중 3중으로 국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을 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니 입은 있지만 그것을 다물 수밖에 없다.
재섭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를 향해서 걸어갔다. 거의 20일 만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재섭은 현관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꺼내려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급히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던 재섭은 제일 먼저 신발 자국이 거실바닥에 어지럽게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둑이 들었던 것이 아니면 신발을 신고 집안을 돌아다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재섭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재섭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걸어 두었던 붙박이장의 문을 밀쳤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있어야 할 옷과 코트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옷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로렉스 시계와 보석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재섭은 불운(不運)이 거기서 끝나기를 바랬다. 그러나 현금을 보관해 왔던 매트리스를 살펴보았을 때 그곳에 두었던 돈까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매트리스 안에는 재섭이 6개월 동안 안 쓰고 안 먹으면서 모았던 피같은 돈을 숨겨 놓았었다. 가게를 차리거나 무역업을 시작할 자본금으로 써야 하는 돈이었다.
한 달에 2천 5백 달러를 벌어 그 중에서 5백 달러를 렌트비와 용돈으로 쓰고 2천 달러씩 모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또 2천 달러는 서울집으로 송금을 했으니, 도둑맞은 돈은 정확히 1만 달러였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위험 부담을 각오하고 흑인 우범지대에다 가게를 내면 3만 달러 선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놓고 있던 터였다. 그러고 보면 소요 예상 자본금의 3분지 1에 해당하는 현찰이 날아간 셈이었다. 옷괴 로렉스 시계와 반지 값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현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다 합하면 당장이라도 몫이 괜찮은 곳에다 번듯한 가게를 차릴 수도 있었다. 도둑은 단단히 한몫 잡아서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로렉스와 보석반지는 처음부터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물건이었다. 장사 밑천으로 요긴하게 쓸 수도 있었지만 노동력이 투여되었던 것이 아니기에 인연이 없었던 것이라고 여기면 억울해도 포기할 수 있었다. 현금은 달랐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로렉스보다 더 재섭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꿈을 키우며 피땀 흘려 모았던 소금 같은 돈이기 때문이었다.
재섭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구 짓인지 알기만 하면 살인도 불사할 것 같은 분노가 가슴속에서 끊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리기가 쉽지 범인을 찾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내 허탈감이 조수처럼 범람하며 가슴 속의 불길을 껐다. 도둑은 그의 복수에 대한 집념을 철저하게 짓밟아 놓았다. 예상치 않았던 기습 펀치를 맞은 재섭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그는 거실의 낡은 소파에 몸을 쿵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꼭 6개월이 지났는데, 한 번도 도둑이 든 일이 없다가, 재섭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에 일어난 변괴였다. 재섭은 최초의 충격이 가셨을 때 마루와 방바닥에 난 도둑의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일당이 두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지문을 채취하거나 보다 과학적인 수사를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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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레이스의 돈이 도둑을 맞은 재섭에게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재섭은 돈에 움직일 사람이 아니기를....
룸메이트 영민과 재섭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극과 극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