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C 4026년 아담창조
B.C 3896년 셋 출생
B.C 3096년 아담사망
B.C 2970년 노아 출생(~2020년)
B.C 2370년 노아홍수
B.C 2166년 아브라함(Abraham)(~1991년 / 175세)
B.C 1800년 구바빌론 시대(Old Babylon) (BC 1800―BC 1600)
B.C 1792년 구바빌론 시대- 함무라비 ( 1792-1750 )(Hammurabi Code)
B.C 1800년 팔레스티나로 이주(고향은 카우카주스로 추정), 전설상 아브라함의 시대
B.C 1358년 투탄카멘(1361-1352)
B.C 1533년 모세 탄생(~ B.C1443년 )
B.C 1530년 아시리아제국(~B.C 625년 905년 )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연합군에게 멸망-수도니네베를 포위 ]
B.C 1450년 아멘호텝 2세 등극-유대인해방 요구( 모세(83세)+아론(85세) )
B.C 1445년 아멘호텝 2세 재위-유대인탈출 시작( 모세+유대민족-이집트 탈출 )
B.C 1250년 플레이아데스 고어(ancient language)로는 헤브론(Hebron)이었음
B.C 1130년 아시리아 시대 12부족으로 나뉨
B.C 1000년 다비드( David )(~ BC 962년경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린 제2대 왕(사울 다음).
B.C 962년 솔로몬( Solomon ) (~ BC 925),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 제3대 왕
B.C 962년 신전건설( 계약의궤 )- 솔로몬왕
B.C 950년 출애급기 작성 (~BC650년 )★
B.C 925년 남쪽의 유다왕국(수도-예루살렘)과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수도-지헴)으로 분열●
B.C 917년 유다왕국이 이스라엘에 패배(다비드 가문의 종말)
B.C 879년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 건설
B.C 841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공물을 바침
B.C 727년 히즈키야왕(재위 BC 727∼BC 698) [ 야훼종교의 부흥]
B.C 722년 아시리아의 한개 주로 전락, 3만명의 주민은 포로로 끌려감●
B.C 722년 이사야에 의해 메시아 관념 생겨남
B.C 722년 아시리아(사르곤 2세)-북쪽 이스라엘 왕국 멸망(수도:사마라)●
B.C 650년 출애급기 작성 (~B.C 950년 )★
B.C 640년 요시아왕(재위 BC 640∼BC 609) [신명기법(申命記法)'에 따른 종교개혁을 단행]
B.C 638년 요시아왕(재위 BC 640∼BC 609) [ 여호와 숭배 복원]
B.C 626년 신바빌로니아제국New Babylonia(~BC539년 87년 ) [아람계 칼데아 부족의 나보폴라사르가 바빌론에 입성]
B.C 600년 헨(Henn)-아루셈의 뒤를 이어 바파쓰를 다스림. 헨은 히브루들에 의해 여호와(Jehova)로 불림
B.C 600년 창세기 작성-바빌론에서 (~BC400 년 ) ★
B.C 597년 신바빌론 시대 네부챠드레자르 2세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
B.C 586년 신바빌로니아( 네부가드네자르)-유다왕국 멸망(수도:예루살렘)●
B.C 587년 유대인 바빌론 유폐(-B.C 539에 다시 돌려 보냄 48년간)
B.C 586년 유대왕국의 귀족들과 주민들을 바빌로니아로 압송( 바빌론포로 )
B.C 586년 유대교가 민족종교 완성시기(~B.C 538년 48년간 )[ 바빌로니아 신화의 영향 ]●
B.C 580년 피타고라스(~BC 500)
B.C 55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BC 330년 220년)
B.C 532년 피타고라스-남부 이탈리아로 이주(~BC 500) [ 기원 전 6세기에 극이동 이론 교육 ]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신바빌로니아멸망●
B.C 538년 신바빌로니아 포로 생활끝남-유대인 팔레스티나로 복귀
B.C 537년 예루살렘 성전 복원-유대인들 [ 페르시아 신화의 영향= 종말론첨가+ 천사존재첨가 ]
B.C 516년 예루살렘의 사원 재건
B.C 400년 창세기 작성-바빌론에서 (~B.C 600년 ) ★
B.C 400년 창세기,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
B.C 333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팔레스티나 점령(~323년)
B.C 333년 마케도니아지배( 알렉산더 )-유대교 헬레니즘의 영향●
B.C 333년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를 떠나 그리스와 이집트와 로마에 흩어져 거주(일명:디아스포)
B.C 333년 디아스포라-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출간(~323년)●
B.C 332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페르시아 제국 멸망
B.C 323년 알렉산더 사망( 06월03일 바빌론에서 연회와 술잔치끝에 갑작기 열병에걸림 )
B.C 323년 알렉산더 사망( 06월13일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의 궁에서 )
B.C 323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유대교 헬레니즘의 영향.
B.C 317년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 3세-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요청에 따라 살해당하였다
B.C 311년 알렉산더 4세-장군중의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B.C 309년 알렉산더의 서자인 헤라클레스-살해당하였다
B.C 301년 알렉산더의 부하장군 네 사람- 거대한 제국에서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B.C 301년 이집트+팔레스티나-프톨레마이오스(~B.C 164년)
B.C 301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카산드로스장군
B.C 301년 소아시아와 트라키아-리시마코스장군
B.C 301년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셀레우코스 리카토르 1세
B.C 300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존재기간 ( ~ AD 390 년경 )
B.C 285년 리시마코스가 카산드로스의 그리스 제국의 유럽지역을 장악하게 되므로 카산드로스장군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B.C 285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필라델푸스(BC 285~246)
B.C 285년 알렉산드리아 독방( 구약성서 번역 ) -이스라엘 예루살렘 12지파( 6명씩 뽑은 72명 )
B.C 285년 예루살렘의 경건한 석학 70인을 청해 알렉산드리아 앞 파라오 섬에서 히브리어를 알지
B.C 285년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 구약성경이 70인역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하게 한다
B.C 285년 마케도니아+그리스+소아시아+트라키아-리시마코스가 장악( 카산드로스장군 제거● )
B.C 281년 리시마코스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여, 아시아 영토의 반 이상이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게된다.
B.C 281년 시리아제국 형성( Syria empire) ( BC 312 285~BC64 ) ( 셀레우코스왕조-수도 안티오크 )●
B.C 281년 소아시아+트라키아+마케도니아+그리스-셀레우코스 니카토르 1세 장악( 리시마코스장군 제거●)
B.C 280년 셀레우코스 1세 [Seleukos I, BC 358 ?~BC 280]
B.C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페르시아 원정 중에 암살되었다(로마황제)
B.C 235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사라피스 신전에 보조적인 '딸 도서관'을 설립(serapium)
B.C 247년 파르티아 제국(~AD 224) 안식국(安息國)●
B.C 202년 제5차 시리아전쟁(~200년 ). 안티오코스 3세가 팔레스티나를 획득,
B.C 200년 안티오코스스 3세-예루살렘점령
B.C 175년 안티오코ㅅ스 4세-헬라주의 문화주입 정책(~B.C 166년)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섬기게 한다.
B.C 169년 야손(Jason 유대 대제사장)이 아레다(Aretas 나바테아)의 성전을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B.C 167년 안티오코스 4세(재위 BC 175∼BC 163)-예루살렘 신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예배를 강요(유대인의 헬레니즘 동화정책)
B.C 167년 마카베오전쟁(~BC 141년) [시리아와 유대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B.C 167년 마타티아스는 동지를 규합하여 시리아군에 대한 유격전 개시
B.C 164년 파르티아인들과 나바테아인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B.C 163년 안티오코스 4세(재위 BC 175∼BC 163)-원정 도중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뒤 셀레우코스왕조는 쇠퇴하였다.
B.C 160년 나바테안 시대(400 B.C. - 160 A.D.)
B.C 142년 마카베오전쟁-유대인의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성취(~B.C 167년)
B.C 142년 유대인 왕국 재건설-하스몬 왕조(~BC 63년 79년통치) [마타티아스의 자손들=마카베오 가문 Makkabaioi ]
B.C 142년 솔로몬 왕 때 옛 영토를 거의 회복
BC 80년 카마골 1세-헨(Henn)을 몰아내고 권좌 차지.헨은 히브루들에 의해 여호와(Jehova)로 불림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예루살렘을 함락 로마 통치시대(~A.D 324년)
B.C 63년 로마-팔레스타인을 포함해서 시리아를 하나의 주로 병합 [ 안티오크: 수도 ]
B.C 63년 헤로데 왕조(~A.D 70년) [ 로마의 식민통치 시작 ]
B.C 62년 로마의 지원-에돔인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 헤로데에게
B.C 48년 폼페이우스 처형됨-이집트에서( 09월28일 ) [ 로마내전 완료 ]
B.C 47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미13세 (카세르게테스)와 내전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알렉산드리아도서관)
B.C 37년 로마 통치시대(~BC 04년)
B.C 37년 유대인왕으로 임명-헤롯대왕(Herod)(B.C. 37-A.D 4).
B.C 15년 유대인 신학자-필론(스토아 철학에 영향력끼침)(~AD 45년) [유대교와 그리스 로고스 개념 병합]
BC 10년 부:가브리엘(Gabriel 플레이아데스인 ) 모:마리아(Mary 라이라인의 후손)
BC 10년 지구인 임마누엘(Jmmanuel) 탄생( 2월 3일 )
B.C 07년 로마의 호구조사( 베들레헴 )-임신한 마리아+약혼자 요셉
B.C 04년 예수탄생 헤롯의 유아 학살-헤롯 대왕의 죽음
B.C 04년 베들레헴 인구-1000명 [ 유아:20명 ] [ 학살사건 진짜아닐 가능성 ]●
B.C 01년 임마누엘(Jmmanuel)- 10세 인도로 유학
B.C 01년 유대인(종파)-사두가이파( 모세 5
A.D 01년 유대인(종파)-사두가이파(종말론.천사론 불인정=헬레니즘의 영향 )→사회적 지도층
유대 사회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
A.D 01년 유대인(종파)-바리사이파(종말론.천사론 인정=페르시아의 영향 )→사회적 지도층 [바울]
민족주의 성향.철저한 율법주의자들.유대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있다고 확신
종교 우선을 외치는 파리사이파
정치 중시를 주장하는 사두카이파(사두개인)가 그것이다
A.D 01년 유대인(종파)-젤로트파(종말론.천사론 인정=페르시아의 영향 ), [극단적 외향적인 성향 ]
민족주의 성향 유대인이 신이 선택한 백성임을 강조 로마 제국의 팔레스티나 지배에 항거 메시아론 인정
로마에게서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다윗과 솔로몬 때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주리라고 믿었습니다
A.D 01년 유대인(종파)-에세네파(종말론.천사론 인정=페르시아의 영향 ) [시몬 유다]
로마로부터의 독립 같은 현세적인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극단적 내향적인 성향]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보다 개인의 구원 쪽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야훼와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해 사해(死海) 주변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공유했으며 예배와 독서와 공동식사를 중요한 일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결혼하지 않은 채,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장소에 따라서도 유대 안에 사는 유대인과 해외의 그리스계 도시에 사
는 유대인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유대 안에서도 내륙에 사는 유대인과 해안지역에
사는 유대인, 예루살렘 안에서도 빈곤층과 부유층으로 나뉘어 있었으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현대의 연구자들은 이것을 일괄하여, 가난한 유대인은 로마에 대해강경파, 부유한 유대인
은 온건파로 양분하고 잇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모두 폭동에 가담했는가 하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대인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다. 급진파는 이때까지 유대 내륙지역을 휩쓸고 다
니다가 예루살렘의 하층민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시카리오이'들이고, 온건파는 예루살렘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0027-00-00 세례자 요한; 메시아의 도래를 설교
0032-00-00 임마누엘(Jmmanuel)-십자가형에 처해지다( 죽지않음 )
0032-00-00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Eli Eli Lama Sabachthani :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0032-00-00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 :
0032-00-00 -성자시여 위대한 바른 지혜로 드러내주소서)”
0058-00-00 루가복음서-루가가 가이사리아에서 저작 [ 이방인 초신자 교육용 ]
0058-00-00 의사였던 루가가 바오로와 함께 동행하면서 씌여지게 된 것입니다.
0060-00-00 마가복음
0062-00-00 야고보편지(외경분류) -예수의 형제 야고보 저작
0066-00-00 유대인반란(~70년)
0066-06-00 플로루스 장관-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 보물창고에서 7탈렌트의 금화를 물수
0066-06-00 예루살렘에 거주 유대인 폭동( 온건파와강경파 )
0066-09-00 유대인반란
0067-05-00 로마군 6만. (베스파시아누스)-유대 북부의 갈릴라이아를 향해 출병
0067-07-20 로마군-요타파타 점령 (사망자가 4만명, 포로가 1200명)
0067-07-00 요세푸스-네로의 다음 황제는 베스파시아누스라고 예언
0068-06-00 네로자살
0068-08-00 로마군-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과 북쪽에서 포위한 상태가 되었다.
0068-10-00 네로사망소식 전해짐 ( 예루살렘 공략만 남겨진상태 )
0068-10-00 베스파시아누스-로마군대철수( 로마군은 휴전 상태~A,D 70년 02월 )
0069-00-00 예루살렘-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생필품 비축과 견고한 성벽도 구축(~A,D 70년 02월 )
0069-07-00 동방군단-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
0069-07-00 네로 - 30세
0069-07-00 베스파시아누스 - 58세
0069-07-00 티투스 - 28세
0069-07-00 요세푸스 - 30세
0069-09-00 비텔리우스 진영+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이 아직 직접 접촉하지 않은 상태
0069-09-00 라인강 방위선( 보조부대 게르만계 속주병 반란 ) 공격→도나우강 방위선( 군단병 )
0069-10-24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0069-10-25) -비텔리우스파↔오토파 병사들
0069-12-初 라인강 하루인 크산텐에 도착-비텔리우스 진영이 패퇴소식
0069-12-19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화재가 일어나 신전이 불탔다
0069-12-15 병사들의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0069-12-20 마리우스↔ 술라 로마 시내에서 시가전
0070-00-00 헤로데 왕조(유대인 왕국)-멸망●
00 70-00-00 유대신전파괴→이방인의 기독교신자의 증가
0070-02-00 로마( 티투스 8만명 군대 )- 예루살렘 당도( 2월 )
0070-05-21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
0070-04-00 로마( 티투스 8만명 군대 )- 예루살렘성 포위( 4월~9월 )
0070-04-00 로마( 티투스 8만명 군대 )- 예루살렘성 공략( 4월~9월 )
0070-08-10 대신전에 불이 붙었다
0070-09-08 시내에서의 저항도 겨우 수그러들었다
0070-09-20 저항은 모두 끝났다 사망자 9만 7천 명..예루살렘 공방전 사망자 110만명
0070-09-28 로마( 티투스 8만명 군대 )- 예루살렘성 점령(요세푸스는 계속 티투스 측근에 남아 있었다.)
0070-09-28 결과:사망자 9만 7천 명(유대전쟁)..결과:예루살렘 공방전 사망자 110만명
0070-09-28 사망자 돌림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게 요세푸스의 주장이다.
0070-09-28 예루살렘 인구 어림잡아 270만 명은 있었다는게 요세푸스의 추정
0070-09-28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0070-09-28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0070-00-00 디토장군은 실바장군(로마 10군단)으로 하여금 마사다를 공격하게 한다.
0070-00-00 3년동안의 포위하고 인공축대를 쌓아 마사다 정상으로 들어 가서 그들이 본 것은 960여명의 시체였다.
0073-00-00 로마-마사다 요새에서 ( 유대인 960여명 전원사망)
0073-00-00 그것은 마지막인 것을 안 지도자 엘리아젤 벤 야일의 제안에 따라
0073-00-00 로마의 노예가 되기 보다 스스로의 죽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0075-00-00 유대전쟁사(~A.D79년 )
0090-00-00 마태복음 저작( A.D 90년경 ) 유다의 배신강조
0093-00-00 유대인 연대기 출간
0095-00-00 요한게시록 ( ~AD97년 )
0100-00-00 예루살렘-초기기독교 성서책없음.수많은 유파가 난립.교회건물없음/그노시스파(=영지주의)-라그하마디경전집필자들
0115-00-00 임마누엘, 사망 슈리나가르에 묻힘. 세 아들을 남김.
0115-00-00 요한복음 작성 ( ~AD180년 ) 유다악의화신강조
0170-00-00 로마-기독교타압
0180-00-00 유다복음서-이단이다
0189-00-00 임마누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고 가르침들은 다시 씌어져 기독교를 만들게 되다.
0189-00-00
0203-00-00
0203-06-28 이레나에우스( Irenaeus~140년 )-사망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정리자( 선정기준모름 )
0203-00-00
A.D 208년 아르다시르 페르시스 왕위 등극( 사산조페르시아제국 시작 )
A.D 210년 티베리아에서 토라의 해설집인 미쉬나가 최종 완성된다. 미쉬나의 13개 신조는 다음과 같다.
A.D 224년 파르티아 군대(아르타바누스)-페르시스군대(아르다시르)→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 점령
A.D 226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건국(~ 651년 )
A.D 312년 콘스탄틴누스(10월28일) 전투에서 승리 [ 막센티우스패퇴]
A.D 325년 로마제국내의 모든주교모임( 콘스탄티누스 주관 ) -니케아공회의
A.D 325년 아리우스(258-336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아타나시우스(297-373 예수가 곧 하나님이다 )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지지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릴 것이라 판단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예수성자가 하나님 아버지다’라고 공인 인간의 지배 논리
A.D 326년 서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예루살렘을 정복한다.
A.D 330년 서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수도 비잔틴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꾼다.
A.D 331년 요세비우스-18권 서적 선정( 양피지인쇄 )
A.D 355년 두로tyro종교회의-아리우스파 승리→아타나시우스는 유배 [동방은 아리우스의 견해를 지지]
A.D 390년 서로마-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된다
A.D 391년 알렉산드리아 딸 도서관-그리스도교도들의 손에 파괴되었다(테오필러스주교)
A.D 395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동로마과 서로마로 분열
A.D 395년 네스토리우스- 비성모설 주장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로스 반대입장
A.D 451년 칼케돈공의회-성삼위일체 성립
A.D 451년 네스토리우스-이단으로 선고되어 페르시아로 추방
A.D 532년 디오니시우스 엑시우스-역법의 오류 (기원전 과 기원후 / 이시기 제로의 개념없음 )
A.D 602년 무아위야-사우디아라비아 메카 탄생 (~680. 4/5 다마스쿠스).
A.D 610년 비잔틴제국(~1453년)
A.D 610년 마호메트(40)-처음으로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습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한동안 무하마드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진정한 알라의 계시인지 단순한 환상인지 고민합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이때 그에게 용기를 준 것이 바로 하디자입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진정한 알라의 계시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첫 번째 신도가 됩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메디나 사람들은 메카 사람들과 달리, 무하마드와 그의 신흥 종교를 반겼습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그는 이곳에서 움마라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합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움마는 보통 교단이라고 번역되는데 움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단과 많이 다릅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움마는 신앙 공동체이면서 정치-군사 결사대였기도 합니다.
A.D 610년 마호메트(40)-교단의 수장이었던 무하마드는 종교적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가이자 군인이었습니다.
A.D 622년 마호메트 메디나를향해 메카를 떠나다(09월)( 대중들이 믿지않음..도시 떠날것을 강요 ) [이슬람 달력의 원년]
A.D 630년 마호메트-신도군(信徒軍)과 함께 메카를 정복[아라비아반도 이슬람교의 세력 통일]
A.D 632년 마호메트 사망((06월08일)
A.D 632년 이슬람 1대 칼리프-아부 바크르 (재위 632∼634).
A.D 634년 이슬람 2대 칼리프- 우마르(재위634∼644)
A.D 642년 나하반드전투(Battle of Nahvand) -아랍인과 사산 왕조가 벌인 전투. [이란이 이슬람화되는 결과]
A.D 642년 아랍군 3만 명(누만)+ 사산 왕조군15만 명(피루잔)
A.D 649년 무아위야-비잔틴 제국 키프로스 함락●
A.D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 멸망(~ 226년 )→옴미아드왕조
A.D 651년 사산 왕조의 시조인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이었다고 합니다.
A.D 651년 또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도 페르시아처럼 종교와 정치가 일치하는 사회였습니다.
A.D 651년 사실 판차탄트라의 영향 때문인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에는 설화문학이 발달했습니다.
A.D 651년 그때 나온 것이 바로 훗날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원조격인 ‘천의 이야기’입니다.
A.D 651년 천일 야화에 배경이 되는 시기도 바로 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입니다.
A.D 654년 무아위야-비잔틴 제국 로도스 함락●
A.D 655년 무아위야-아나톨리아의 리키아 해안에서 비잔틴 해군 격멸
A.D 657년 무아위야군대-시핀 전투에서 불리해지자 휴전(알리군대)
A.D 661년 이슬람 제4대 칼리프-알리(마호메트의 사위) 이라크의 쿠파에서 암살→무아위야 시리아와 이집트를 모두 장악했다
A.D 661년 이단파인 할리주교파(敎派)의 자객
A.D 661년 이슬람 제5대 칼리프-무아위야( 661~680 재위 )-공물상납을 중단하고 거의 매년 비잔틴에 원정을 계속했다
A.D 661년 옴미아드(우마이야) 왕조 (661~750 89년) [ 첫번째 이슬람 칼리프 왕조 ]Ommiad dynasty
A.D 645년(64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완전히 파괴(모슬렘 정복자 오마르(Omar) )
A.D 680년 이슬람 제6대 칼리프-야지드←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
A.D 680년 카르발라 전투(01월10일)-알리의 아들 후세인 살해
A.D 691년 압드 알 말리크에 의하여 성전 자리에 모스크바위사원(Dome of the Rock)이 세뤄진다
A.D 750년 자브 전투( 1월 25일 )-옴미야드조가 멸망
A.D 750년 아바스왕조(750~1258 509년 ) [두번째 이슬람 칼리프 왕조]
A.D 751년 탈라스평원전투(Talas) (07월)
A.D 751년 아랍제국( 지하드 이븐 살리히+갈라족 )과 당나라( 고선지 7만명 = 5만전사 2만 포로)
A.D 755년 압둘라만-세우타에서 거병
A.D 756년 압둘라만-과달키비르 전투(05월16일) [스페인 현지군대 패퇴]
A.D 756년 압둘라만-압바스왕조 창건(~1031년) ( 코르도바에 도읍 )
A.D 756년 후우마이야왕조-에스파냐에 있던 이슬람왕국(756∼1031) (코르도바 수도)
A.D 762년 아바스왕조-바그다드에 도읍을 옮겨 1258년까지 계속되었다.
A.D 768년 프랑크 왕국-샤를마뉴(768~814 재위) [로마교황은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깜짝선물을 주었습니다]
A.D 800년 신성로마제국(~1806년 )
A.D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 예루살렘왕국 건설(∼A.D 1187년 ).
A.D 1010년 보두앵 1세(볼드윈)( 1100~1118 ) [ 고드프루아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
A.D 1118년 보두앵 2세( 1118~1131 )
A.D 1131년 풀크(1131~1143)
A.D 1143년 보두앵 3세( 1143~1162 )
A.D 1162년 아말리크( 1162~1174 )
A.D 1174년 보두앵 4세( 1174~1185 )]
A.D 1185년 보두앵 5세( 1185~1186 )
A.D 1186년 기 드 뤼지냥 (1186~1187)
A.D 1177년 이슬람 살라딘의 부대기습-몽지사르 계곡에서( 11월 25일 )
A.D 1177년 볼드윈4세 기사-몽지사르 계곡에서 ( 1000명 )
A.D 1179년 예루살렘 왕국(볼드윈4세)-이슬람 살라딘 승리(마자윤에서 6월 10일 ) [ 이교도 대부분을 참수 ]
A.D 1182년 레이날드가 메카와 메디나를 정벌실패( 케락성성주 )←살라딘 케락성을 공격
A.D 1183년 마침내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살라딘●
A.D 1184년 예루살렘 왕국( 왕위계승 )
A.D 1185년 볼드윈4세 사망→급진파( 귀 드 뤼지냥 )와 신중파( 발리앙 )의 대립격화→ 4년간 휴전조약 체결
A.D 1185년 레이날드가 다시 대상들을 공격하면서 휴전결렬
A.D 1185년 살라딘-예루살렘의 볼드윈 5세에게 휴전위반에 대해 항의→레이날드에게 돌려주라고 지시
A.D 1185년 레이날드는 “나는 내 땅의 주인이다. 아랍인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며 왕명(王命)을 거부
A.D 1187년 살라딘-지하드를 선언-전 이슬람 세계의 군대가 다마스쿠스에 집결(3월)→케락성으로진군(4월)
A.D 1187년 하틴 전투전멸( 7월 4일-살라딘 승리 )→레이날드는 처형됐고 발리앙은 탈출했다●
A.D 1187년 1만5000명(십자군) +1만8000명(이슬람군)
A.D 1187년 예루살렘 점령( 살라딘 10월02일 )→발리앙협상→주민들의 몸값조건(살라딘)
A.D 1187년 발리앙이 “성 내의 모든 인간을 살해하고 이슬람 성소인 알아크사 사원을 파괴하겠다 경고
A.D 118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해 몸값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나 전투 중 붙잡힌 병사도
A.D 1187년 모두 석방해주었다. 이슬람 사원에 있던 황금 십자가를 모두 헐어버렸다(09월)●
A.D 1191년 아크레를 함락-제3차 십자군
A.D 1191년 아르수프 전투-제3차 십자군( 9월 7일 )
A.D 1192년 동양을 떠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10월 )-제3차 십자군
A.D 1193년 살라딘 다마스쿠스에서 사망(~1137년에 티크리트라)●
A.D 1199년 사자왕 리처드 1세 사망
A.D 1260년 애굽의 마멜루크에게 점령당한다(~260년간 예루살렘은 가장 황폐화 된다)
A.D 1296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 건국(~1922년)
A.D 1299년 오스만 투르크 건국
A.D 1306년 프랑스는 10만명의 유대인을 재산몰수 후 추방.
A.D 1348년 동유럽 페스트(흑사병)가 발병한다. (-50년)
A.D 1348년 유대인들의 절반 가량이 이 병으로 죽자 유대인들의 복수를 두려워한 기독교인들이
A.D 1348년 유대인들이 수원에 독을 뿌려 발생했다고 소문을 퍼트린다.
A.D 1348년 이 일로 100만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도처에서 학살 당한다.
A.D 1453년 동로마 멸망
A.D 1453년 오토만의 모하메드 2세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꾼다
A.D 1492년 스페인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쫒겨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다
A.D 1516년 오토만 터어키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A.D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예수는 유대인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한다.
A.D 1517년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대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자 그는 “유대인들은 가장 혹독한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회당과 집은 무너뜨려 집시처럼 텐트생활을 하도록 내어 쫒아야 한다.
종교서적을 갖지 못하게 하고 랍비들은 율법을 가르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어떤 직업도 가지지 못하게 하고 가장 힘든 일과 지저분한 일만 시켜야 한다.
돈많은 유대인들에게서 재산을 뺏아 개종하는 유대인들을 돕도록 해야 한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못 거둘 경우 그들을 쫒아 내야 한다(Baar, p. 21-데릭 프란스의 글에서 인용)
”고 유대인을 비난한다
A.D 1538년 그리고 슐레이만 대제-현존하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다.
A.D 1555년 로마 교황 바울 4세가 유대인을 케토(Getto)에 격리시킨다.
A.D 1776년 영국에서 유대인 법적 평등권이 부여된다.
A.D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유대인에게 평등권을 부여 받는다.
A.D 1799년 나폴레옹이 성지를 탈환하여 유대인에게 주기 위해 왔으나 악고에 패하여 돌아간다.
A.D 1860년 예루살렘성 남쪽에 처음으로 유대인 마을 예민 모세가 건설된다.
A.D 1875년 예루살렘성 밖에 하시딤 마을(메아 쉐아림)이 건설된다.
A.D
A.D 1902년에 ‘데오도르헤르츨’이 시온이즘을 정립한다.
A.D 1880-1903년 사이에 첫번째로 러시아에서 유대인 이민자가 들어온다.
A.D 1904-9년에 두번째로 동부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다.
A.D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난다.
------
이 시기에 유대인 이민자들이 동부 유럽과 독일에서 들어 온다.
1917-10-00 맥마흔선언-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A.H.맥마흔[아랍인의 독립국가 지지]
1917-11-00 영국-이스라엘의 독립에 여러가지 형태의 방해작전을 은밀히 진행한다
1917-11-00 영국의 기독교인들- 이스라엘이 세워지도록 노력한다
1917-11-00 영국통치시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통치한다 (-1948)
1917-11-00 정치적인 이유 곧 아랍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아랍국가들을 지원한다.
1919-23년에는 세번째로 동부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다.
1924-32년에는 네번째로 동부유럽에서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다.
1945-00-0 에세네파 사해문서 양피지발견-쿰란 동굴에서(한 양치기 소년에 의해서)
1947-00-0 쿰란-파피루스문서발견
1948-05-14 영국군의 철수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1948-05-14 이스라엘-독입선언
1948-05-15 이집트의 파루크 국왕+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이락의 파이살 국왕+사우디아라비아 사우드 국왕+시리아+레바논
1948-05-16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왕-서안에 진주 [예루살렘의 성지점령하는데 성공]→아랍연합분열
1948-05-15 전투의 단절은 이스라엘이 해외에서 무기를 수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였다.
1948-05-16 특히 전쟁 초기 제2차 세계대전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1948-05-17 제1차중동전쟁 시작(→1949-07-00)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유대인들의 집단 이주기간 중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이다.
4. 1948-51년 사이
1) 이스라엘 국회는 “귀환법”을 제정하였다. 그 법의 취지는 ‘모든 유대인은 이 나라에 이주해 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2) 인구가 684,000명의 새로 온 사람들은 유럽에서 온 대학살의 생존자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회교극들에서 온 난민들, 예멘(43,000)과 이라크(113,000)에서 모두 함께 비행기로 옮겨온 유대인들이었다.
3) 이주해 온 다른 민족들 - 유럽의 아쉬케나지족과 동양의 세파르디족, 다양한 문화, 습관, 전통을 가지고 있음.
4) 이 새 나라의 당장 시급한 문제 - 주택, 식량, 일자리
5) 이스라엘은 삼 년 동안 78,000채의 집을 짓고 345개의 마을을 세웠다.(과거 70년 동안 293개의 마을을 세웠음.)
6) 서양의 유대인들은 큰 금액의 돈을 기부도 하고 대출도 해 주었으나 이 기간에 이주해 온 사람은 적었다
1949-01-00 이스라엘 대표와 이집트 대표가 휴전회담시작
1949-01-00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체결
1949-00-00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휴전협정 체결
1949-00-00 이스라엘-요르단 휴전협정 체결
1949-00-0 이스라엘-시리아가 휴전협정 체결
1949-02-17 이스라엘-첫 국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렸고 차임 웨이즈만을 첫 대통령으로 뽑았다.
1949-07-00 휴전협정은 조인-아랍연맹은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봉쇄하고 이스라엘과의 영원한 전쟁을 선포했다
1949-00-00 이집트-이스라엘 선박의 스웨즈 운하 통과를 봉쇄했다.
1949-00-00 그 뒤 어느나라 선박이든 이스라엘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통과를 봉쇄했고 스웨즈 운하에 관한 UN의 결정을 무시했음
1951-00-00 이집트-남쪽 에일랏 항구로 향하는 이스라엘 선박, 특별히 석유를 실은 선박들을 간섭하기 시작했
1951-00-0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선각자의 한 사람인 하지 아민 후세이니파가 사주한 하수인에 의해서 암살-요르단 압둘라
1951-00-00 세계 시온주의 대회가 예루살렘에서 처음 열렸음
1951-00-00 서독-독일하에서 유대인들의 물질적인 손해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에 7억 1천 5백만불과
1951-00-00 개인들에게 1억불을 지불하기로 하는 배상협정에 서명했다.
1951-00-00 쿰란문서 출판
1951-00-00 이집트- 남쪽 에일랏 항구로 향하는 이스라엘 선박, 특별히 석유를 실은 선박들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1952-00-00 아랍인들의 적대행위가 계속되었다(~1956년)
1952-00-00 아랍 게릴라에 의한 끈질긴 공격으로 400명 이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고 9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음.
1952-00-00 아랍군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3천회의 무력충돌이 있었음.
1952-00-00 이집트의 자폭 전투기들이 이스라엘 영토 깊숙히 반복해서 침투하였음.
1952-00-00 UN은 이스라엘의 보복행위를 비난하였다
1952-00-00 이집트는 1949년 이스라엘 선박의 스웨즈 운하 통과를 봉쇄했다
1952-00-00 어느나라 선박이든 이스라엘로 향하는 모든 상품은 통과를 봉쇄했고 스웨즈 운하에 관한 UN의 결정을 무시했음
1955-00-00 이집트-시리아와 군사협정을 체결 요르단도 함께 서명하였다.
1955-00-00
1955-00-00
1956-10-29 ●제2차중동전쟁 시작(
1956-10-00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아랍국가들의 전쟁위협에 이스라엘은 선제공격 “시나이 작전”을 개시했다
1957-03-0 ●제2차중동전쟁 완료(
1957-03-0 이스라엘-시나이 반도로부터 철수한다. UN은 1967년까지 에집트로 하여금 더이상 게릴라 활동을 못하게 하였다.
1958-00-00 이스라엘-건국 10주년이 지났다. 다음과 같은 분야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1958-00-00 1) 새로 이주해온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구사하고 일자리를 잡았다.
1958-00-00 2) 동양계 유대인들(세파르디)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대부분 자립하게 되었다.
1958-00-00 3) 농업의 자급자족이 관개시설을 한 지역이 400% 늘어났으며 많은 지역에 나무를 심었다.
1958-00-00 4) 인구가 1백 80만으로 늘어났고 실업율은 1.4%였다. 15만 채의 집을 지었음.
1958-00-00 5) 2세들의 100%가 학교에 다녔고 학생 수는 13만명에서 55만명으로 늘었다.
1958-00-00 대학교는 4개였고 대학생 수는 만명, 1948년의 대학생 수는 1,500명이었다.
1958-00-00 6) 유대인의 문화와 영적인 유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면 정부는 예루살렘에서 세계 성경 대회를 개최했다.
1958-00-00 7) 아랍인과 두루우즈족이 사는 지역이 많이 발전됨 - 농업 생산성 600%향상,
1958-00-0 각종의 무료혜택 - 초등교육, 보헙사회 복지, 병원, 도로, 수도, 전기,
1958-00-00 위생시설, 관개시절, 선거에 참여하며 국회도 대표를 보내고 있음.
1958-00-00 이스라엘과 후진국들과의 관계(1958-59년)
1958-00-00 1)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후진국들에게 과학기술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농업분야).
1958-00-00 2) 많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대사관계를 수립했고 UN에서 그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1965-05-15 토론토 데일리 스타(보도)- 로마교황 요한 23세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잘못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1965-00-00 이스라엘에서는 다음과 같은 분야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1966-00-00)
1965-00-00 1) 농산물 수출 총계는 8,600만불에 달했다. 주로 감귤류의 수출이었다
1965-00-00 2) 대수로(大水路)가 완성되어 요르단강 상유에서 남쪽의 네게브사막에 물을 끌어 들였다.
1965-00-00 3) 생필품(냉장고, 라디오)산업이 발전하였다.
1965-00-00 4) 다른 한편 이주민의 숫자가 줄어 들어 (1965년에는 3만명, 1966년에는 1만 6천명) 건설업과 관련사업이 침체하기 시작했다
1967-00-00 6일 전쟁 바로 앞에 있었던 사건들
1967-00-00 1)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알. 파타가 사보타지를 위해 훈련된 테러분자들을 이스라엘에 침투시킴.
1967-00-00 2) 시리아는 갈릴리에 있는 키부트 마을을 폭격하였다.
1967-00-00 3) 5월 16일 낫세르는 시나이에서 UN 평화유지군을 추방했다.
1967-00-00 4) 5월 24일 낫세르는 아카바 만과 에일랏 항구의 입구인 타이란 해협을 봉쇄했다.
1967-00-00 5) 5월 26일 낫세르는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를 준비가 완료됐다.”고 선포했다.
1967-00-00 6) 5월 30일 후세인왕은 요르단의 군대를 낫세르 지휘로 넘겨주었다.
1967-00-00 7) 6월 4일 이라크도 요르단의 뒤를 따랐다.
1967-06-05 이스라엘-요르단의 후세인 왕에게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통보
1967-06-09 이스라엘-시나이를 거쳐 스웨즈운하까지 밀고 들어가 가자지역을 점령했다.
1967-06-10 3) 개방정책을 채택하였고 요르단의 센왕도 찬성했다.
1967-06-11 유다 지역과 사마리아지역 그리고 가자지역 아랍인들은 아랍국을 자유롭게 오가며 요르단에서 물건을
1968-00-00 이스라엘-장기 소모 전쟁이 계속된다. (~73년 )
1968-00-00 1) 이집트는 시나이 국경을 계속 괴롭힘.
1968-00-00 2) 소련의 이집트와의 관계 증가, 소련 전투기와 소련 조종사 그리고 소련 요원들이
1968-00-00 근무하고 있는 대공미사일 기지가 이집트에 많이 생겼다.
1968-00-00 3) 시리아도 소련의 원조를 받았다. 소련제 케츄카 로켓트로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을 정기적으로 포격했다.
1968-00-00 4) 팔레스타인 테러분자들이 레바논 국경을 통해서 북쪽으로부터 테러활동을 증가시켰다.
1968-00-0 후세인 왕은 팔레스타인 테러분자 캠프를 폭격해서 1970년 그들을 요르단에서 내쫓았다.
1968-00-00 그들은 납부 레바논에 옮겨 살았고 그곳을 “파타지역”이라 불렀다.
1968-00-00 5) 이스라엘 밖에서 아랍인들의 테러가 늘어남. 비행기 납치. 1971년 뮌휀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의 살해.
1973-10-05 욤 키퍼 전쟁 직전에 있었던 사건들
1973-10-05 골다 메이어 수상(공격이 임박한 확실한 조짐)- 통보 받고 공격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선제 공습공격을 지시했다.
1973-10-14 미국- 이스라엘에 탄약과 부속품을 공수하기 시작했다
1973-10-15 이스라엘-시리아쪽의 휴전선 넘어로 12-15마일까지 밀고 들어갔다(다마스커스도 25마일 안으로 들어왔다.)
1973-10-16 이스라엘-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들어 갔고 이집트 육군이 구축한 전선 뒤에 있는 미사일 기지와 군사시설을 폭격
1973-10-21 소련- 미국에 휴전을 제의
1973-10-22 이스라엘-이에 동의했다
1973-10-23 이집트와 시리아는 계속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12시간동안 참다가 반격했다.
1973-10-24 10월 25일에서 11월 사이에 휴전이 성립된다
1973-10-30 이스라엘-이집트, 고위군사회담 개최
1973-12-0 석유파동 ( $2.59에서 12월 $11.65 )
1973-00-00 이스라엘안에서 1575회의 테러가 있었다 (~1979
첫댓글 그렇구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