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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살찌웠던 實事求是 세종대왕
차기대선 주목되는 ‘세종의 知行合一 천재적 리더십’
제18대 대통령이 선거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글로벌 대웅비를 위해 우리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지도자를 대망해야 한다. 한국을 세계사 중심축의 대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막중한 책무가 부여된 차기 지도자의 품성과 덕목, 자질과 역량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당대의 國內外 정세를 꿰뚫었던 혜안의 왕으로서 널리 칭송되고 새로이 조명되는 세종의 진면목을 조명하는 지면을 마련하였다.(편집자주)
‘성군’ ‘대왕’이라는 극존칭의 대명사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조선의 역대 왕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지금껏지 지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길이 남을 귀감과 모범의 왕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정식 시호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인 세종은 22세에 즉위하여 재위 기간은 32년으로 54세에 민초들과 작별을 고했다.
1397년 세종은 태종(정안대군)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이다. 1408년(태종 8년)에 충녕군(忠寧君)이 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가 되었다.
이후 두 달 뒤인 1418년 8월에 왕위에 올랐다. 원래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왕세자였으나, 태종(太宗)은 자신이 고되게 일군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세종의 위대한 창조적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 초석을 다진 시기였다. 세종의 시대는 집현전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겨레 문화 제고의 주춧돌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다방면에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는바,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을 남긴 세종의 위대함은 애민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 實事求是 知行合一의 표본 세종!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호학(好學)의 군주이다. 세종의 독서는 유학의 경전에 머물지 않았다. 역사∙ 법학∙ 천문∙ 음악∙ 의학 다방면에서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구축했다. 경서(經書)는 100번씩 탐독했다. 역사서와 기타 다른 책들은 필히 30번씩 숙지하였다 한다.
“몹시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밤새 글을 읽어, 나는 그 아이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런데도 나의 큰 책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부친 태종의 말이다.
세종은 단순히 다독(多讀)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비교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 그 내용과 이치를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진전된 성찰을 학자들에게 촉구하였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유학의 경전과 사서를 규합하여 실용적 제도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부 사항까지 규정해나갔다. 작은 법규 하나조차 그 제도의 역사를 면밀히 고찰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분석한 뒤 그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 다른 제도와의 관련성 및 현실적 상황까지 고려했다.
물론 세종 홀로 이러한 경이적 업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하여,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연구를 분담시켰다. 이렇게 해서 윤리∙ 농업∙ 지리∙ 측량∙ 수학∙ 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 관료∙ 조세∙ 재정∙ 형법∙ 군수∙ 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혁신하였다. 당대의 규정들은 후일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 自主的 主體的 문화의 꽃을 피우다
◆ 세계사적 기념비 ‘훈민정음 창제’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 문자로 평가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을 시켜서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세종은 중국과 우리나라 말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겨워하는 모습에 애통하면서 중국 글자인 한자를 대체하여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우리 문자 제정에 깊이 고민했다. 그리하여 집현전을 통해 길러 낸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이개 등 패기만만한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고, 1446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여 우부우부(愚夫愚婦)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는 세종의 메시지는 너무 감격적이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라고 훈민정음 서문의 신하 정인지가 쓴 글에서 애민사상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하나의 감동적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하여 본다. 세종 28년(48세)은 한글이 반포된 해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2년 전 세종 26년 2월 20일에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하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등은 언문제작의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만들어서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夷狄)과 같아지려 하는가? 등등 조목 조목 사유를 들어 격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읽은 세종대왕은 진노하여 소리쳤다. “너희가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이 한마디는 이들을 침묵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최만리 등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단 하루만인 다음날에 방면을 했다.이번에는 신하들이 놀라서 방면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세종대왕의 답변은 그야말로 성군의 자질을 그대로 노정시킨다. “비록 최만리 등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어도 그 상소의 내용이 논리가 정연하여 그 학문을 깊이를 가상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 조선의 獨自的 음악을 태동
세종은 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모든 음 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첫 창안하였다.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을 세종대왕이 친히 작곡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관습도감은 1393년(태조 2년)에 설치되어 1457년(세조 3년) 악학(樂學)과 병합될 때까지 60여 년간 봉상시(奉常寺), 전악서(典樂署), 아악서(雅樂署) 및 악학(樂學) 등 예조 산하의 다른 음악기관과 함께 주로 음악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중국계 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악보의 일종인 정간보(井間譜)를 새로이 만들어 냈으며, 맹사성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한국 고유의 음악인 향악(鄕樂)을 뒷받침하였다.
당시의 대부분 음악과 악기는 중국 일색이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악기와 음악의 정비에 착수했다. 폐물로 전락한 가야금, 거문고, 해금 등 모든 악기를 수리하여 재정비를 하였지만 석경(石磬)만은 복원할 수가 없었다. 악기의 일종인 ‘석경’은 큰 ‘기역자’처럼 생긴 하얀 돌을 크기순으로 열두 개를 매달아놓고 막대기로 치면 소리가 난다. 이를 다시 구할 수 없어 복원이 난망했다.
세종은 음악가 박연(朴堧)을 호출하여 이렇게 명한다. “그대가 목숨을 버려서라도 찾으라.” 음률의 대가인 박연은 국악을 정비하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었다. 그는 몇 해에 걸쳐 전국의 산천을 누빈 끝에 마침내 이를 찾아냈다.
조선의 고유 악기가 모두 복원되었지만 이번에는 악보가 없었다. 악사들이 이 사실을 세종에게 고하자, 세종대왕은 친히 작곡한 악보를 하사한다. 지음(知音)을 터득한 군왕에 의해 조선의 음률이 완벽하게 복원되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 역법(曆法), 과학기술 르네상스 일구다
세종은 이천과 장영실에게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하였으며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의 과학 기구도 발명하였다. 또한 활자 기술과 인쇄 기술을 발전시켰다.
혼천의는 고대 중국에서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던 장치로서 지평선을 나타내는 둥근 고리와 지평선에 직각으로 교차하는 자오선을 나타내는 둥근 고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하늘의 적도와 위도 따위를 나타내는 눈금이 달린 원형의 고리를 한데 짜 맞추어 만들었다.
세종은 당대의 과학자들인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을 불러 우리에게 적합한 일력(日曆:양력)과 월력(月曆:음력)을 정립시켰다. 세종은 이들에게 원나라의 ‘수지역법(授時曆法)’ 명나라의 ‘통궤역법(通軌曆法)’ 심지어 아라비아의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까지를 참조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조선역법을 제정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주체적으로 우리의 시간을 소유하게 되었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천문, 역법, 의상(儀象)등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내도록 했다.
◆ 천문학의 융성
천문학을 주관하던 곳은 서운관(書雲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簡儀臺)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너무 미흡하여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天文儀象)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천문 연구에 본격 돌입할 수 있었다.
▽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그리고 방위(方位)를 바로 잡아서 동서남북을 표시하는 수평판(水平板)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조합하였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 혼천의(渾天儀)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渾天儀)는 별과 별자리를 천구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표시한 천구의 모형인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 독창적 시계의 발명
세종은 흠경각(欽敬閣)을 세워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정밀한 시계를 만들어 자연현상과 시간의 흐름을 조화롭게 융합한 대선각자였다.
▽ 해시계
해시계 제작에 공을 들인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해시계는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仰釜日晷)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일구(天平日晷)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定南日晷)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仰釜日晷)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자격루는 일종의 자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고안되었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두철미 주도면밀하게 고증한 끝에 선보인 독창적 산물로서 당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월등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 세계 최초의 측우기
세종의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 분포를 측정하는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 장비이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여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진전을 이루었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물의 높낮이를 재는 수표(水標)를 만들어 청계천 다리에 세우고 홍수에 대비하게 하였다.
■ 자주국방의 토대를 쌓다
세종의 외치(外治)에서 부각되는 것은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 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 관계에서는 처녀진헌(處女進獻, 여자를 바침)과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책을 교차하였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6진(六鎭)을 구축하면서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인구이주정책인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 잡힌 발전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세종 1년에는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宗貞盛)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쓰시마섬(對馬島) 도주(島主)에게 내왕을 허락한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이들에게 하사하는 쌀과 콩인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왕으로부터 통상 허가의 증명서를 받은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세종은 이민족의 정벌에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일명 무기의 현대화에 힘쓰면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세종 당대에는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되어 각종 총통을 대형총통에서부터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라 부르고, 명나라 초의 소총통의 형식에 속하는 휴대용 화기를 승자총통이라 이름 지었다.
세종은 화포주조소인 ‘야소’를 세워 화포의 사정거리 증진에 골몰하였고, 그 표본을 주조하여 일발다전화포(一發多箭火砲)의 사용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소량의 화약으로 천자화포를 1천보나 나갈 만큼 발전하게 되었으며, 개량된 규격에 따라 모든 화포를 새로 주조하게 하여 새로운 형식의 화포가 전국에 배치되었다.
특히 신기전(神機箭)은 고려 말 최무선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 30년인 1448년에 개량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신기전기(神機箭機)는 지름 46 mm의 둥근 나무통 1백 개를 나무상자 속에 7층으로 쌓은 것으로 이 나무 구멍에 중·소신기전 1백 개를 꽂고 화차의 발사 각도를 조절한 후, 각 줄의 신기전 점화선을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15발씩 차례로 1백발이 발사됐다 한다. 현대의 다연발 로켓포과 비견된다 할 수 있다.
세종 30년인 1448년에는 모든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림으로 표시하고 정확한 규격을 기입하여 총통등록(銃筒騰錄)을 편찬, 간행하여 조선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종래 중국식 화기의 모방에서 탈피하여 조선 특유의 형식과 규격을 갖춘 독자적 화기가 태동된다. 조선의 모든 화포는 ‘총통등록’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이것은 그 후 조선 후기에 간행된 ‘융원필비’(戎垣必備)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 ‘인재등용’ ‘愛民사상’의 극치
▼ 적재적소에 유능한 인재등용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현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등 어질고 능력 있는 신하를 무려 20여 년 이나 지근거리에 두었다.
그런 세종대왕의 혜안이 변계량, 정인지, 김종서, 최항, 신숙주, 성삼문, 장영실 등 미래를 이끌어갈 능력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무한 잠재능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자판을 조립하는 방식이라 할 만한 갑인자(甲寅字) 개발은 너무 경이적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 전의 금속활자는 완성형 한글코드였다면 갑인자는 조합형 한글코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 인쇄 능률이 향상된 것은 불문가지이다. 아울러 종이 생산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기관인 ‘조지서(造紙署)’를 통해 다양한 종이를 생산하여 활자의 개발과 더불어 수많은 서적을 신속하게 다량 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 풀뿌리 민주주의 ‘애민사상’
세종은 조선시대 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 못지않게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다. 은혜로운 왕이었다. 왕이 너무 관대하면 백성들이 요행수를 바라게 된다며 신하들이 극력 반대했지만, 세종은 위민(爲民) 정책을 무수히 펼쳤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전)을 베풀었고, 사면령을 빈번히 내렸으며, 징발된 군사들은 기한 전에 돌려보냈다. 노비의 처우를 개선하기도 했다. 주인이 혹형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고, 실수로라도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전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었으며 출산 1개월 전에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종은 백성들의 심성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문맹의 시절이었기에 한 쪽은 글자로 적었고, 다른 한 쪽은 그림을 그려 넣는 식으로 하였으니 이는 애민사상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法治主義 확립 ‘法典’ 정비에 박차
세종은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법전 정비에 힘을 기울여 법치주의를 확립했다. 백성들이 억울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세종 4년부터 시작한 속육전(續六典) 편찬 사업이 세종 17년에 이르러 비로소 완결되었다. 또 세종 28년에는 공법(貢法)을 확정하여 조선 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도록 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적지 않았기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해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에 의거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 마다 측량하여 일종의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을 작성하도록 했다.
세종은 지리지 편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는 1432년(세종 14년) 1월에 편찬된 조선왕조 최초의 지리서이다. 이 지리책은 조선 인문지리학(人文地理學)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地理志)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바야흐로 조선시대 지리학은 이 책의 편찬으로 말미암아 음양풍수지리(陰陽風水地理)의 수준에서 탈피하여 과학으로서의 인문지리학으로 발전하는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편찬 과정은 각도(各道)에 통첩을 보내어 조정에서 정해준 양식에 따라 지지 편찬의 자료를 조사 ·기록하여 춘추관(春秋館)으로 올려 보내었다. 여기서 양식은, 도(道) 및 각 도의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연혁과 변천, 도내(道內)의 인구 및 호구수 등에 걸쳐 매우 자세한 12개 항목에 이르는 내용이다.
또한 세종실록 중에서도 세종실록지리지 8권 8책은 당시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윤회, 신장 등의 학자가 전국 338개 부, 목, 도호부, 군, 현 각 지명별로 연혁, 정치, 경제, 인구, 재정, 산업, 군비, 교통 등의 조직과 기구를 망라한 것으로 오늘날 인문지리서의 선구적 책자이며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 의서(醫書)와 농서(農書)에도 리더십발휘
▼ 農書 ‘농사직설(農事直說)’
농사직설은 1429년(세종 11년)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정초(鄭招), 변효문(卞孝文) 등이 편찬한 1책의 농서이다. 이듬해 각도의 감사와 주 · 부 · 군 · 현 및 경중(京中)의 2품 이상에게 널리 나누어 주었다.
농사직설의 내용이 대부분 중요 곡식류에 국한되고 간략한 기술이나,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법으로 편찬된 책의 효시이다. 또한 이것은 지방 권농관(勸農官)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어 속속 간행된 여러 가지 농서 출현의 초석이 되었다.
이처럼 ‘농사직설’은 지역에 따라 적절한 농법을 수록하여 우리 실정과 거리가 있는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하는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비곡(備穀 : 종자의 선택과 저장, 종자처리 등), 지경(地耕 : 논밭갈이), 종마(種麻 : 삼의 파종과 재배, 수확), 종도(種稻 : 벼의 재배), 종서속(種黍粟 : 기장 · 조 · 수수의 재배), 종직(種稷 : 피의 재배), 종대두소두(種大豆小豆 : 콩 · 팥 · 녹두의 재배), 종맥(種麥 : 보리와 밀의 재배), 종호마(種胡麻 : 참깨 가꾸기) · 종교맥(種蕎麥 : 메밀 재배) 등 10항목으로 구분되어 기술되어 있다.
▼ 醫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고려 중엽 이후 정치·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백성들은 값비싼 중국 약재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향약고방(鄕藥古方),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등의 향약방서(鄕藥方書)들을 간행·보급하여 주변의 값싼 약재들을 활용하도록 했고, 조선 초기 역시 이러한 정책이 지속되었다.
실제로 태조는 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을 두어 일반인들을 치료하는 한편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했다. 세종은 이러한 향약장려정책을 계승하여 1431년 책의 편찬을 집현전 학지들에게 명하였다.
이 책에는 당대의 과학적인 학문풍토에 힘입어 ‘향약제생집성방’을 기본으로 959종의 병증과 17만 706종의 방문(方文), 1,416조(條)의 침구법, 향약본초, 표제법과 간행 당시의 임상경험 및 모든 향약 등에 대한 설명을 총망라하고 있다.
여기서 ‘향약(鄕藥)’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토양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의미한 것인데, 중국산의 약을 ‘당재(唐材)’라고 부르는 데 대한 우리식 총칭이다. 세종은 이 책을 편집하기 위하여 먼저 향약과 당재를 비교, 연구하고, 각 도 각 읍에서 생산되는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고, 그 다음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반포하도록 하였다.
▼ 醫書 ‘고금의방유취(古今醫方類聚)’
365권 분량으로 목판본인 고금의방유취(古今醫方類聚)는 1445년(세종 27년)에 간행된 의서(醫書)로서 당대의 동양의학백과사전이라 할 만한하다. 고금의방유취는 조선과 중국의 의서 153종을 집대성하여 모든 병증들을 병문(病文)으로 나누고 각 병문에 대한 고금의 약방(藥方)들을 원문 그대로 취사선택해 게재했다.
1397년 4월 10일 출생한 세종!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국사를 돌보던 세종은 1450년 2월 17일 결국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종(文宗)이고, 둘째 아들은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世祖)이다.
능의 이름인 능호(陵號)는 영릉(英陵)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소재한다.
첫댓글 우리도 훌륭한 대통령 뽑아 3회 연임 가능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매2년 국회의원 선거를 통한 중간평가 실시하여
문제가 있으면 물러나게 합시다. 훌륭한 대통령은 12년 연임하게하고 못난자질의 대통령은 2년만에 교체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