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역사 제3장 : 첸라 왕국 (진랍 왕조)
Chenla Kingdom
첸라(Chenla) : [크메르어] ចេនឡា) / [한자] 眞臘(진랍) / [베트남어] Chân Lạp
'첸라'는 중국에서 푸난(Funan, 扶南: 1세기~550년) 왕국이 멸망한 이후의 캄보디아를 지칭하던 말이다. 중국 원나라에서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에 사신으로 왔던 주달관(Zhou Daguan, 周達觀: 1266~1346)은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저술하여 13세기에도 '진랍'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첸라'라는 용어를 6세기말부터 9세기초 사이에 존재했던 크메르족 국가들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첸라 왕국은 남인도에 존재했던 빨라와 왕조(Pallava dynasty: 2세기~9세기) 및 찰루꺄 왕조(Chalukya dynasty: 543~753)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주1)
소위 "당렉 부족장들"(Dangrek Chieftains)(주2)로 불리는 세력의 시작은 모호한 상태이다. '당렉 부족장들'이란 당렉산맥(Dangrek Mountain)을 중심으로 그 남북에 산재했던 소규모 군장국가(chiefdom)들을 말한다.
초기의 일부 비문들에는 최초의 왕자들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스떵 뜨라잉(Stung Treng) 지역에서 발견된 '발깐텔'(Vãl Kantél) 비석(주3)은 산스끄리뜨어(Sanskrit)로 작성됐는데, 이 비문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공주의 아버지가 위라와르만(Vīravarman, 비라바르만) 왕이라고 기록했다. 여기에 기록된 공주는 소마샤르만(Somaśarman)이란 이름의 상류층 가문의 자제와 결혼했고, 바와와르만(Bhavavarman, 바바바르만)이란 이름을 가진 왕자의 누이였다. 바삭(Basăk/Laos)에서 발견된 깐낙온(Čăn Năk’ôn) 비문(분류번호: K. 363)(주4)에 따르면, 위라와르만 왕은 또한 찌뜨라세나(Citrasena) 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찟뜨라세나는 바와바르만의 동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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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바르만 왕자와 찌뜨라세나 왕자는 동일한 어머니의 자식들이었지만 아버지가 달랐음이 명백하다. 그 점은 오늘날의 태국 영토에서 발견된 시텝(Si Tep) 비문(주5)의 내용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 비문은 바와와르만 왕자가 쁘라티윈드라와르마(Prathivīndravarman)의 아들이자 짜끄라와르띤(Cakravartin)의 손자리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태국의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 도에서 발견된 빡문(Pak Mun) 비문(주6)은 위라와르만 왕자의 아버지를 사르와바우마(Sārvabhauma)로 기록하고 있다.
이 비문들은 모두 이들 왕들이 커다란 영토를 통치했다고 말한다. 초창기 도읍이었던 이샤나뿌라(śānapura)는 캄보디아의 삼보 쁘레이꾹(Sambor Prei Kuk) 고고학 유적지에 남아 있다(☞ 지도 상의 위치). 이곳에서 출토된 로반로마스(Robaṅ Romãs) 비문에 따르면, 바와와르만 왕, 마헨드라와르만(Mahendravarman: 통치칭호는 '찌뜨라세나') 왕, 이샤나와르만(Īśānavarman) 왕의 치하에서 순차적으로 봉신이었던 나라싱하굽따(Narasiṃhagupta)가 바와와르만 통치기인 서기 598년 4월 13일에 이 비석을 세웠으며, 바와와르만 왕을 '깔루빠와수데와'(Kalpavāsudeva: =위슈누 신[Vishnu]) 같은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주7)
이러한 내용은 당나라(Tang Dynasty, 唐朝: [존속기간] 618~907)의 위징(Wèi Zhēng , 魏徵: 580~643)이 서기 636년에 편찬한 사서인 <수서>(Book of Sui, 隋書)가 언급한 첸라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수서>는 7세기의 첸라를 통치한 인물이 찌뜨라세나와 이샤나와르만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샤나와르만 왕은 도읍을 이샤나뿌라에 두었고,(주8) 선왕인 바와와르만 1세는 여전히 바와뿌라(Bhavapura)에 머물고 있었는데, 바와뿌라는 오늘날 도시 인근에 위치한 탈라바리밧(Thala Barivat) 근처로 추정되고 있다(위치: 북위 13°33’, 동경 105°57’).(주9)
(주1) Some Aspects of Asian History and Culture by Upendra Thakur p.2.
(주2) Michael Vickery, Society, Economics, and Politics in pre-Angkor Cambodia: The 7th-8th centuries. Tokyo: The Center for East Asian Cultural Studies for Unesco, The Toyo Bunko, 1998. p.71 ff.
(주3) ISCC = Inscriptions sanscrites de Campā et du Cambodge. [Éd. et trad.] par Abel Bergaigne et A[uguste] Barth. Paris: Klincksieck 1885~1893. No.IV, p.28 ff.
(주4) A[uguste] Barth, «Inscription sanskrite du Phou Lokhon (Laos)», Album Kern; opstellen geschreven ter eere van H[endrik] Kern, Leiden: E.J. Brill 1903, pp.37~40.
(주5) IC = Inscriptions du Cambodge. Éditées et traduites par G[eorge] Cœdès. Vol. I-VIII. Hanoi, Paris: Impr. Extrême-Orient; de Boccard [etc.] 1937-1966 (Collection de Textes et Documents sur l’Indochine: III). Vol.VII, pp.156~157.
(주6) Erik Seidenfaden, «Complément à l’inventaire descriptif des Monuments du Cambodge pour les quatre provinces du Siam Oriental»,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XII (1922), p.57.
(주7) George Cœdès,«Études Cambodgiennes XXXVI: Quelques précisions sur la fin de Fou-nan»,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LIII (1943), pp.5~8.
(주8) Paul Pelliot, «Le Fou-nan.»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III (1903), p.278.
(주9) Paul Lévy,«Thala Bŏrivăt ou Stu’ṅ Trèṅ: sites de la capitale du souverain khmer Bhavavarman Ier», Journal Asiatique 258 (1970), pp.113~129. |
첸라의 역사
푸난 왕국의 고대 영토들을 가까스로 흡수한 첸라의 국왕은 이샤나와르만이었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와 송기(Song Qi, 宋祁: 998~1061)가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Xīn Táng shū, 新唐書)는 이 때문에 이샤나와르만을 푸난 왕국의 사실상의 정복자로 기록했다. 이샤나와르만 왕의 통치기에 관해 가장 일찍 알려진 연대는 그가 616~617년 사이에 중국의 수나라(Sui dynasty, 隋: [존속기간] 581~618)에 파견한 첫번째 사신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분명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직접 세운 비석들에서도 연대가 나타나는데, 그 중 한 비문은 627년 9월 13일 이샤나뿌라에 세워진 것이고(분류번호: K. 604),(주10) 오늘날 태국의 카우너이(Khău Nôy)에 637년 5월 7일에 세워진 것이다(분류번호: K. 506).(주11)
이샤나와르만 왕은 637년에 사망했는데, 그의 비문들은 '바와와르만(2세)'이라는 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바와와르만(2세)에 관한 연대가 기록된 비문은 644년 1월 5일 따께우(Tà Kev)에 세운 비문(분류번호: K. 79)(주12)과 655년 3월 25일 따께우 남쪽의 뽄냐호(Poñā Hòr)에 세운 비문(K. 21)(주13) 뿐이다.
연대 미상의 K. 1142호 비문에 따르면,(주14) 이후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짠드라와르만'(Candravarman)이란 이름의 왕으로 보이는데, 이샤나와르만 왕의 직계였겠지만 그 출신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알 수가 없다.
짠드라와르만 왕의 아들은 유명한 자야와르만 1세(Jayavarman I: 자야바르만)였다. 그의 연대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쁘레이 웨잉(Prei Vêṅ, Prey Veng) 도의 뚜올 꼭쁘라(Tûol Kôk Práḥ)에서 출토된 비문(K. 493)(주15)과 밧덤벙(Bằttaṃbaṅ, Battambang, 바탐방) 도의 바셋(Bàsêt)에서 출토된 비문(K. 447)(주16)이다. 이들 두 비문은 모두 657년 6월 14일에 세워졌다. 자야와르만 1세의 치세에서 세워진 비문은 총 19~20개이며, 그 지역적 분포는 북쪽으로는 현재의 라오스 참빠삭(Champasak) 인근 왓 푸(Wat Phū, Vat Phou, Vat Phu'u)에서 남으로는 태국만(Gulf of Thailand)에 이른다.
<신당서>에 따르면, 첸라 왕국은 638~639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위한 사신을 파견했고, 영휘(永徽: 650~655) 연간이 끝난 후 캄보디아 북서쪽에 위치한 또 다른 공국들을 정복했다.(주17) 자야와르만 1세의 치세는 30년 가량 지속됐고, 필시 690년 이후의 시점에서 끝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발견된 그에 관한 마지막 비문은 K. 561호 비문인데,(주18) 그 건립 연대는 681~682년 사이이다.
자야와르만 1세가 죽은 후 첸라 왕국은 혼란에 빠졌고, 8세기 초 무렵엔 왕국이 많은 수의 공국들로 갈라졌다. 앙코르(Angkor, 엉꼬: 오늘날의 시엠립[Siem Reap]) 지역을 다스린 것은 자야와르만 1세의 딸 자야데위(Jayadevī) 공주였다. 그녀가 713년 4월 5일 서-버러이(Western Bàrày)에 세운 K. 904호 비문(주19)을 보면, "나쁜 시절"이란 불만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의 사서들에 따르면, 첸라 왕국은 신룡(神龍: 705~707) 연간이 끝난 후, 육첸라(Land Zhēnlà, 陸真臘: 문단[文單]이나 파루[婆鏤]로도 지칭)와 수첸라(Water Zhēnlà, 水真臘)로 분열했고,(주20) 푸난 왕국의 왕등과 첸라 왕국의 첫번째 왕이 병립하던 시대와 같은 혼란기로 되돌아갔다.
쉬루따와르만(Śrutavarman)과 쉬레슈타와르만(Śreṣṭhavarman: 혹은 뿌슈까락샤[Puṣkarākṣa])과 같은 왕들은 훨씬 후대인 앙코르 시대(=크메르 제국) 비문들에만 등장하는데, 그들의 역사적 실존 여부에는 의혹이 많다. 우리가 '육첸라'라는 용어로써 알 수 있는 내용은 717년에 중국(=당나라)으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 뿐이다. 750년에 중국으로 갔던 또 다른 사신들은 필시 수첸라에서 보낸 사신들일 것이다.
중국의 연대기들에 따르면, 문단(文單: 육첸라) 왕의 아들이 753년 중국을 방문하여, 이듬해 남조(Nánzhāo, 南詔)를 공격하는 당나라 원정군에 합류했다.(주21) 771년 문단의 사신들이 다녀간 후, 771년 12월 13일 문단의 왕세자 파미(Pómí, 婆彌)가 당나라 황궁을 방문하여, 황제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3정승과 동급의 품계)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799년에는 '이두급'(Lītóují, 李頭及)이란 이름의 문단에서 온 사신도 중국 황실의 품계를 제수받았다.
803~804년 사이에 세워진 K. 124호 비문(주22)은 샴부뿌라(Śambhupura)라는 국가의 통치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샴부뿌라의 통치는 인드라로까(Indraloka)라는 왕 이후에 느리빠뗀드라데위(Nṛpatendradevī), 자옌드라바(Jayendrabhā), 졔슈타랴(Jyeṣṭhāryā)라는 3인의 여왕들로 차례로 계승됐다.
'자야와르만'(Jayavarman)이란 통치자를 언급하는 비문은 2개이다. 하나는 껌뽕 짬(Kompoṅ Čàṃ, Kompong Cham) 남쪽에서 출토된 K. 103호 비문으로 770년 4월 20일에 세워진 것이고,(주23) 다른 하나는 끄라쩨(Kračèḥ, Kratie) 인근 샴부뿌라(Śambhupura)의 로복스롯(Lobŏ’k Srót)에서 출토된 K. 134호 비문으로 781년에 세워진 것이다.(주24) 프랑스 학자인 조르쥬 세데스(George Coedès: 1886~1969)는 이 왕을 '자야와르만 아이비스'(Jayavarman Ibis)라고 불렀는데, 마이클 빅케리(Michael Vickery)가 지적한 바 있듯이, 필시 이 인물이 바로 앙코르제국(=크메르제국)을 건국한 자야와르만 2세(Jayavarman II: 770~850, [재위] 802~850)일 것이다. 빅케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자야와르만 2세는 남쪽 출신으로서 그 어떤 알려진 왕들보다 가치를 지닌다. 그는 특히 위야다뿌라(Vyādhapura)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위야다뿌라는 앙코르시대 이전의 비문 중 오직 하나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비문은 K. 109호 비문으로서, 655년에 건립됐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656년 2월 10일에 세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앙코르 시대에 세워진 16건의 문건 중 마지막 것은 1069년(1069-5-3)에 세워진 것으로 빨할(Pàlhàl)에서 출토된 K. 449호 비문인데, (중 략) 그 중 2개는 자야와르만 2세가 위야다뿌라의 백성들을 밧덤벙으로 이주시켜 정착시켰다는 명확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주25) |
(주10) Louis Finot, «Nouvelles inscriptions du Cambodge»,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XXVIII (1928), p.44 ff.
(주11) IC, Vol.V, p.23.
(주12) IC, Vol.II, p.69 ff.
(주13) The Sanskrit text and a French translation was published in ISCC, pp. 21-26, the Khmer text and a French translation in IC V, pp.5~6.
(주14) MÉC = Manuel d’épigraphie du Cambodge. Yoshiaki Ishizawa, Claude Jacques, Khin Sok. Avec la collaboration de: Uraisi Varasarin, Michael Vickery, Tatsuro Yamamoto. Vol. I, Paris: École Français d’Extrême-Orient 2007. pp.47~53.
(주15) IC, Vol.II, pp.149~152.
(주16) IC, Vol.II, pp.193~195.
(주17) O[liver] W[illiam] Wolters, "North-western Cambodia in the seventh century",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37 (1974), pp.374~375.
(주18) IC, Vol.I, pp.39~44.
(주19) IC, Vol.IV, pp.54~63.
(주20) Paul Pelliot, «Deux itinér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 du VIIIe siècle»,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IV (1904), p.211.
(주21) Paul Pelliot, «Deux itinér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 du VIIIe siècle»,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ême Orient IV (1904), p.212.
(주22) IC, Vol.III, pp.170~174..
(주23) IC, Vol.V, p.33.
(주24) IC, Vol.II, p.92 ff.
(주25) Michael Vickery, Society, Economics, and Politics in pre-Angkor Cambodia: The 7th-8th centuries. p.396. |
첸라의 통치자 목록
순서 |
왕의 이름 |
재위기간 |
1 |
바와와르만 1세 (Bhavavarman I) |
550–600 |
2 |
마헨드라와르만 (Mohendravarman) |
600–616 |
3 |
이샤나와르만 1세 (Isanavarman I) |
616–635 |
4 |
바와와르만 2세 (Bhavavarman II) |
639–657 |
5 |
자야와르만 1세 (Jayavarman I) |
657–681 |
6 |
자야데위 여왕 (Queen Jayavedi) |
681–713 |
7 |
삼부와르만 (Sambhuvarman) |
713–716 |
8 |
뿌슈까락샤 (Pushkaraksha) |
716–730 |
9 |
삼부와르만 (Sambhuvarman) |
730–760 |
10 |
라젠드라와르만 1세 (Rajendravarman I) |
760–780 |
11 |
마히빠띠와르만 (Mahipativarman) |
780–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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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카페 캄보디아 역사 게시물 중 가장 미흡했던 부분인데요..
5년8개월만에 증보하여 개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