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바라며
제4대 총동창회장 권기호
올해로 나의 모교 금계중학교가 개교 55주년을 맞이한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60여년 이상 걸어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건대, 학창시절 추억을 말해보라 하면 아마 금계중학교에 다니던 때가 아닐까 합니다.
6.25 전란이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개교한 나의 모교는 여러면에서 공부할 여건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1,2학년 때는 초가지붕 교실에서 수업을 하였고 3학년때야 겨우 기와집 새교실에서 1년간 새의자 새책상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세찬 소백산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주먹만한 돌들이 늘어져 있어 걸어 다니기 조차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초가집으로 지은 교실에서 언 손가락을 호호 불면서 힘들게 공부하던 그 시절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건,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는 가운데 오히려 내 자신이 무척 성숙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친구들 가운에 유달리 승부욕이 가하여 운동이건, 공부건 뒤지기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불의를 보면 도저히 못 참고 친구들이건 선배들이건 바른 소리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과 아주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자랑같지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정의파로 통했고, 공부 또한 1,2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1학년 때는 소대장, 2학년 때는 중대장, 3학년 때는 대대장을 맡아 수업에 많은 지장을 받기도 하였지만 보람도 있었습니다.
운동 역시 축구, 배구, 탁구, 육상 등 체육대회 때는 선수로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로 인한 연습으로 인해 수업에 많은 부담이 되었지만 학교수업의 일부로 생각해 이 또한 열심히 하였습니다.
교과목 중에서 나는 특히 수학과목이 재미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3학년 때 한번은 수업시간에 수학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풀다가 막히신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학생들을 향하여 “풀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하시더니 내 이름을 부르며 풀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문제를 술술 풀어내는것을 보신 선생님은 제게 큰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수학박사로 통했으며 당시 선생님이 결근하실 때는 1,2학년 수학시간을 강의하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3학년 과학시간에는 선생님께서 “보온병의 원리를 배난규 설명해봐”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내가 일어서서 설명을 하였더니 “너가 배난규냐”며 “오늘부터 넌 남자 배난규다” 하셨던 것이 별명이 되어 그 여학생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기도 하였고, 3학년 국어시험 시간 옆자리 친우와 글씨가 비슷하여 선생님으로부터 커닝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던 일, 쉬는시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3학년 친우와 싸움이 벌어져 친우에게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교장실로 불려가 “넌 애를 주먹으로 때린거야, 망치로 때린거야” 하며 큰 꾸지람을 들었던 일, 3학년 가을 읍내 야외극장에 단종애사란 영화가 들어와 방과 후 교장선생님께서 전교생을 대대장이 인솔하며 다녀오란 명을 받아 영화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던 중 풍기중학교 3학년 3명으로부터 시비가 걸려와 부득이 3대1로 싸와 완승을 하였던 일들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습니다.
1992년 8월 15일, 동문들의 추대를 뿌리치지 못하고 제4대 금계중학교 총동창회 회장직을 맡게 되면서 나는 학창시절 모교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총동창회가 잘 되기 위해선 먼저 총동창회 기금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금이 조성되어야 그 기금을 운영하여 총동창회 활동을 활성화 할 수 있고 모교 발전을 위한 사업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93년 8월 중순에 있었던 총동창회 총회에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동문들이 힘을 모아 총동창회 기금을 일정액 조성하면, 그 모은 만큼의 액수를 총동창회 기금으로 쾌척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문 중 한 사람이 회장이 먼저 쾌척한 액수만큼 동문들이 모으겠노라고 역 제안을 해 왔습니다.
저는 흔쾌히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2,500만원의 기금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회원들의 모금은 쉽지가 않아 오랜 시간이 걸려 그 동안의 이자가 늘어나 4,500 만원이 되었습니다.
그 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6,500만원이나 되는 총동창회 기금이 조성되었습니다. 그 기금의 이자로 해마다 총동창회 기별체육대회 주최 기수에 지원하고 있으며, 모교의 어린 후배들에게 총동창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습니다.
1993년 겨울(음력 11월 19일), 존경하는 계삼정 초대금계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금계중학교를 설립하시어 지역 교육 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유화를 잘 그리셔서 미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지신 바 있는 이사장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은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 이었습니다. 수차 문병은 하였지만 돌아가시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총동창회에서는 유족과 숙의 끝에 학교와 총동창회의 연합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모교 교정에서 이사장님의 장례를 치르던 날 날씨는 유난히 추웠습니다. 그러나 계삼정 이사장님을 보내드리는 마지막 글을 읽어 내려가던 저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려 몇 번이나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3년 동안 교장선생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정이 들었었고 조사를 직접 작성하면서도 마음이 울적하였었는데 뛰어놀던 운동장에서 영정과 시신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가 없었습니다. 도솔봉 수용골 양지바른 곳에 모셔 드리면서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당시 장지까지 동행한 많은 동문들에게 이제서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돌이켜보건데 제가 10여 년 간 총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는 기간에 해마다 총동창회 기금이 늘어나고, 기별체육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는 등 우리 동무들의 화합의 계기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동문 개개인의 공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특히 과학기술고등학교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19회 최훈 동문은 사무국장을 맡아주어 지금의 동문회와 기금이 조성될 때까지 도움은 길이 남을 것이며 지금 한신 장학재단과 장산문화재단의 상임감사를 맡아주게 된 큰 인연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모교 교정에 계삼정 이사장님의 동상을 세워 그 높은 뜻을 후배에 길이길이 전하고 싶었는데, 나의 임기동안에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총동창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후배 회장단을 도와서 언젠가는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또 하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는 것은 총동창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길왈헌 동문이 하늘의 부름을 받고 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회장을 물려주고 난 뒤 총동창회 사무국장을 맡은 길왈헌 동문도 내가 회장을 할 때의 사무국장 못지않게 매우 헌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6대 이만화 총동창회장과 서상호 사무국장이 총동창회를 맡아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며 길국장도 하늘에서 흐뭇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총동창회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모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총동창회와 모교는 일심동체가 되어 발전을 거듭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 총동창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모교의 일이라면 작은 힘이나마 항상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권기호님! 나역시 계삼정 교장 선생님의 장례식은 물론 병문안 한번 하지못한 겄이 지금도 가슴이메워집니다,그분은 좋은 스승이었고 훌륭한 예술가 이 셨는데 뒤늦게나마 좋은 나라에 계시리라 믿으며 업드려 그분의명복을 빕니다, 교장선생님 죄송해요,계행자님,미안하구요
권기호 회장님 !! 29회 이덕영이고 저의 아버님이 회장님의 오랜 친구가 되는 유전동의 이 병선입니다. 오래만에 지면을 통해서 건강하신 모습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올려주신 글을 통해서 금계중학교와 함께 회장님 께서 걸어오신 발자취를 엿볼수 있어서 회장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내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하양중앙내과 이덕영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