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일 청림회(1)
바쁘실 텐데 많이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린 애들 둘이 싸워 보면은, 옆에 심판이 설사 없다하더라도 내가 이겼는지 쟤가 이겼는지 스스로 알거든요. 많이 참석했는지 안 했는지 스스로 아십니다. 오늘 수업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함, 봅시다. 좀 나눠 주시고··· 보시고, 나중에 회수하겠습니다. 이게, 잠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게 제가 화요일 날 새벽에 썼던 일기인 것 같습니다. <문수선원> 정초기도 회향하고 쓴 글입니다. 제가 일기라고는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법화경>을 한 달에 한 번씩, 이렇게 <청림회>에서 공부를 하시는데. 너무 오래 하다가 보면은 식상하기도 하고. 또 불교를 또 익숙하게 오래 공부하시다 보면은 “관문상(慣聞想?)”이라. 습관적으로 듣는 마음을 내기가 쉽기 때문에 해태해지고 또 신선한 것도 없고 그렇습니다. 불교란 게 사실은, 재미없는 재미로, 맛없는 맛으로, 마음 없는 마음으로, 그렇게 가는 길로 살기 때문에, 식상하기 때문에 아주 가볍게, 아무 의미 없는 글 하나로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그대, 아직도 흔들리는가?
그대, 아직도 흔들리는가? 그대, 아직도 흔들리는가? 그대, 아직도 흔들리는가? 이때, 그대는 망상으로 돋아난 저 아상(我相)의 지금 현재, 이 모습을 말하는 거죠. 진짜 꽁꽁 숨어 있는 나의 본래 주인공의 그대는, 원래 흔들림이 없는 것이니까. 일단 살아가는 모습들에서 하나의 상을 내어 가지고 주인 노릇하면서 아직도 세상살이에 욕심과 진심(嗔心)과 삿된 소견으로, 그렇게 사는가?
법에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이며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마라.
사람을 의지하다 보면, 인정사정 보다보면, 도 닦는 마음이 얕아지게 되죠. 옛말에 “인정(人情)이 농후(濃厚)하면 도심소(道心疎)라. 냉각인정(冷却人情)하야 영영불고(永永不顧)라.” 인정(人情)을. 사람의 세속적인 모습에서 너무 지나치게 정을 쏟아 부으면, 도(道)를 닦는 마음, 참 무심하게 가는 길이 서투르게 되고, 흐트러지게 되니까. 가면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게 되니까 냉각인정(冷却人情)하야. 세상의 명리를 아예 사악, 돌아보면서, 뒤로 한번도 다시는 돌아보지 말고. 영영불고(永永不顧)라. 영영 돌아보지 마라, 그랬어요.
뜻에 의지하고 말을 의지하지 말 것이며.
뜻을 의지한다는 것은 근본 성품을 자꾸, 이렇게, 추슬러나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조리를. 쌀을 이렇게 일다 보면은. 요즘은 정미(精米)가 잘 되어있어, 돌이 별로 없습니다마는. 뭐, 불과 10년 전, 20년 전만 하더라도 정미(精米)를 해 놓아도 밥 먹다가 돌 씹기가 일쑤고, 이빨이 상하기가 십상이고, 그렇습니다. 그때, 쌀을 이렇게 일고 나면은. 뒤에 남는 것이 뭡니까? 돌이 남잖아요? ‘일 도[淘]자(字)’ ‘일 태[汰]자(字)’를 써 가지고, 뒤에 돌을 가려내는 일을 도태(淘汰)라 그러지요, 도태(淘汰).아시죠?
옛날에 습착지(習鑿齒)와 도안(道安:314~385) 법사가 길을 가는데. 도안(道安) 스님이 모흑형루(貌黑形陋)라. 모흑(貌黑). 얼굴은 검고. 형루(形陋). 형상은 이빨 벌어지고 머리 빠지고, 누구처럼 누추~했는 거라. 사(師), 12(十二)세에 출가(出家)하야. 사(師)는 스님. 12세에 출가하야. 모흑형유(貌黑形유). 얼굴은 검고 형상은 꾀죄죄~하게. 용모(-某) 스님처럼 생겼다, 이 말이야. 용모(容貌)가. (웃음) 사경시지(師輕視之)하야. 은사 스님이 그걸 업신여겨 가지고. 구역전사(駈役田舍)라. 저~ 쪽에 밭에 나가서 일을 시켰다는 거야. 똥거름이나 치고 밭이나 갈고··· 구역전사(駈役田舍)한데. 어느 날 쯤, 돼 가지고[집로삼년(執勞三年)]. 스님! 저도 공부 좀 해 보겠습니다[방구사교(方求師敎)]. 니가 뭐, 공부한다고? 이래 가지고 <변의경(辨意經)>이라는 책을 한 권 줬어. 자, 그러니까, <금강경>쯤 되는 책을 한 권 주니까 수변의경(授辨意經)하야. 변의경(辨意經)을 이렇게 주니까. 인식취람(因息就覽)이라. 밭일 하다가. 인식(因息). 휴식한 때를 인해서. 취람(就覽). 그걸 갖다가 한 번 씩 훑어 봤다는 거야. 근데, 한 번 보고는 홀딱 다 외웠어, 하루만에. 그래, 은사 스님! 또 다른 책 주세요, 이러니까. 어제 가져간 거는? 다 외웠다고. 해 봐라, 이러니까. 싸악, 다 외우는 거라.
그 분이 그 유명한, 우리 요즘 이제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 이렇게 경전을 나누잖아요? 그걸, 세 단락으로 나눴던 스님이 도안(道安) 법삽니다. 달마 스님이 **이죠. 굉장히 똑똑했는데, 그 스님이. 원래 천재였는데, 그 스님께서. 그래 모양이 꾀죄죄~하게 생겨 놓으니까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거야.
그래, 여기서 뜻을 의지하고 말을 의지하지 말 것이다, 요런 것이 있는데.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 뭐, 습착치(習鑿齒) 얘기 하다가 말이 꼬여 버렸는데. 도안(道安) 법사가 딱 가는데. 습착치(習鑿齒)가. 습착치(習鑿齒)가 똑똑하잖아요? 그래 똑똑하니까. 인사하기를 거만을 떨면서. “제가 사해(四海) 습착치(習鑿齒)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습착치(習鑿齒)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도안(道安) 스님이 이제. 아, 그렇습니까? 합장하면서 “저는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입니다.” ‘가득할 미[彌]자(字)’ ‘하늘 천[天]자(字)’ 우주적으로 유명한, 도안(道安)입니다···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 아미타불(아미타불), 할 때의 ‘미[彌]자(字)’ 있지요? ‘더욱 미[彌]자(字)’·‘퍼질 미[彌]자(字)’·‘가득할 미[彌]자(字)’. 온 하늘에 이름이 가득한. 하늘이 큽니까?, 바다가 큽니까? “제가 사해(四海) 습착치(習鑿齒)입니다.” 이러니까 “저는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입니다.”
근데 어느 날, 길 가다가. 습착치(習鑿齒) 스님이 할 때마다 당하고 이러니까. 도안(道安) 스님, 쪼맨~한데 앞에서 까불까불까불하고 가니까 습착치(習鑿齒)가 뒤에서 이렇게 바라보다가. 이렇게 키질을 하면은, ‘까분다’ 그러죠? “키질을 하면은 쭉쟁이는 앞에 날라 가고 알맹이만 뒤에 남는다.”, 이러니까 도안(道安) 스님, 홱 돌아보면서. “쌀 일어 봐라. 뒤에 남는 건, 돌 밖에 더 있냐.” (웃음) 거기서 나온 게. 도태(淘汰), 도태(淘汰).
제가 첫 시간에 뭐라고 말씀드렸죠? 저를 만난 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또? (···) 또 뭐였죠? (···)
여하튼, 뜻을 의지하고 말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사람의 타고난 바, 내지는 문장의 본래 가지고 있는 뜻, 그런 건데. 해석하는 사람 따라서 경전도 달라지지마는. 어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갈 때 아주 근본적으로 타고나기를 좀 못된 사람이 있고,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자기의 순간적인 입지를 생각해 가지고 항상 말을 바꾸게 되어 있죠. 대표적으로 이제, 정치인들이 그런 분들, 많죠. 정치라고 하는, ‘정(政)자(字)’라고 하는 거는. ‘바를 정[正]자(字)’옆에다가 이 ‘둥글월 문[文]자(字)’있는 거[政], 있잖아요? 큰일을, 아주 큰일을 ‘정(政)’이라 하고. 사소한, 아주 개인적인 일을 ‘일 사[事]자(字)’써서, 사(事)라고 합니다. 국정(國政)은 큰일이잖아요, 나랏일은? 그래서 그걸 갖다가 ‘정(政)’이라 하고, ‘정(政)’ 그런데 그 분들은, 정치(政治)라고 하면 안 되지, 정치(政治). 사치(事治). (웃음) ‘치[治]자(字)’를 붙여 주까, 마까, 지금...‘일 사[事]자(字)’내지는··· ‘일 사[事]자(字)’도 아니고 ‘사사로울 사[私]자(字)’. ‘정(政)’이라고 하는 것은 무사공평(無私公平)이라. 사사로움이 없이, 절대 공적으로 평등한 것. 무사공평(無私公平)한 것을 ‘정(政)’이라 그래요. 그, 정치하는 분들은. 이, 도자기를 굽게 되면은, 이 물레라는 게 있잖아요? 물레. 그러면 이 물레를, 이리 뱅뱅 돌아가는데, 균축(勻軸)이 있죠, 축대가? 균형을 잡아주는 축대가 있죠? 그것이 비틀거리면, 어때요? 그릇이 찌그러져서 제대로 안 나옵니다. 그래, 정치하시는 분들은, 사실은 백성을 구워내는, 그릇을 만들어내는 분이라서 자기 중심축이 확실히 있어야 되는데 말 바꾸기가 여반장이거든, 그 분들이. 대체로 보면. 그렇죠? 안 보이는 데서 좀, 헐뜯어 놓고 넘어 가는 거죠. 그리고, 정치인들 뿐이겠어요? 우리도, 역부여시(亦復如是)지. 이게 무슨 **구조가 잘못 됐는지. 한참 하다가 가지, 이렇게 쳤다가 본론, 어디 가 버리고 없어요. 요거, 가볍게 읽고 넘어 가려다가 너무 무거워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완전한 것에 의지하고. 이 경전이라면, <법화경> 같은 거, 내지는 <금강경> 같은 거, <화엄경> 같은 거. 부처님의 완전한 삼매와 지혜에 대해서 그 실제적인 것에 의지하고. 불완전한 것. 경전에 나오는 여러 가지 방편들은 의지하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죠. 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이거는 <능엄경> 서문에 나오는 이야긴데.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망각해 버리니까 불교 공부가 익숙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불교 공부가 익숙하지 못하니까, 말을 타고 소에 짐을 실어야 되는데, 우리가 보통 어떻게 살아가냐면. 소를 타고 말에다 짐을 싣는다, 말이죠. 소도 불편코, 말도 불편코.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얘기는 다른 사람한테 들을 수, 잘 없죠? 그럴 때는 항상? (손가락 셋을 펴시며) 녹화가 되기 때문에 싸인을 이렇게··· (웃음) 말을 의지하지 말고, 뜻을 의지해야··· (손을 활짝 펴서 드시며) 이거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입법계품(入法界品)> 보면은, 53선지식, 마지막 51, 52번째 만날 때 보면은. “是時(이시)에 文殊師利(문수 사리)가 遙伸右手(요신우수)하사 過一百一十由旬(과일백일십유순)하야 按善財頂(안선재정)하시니라.” 문수 보살이 오른 손을 들고 선재야! 이러면서 오는 대목, 있잖아요? 그런 대목들이 있죠. (손을 활짝 펴서 드시며) 이런 때는, 모든 것을 퍼뜩 알아차리셔야죠. ‘석 삼[三]자(字)’를. (웃음) 우리끼리만, 저번 수업 시간 안 들으신 분들은 잘 모르시니까 녹화될 때는 좀, 비밀을 유지하고, 그래야 돼요.
며칠 전, 불교 방송국 인터뷰 할 때, 갑자기 질문 하나 받았습니다. “스님! <금강경> 결사하는 데, 스님 좋아하는 구절 있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여여부동(如如不動)”을 너무 좋아했던 것 같애요. “여여부동(如如不動)”이란 대목이 어디 나오냐 하면.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하는 대목, 너무나 잘 아시죠? 여러분들이, 익숙하니까··· 그 대목,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그 게송은 해설이고. 그 해석이 뭐냐? 라면. “불취어상(不取於相)이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세상에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아상(我相)이 없으면 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은 절로, 따라서 없어지는 거죠. 내가 꺼져 버리고 나면. ‘차아(此我)’가 꺼져 버리고 나면 ‘피아(彼我)’는, 저 쪽은 저절로 다 꺼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불취어상(不取於相)”이라. 상(相)을 취하지 아니하면, 상(相)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것을 바로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 “여여부동(如如不動)”을 저는, 그렇게 해 놨습니다. 왜 이걸 좋아하냐면. 제가 흔들리기 때문에 안 흔들리려고.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마치 어릿광대가 외줄타기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외줄타기 할 때, 그 중심은 누구만이 알아요? 광대만이 알고 있어요, 그렇지요? 그런 부전지묘(不傳之妙). 전할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다 거짓말이거든요? 마음은 없기 때문에 절대 전할 수 없어요. 피치 못해서 그렇게 전한다는 거죠.
세월이 지나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마음상태, 그걸 ‘여여(如如)’하다. 또, ‘부동(不動)’이라는 것은, 저번 수업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빛과 그림자를 빼고 나면 중간에 남는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빛’이라고 하는 것은 진심(眞心). 진짜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진짜의 마음에서 파생되어져 나온, 길이가 각양각색이고 모양이 각양각색이고. 그 형체의 모양에 따라 다 달라지죠, 그림자는.
저는 누굽니까? 그, <쿤둔>이라는 영화에 보면은. <쿤둔>이라는 영화에 보면은. 달라이 라마가 티벳을 떠나서 인도 국경을 넘어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도 병사와 대화를 나눕니다.
인도 병사가 그렇게 묻습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그 때, 달라이 라마는 뭐라고 했죠? <쿤둔:Kundun, 1997>, 보신 분들, 계시죠? 안 보셨어요? 달라이 라마(Dalai Lama). 대답 못 하시면, 안 보셨다고···. 세 번 물을 때까지 대답 안 하시면, 고의적이 돼 가지고, 안 되는 거죠. 보셨습니까? (못 봤습니다.) 안 보셨어요? 한 번 더 안 묻겠습니다, 그럼. 거기 대목에··· 그런 영화는 보시는 게 좋습니다. 아주 3류 영화라도 이렇게 5천원 주고 들어가면, ‘대사 하나’는 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영화도 ‘대사 하나’는 건질 수 있습니다. 그걸 갖다가 불교적으로 회향하면 좋죠.
“그대는 누구십니까?”
“나는. 이름 없는 초라한 비구(比丘)요, 부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 대목이 섬찟해 가지고, 제 가슴 속을 함, 울린 적이 있어요.
여하튼 이, ‘여여(如如)하다’는 것은 그런 그림자에 현혹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걸 이제, ‘부동(不動)’이라고 해요. 그 처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이 쪽에 있든지 저 쪽에 있든지 항상 여여(如如)한 것. 더 나아가서 말씀드리자면, 변화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그대는 아직도 흔들리는가? 흔들립니다. 하지만 흔들림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합니다. 경허 스님(鏡虛: 1849∼1912)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도인(道人)인데 어떻게 그렇게 막행막식(莫行莫食)하고, 그렇게 파행적으로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도인(道人)의 기행이 지나치십니다.” 이러니까,
“바람은 멈추었는데 파도는 일렁인다.” 경허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걸 이제 여파(餘波)라, 여파(餘波)라··· 후폭풍.
그냥 흔들림이 없는 흔들림을 저는 아마 평생 흔들린다,고 생각하며 살지 모릅니다. 생멸(生滅)이 본래 없는 것인데 이 생멸법(生滅法)에 계~속 의지해서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게는 다행히 말귀가 통하는 물과 돌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이, <수암선원>이구만, 보니까. 물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맞춰서 우짜든지 모양을 변해 가면서 같이 어울려서 어깨동무 하는 것이고. 돌이라는 것은. 견지부동(堅持不動)해서 절대 신심을 놓치지 않는 것. 자기 자신한테는 굳센 돌과 같을 것이고. 타인에게 있어서는, 이타행을 할 때는 물과 같이 흘러간다, 요런 뜻으로 써 놨습니다.
모든 일을, 삿된 생각을 놓으면은 금세 이해타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흐르는 구름처럼 살고 싶어 운수납자의 길로 왔는데 왜 이리 얽힌 일이 많습니까? 모든 것이 여유롭지 못한, 제 공부가 삼매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 할 때, 어떤 경계가 한번씩, 올라옵니다. 그 때, 새로운 경계가 올 때마다 환희심이 나고 좋기는 하지마는 그 새로운 것들은 다~ 망상입니다. 마음에는 흔적 없는 것이 최고의 경집니다. 흔적 있는 것은. 설사 부처라고 하더라도 용광로에 집어서 녹여야 된다, 이런 말씀이죠. 오늘도 졸면서 새벽에 <금강경>을 읽을 것입니다. 회향은 했지만. 졸다가 보면 <금강경>은 반은 읽고. <금강경>이 <금강경>을 반 읽고. 또 어떤 때는 잠이 또 반 읽고. 제가 반 읽고 반은 잠이 읽습니다. 어떤 때는 잠들어서. 잠도 잠들고 저도 잠들고 이러면, 부처님이 읽고. 그 기분, 참 좋습니다. 기대가 없으니까, 그죠? 잘 해야 되겠다는 기대가 없으니까, 좋은 거라. 너무 잘할라 하다 보면 꼭 시비가 일어나요. 잠은 무상하고 잠 속의 꿈은 더 무상합니다. 왜냐? 그대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너무 역설적이죠?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진실입니다. <법화경>도, 지금 하는 것이, 모든 맥락이 불교는 여기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가 이분법적으로 본다, 이러면 너무나 위험천만하게 이 말이, 언어의 궤변처럼 들려 가지고 이해가 가지 않아요. 오직 자기의 인생살이를,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따르지 않고 무생(無生)쪽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쪽으로, 부동(不動)쪽으로 자꾸 끌어 당겨야 ‘아! 꿈도 없고 나도 없기 때문에 자꾸 없다’는 쪽으로 가야지. 꿈은 마냥 허망한 것이고 지금 쓰는 의식, 그것도 허망한 것인데 그걸 가지고 실제로 잡고 있으니까 공부에 진척이 있을 리가 없고, 이렇게 이빨 빠진 듯이 자리가 텅텅 비게 되고. 이, 부처의 놀음은 이해가 안 가는 거죠.
이제 저편 강 언덕에 수양버들이 휘~이, 늘어질 것입니다. 수양버들은 이제. 옛날 사람은 이별을 할 때. 이, 이별을 뜻하는 겁니다. 망상하고, 나는 이별하겠노라고. 그렇지만 그 망상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겠노라고, 그런 뜻이 있어요. 옛날에 서로 이별하고 이럴 때는 버드나무 버들가지를 꺾어다가 멀리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거라. 이별할 때 항상 버드나무 가지를 흔드는 거. 그, 왜 중국에 아주, 시불(詩佛)이라고 일컬었던 왕 유(王 維:701~761)의 시, 있잖아요?
객사청청유색신 (客舍靑靑柳色新)이요~, 아시죠?
위성조우읍경진(渭城早雨浥輕塵)
위성조우(渭城早雨)에. 위성에 가는 비, 오늘 같이 이리 가랑비 촉촉이, 내리니까. 읍경진(浥輕塵)이라. 먼지가 촉촉하구나.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
여관방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보니. 버들나무 가지에 버들잎이 촉촉이 돋아 오는데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進一杯酒)리.
내 이제 그대에게 술 한 잔, 다시 권하노라.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이제 서쪽으로, 국경을 떠나가 가지고 저 쪽으로, 먼 타향으로 가면 다시, 아는 사람 없으리라. 무고인(無故人)이라고. 사고무친이라고. 아무 사방을 둘러 봐도 아는 사람 없다.
그 때부터 이제, 우리 불교 공부가 익어 가는 거죠. 서출양관(西出陽關)에 무고인(無故人)이라. 얼마나 좋아요? 그런 심정으로 해서 제가 썼어요. 제가 수양버들, 살펴 보면은, 봄에 남보다 다른 잎사귀보다 일찍이 연두색이 돋아납니다. 일찍이 연두색이 돋아나는데. 어릴 때는 ‘봄바람이 어디서 오냐?’ 물으면. ‘그, 새파랗게 돋아나는 여린 잎새에서, 잎사귀에서 봄바람이 돋아난다’고. 그래, 봄바람 색깔은 연두색이라고, 이렇게 <통도사>살 때, 한 20년 전에 이렇게 글 써 두었던 게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또 그런 생각이··· 항상 변하는 것이니까··· 여기서 이제, 버드나무 가지 하나 꺾어서 그 피리로 무생가(無生歌?)를 부르면 이제, 제 봄은 시작될 것입니다. 중국 낙양 이강에서 바라본 그 수양버들처럼 말입니다, 이랬는데. 이제 저편 강 건너 언덕에. 저편 강 건너라는 것은, 은유적으로 상징한 것이. 열반 쪽에서, 열반, 뭐 이런 걸 뜻하는 거고. 이 수양버들이라고 하는 거는. 봄에 다른 잎새보다 일찍이 돋아나서 12월이 되어도 채 낙엽이 잘 지지 않습니다. 왜? 유연하기 때문에. 다른 거는, 오동나무는 잎사귀가 크기도 하지마는 또, 억세게도 돼 있잖아요, 그죠? 수양버들은 이렇게 바람에 흔들릴 줄, 알거든. 오래, 오래도록 면면을 유지하면서 불법(佛法)에서 퇴보하지 않겠다고, 이렇게 은유적으로 써 놨습니다. <법화경> 하는데, 뭔, 이런 잡소리가 많았어요. 잡설(雜說)이라 그러죠, 잡설(雜說).
자, 진도 나갑니다. 본문이 안 나가니까 공부 안 나가는 거 같죠? 6번까지 하셨어요? (6번, 할 차롑니다.) 할 차롑니까?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을 저번 수업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릴 때. 왜 우리가 이렇게 먼 시간처럼 느껴지죠? 1월 달에 수업 했습니까? (2월에 했습니다.) 2월에 했습니까? 한 달이 돼 놓으니까 너무 멀어져 버렸어요. 저번 수업 시간에 제가 얼핏 기억나기는. (손가락 셋을 펴시며) 꽃은 몇 종류가 있다, 그랬어요? 세 종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씀 언(言)변’에다 ‘미칠 광(狂)자(字)’쓰는 ‘속일 광[誑]자(字)’, 광화(誑花)가 있고. 꽃이 피며는 사과나·감이나·배처럼 반드시 과일 열매를 맺는, 꽃과 열매가 같은, ‘같을 여(如)자(字)’써서 여화(如花)가 있고.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어지는 실화(實花), 연꽃이 있다, 이랬습니다.
연꽃할 때, 제가 설명할 때, 연뿌리가 이렇게 연근에 그, 구멍이 몇 개 있다 그랬어요? 10개. 돌아가면서 아홉 개, 중간에 한 개. 열 개. 그래서 불교는 ‘10개’라는 숫자가 만수(滿數)요, 원수(圓數)요, 원만(圓滿)한 수다, 그렇게 이제 말씀하죠. 연뿌리 하나에서도 다, 의미가 있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리고 어떤 꽃은 햇빛을 받아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어떤 꽃은 달빛을 받아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달맞이꽃, 해바라기를 보더라도. 각양각색이 다 다르죠. 조금 잡된 것들은, 광화(誑花)는 어디에 꽃을 피워요, 잘? 잡광(雜光)에. 형광등 밑에서 꽃을 피우고, 뭐 야단입니다. 가로등 밑에서 일찍 꽃 피우고.
그런데 약초(藥草)는 어디에서 꽃을 피운다, 했습니까? (별빛) 그렇죠, 별빛. 제가 300원 드려야 되겠네요. 그래, 산삼은, 산삼꽃은 무슨 기운을 받아서? 북극성이라든지. 아~주, 별 중에서도, 별 중의 별 같은, 그런 기운을 별빛을 모두어서··· 그 아스라한 별빛을 모두어서 꽃이 되니까 그것이 다 약초(藥草)가 되는 거라. 아주 잡스런 빛에다가 이렇게, 꽃이 되고 피고, 이렇게 하는 것은 흔들리고 해 가지고 지조없이··· 그런 것은 잡초 내지 독초, 비스하게 그리 되는 거죠. 꽃이 있어도? 흐리~미, 하고 그렇죠.
그래서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을 설명하면서,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은 어떠한 근기를 위해서 설명했다고요? 중근기. 대근기는 비유하자면은.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초목(草木)이 나오잖아요, 그렇죠? ‘풀과 나무[草木]’가 나오는데, ‘나무’는 어디에 비유합니까? 보살의 대근기에 비유하고. ‘풀’ 중에서도 잡풀은 아주 하근기고. 약초(藥草)쯤 되는 풀들은, 중근기에 해당한다. 이래서 <약초유품(藥草喩品)>을 사람에 비유해서 성문(聲聞) 상태를 조금 벗어난 단계, 그렇지요? 이게 설명하는 게. 가섭이라든지 부처님 10대 제자들이 어느 정도의 법문을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유장한 일음연창(一音演暢)을 잘, 이해를 못하게 되고. 이 소견머리가 작아 가지고 잘, 이해가 안 되고 이러니까. 조끔 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가지고 설명하는 상태가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이잖아요? 그렇죠? 이 <약초유품(藥草喩品)>의 내용은 그렇고. 오늘 할 대목이 9번까지, 요렇게 할 참인데요.
6. 密雲(밀운)이 彌布(미포)하야
빽빽~한 구름이. 구름이 빽빽~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빈틈없이 하늘에 꽉~~, 차 있듯이. 꽉~ 덮고 있다, 이거죠. 조각구름들이 아니고. 그것이 미포(彌布)라. 아까.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이라, 했잖아요, 그렇죠? ‘무슨 미자(字)’요? ‘퍼질 미[彌]자(字)’·‘더욱 미[彌]자(字)’. 가득~하게, 이렇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徧覆三千大千世界(변부삼천대천세계)하야
“불신충만 어법계(佛身充滿 於法界)” 부처님의 몸은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다. 요런 건. 이치적으로 얘기하는 거죠, 이치적으로.
여기 이 방에, 라디오가 2대가 있으면. MBC 방송이 2군데 밖에 안 나올 것이고. 3대가 있으면 3개가 나올 것이고. 이 방에 라디오를 1000개 갖다 놓으면 1000개가 나올 것이고, 그렇죠? 근데, 이 안에는 가득히 뭐가 있습니까? 주파수는 가득 차 있듯이. <법성게>대목에는 이런 대목은 이렇게 나오죠.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雨寶益生). 우보(雨寶). 보배가, 중생을 이익시키는 그런 보배가 많고 허공에 가득하다. 만허공(滿虛空). 여기 하는 거는. 밀운(密雲)이 미포(彌布)하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그런 법을 설하신 그 내용들, 법의 근성이라 할까요? 그걸 이제 얘기하는 거죠.
앞부분을 그 쪽에, 한 번 앞으로 잠깐 넘어가 볼까요? 일체제법지소귀취(一切諸法之所歸趣)라는 거, 있잖아요? 131페이지에. 일체제법의 돌아갈 바의 곳. 이건 일승실상(一乘實相)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중생의 깊은 마음의 행하는 바를 다 안다. [亦知 一切衆生(역지 일체 중생)의 深心所行(심심소행)하야] 이렇게 한 것은. 삼승(三乘),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의 욕성(欲性)을 얘기하는 겁니다. 중생의 근기와 욕망과 성품은 각기, 다 다르거든요. 각기 다 달라요. 그래, ‘밀운(密雲)이 미포(彌布)하다’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부처님의 그런 가르침이라든지 절대 진리의 세계가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데
一時等澍(일시등주)에
한꺼번에 이렇게 내리 쏟아 붓는데. 촉촉하게, 어디 안 미치는 곳이 없이, 쏟아 붓는데.
其澤(기택)이 普洽(보흡)커든
그, 윤택하게 적시는 것이 보흡(普洽)커든. 전체 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니까 개망초도 자라고·민들레도 자라고·소나무도 자라고· 대나무도 자라고·국화 싹도 자라고·쑥도 자라고·냉이도 자라고··· 다 자라는데.
卉木叢林(훼목총림)과 及諸藥草(급제약초)의
풀과 나무가 빽빽한 숲들이. 그러니까 총림(叢林)들이. 총림(叢林)과 제약초(諸藥草)의
小根小莖(소근소경)에 小枝小葉(소지소엽)과 中根中莖(중근중경)에 中枝中葉(중지중엽)과 大根大莖(대근대경)에 大枝大葉(대지대엽)이며
작은 뿌리·작은 줄기, 작은 가지에 작은 잎사귀와. 중간쯤 되는 뿌리와 중간쯤 되는 줄기, 중간쯤 되는 가지와 중간쯤 되는 잎사귀와. 큰 뿌리와 큰 줄기와, 큰 가지와 큰 잎사귀에. 구름이 비 내리는 것이 다 이렇게 적셔 지는데.
諸樹大小(제수대소)가 隨上中下(수상중하)하야
모든 나무들이. 크고 작은 것들이 한결같이 따르는 것이. 많이 받아먹는 놈은 많이 받아먹고. 적게 받아먹는 놈은 적게 받아먹는데.
各有所受(각유소수)어든
각기 받는 바가 있거든. ‘각기 받는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은. <금강경> 구절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각기 받는 바가 있다’는 것은 절대차별을 얘기하는 것인데. 이, 차별이라고 우리가 흔히 잘못들 생각하면은. 남녀평등이라든지, 그 차별들, 잘못들 생각하면은. 똑같이 균등하게 나눈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불변차별(不辯?差別)하고. 차별을 없애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 진짜로 평등한 것이다. 차별. 없앨 수가 없지요, 사실은. 그렇잖아요? 차별을 없앨 수 없어요. 그 차별은 어떻게 벌어지느냐? 참 불가사의하잖아요. 일도춘풍(一到春風)에. 한 줄기 봄바람이 ***처럼 지나가니까 붉은 꽃은 붉게 피고·노란 꽃은, 개나리는 또 노랗게 피고·진달래는 무슨 이유로 핑크빛으로 피는지. 똑같은 한줄기 봄바람이라. 또 자세히 살펴보니까. 부재춘풍 부재춘(不在春風 不在春)이라.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봄에 있지도 않고 바람에 있지도 않더라. 고런 걸 자꾸 맥락을 잡아야, 이 <법화경>이 찐 쌀 씹듯이 꼬소~하게 와 닿는데. 그거 말고 지식적으로 자꾸 풀이해볼라, 해 봤자, 도로 아미타불이예요, 도로 아미타불.
7. 一雲所雨(일운소우)에
일운(一雲)이라고 그렇게 애기하는 거는. 부처님이 그런 큰 법비[法雨]를 내리는 거를 비유하는 거하고 똑같죠. 내린 바, 비에.
稱其種性(칭기종성)하야
그 종자의 성품을 칭합(稱合)했다. ‘칭(稱)’이라고 하는 것은 딱 들어맞는 것을 ‘칭(稱)’이라고 하죠, ‘칭(稱)’. 그래 가지고 개미는 개미만큼 저 과자 부스러기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고·낙타는 낙타만큼 짊어지고 가는 것이고·콘테이너는 콘테이너만큼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고·승용차는 승용차만큼·오토바이는 오토바이만큼, 그 짐을 실어 나르는 게 다 다르잖아요? 고런 걸 갖다가 요 비유로 하자면··· 칭기종성(稱其種性)이라. 비가 내리면은 큰 놈은 많이 받아먹고·작은 놈은, 쪼매~, 받아먹는 거.
그러니까 여기서 일운소우(一雲所雨)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근본자리를 얘기하는 것이고. 이판사판(理判事判)으로 따지면, 이판(理判)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고. 여기서 칭기종성(稱其種性)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모양이 있든지·종자가 있든지, 하는 것들은 전부다 사판(事判)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사(理事)는 불이(不二)요. 이판사판(理判事判)이라고 하는 거는 절깐에서 공부하시면서 여러분들,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을 아는 것처럼 반드시 알아야 되거든요. 사리(事理)는 불이(不二)한 것처럼. 둘이 아닌 것처럼.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 공간 속에서 MBC 방송을 들었다고, MBC가 여기 가득 차 있습니다. 저 구석은 적고, 이 구석에 많고··· 이런 거는 없거든요? 그렇죠? 그러나, 한 점도 아닌, 이 자리에서 KBS나 MBC, 똑같은 그 자리에서 똑같이 상용(?相用?)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치의 자리고. 이판(理判)의 자리라고. 그러나 주파수 따라서, KBS 나오기도 하고 MBC 나오기도 하는 것은 사판(事判)의 군상이라는 거죠. 그러나 이사(理事)는 떨어져 있습니까?, 붙어 있습니까? 붙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떨어졌다, 할 수도 없죠. 붙어 있다고 하자니까, 지금 들리느냐? 안 들리죠. 인연을 빌려야 들립니다, 반드시, 그죠? 인연을 빌렸을 때는 또, 떨어졌다 할 수는 없지요. 그, 사(事)속에 이(理)가 같이 붙어 있다는 거. 감 잡으셨죠?
우리 진심(眞心)과 망상(妄想)이 그렇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진실이더라~. 아까, 어느 놈이 일기 써 놓은 것이 그, 하나 있데요. (웃음) 무슨 감이 잡히지요? 시를 쓰든지, 글을 쓰든지 간에 자기의, 뭐랄까, 불교적인 소견이랄까, 그런 깨달음 없이 글을 써 버리면 그건 하나의 넋두리에 불과한 거여. 그, 문학소녀들이나 읽을 만한 책들입니다. 쪼끔, 글이 거칠든지 어쩌든지 간에, 영양가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안 그러면 말장난이고, 그 남의 눈을 현혹할 뿐이고, 하나의 인쇄 공해밖에 안 되는 거라, 인쇄 공해. 그런 사람, 숱하게 있죠. 차라리 안 쓰니~만, 못하죠. 왜 이래, 또 지 자랑, 비슷한 걸, 해 쌓는가, 몰라···(웃음)
而得生長(이득생장)하며
그 종성(種性)에 딱, 칭합(稱合)해 가지고 생장(生長)할 수 있다. 생장(生長)을 얻으며
華果敷實(화과부실)하나니
이 때 ‘부(敷)’자(字)라고 하는 거는 꽃이 활~짝, 연꽃이 이만큼 (공을 손에 올린 듯 손을 모아 펴시며) 피는 걸 ‘부(敷)’라 그래요. 활짝 피는 걸, ‘부(敷)’라 그래요. 연꽃이 이렇게 (편 손을 모아 닫으시며) ‘함(含?)’이라 그래요, ‘함(含?)’. 아시겠죠? 연봉우리 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우리가 수미단이나 어디든지 보면은. 연이파리가 있고. 연이파리는 물 한 줄기가 붙어 있고. 항상 연꽃은 하나는 오므리고 있고, 하나는 펼쳐 있습니다. 오므리고 있는 세계는 마음의 본체, 이치의 세계고.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은? 사판(事判)의 세계입니다. 그래, ‘씨앗’으로 있을 때는. 요 참깨나 저 참깨나 똑같잖아요? 그렇죠? 그것이 다시 한 번, 그 참깨가 이제 발아해서 자랄 때는 이 참깨 씨가 자라는 나무하고 저 참깨 씨가 자라는 나무는? 천양지차죠, 서로 달라지는 거예요. 참깨가 나무에서 자라나요? 나무라 해야지, 뭐 어쩌겠어요? 화과부실(華果敷實)한다. 꽃이 피는 것을 부(敷)라 하고 열매가 맺는 것을 실(實)이라,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근데 보통 또 보면은. 벼 같은 거·나락 같은 거·조 같은 거·옥수수 같은 거, 내지는 콩 같은 것, 요런 것들을 ‘열매 실[實]자(字)’를 쓰고. 사과와 배, 뭐 감 같은 거·자두 같은 거·살구, 매실 같은 것을 과(果)라 그러죠, 과(果). 같은 열매라도. 실(實)은, 우리가 이제 그냥, 조·수수 같은 그런 것이고, 과(果)라는 것은 나무에 달리는 결과에 대해서 과(果)라고 쓰고. 혼동해서 많이 쓰기도 합니다마는 굳이 구분하자면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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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가을햇살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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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