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김진호는 1980년 예천여고를 졸업한 뒤 한국체육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열린 이탈리아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며 부진했다. 그해 4월 어깨를 다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진호는 대한양궁협회의 지원과 스스로의 노력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재활에 성공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했고 198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다시 한번 5관왕에 올랐다. 금메달을 따 낼 때마다 각종 기록이 쏟아졌지만 김진호는 기록을 의식하지 않았다. 양궁은 자신과 싸우는 경기로 실력이 좋아지면 기록은 당연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2번의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이라는 타이틀은 김진호에게 세계 최정상의 궁사라는 영예와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부담을 줬다. 많은 이들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양궁 개인전 금메달은 당연히 김진호의 차지라고 생각했다. 김진호는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고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대표팀은 다른 종목 선수들보다 먼저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특별 관리 종목이었던 것이다. 김진호는 경기 열흘 전쯤에 현지에 가서 컨디션을 맞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대표팀은 그보다 훨씬 이른 대회 한 달 전에 로스앤젤레스 땅을 밟았다. 198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충분한 전지훈련으로 경기 감각을 익혔지만 이번에는 빨리 현지에 간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김진호는 “오랜 시간을 현지에서 보내다 보니 신체 리듬이 흐트러졌다. 경기 5일 전 컨디션이 다시 최고 수준으로 올랐지만 계속 긴장을 하다 보니 몸 상태가 엉망이 됐고 결국 컨디션이 바닥인 상태에서 경기를 치르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전까지 여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세계 최고 궁사였던 김진호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고 한국도 이에 동참하는 바람에 메달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한국의 첫 올림픽 여자 금메달리스트가 나온다면 여전히 김진호가 유력했다. 그러나 김진호는 0점을 두 번이나 쏘는 최악의 컨디션을 보였고 한국 최초의 올림픽 여자 금메달리스트의 영예는 대표팀 막내 서향순에게 돌아갔다. 김진호는 동메달을 따며 선전했지만 스스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기 내용이었다. “화가 많이 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경기를 한 적이 없었다.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던 시기였는데 좋지 못한 결과를 내 무척 아쉬웠다.” 올림픽이 끝난 뒤 김진호는 스스로에 대한 불만으로 한동안 활을 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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