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월, 정주영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의욕에 찬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반년 후 6ㆍ25동란이 터졌다. 또다시 아수라장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회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6월 26일. 벌써 시내 곳곳에 괴뢰군들이 들어와 있었다. 대가족을 모두 이끌고 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정주영은 아우인 정인영만을 데리고 일단 피난길에 올랐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정인영을 서울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 같아서였다.
을지로를 지나 한강쪽으로 빠져나갔다. 길거리에는 이미 피난민의 대열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강 다리는 이미 끊긴 후였으나, 어떻게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간밤에 내린 비로 한강 물은 더욱 불어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한강에서는 작은 조각배 하나로 사람을 두셋씩 태워 강을 건네 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밀리기만 하는 피난민의 대열에 지치고 짜증이 났던지 그 사람은 보트를 백사장에 올려놓고는 노만 훌쩍 들고 사라져 버렸다. 아마 노가 없으면 보트는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정주영은 동행했던 서비스 공장 직원 최기호와 정인영과 함께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 보트를 강물에 밀어 넣고 올라탔다. 두 손만으로 물살을 헤치며 다다른 곳은 반포쪽 한강 기슭, 어쨌든 한강은 건넌 셈이었다. 거기서부터 수원까지는 걷는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는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얻어 타고 천안까지 내려갔다. 여기서 국군의 진격 소식을 듣고는 다시 노량진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다시 천안까지 되돌아오는 고달픈 피난행렬을 계속했다.
천안에서 다시 걸어서 내려간 곳이 대전, 이곳에서 마지막 남행열차를 간신히 얻어 타고는 대구로 향했다
@ 고달픈 피난생활
다행히 동생 정인영이 동아일보 기자였던 터라 대한일보에서 편집 일을 하게 되었다. 정주영은 일선 정훈부대로의 신문 배달을 자청했다. 교통편이 제대로 있을 리 없어 배달하는 일은 거의 걸어서 해야 했지만 날마다 산중 일선 부대에까지 열심히 신문을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배달할 신문을 가지러 배본소로 가보니 신문이 한 부도 없었다. 신문 배본 책임자가 두부가게에 돈을 받고 몽땅 팔아 넘겼던 것이다. 일선에서는 그것도 소식이라고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말이다. 전쟁의 상황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추풍령 저지선이 무너져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정주영은 다시 동생과 함께 낙동강을 건너기로 했다.
비교적 수심이 얕은 곳을 골라 맨몸으로 헤엄을 쳐서 낙동강을 건넌 정주영은 다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무슨 일을 해도 풀칠하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정훈감실에서 알았던 육군 대위를 만났는데, 그가 주민들에게 홍보하는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주영과 정인영은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서는 이섬 저섬을 돌아다니며 해안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괴뢰군은 잠깐이다. 곧 미군이 들어온다.”
거제도(巨濟島)에는 특히 대학교수들이 많이 피난을 와 있었다. 최고 식자층인 대학교수들을 앞에 놓고 연설을 하면서 정주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남해안을 따라 목포에 도착한 정주영은 여기서 끔직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주영과 함께 주민 선무활동을 하던 대위가 마침 멸치를 말리던 어부에게 다짜고짜 그 멸치를 배에 몽땅 실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어부가 조금만 남겨놓고 가져가 달라고 사정을 했건만 대위는 인정사정 없이 어부를 두들겨 패고 기어이 멸치를 빼앗아 실었다. 그것으로 그 대위와도 결별을 하고 만 정주영은 다시 부산 거리를 쏘다니며 일거리를 찾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름이 한창 뜨거운 폭염을 퍼붓고 있었던 7월, 정주영은 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민주당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웃통을 벗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정주영은 기가 막혔다. 아무것도 아닌 보통사람들은 작은 애국이라도 한답시고 일선 부대로 신문 배달도 하고, 배멀미에 시달리면서도 섬마다 돌아다니며 목청을 돋구고 있는데, 전쟁 중에 맥주 마시며 바둑 두고 있는 그 정치가들에게서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 부산 시절
옷은 서울서부터 입고 왔던 노동복 단벌에 돈은 무일푼, 정주영은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어느 날, 굶주림에 지친 정주영은 동생과 함께 전당포를 찾았다. 수중에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이 배를 곯을 형편이었던 것이다. 정주영이 차고 있던 시계라도 전당을 잡히고 밥을 사먹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당포 주인이 부르는 값은 형편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길거리에 사람을 뽑는 구인 광고가 붙어 있었다.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모집한다는 광고였다.
“형님, 손목시계는 일단 차고 계세요, 통역으로 취직을 하면 미군 식당에서 빵부스러기를 가져오기만 해도 먹는 것은 해결될 겁니다.”
정인영의 말대로 신문기자였다는 말에 호감을 느꼈는지 정인영은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었고, 통역을 보내달라는 부서가 줄을 서고 있던 형편이라 정인영은 공병대의 통역을 맡을 수 있었다.
어떻게 공사라도 해서 밥을 먹어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공병대 책임자인 매카리스트 중위는 통역인 정인영에게 건설업자의 선정을 의뢰했고, 정인영은 곧바로 정주영을 불러들였다. 임시 수도이자 최후 전략 교두보인 부산은 군수 물자 집하지이기도 했고 군사 지원 사령부도 있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미군 병사 10만 명의 하룻밤 숙소를 만드는 일이 정주영에게 떨어졌다. 학교 교실을 소독하고 페인트칠을 한 다음, 맨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천막을 치면 임시숙소가 만들어졌다. 매일 3시간 이상 눈을 붙여본 일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한 달쯤을 일을 하고 나니 돈이 커다란 가방에 가득했다.
미군 공사는 전선을 쫓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정주영은 선발대로 미군 군용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매카리스트 중위는 미군을 따라 평양(平壤)까지 갔지만 정주영은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스러워 서울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 보니 그동안 돈암동 집은 북한군에게 빼앗겼고, 쫓겨난 가족들은 경기도 여주에 있던 정인영의 처갓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청렴결백해서 기껏해야 댄스 파티 초대밖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현대의 성공에 큰 힘이 되었던 매카리스트 중위는 한국에서 대위가 되어 귀국했다. 그리고 한참 후 육군 소령이 되어 다시 한국에 배치되었다가 중령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가 퇴역한 후에도 어려웠던 6.25 시절을 잊지 않았던 정주영은 그가 전역한 후 미국 휴스톤 지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매카리스트 중위는 후에 ‘자신이 정주영을 만난 것은 우연이며 그 뒤에도 계속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은 정주영의 일 솜씨가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해서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으며 그의 깔끔한 일 처리 때문에 자신도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뒤에 부부 초청으로 두 어번 한국을 다녀간 그에 대해 정주영 역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 아이젠하워 방한과 “원더풀!”
1952년 12월 추운 혹한기, 새로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공약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치르는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미8군 관계자들은 걱정에 빠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묵을 만한 숙소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운현궁을 임시 숙소로 쓰기로 결정은 했는데, 그것도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화장실과 보일러 난방시설이 없는 것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기간이 15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운현궁 방안에 화장실을 만들고, 실내 난방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 공사는 정주영에게 떨어졌다. 정주영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5일. 게다가 양변기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주영이었다.
공사를 기일 내에 제대로 해놓으면 미군이 공사비 갑절의 보너스를 따로 내기로 하고, 반대로 기일 내에 제대로 못 마치면 갑절로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합의를 본 후, 정주영은 일꾼들을 끌고 용산쪽을 훑기 시작했다.
피난으로 비어 있는 고물상들을 하나하나 뒤지며 보일러통, 파이프, 세면대, 욕조, 양변기들을 실어왔다. 아무개가 언제 무엇을 얼마만큼 갖고 갔으니 어디어디로 물건값 받으러 오라는 인출증 같은 것만 하나씩 써붙여두고 가져간 자재들로 우선 공사를 시작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씩 꼬박 들러붙은 끝에 열흘 만에 공사는 끝이 났다. 그런데 보일러를 시운전해 보니 기가 막혔다. 보일러의 라디에이터를 비롯한 모든 연결점에서 증기가 새어나와 순식간에 실내 전체가 온통 뿌옇게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틀을 철야작업한 끝에 완전무결한 공사를 마무리지을 수가 있었다.
약속 시한 사흘 전에 공사 마무리를 하고 공사비를 받으러 간 정주영을 보고 미군들은 손을 치켜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다이 넘버원!”
평소 신임을 받아 온 정주영에게 맡겨진 이 일은 짧은 기간과 공사의 힘겨움에도 비교적 잘 마무리되어 그 후 미군 관련 공사를 정주영이 거의 도맡다시피 하는 계기가 되었다.
@ 잔디 대신 보리라도
유엔군 묘지 조성공사는 정주영과 현대의 기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로 손꼽힌다.
운현궁 공사로 미군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았던 정주영에게 이번에는 참으로 기발한 공사 제의가 들어왔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달라는 것이었다.
때는 풀 포기가 다 말라비틀어진 한겨울이었다. 유엔군 묘지는 한창 조성 중이던 터라 흙바닥 그대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곳을 한국전에 출병한 각국 유엔 사절들이 내한해 참배할 계획이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8군 사령부는 정주영이라면 이 일도 해낼 수 있으리라 여겼던지 이 일을 맡긴 것이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제의를 받고 참배 날짜까지는 닷새밖에 없었다. 일이라면 무조건 달려들고 보는 정주영이라 해도 이번 일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정주영의 기지가 발휘된 것이 바로 이때다.
‘미군이 요구하는 것은 잔디가 아니다, 파란풀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면 참배객들이 둘러보는 동안 파란풀만 눈에 들어오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정주영은 아이디어비를 포함해 실제 공사비의 세 배를 요구했다. 돈이 문제겠는가. 당장 계약을 체결한 유엔군측에선 정주영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계약을 맺자마자 정주영은 사방에서 트럭을 끌어 모았다. 이렇게 마련된 30대의 트럭을 끌고 정주영이 간 곳은 낙동강 가의 보리밭이었다.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하게 남아 있는 건 보리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자란 정주영이 보리를 떠올린 건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었다. 그 주변의 보리밭을 몽땅 구입한 정주영은 흙과 함께 보리들을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 관계자들은 “원더풀, 원더풀, 굿 아이디어!” 를 외치며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감탄했다.
이렇게 해서 미8군 공사는 시쳇말로 ‘손가락질만 하면’ 모두 정주영의 몫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 참담한 시련 - 고령교 건설공사
1954년 4월, 정주영은 크나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조폐공사에서 발주한 동래의 건설현장과 함께 시작된 고령교 복구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기록, 현대건설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령교는 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으로 지리산(智異山) 공비 토벌을 위해 복구가 시급한 처지였고, 그때까지의 정부 발주 공사로는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주영은 이 공사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교각은 기초만 남아 있고, 파괴된 상부 구조물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어 말이 복구 공사지 오히려 신축 공사가 더 쉬울 판이었다. 게다가 투입할 수 있는 장비라고는 20톤짜리 크레인 한 대, 믹서기 한 대, 콤프레셔 한 대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부분 인력에 의지한 원시적인 공사로 세워놓았던 교각이 홍수에 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결국 착공 후 1년이 지나도록 교각 한 개도 다 박아 넣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물가는 120배로 엄청나게 올라버렸다. 어쨌든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조폐공사 동래 사무실과 건조실 공사는 7천만환의 막대한 적자를 보고 완공되었다. 미군 공사에서 알뜰하게 벌어 모은 돈을 조폐공사에 다 털어 넣다시피 해 완공한 것이다.
회사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공사장에서는 인부들이 ‘임금을 내놓으라’ 파업을 하고 가뜩이나 부진한 공사는 지지부진, 하루하루 지연되었다.
신용이 사업하는 사람의 재산이라고 생각한 정주영은 어차피 손해를 보는 일, 공사만이라도 계약기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자금 조달을 위해 뛰어다녔다. 최대한의 힘을 동원한 결과, 남의 돈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생들과 최기호, 매제 김영주의 집까지 처분하기로 뜻을 모았다. 조상 차례 지낼 집 한 칸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정주영은 집 대신 초동 자동차 수리 공장 자리를 내놓았다.
그동안 물가가 엄청나게 뛰었기 때문에 가족들의 집을 팔고도 모잘라, 얻을 수 있는 빚을 다 끌어 모아야 했는데, 그 이자가 월 18퍼센트나 되어 1년이면 쓴 돈의 꼭 배를 이자로 내야 했다.
55년 5월 마침내 악몽의 고령교는 최악의 상황 속에 당초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완공되었다. 계약 금액 5천4백78만 환보다 많은 6천5백여만 환의 엄청난 적자를 보고서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는 현장 장비를 철수시킬 기력도 없는 지경이었다.
빚쟁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종업자들의 시기와 질시도 더욱 극심해졌다. 소학교밖에 안 나온 정주영이 공기가 2년이나 되는 장기 공사를 수주하면서 인플레 계산을 빼고 일괄 계약을 한 것이 실수라느니, 그 학력으로 인플레가 무엇인지나 알겠느냐느니 하는 개인적인 비난도 들어야만 했다.
정주영은 그러나 이런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경험 부족으로, 우리나라의 형편없이 부실한 건설 장비로는 고령교 정도의 공사도 힘겹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실책이었다.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지만, 이때 얻은 빚을 갚는 데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 6대 건설업체로 발돋움
1957년 9월, 현대가 한강 인도교 공사를 따낸 것은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커다란 이슈였다.
당시 역사가 깊은 조흥토건과 흥화공작소의 수주 경쟁은 너무나 치열했다. 누구도 양보하지 않아 조정이 안 된 채 예산 집행이 1년이나 연기되고도 타협점을 못 찾는 바람에, 결국 경쟁입찰에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화공작소가 당시 시내에서 한강까지의 택시 요금 4천 원의 4분의 1 가격인 단돈 1천 원에 응찰하면서 기부 공사를 하겠다고 나왔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입찰서를 뜯은 내무장관이 흥화공작소는 입찰 의사가 없는 것 같으며, 기부 공사도 받을 수 없다고 공식 발언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응찰 가격 두 번째였던 현대건설로 자동 낙찰이 되었다.
이 공사에서 40퍼센트의 이익을 거둔 현대는, 고령교 복구 공사의 악몽에서 벗어나 건설업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계기를 마련했다.
단일공사로는 전후 최대 규모인 이 공사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기 위해 정주영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장비 문제였다. 고령교 공사로 인한 막대한 적자의 뼈아픈 원인을 되새겼던 것이다. 다행히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체 중 유일하게 미8군 장비 불하처에 등록된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때는 건설업자들이 미군부대와 직접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중간 상인들을 통해서 비싸고 결점 많은 장비를 사서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미군 발주 공사는 전시 중의 긴급 복구 공사와는 달리 엄격한 제한들을 지켜야만 했다. 또 앞으로의 추세로 보나 쓰디쓴 경험으로 보나 장비 확보에 현대 건설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정주영은 생각했다.
정주영은 1957년 5월 초동 서비스 공장에 중기 사무소를 내고 김영주에게 관리 책임을 맡기고, 구입한 장비와 부속품들을 수리, 조립, 개조시켰다.
그밖에 장비 부속품은 미8군의 모델이 바뀌어 시장에 내다 파는, 거의 신품에 가까운 것을 중간 상인들을 통해 저울로 달아 고철값에 구입하곤 했다.
정주영은 미군이 모델이 바뀌어 쓰지 못해 내다 파는 부속품에 맞는, 미군의 전 모델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4년부터 미국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전쟁 복구 공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했고, 예상대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고령교 공사를 마무리지어 준 성과도 신용 현대의 이미지를 쌓아 그 후 정부 발주 공사 수주를 쉽게 할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나 주었다.
바야흐로 현대건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한강 인도교 공사를 수주하고부터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