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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마재권역’은 ‘지장성지’
동살의 꽃*
삼인리의 소녀가 도솔산의 차밭에서
깜냥대는데
도솔천에서 장수강까지. 너나없이
그 눈썰미가 선겁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소리 같은 장수강 갯벌 소년들은
배맨바위에서 투미하게 타울댄다
*백파긍선, 석전박한영, 신재효, 전봉준, 차경석, 손화중, 김성수, 서정주외
동살의 꽃의 시에서 삼인리는 선운사의 천지장(하늘), 인지장(땅), 지지장(지하)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운사(禪雲寺)는 아마 세계적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지장성지도량이다. 그렇지만 질마재권역의 지장성지는 선운리(仙雲里)라고 표현되어서 자세히 따져 보아야 한다. 즉 선운사에서 도량 공부를 마치고 질마재권역에 와서 군대에 갈 수 있는지 못 가는지 신체검사와 각종 의문점을 통과하듯 세세히 따져 보듯 말이다.
‘동살의 꽃’의 시에서 삼인리의 소녀는 하늘, 땅, 지하를 대표한다. 이 소녀들을 두고, 지금도 오소리 같은 장수강 갯벌 소년들이 배맨바위에서 어리석게 서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지금도 장담하고 있다.
2. 백담사와 만해문학관, 유정사와 봉평이효석문학관을 보듯 선운사와 미당문학관은 유네스코세계유산도시로서 세계사에 우뚝 솟을 것이다.
선운사*
민물과 바닷물이 맞닥뜨리는 장수강변에서
백로가 부처의 꽃 미소로, 왼발로 서 있는 것은
붕어를 보면 오른발로 날벼락을 칠랑갑다
천년의 동백꽃이 피면 동박새가 날아들고
그 아래로, 상사화와 꽃무릇이 피는 도솔산에서
부처도 백로에게 천둥번개를 칠랑갑다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158-6
나무*
지나간 시간은 다아
알아서 굽고
다가올 시간은 다아
몰라서 곧다
*‘아미타불’ 당신에게 귀의코저 합니다.
참당암의 연리목
깊고 높은 밤
이 때에 지장보살의 맘으로
외외한 염불에도 들키지 않게
내원 궁 건너 천마봉에서
어린 장단이와
늙은 조화님의 맹세
하늘에서는
봉황새나 그 둥지가
되기 원하고
바다에서는
해룡이나 그 난바다가
되기 원하며
땅에서는
이팝이나 조팝나무로
그 연리근이 되기 원하네
높은 하늘
깊은 바다
넓은 땅
그 수명 있건만
장단이와 조화님의 맹세
그 수명 영원하네
꽃-무릇
‘피겠네’가
지겠소에게
아는 척
일찍 갔다가
무슨 일 없소
‘지겠네’가
피겠소에게
모른 척
늦게 갔다가
무슨 일 있소
*모양성牟陽城
생성의 연대기 속에
한번은 타올라야 할
원시림의 핏줄로
꼭두새벽부터 창과 쟁기를 손에 들고 등에 지고
황소와 파랑새를 앞에 세우고 걷고 날게 하면서
워, 워, 워 -몰아 나간 머슴아가,
캄캄한 막장의 절망을
살아생전 이룬 성전으로
불꽃 화차에 실어내고
*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1
3. <미당 촌>과 ‘질마재신화’
나의 스승은 여러 정황상 세분 정도로 요약하고자 한다. 하늘 같은 스승은 서정태선생님, 그리고 박우영선생님, 박종은선생님이다. 하늘의 빗물이 땅에 내려 물길을 내듯 지켜봐 주시고 인내하신 분들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있어 기쁘다. 오늘은 미당 촌과 질마재신화 이야기를 서정태선생님이 시작하시고 지켜봐 주신 대목이다. 서정테선생님을 찾아오는 분들은 대개가 미당선생님 문학과 제자들로 생각된다. 서정태선생님은 황동규, 정현종, 오세영, 김재홍, 천이두, 김남곤, 송하선, 김화영, 서정춘, 황금찬, 이근배, 이경 등으로부터 많은 이야기와 발걸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라! 그래서 그분들의 실력을 적고 다듬어서 선생님께 정성껏 갖다 드렸다. 그래서 <미당 촌>이 정리되었다. 조희수가 20,000회가 넘었고 사연도 있었고 책임감이 컷다.
질마재신화는 삼신산의 모산 소요산과 칠산바다를 오르고 내려 나아 가면서 방장산, 두승산, 변산의 만고풍상의 이미지와 이야기들. 질마재권역의 사람들 생사화복과 생로병사의 이야기들이다.
특히 ‘80소년 떠돌이의 시‘에서 시집 제목에서 보듯 미당선생님은 1915년~2000년은 원시사회와 문명사회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미당은 실어증과 공황장애, 79세에 러시아 유학길, 본인의 치매방지를 위해서 세계의 산 1628개의 이름, 높이, 나라 이름을 매일 아침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임종에 이르러 자기의 제자(이경철)에게 내가 시인 맞느냐고 물었다. 그는 늘상 타인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본인은 그냥 집터도 안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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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마재의 첫눈
고갯길 저수지아래 선운리의 위뜸이나 새뜸 그리고 아랫뜸 비탈길사이로 고추밭엔 고추가, 복분자밭엔 복분자가, 콩밭엔 콩이, 인삼밭엔 인삼이, 논에는 나락이, 나무에는 새들이, 풀숲에는 들쥐나 고양이가, 고샅에는 술주정뱅이 정수가, 천석꾼 천수가, 홀어미 고잔 댁이, 노총각 천식이가, 홀아비 서영감이 동네 방앗간 집 헛간에서 소요산으로 내리는 눈을 맞는데 …
소요산에 목탁소리, 장수강변에 저어새, 하전갯벌에 바지락, 칠산 바다에 재갈매기, 미당산소에 까마귀, 고추밭 고랑에, 복분자밭 이랑에, 국화꽃밭 언덕길에, 아름이 등교 길에, 재홍이네 담뱃가게 앞에 오늘 첫차 시내버스에도 눈이 쌓인다.
눈 쌓인 인삼밭에는 농부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아낙들은 김장이다, 참기름이다, 국화차다, 복분자다, 손자다, 서방님이다 화롯불에 고구마를 굽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날은 고샅길에 정수가 까마귀목소리로 “리-미럴 내가 해서 안 되는 거 봤어” 몸짓을 하는데, 천식이도 남의 밭두렁 논두렁을 걸을 때마다 “시상 빚이 질 무서운 것이랑게, 리미 돈이 웬수여, 건강이 최고제”라고 '기억하며' 암자의 목탁소리처럼 손바닥을 친다. 더구나 천수도 노랑머리갈매기처럼 어촌 갯벌만 기웃거리는데 고잔 댁은 또 하는 말이 “긍-께 내 눈에 차는 놈이 있어야제”라며 딴짓을 하다가 서당골 물가에 무자치처럼 바지락밭만 찾아 기웃거린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서영감은 소재지 길 다방에 새로 온 꽃순이에게 갔다가 “아 긍게 이리 와 바아,” “아따 이리 와봐야,” “이리 와 보랑게” 양다리만 오므렸다 폈다 세운다. 그래서일까 이런 궁상窮狀들이 눈발 맞은 바다에서 잡아 끌어올린 숭어회나 장수강변에서 움켜잡아 올린 풍천장어에다가 국화주나 복분자술 한 잔으로! 질마재 고갯길에 바람 쌩쌩 지나가게, 명사십리 동호 앞바다에 파도 높이 치게 하는가 …
신흥리의 봄*
지-지난 겨울날부터인가
이미 청춘을 소화해 버린 삭신으로
두텁게 깔린 썩은 나뭇가지 속에서
무채색에 산천을 바꾸는 꿈을 꾸는 두더지가
흙질에 탄력을 키우는 꿈을 꾸는 지렁이가
지층 속에 묻힌 꽃향기와 새소리가 겹치는
신록까지 묻혔을 매장지를 찾아 꿈을 꾸는 곳
제 집 담장 안팎에서
남의 집 살림만 토의 하던 입들이
새끼 깐 짐승은 건들지 말자는 입들이
늘 같은 자리에다 삽질하자는 입들이
한 치도 바꾸면 안 된다는 입들이
이웃들과 의견만 모아서 끄덕 대는 곳
바람이, 짐승들이 들고 난 구멍을
가지런히 생긴 텃밭과 마당과 꽃밭을
더듬거리며 생긴 허공에다가
전답과 냇가와 산들이 생긴 비율로
계절의 붓으로 찬찬히 그려지는 곳
어떤 일도 도전하겠다는 두더지와 지렁이가 있어서
산과 강과 바다와 전답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곳
*질마재의 권역에 있는 4개의 마을 중 하나
서당골書堂搰
그래도 하늘 천 땅 지로 고삿 안팎에서 어거리풍년이다
천둥벼락에 맞서는 개미
금방에다 밤길 내는 달팽이
사방에다 오솔길 내는 구렁이
칡넝쿨과 등-덩굴에 맞서는 중심
어둠에 올무로 애면글면하는 밝음
녹차 밭에 무싯날로 엿보는 팽나무
보살의 결단에 맞서는 이 처사
개소리와 새소리에 버티는 침묵
파종에 시계바늘인 그 농부
상류를 막 채운 저 갈대숲
갈대숲에서 하류로 용트림
용트림에 지천으로 핀 개망초
개망초만큼 널린 새벽 거미줄
아침거미줄에 걸려 붙은 날벌레
자귀꽃과 백일홍이 피기 전, 때까치
감꽃이 필 때 헛간에서 새끼고양이
감이 떨어질 때 고삿에서 어미고양이
하늘에서 땅이 멀어지면 울그락
땅에서 하늘이 가까워지면 불그락
아직도 내남없이 하늘 천 땅 지에 글 멀미로 서당골 안팎에서
비나리치는데 훈장 댁에 은행나무도 아귀차게 쏘개-질이다
*'서당물 서쪽 계곡상류와 하류의 중간에 미당이 생전 처음으로 사본 땅(돌밭,90평 정도)이 있다고. **이재 황윤석(1729~1791)의 말년에 이곳 서당마을에서 그의 교유권에 있는 사람들과
제자들이 학문을 논의 하였다는 넓고 큰 글 바위가 서당 골의 상류(70m)와 하류의 중간쯤에있다
4. <문학뉴스> 편집국장 들풀입니다. 매년 이 맘 때(11월)면 온 마을이 노란 국화꽃으로 물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1) ‘질마재국화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질마재국화축제’는 제가 미당시문학관개관 때부터 질마재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미당시문학관이 질마재주민이고 질마재주민이 미당시문학관입니다. 서정주선생님을 알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모든 회의와 대소사의 일들을 미당시문학관에서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회의나 대소사의 일들이 미당시문학관에서 의논되고 그 실천이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2003년 11월 중순경 정우영(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부장)시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서정주선생님 묘소를 찾아가 뵈니 참 부끄럽습니다. 「국화 옆에서」 시가 있는데 산소관리를 부탁합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고창군의원이던 정원환과 그의 부인이 우연히 사무국장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서정태, 정원환의원 부부, 서동진이 며 칠 전 정우영부장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원환부부는 저의가 고창군을 위해 국화꽃(「국화 옆에서」)을 심고 책임지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부터 주저 없이 잡목과 쓰레기로 뒤덮은 미당선산(6,000평)에 정원환의 사비로, 그의 지인(들꽃학습원-이학성)에 도움으로, 윤만수(선운교회장로, 윤씨 선산지기)에 배려로, 이태문(안현마을, 이씨문중대표)에 신의로 질마재가 들썩거렸습니다. 전국에 국화꽃축제의 시작이 된 2004년 11월 3일 4,000평 ‘황금빛 국화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특종으로 시작해서 전국의 사진작가와 관광객이 한 달간 30만 명이나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3만평에, 2006년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고창읍내 석정온천에 30만평에, 그리고 고창군민의 후원으로 질마재에서 고창읍(12㎞)까지 도로 양옆에 국화꽃을 심었습니다.
2) ‘미당시문학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 서○○ 부부는 한국문학관협회회의에서 위 사실을 발표한 바, 모두로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미당시문학제』 공모사업에 응모 권고를 받았습니다. 위 사실을 고창문인협회회 진기동회장께 말씀드렸고, 진기동회장은 정일묵, 표순복, 신미수 등과 함께 사방으로 『미당문학제』 준비했습니다. 『미당문학제』는 동국대 윤재웅, 중앙일보 이경철, 미당시문학관 정원환이사장, 진기동, 서동진, 신미수, 질마재마을 주민들이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준비(진흥위원회공모기금, 1,800만원, 현금-현물모금 3,000만원, 복분자술 50병, 고구마 50박스, 계란 100박스 등)하였습니다. 2005년 11월 3일 『미당문학제』는 황금빛 국화꽃과 함께 질마재에 가득했다. 이날 『미당문학제』에 참여한 인사로는 중앙일보사장, 동국대총장, 이어령장관, 신경림시인, 황동규교수, 김재홍교수, 이근배시인, 장사익가수, 김남곤전북일보사장, 송하선교수, 이상인시인, 정주환수필가, 전원범교수, 진동규시인, 김해동사장, 이기영작가, 이남호교수, 전옥란작가, 서지월시인, 민용태교수 부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질마재주민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계란과 고구마와 복분자와 부녀회에서 손수 만든 마을음식들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지역 특산품을 선물하였습니다.
3) 먼저 미당 시문학과 건립 동기는 어떻게 추진됐나요?
국내 최초로 민선지자체에서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한국 현대 시사에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위치는 확고하여서. 후학 시인 고은은 「서정주 시대의 보고」라는 글에서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라고 말한 바 있고, 어떤 이는 서정주를 “살아 있는 시신(詩神)”이라고 하여서, 신라의 국선도와 불교의 윤회전생, 그리고 민간에 떠도는 온갖 설화를 에두르는 그의 시적 방황 또는 정신사적 편력은 한국인의 심상과 우주에 떠올라 있는 역사의 총체, 생사관, 이승과 저승을 한데 아울러서. 그래서 초, 중, 고, 대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의 고향집(선운리)으로 학생, 교수, 기자 등이 찾아왔어요.
그 당시(1995) 우리나라 민선정부가 시작되면서 지자체에서는 민심의 수요와 공급을 찾는 데 군력을 힘을 모으던 차에, 서정주의 생가(선운리)가 폐가인 점이 찾는 이마다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것이 전국에 소문이 나면서 생가복원과 미당시문학관으로 건축하자는 여론이 그 때에 앞서갔던 것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창군수(이호종)는 생가복원을 하여서 서정태(미당아우, 귀촌)옹이 그 집에서 거주하면서 서정주의 문학을 선양하기를 바랬고요. 그리고 김원(광장-건축환경연구소)교수에게 미당시문학관 설계를 1998년에 의뢰했어요.
이때에 광장-건축환경연구소에서는 미당생가에서 외가 쪽 길가 안(70~80m)까지 거리에 지하터널을 만들어서 미당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설계(398억)를 제출하였고. 이에 미당시문학관건축은 이호종군수의 민선초기의 군정에 사정(군비)과 김원교수가 생각하는 미당서정주시인의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에 충돌 같았습니다. 이호종군수는 선운리에서 주민, 교수, 향토사학자들과 최선의 방법을 찾던 차에, 문득 서정태옹으로부터 귀에 번뜩이는 제안을 듣게 됩니다. “지금 이 앞에 선운분교(3,000평)가 폐교 상태입니다. 이 선운분교를 활용하면 환경문제와 제정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남현동 서정주선생님께 의논 차, 서정태, 이호종, 김원, 김준형(부안면 군의원)이 찾아 갔는데, 서정주선생님은 “문학관은 나 죽거든 짓든지 말든지 해라.”하고 문전박대를 합니다. 이 환경을 가지고 김원교수가 새로운 설계로 제안을 하였는데, 선운분교(폐교)는 낡았고 미당시문학관 설계는 새로워서 건축이 어려웠어요. 그리고 건축비용(성금 1억, 국비 3억, 군비 3억)마저 빠듯하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유족회 등은 연일 친일문제와 전두환 찬양을 문제 삼고. 다시 말하면 국내 최초로 지어진 미당시문학관과 생가 복원은 3~4년에 우여곡절 끝에 2001년 11월 3일에 개관합니다.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시위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죠.
4) 문학관과 관련된 친일 논쟁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
미당시문학관이 개관 때부터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고창군수(이강수)와 미당시문학관, 그리고 관계된 곳을 찾아다니며,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를 구호로 태평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무리지어 다녔다. 이에 서◌◌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은 문학관 개관 때부터 태평양유족회는 일본의 정책 「대동아공영권(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민족 끼리 같이 번영할 권리'-유럽세력을 일본이 몰아내고 보호 해준다는 뜻)」에 참여한(유족의 주장은 300만을 강제로 징발했다고 하나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의무와 영광을 위해 참여했다고 서◌◌은 주장) 전범에 후예이니 자 민족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주장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에게는 ‘죄’는 연대 죄와 자범 죄로 구분할 줄(모든 주장이 태평양유족회 같음)알라며 옥신각신 세월이 흘렀다.
5) 미당의 친일시는 언제부터인가 문학관에 걸려 있다.
‘미당의 친일시 달기’는 국화축제(2004)와 미당시문학제(2005) 때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유족회측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그 당시 미당시문학관 박우영 이사장과 김정웅이사 등이 협의 하였다고 들었다. 미당의 친일시를 미당문학관에 벽(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게첨하는 날(2004년 11월)은 미당문학관측에서 박○○, 김○○ 등이 참여하였고, 상대 쪽에서는 손○◌, 오◌◌, 이◌◌ 등이 참여해서 서로 간에 협의하였다.
6) 미당 서정주를 개인적으로 설명 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미당서정주는 특별한 애국지사(김구, 김좌진 등외)는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위해서 일본 동경대 법대의 꿈도 꿨고, 주변의 불의를 보면 행동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앙고보(광주학생 독립운동)사건, 그 이듬해 고창고보 자퇴(독립운동/불온자, 퇴학권고)사건, 매번 만주로 독립운동하기 위해 가출사건, 보다 나은 효도를 위해 스승을 찾고 친구를 찾아 공부도 하지요. 그래서 주변의 도움으로 『화사집』(1940) 발표 후에 박한영대종사, 만해한용운선생, 조선일보사장, 동아일보사장 등 우리 민족진영의 지사들로부터 최고의 인품과 시인이란 칭찬을 받게 된 미당서정주는 조선일보( 폐간시), 김좌진전기, 이승만전기 등은 그 분들의 부탁에 의해 쓰게 됩니다. 이 후 미당은 한시도 게으르지(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을 극복) 않아서 모두로부터 배우고자하고 부탁받는 시인이 됩니다.
ㅋ
7) 개인적으로 미당 서정주의 시를 하나 소개한다면?
*아버지의 밥숟갈
아버지가 들고 계시던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를 보시자 떨구시던 그 밥숟갈
정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던 밥숟갈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 주모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간 내가
해 어름에 돌아와 업드려 절을 하자
저절로 떨어져내리던 아버지의 밥숟갈
`````그래서 나는 또
아버지가 끼니밥도 제대로는 못 먹게하는
대불효의 자격을 또하나 얻었다.
8) ‘광주학생사건과 고창고보자퇴(퇴학권고)의 사상배경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일본제국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한다! 우리 조선독립만세>의 배경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레닌의 『러시아 혁명의 거울로서의 레오 톨스토이』와 일본인 사회주의자 누군가의 『제이빈핍물어』, 자본주의의 『가다꾸리니』, 『아메리카 기행』 등 다양한 전문서적이 다양한 이론과 행동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사상적 배경과 조선일보 ˂폐간시˃행진곡이 독립운동 연극 ‘시나리오‘로 암암리에 활성화되자 1944년 고창경찰서에 투옥이 됩니다.
9) 동아일보의 사회부장과 문화부장(1946년), 그리고 대한민국 서기관(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3급, 1948년)에 합격하고도 그만 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당은 천재였지만 정신적환경(1915~2000)은 항상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미당(未堂)의 뜻은 본인은 집터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더듬더듬 조심조심 사셨다고(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 생각해요.
<
10) 개인적으로 1900년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미국 진주만공격 등 가히 일본은 세계 최고의 힘을 가진 아시아의 일등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11)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우리(한민족)의 잘못이다. 일본은 탓할 이유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생겨나면서부터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존재한다. 일본국민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국력을 키운다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2) ‘을사늑약’에서 해방 때까지 우리 한민족의 백성들은 그 ‘삶’과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업’으로 말하면 기업경영진이 바뀐 것이 아닌가? 우리 편이 아닌 저 편이 와서 기업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이 회사 직원과 가족들은 다양한(각 분야) 방법으로 이 전의 〈기업주권〉을 위해 희망하고 살았을 것이다. 손은 안으로 굽는 것 아닌가! 이때에 살았던 모든 분들에게 아픔을 전하고 싶다.
☺12)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논쟁도 대단했다. 돌이켜 생각한다면 바뀐 것은 없는가?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라는 구호로 미당시문학관과 고창군수에게, 사이버상에서 더욱 극렬하였다, 그러던 차에 사이버상에서 본인신분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돌○○로서 고려대 학사, 석사를 마친 현직교사이다. 고창군청공무원 〷새끼들은 신문도 텔레비전도 안보니까 혈세로 〷들을 하지! 쓰고 있었다. 그래서 서○○은 「대동아공영권」(일본에는 자신들이 또 다른 유럽이라는 기묘한 사상으로, 그 원류로서 유럽사가 있고 원류의 원류로서 로마제국이 있는데 그 로마가 붕괴된 후 되살리려 했던 게 르네상스이고, 그걸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것이 대영제국, 그 영향을 받은 게 일본이라는 생각이다.)은 일본과 조선은 동등한 일선동조론에 근거해서, 권리와 영광을 함께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정치적 활동에 징용이든 보급이든 일본신민으로서(태평양전쟁유족회의 조상) 참여한 매국노후손들이 마치 대한민국애국자인 것처럼 행동하지마라! 이 후 댓글은 없었고, 그 당시 고창군청 미당시문학관 담당 팀장님(이○○)과 교육청 장학사(박○○) 께서는 미당선생님 제자들이 그리 많은데, 사무국장님께서 큰 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이버상’에서는 위와 같은 댓글은 없었습니다.
<사진>1929년 중앙고 퇴학기사
14) ‘질마재권역’과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가 대단하다. 앞으로 어떤 게획을 가지고 있는가?
질마재권역의 콘텐츠는사리안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에서는 각 마을별로 그 동안 공부하고 실천한 내용을 가지고, 국화벽화체험마을, 맛 체험마을, 마을 가꾸기마을, 미당선생님의 『질마재 신화』를 읽고 각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서 『질마재권역』 마을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창군청에서는 현재 『미당시문학관』과 『질마재권역』에 각종 콘텐츠를 위해 동국대학교에 위탁하여서 만해문학관은 백담사, 봉평이효석문학관은 유정사를 떠올리듯 미당문힉관도 선운사와 같이 전국적 세계유산도시의 고창의 위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는2015년 2월 7일 고창부안축협 참예 우한우명가에서 《미당문학회》 창립총회를 열고, 《미당문학》 창간호를 발표하는 등 ‘미당정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창간호에서 ‘미당문학회’ 김동수회장과 감명수사무국장은 ‘문학의 본질은 우리의 사회적 편견과 독선에 맞서, 인간 본연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끝이 없는 사랑과 연민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간적 지향이야말로 문학의 자율성과 심미적 고양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미당이 일찍이 《시인부락》(1941) 창간호에서 언급한,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을 합해 하나의 심포니를 만들어 보려한다는 창간사를 떠올린다. 《미당문학》도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되살리고 대립과 분열을 화쟁(和諍)으로 이끌어 가면서 한국문학에 또 하나의 정신세계를 열고자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15) 본인이 한 편의 시(詩)를 허락한다면!
미당이 일찍이 《시인부락》(1941) 창간호에서 언급한,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을 합해 하나의 심포니를 만들어 보려 한다는 창간사를 떠올린다. 얼마 전 어느 스님(고승)은 결국 하나의 종교의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세상은 결국 ’신의 세계‘를 ’부모의 심정‘에서 찾을 것이다. 즉, 통 종교의 세계말이다. 그래서 ’부모의 심정‘을 남기고 싶다.
부모님의 심정은 신의 심정
부모님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신은 인류의 부모님이시며
부모님은 천하를 다 내 준다 해도 내 자녀를 원하듯이
신은 인류를 천주와 바꾸지 않으며
부모님은 내 자식이 행복하고 완전하기를 바라듯이
신은 인류를 위해 존재하고
부모님은 결혼하기 전 정조를 원하듯이
신의 순결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과 영혼의 중심이며
부모님은 잘난 자녀보다 불행한 자녀 때문에 근심하듯이
신은 불행한 인간과 민족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며
부모님은 형제의 다툼을 싫어하듯이
신은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원하며
부모님은 열 자식을 키워도 그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 하듯이
신은 각 분야에 절대가치를 이루어 조화를 바라며
부모님은 사랑을 중심한 정지의와 진선미를 갖춘 자녀를 원하듯이
신은 참사랑을 중심한 정지의와 진선미를 갖춘 공생, 공영, 공의의
주체자로 역사하시며
"신인지관계-부자지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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