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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복 시학의 안식과 고향의식
박영배(시인, 문학평론가)
1. 시작하며
그 길에 나서면 만날 수 있는 시인이 있다. 그 길에 서서 두리번거리면 다가오는 시가 있다. 그 길에서 그가 아직 남겨둔 길을 바라보면 손짓하는 시가 있다. 잠시 그 길에 앉아 숨 고르는 시인의 피멍 든 발꿈치를 만지면 비로소 가슴을 때리는 시가 있다. 그 길에는 시인이 제 몸을 달구고 두들겨 곳곳에 꼿꼿이 꽂아놓아 그 자체로 길이 된 시가 있다.
평생을 오직 한길만을 밟아온 시인은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서 자신이 도달해야 할 길의 끝을 보았을까. 그리고 그 길을 밟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길의 길섶이라도 딛고서야 어렴풋이 보일 것이다. 아직도 거쳐 걸어야 할 곳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그 길의 어디쯤에서 부딪친 이 시인의 표정에 대해서, 그리고 몇몇 시편의 흔적에 대해서 말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지 모른다.
한 시인의 작품을 적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균형감 있는 시 읽기가 요청된다. 작품의 발생론적 탐구와 형식 분석이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게 기울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될 때 바른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의 형식에 대한 이해가 이미 상당한 정도로 명료해진 때에는 그것의 발생론적 의미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탐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춘복 시인은 평소 자신의 문학 스승으로 여러 시인을 거명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박종화, 신석초, 오영수, 김구용, 황금찬, 박목월, 한성기, 조병화 등이 그들인데, 특히 신석초와 박목월은 성춘복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깊게 영향을 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성춘복 시학은 초기의 극심한 침체를 경험한 후, 서정으로의 복귀를 결행하면서 형식의 파행 및 길 떠남을 통해 욕망을 털어내며 자기구원을 꾀하였고, 이제는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사유와 함께 관조적인 시세계를 구축하면서 자신의 시적 지향으로 그토록 오랫동안 좇아 헤맨 ‘시적 삶과 시정신의 본향’ 그 편안과 안도의 길에 들어서려 한다. 본고에서는 성춘복의 지난한 시적 행로를 줄곧 이끌어주었을 스승의 가르침에 주목하면서, 그가 평생을 사사한 신석초와 박목월의 삶의 자세와 시정신이 ‘성춘복 시학의 안식과 고향의식’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쉴 섬 하나 점찍으며
‘내가 만든 섬’은 비로소 내가 발견한 나의 처소 혹은 미래이다. 보람이거나 삶의 값이다. 영원한 현재를 추고코자 하는 나의 그리움이고, 약속된 나의 길이다. 이 길을 더욱 추구하는 일이 내가 엮은 시라면 내 인생도 탓할 것은 아니리라. (성춘복, 제8시집 『길 하나와 나는』, 1990, 「책 머리에」)
성춘복 시인은 한 자전적인 수필에서 “만일 내가 시인으로 인간의 어느 한 부류를 택해야 한다면, 세속과는 등을 돌리고 깊은 눈과 날카로운 콧등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여 한 톨의 먼지도 그 몸에 묻기를 거부하는 고고하고 초연한 몸짓으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내 삶을 일으키게 해 준 한 스승으로부터 문학과 삶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지성으로서 언어로서 시인이 갖추어야 할 문학과 삶의 자세와 방법을 실천적 몸짓으로 물려주신 분, 맛과 멋을 아울러 인간적 훈기와, 또 보람으로 살아 있게 지혜를 일깨워주신 분, 석초(石艸) 신응식 선생이 내게 던진 엄정한 몸짓과 사고법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내 안에 깊이 뿌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며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삶의 바른 자세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만큼 석초가 성춘복에게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의 시편은 스승 석초에 대한 그런 믿음과 그리움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바다가 보임직한 길을
우리 내내 달렸습니다
키 작은 해바라기의 천인국
노랗고 뜨거운 길을
맨발로 뛰었습니다
부용꽃 새 빛깔 익히며
너는 꽃게의 붉은 등을 타고
늦은 한낮의 걸음이 되었고
나는 잔솔밭에 허리 꺾여
땀방울로 매달렸습니다
파도 소리 몰려가는 서쪽 하늘
간끼밖에 더 얻을 것 없는
헌 망태기 벗어 놓고
물 빠진 모래펄 밀어붙이며
진탕길을 손 붙들어 걸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도 모래바람뿐
더운 날의 서해는 구름이었고
내가 쉴 섬 하나
내가 앉을 자리로 점찍으며
파도 건너 바위로 깊이 묻었습니다.
─ 「서천행瑞川行」 전문
「서천행」은 성춘복의 제8시집 『길 하나와 나는』에 실려 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이제 방랑의 길에서 쉴 곳을 찾으며 충청도의 서쪽, 스승의 고향으로 지친 발걸음을 옮긴다.
70~ 80년대 혹독한 시대성의 갈등으로 정체성의 방황을 거듭하던 시인은 시의 본고장을 떠돌며 ‘시 쓰기의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서정으로 복귀하려는 자신과 뜨겁게 싸움을 벌인다.
그렇게 하와이에서(「하와이에서 춤을」), 부다페스트에서(「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다리목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알렉산드리아 가는 길」), 레닌그라드에서(「레닌그라드를 떠나며」), 파리에서(「파리 入城」) 성찰과 함께 자기회복을 꾀하던 시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스승 곁에 안식처를 마련하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이 떠나고 없는 그곳에는 “간끼 밖에 더 얻을 것이 없”는 “물 빠진 모래펄”과 “진탕길”만 남아 있을 뿐이어서 그나마 스승의 가르침의 체취라도 남아 있을 것 같은 “섬 하나”를 “앉을 자리로 점찍으며” 미래의 쉴 처소로 묻어두려고 한다. 일찍이 스승 석초로부터 물려받은 문학과 삶의 방법이 진정한 서정으로 복귀하는 바른길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성춘복 시의 특성은 여러 면에서 석초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20연으로 이루어진 성춘복의 「공원 파고다」와 45연으로 된 석초의 「바라춤」은 공통적으로 장시(長詩)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현실적 갈등과 허무주의 색채를 띠면서도 짙은 상징성으로 화자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지 않고 초월적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추구하는 서사를 보여주면서, 전체적으로는 엄격한 구성과 함께 고전적인 심미성을 추구한다.
또한 1986년에 발표된 성춘복의 「폭풍의 노래」는 지적 뉘앙스를 품고 있으며, 생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각성하는 모습을 도출하면서, 오늘의 위치와 그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함을 다양한 상징을 불러내어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제목의 석초의 장시 「폭풍의 노래」와 매우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성춘복의 「폭풍의 노래」에서는 과거지향으로 어휘의 낭비 없이 절제가 두드러지며, 4연까지 내보인 강한 긍정을 마지막 연에서 슬며시 부정함으로써 과거에 품었던 의지를 되살리면서 여운의 감동을 발산하는 좀 더 짙은 서정의 멋을 엿볼 수 있다.
바람이었네, 천둥이었네
가슴 깊은 모래펄을 쓸고 가는
가을밤의 폭풍이었네
(중략)
빗소리였네, 어둠이었네
뱃머릴 흔드는
사나운 흐름이었네
(중략)
바람은 없었네, 어둠은 없었네
썰물과 밀물에 들고 날
나의 길은 없었네.
─ 성춘복, 「폭풍의 노래」 부분
바람이 분다. 바람아 잠 깬 바다를 건너
내게 몰려오라.
너의 숨결은 내 아침 하늘에
안개와 광명의 티끌을 가져온다.
금은으로 두른 아레스의 옷자락이
나를 빛내고 또 나를 흐린다.
프로메테우스여. 내 ─
바다를 쏘는 황금 화살이
구름의 벽을 뚫고
너의 심연으로 쏟아지는구나.
(중략)
바다는 고민하는 아틀라스의 머리 위에서
진동을 한다.
바위로 부서지는 물결의 물보라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아오르는구나.
(중략)
갑작스러운 물결의 소용돌이로
바위는 포효하고 하늘은 찌푸려지고
갈대는 떤다.
(중략)
그러나 조바심하는 가슴이여
내 내부의 깊은 뒤설렘이여
(정신은 질서 없이는 지속되지 않느니)
오오, 독수리여. 제우스의 사자여
나의 간을 갉아먹는 악독한 새여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야 한다.
너의 날카로운 부리로 쪼은 내 몸의 상처
얼마나 포악한 너의 박해가
나에게 이다지도 큰 시련을 주었던가.
(중략)
나는 파괴된 것을 건설해야 하리
나는 언제나 높고 빛나는
영원한 피라미드를 원한다.
─ 신석초, 「폭풍의 노래」 부분
성춘복과 석초의 관계는 석초가 한 신문사의 문화부장으로 있을 때부터 두터워진 것으로 보인다. 고된 수련 과정을 거쳐 시와 함께 시인으로 갖춰야 할 인품과 덕성을 갖추는 일이 중요시되던 시절에 석초와 같은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던 김후란, 대학 동문인 김여정, 그리고 홍희표, 임성숙 등과 함께 ‘화요회’ 모임을 통하여 ‘시와 시인’ 공부를 지속하면서 그와 더욱 가까워졌고, 1958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현대문학』에 「어항 속에서」 외 2편이 석초의 추천을 받으면서 성춘복은 평생 제자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적인 시적 방법인 상징주의에서 동양적 관조의 유현(幽玄)한 세계로 깊이 파고들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에로 발전되어간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신석초에 대해 “선생은 이미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 있지만, 내 나이 쉰이 넘고 예순이 차도록 그분의 행동반경 속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면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이 내게 준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타당하기만 하다”면서 노년에 이른 성춘복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석초의 가르침이 얼마나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유랑하듯 해외를 떠돌며 시의 근원을 확인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성춘복이 ‘쉴 곳’을 찾아서 시적 삶의 본향, 가르침의 체취가 배어있는 석초의 고향 서천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의 시적인 삶과 시정신을 담금질하며 완성해나가는 고난한 행로에서의 본능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3. 내 마음의 고향은
귀소본능으로서의 고향, 그 회귀가 단순한 동물적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해도 삶의 뿌리인 과거와 미래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 무한의 동경을 갖기 마련이지요. 고향은 내가 태어났거나 부모가 한 생을 살던 곳이라 자주 가는 것은 아닙니다. 고향이란 개념의 하늘과 산과 개울이 그곳에서 지키며 기다리고 있지요. (“존재 가치와 의미부여: 성춘복 시인”, 『스토리문학』 Vol. 60, 2009년 8월호)
경주 외동리
박목월 시인의 도화꽃 피던 곳엔
눈썹 같은 달이 뜨고
음력 오월 초닷새
보문호 맑은 물살이
내 마음 헹궈내면
옛적 신라의 요석공주
손톱마다 봉선화 꽃물 들여
간곡히 당부하는 말
내 마음의 고향은
이곳의 밤하늘
나를 더욱 밝히려 드네요.
─ 「신라의 달밤」 전문
타지에서 외롭고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심사일 것이다. 시편 「신라의 달밤」에서 화자는 “음력 오월 초닷새”, 양기가 가장 왕성한 수릿날에 “손톱마다 봉선화 꽃물 들”이고 사랑하는 아들 설총(薛聰)을 기다릴 “요석공주”를 소환하며 “경주 외동리/ 박목월 시인의 도화꽃 피던” 그곳의 밤하늘에 떠올랐을 “눈썹 같은 달”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뭐라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면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는 바람에 날려서// (중략) //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중략) //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라고 노래하는 목월의 시편 「이별가」의 몇 대목을 되살려내며 “내 마음의 고향은/ 이곳의 밤하늘/ 나를 더욱 밝히려” 든다고 자신의 시의 고향을 ‘신라인과의 대화, 저승과의 대화, 저승의 모든 한국인, 우리네의 고향 친구들, 또는 조상들의 얼과 화답하는’ 목월의 그 시정신에 두고 있음을 고백한다.
젊은 시인 성춘복이 목월을 평생의 스승으로 마음에 담은 것은 두 사람이 부산의 ‘하단’으로 예정에 없던 동반 여행을 다녀온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성춘복은 그 여행의 시작을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 종로2가의 화신 옆 장안빌딩에 자리한 을유문화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1층의 책방에 들렀던 목월 시인은 구내전화로 그 위층 을유문화사의 편집실에 있던 나를 불렀다. 아래층엘 들렀으니 잠시 내려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다. 물론 목월 선생이 위층으로 직접 올라올 수도 있는 처지였는데 그날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나를 불러 내렸다. 왜냐하면 그 책포에서 청록집이 출판되었을 뿐더러 책임자도 잘 아는 터였다. 그런데 복잡한 인사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래로 내려가자 그분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책방 바깥으로 나를 인도해 거리에 세워놓고는 다짜고짜로 “나하고 지금 어디 좀 안가겠어?” 급한 일이라도 있는 양 다그쳤다. 왠지 나는 그 이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저 좀 멀리 다녀오자”는 말씀이었다. 그 외는 다른 이유를 건네지 않으셨다. 그분 특유의 큰 눈망울을 굴리면 그때 나는 두말없이 하자는 대로 쫓는 습관이 이미 되어 있었다.
한편, 성춘복을 다그쳐 낙동강이 바다를 만나는 갈밭 마을 ‘하단’으로 내려가 지내고 돌아온 목월이 그 며칠간의 여정에 대해 「 하단에서」란 시편으로 속마음을 드러낸 것을 보면, 그도 평소에 젊은 성춘복을 남달리 아끼며 가까이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갈밭 속을 간다.
젊은 詩人과 함께
가노라면
나는 혼자였다.
누구나
갈밭 속에서는 일쑤
同行을 놓치기 마련이었다.
成兄
成兄
아무리 그를 불러도
나의 音聲은
內面으로 되돌아오고
이미 나는
갈대 안에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갈밭은
어석어석 흔들린다
갈잎에는 갈잎의 바람
白髮에는 白髮의 바람
젊은 詩人은
저편 기슭에서 나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나는
應答할 수 없었다.
나의 音聲은
內面으로 되돌아오고
어쩔 수 없이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 박목월, 「同行 − 下端에서」* 전문
* 『사상계』 1968년 1월호에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제목이 「下端에서」로 되어 있고 하단에 대한
주가 달려 있다. “下端은 낙동강 하류 부산시에 있는 갈밭 마을이다.”
목월의 서정시편들은 그의 천부적 언어능력에 의해 단단한 결집력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초기 시편들의 경우 한국시가 도달할 수 있는 순수의 궁극을 보여준다. 특히 정서와 의미 그리고 그것들의 음성이 지니는 소릿결을 합일해낸 『청록집』과 「산도화」 시편의 모국어는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모국어를 아름답게 가꾸어 그 속에 깃드는 정신과 정서를 고양된 모습으로 담아내는 일이 성춘복에게는 시인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소명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국토의 남단 토말인 부산의 하단에서 목월과의 동행을 끝내고 상경한 몇 년 후 성춘복은 제2시집 『산조散調』를 상재하면서 목월의 「하단에서」에 부응해 「동행」이란 시편으로 화답한다.
낙동에선가
하단에선가
갈대밭 속에서
동행은 알몸이 되어
강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려우선가
따가우선가
돌아오는 길엔
정자로 하늘을 받치고
처녀애의 과원에 앉아
은밀한 과실에 얼굴을 묻었을 때
하이얀 알몸을 부르는
갈밭의 소리
그날 이후
거리에서 본 동행은
별로 단정한 차림도 아니었고
오늘은 철저한 알몸으로
찻잔 속에 함께 들어
짙은 하늘빛 바다의
순수한 화신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성춘복, 「동행」 전문
성춘복은 하단에서 목월과 함께 “갈대밭 속에서” “알몸”으로 “강 속으로 빠져들었”고 “돌아오는 길엔” “처녀애의 과원에 앉아” “하이얀 알몸을 부르는/ 갈밭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하단에서의 동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철저한 알몸으로/ 찻잔 속에 함께 들어/ 짙은 하늘빛 바다의/ 순수한 화신으로/ 가라앉”아 목월과 한 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훗날, 성춘복은 『목월 선생 30주기 기념문집』에서 “그 후 몇 차례의 여행을 목월 선생과 하면서 심정적인 얘기는 아무것도 없이 시에 관하여 인간에 관하여 사물에 관하여 그리고 우주에 관하여 참 많은 것을 토로하였으며, 그런 뒤 목월의 실상과 같은 벗은 모습의 선생인 그분과 나란히 찻잔을 받아놓고 있으면, 반드시 내 잔 속으로 들어와서 뚫어지게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거듭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한 수필집에서는 그 ‘하단에서의 일’을 다시 상기하며 자신이 직접 그린 펜화 한 장과 함께 가슴에 묻어두었던 목월을 향한 짙은 그리움을 드러낸다.
이제 노년의 성춘복은 60여 년 전 하단에서의 동행을 떠올리며 자신의 시의 고향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신라가 있고, 어머니 품속 같은 요석공주의 고향 경주가 있으며, 젊어서 처음으로 대면하며 평생을 따라야 할 것으로 느꼈을 그 ‘묘한 눈빛과 입술’의 목월의 서정과 시정신이 있는 그곳으로 끝내 돌아온 것을 직감한다. 돌이켜보면, 목월을 따라나선 그 날 ‘하단에서의 며칠’이 늙어가는 목월에게는 제자를 기르고 친구를 사귀는 인생의 ‘시와 더불어 생활하는 길’에서 젊은 시인과 함께 새로운 ‘무언가를 잡아보려는 절박한 길’이었다면, 성춘복에게는 자신의 시정신의 근원이 된 목월의 그 ‘묘한 눈빛과 입술’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국토의 끝을 마구 쏘다닌, 그러나 훗날 그 근원을 좇아 악착스레 따라 밟아야 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우리 멱 감을까?” 목월이 떠난 후 혼자가 되어 걸어가는 성춘복의 가슴에는 그 날 목월이 갈대밭이 펼쳐진 낙동강 하류에서 훌러덩 옷을 벗어 던지면서 철이 덜 든 아이처럼 외치던 그 목소리가 자신이 다다라야 할 순수의 궁극, 서정의 원형인 시정신의 뿌리로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4. 끝내며
성춘복의 시편들은 그의 내면에 다가가 ‘시가 허식이나 어떠한 장식도 걸치지 않은 자유로의 순수를 회복하는 길에서 만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읽어들일 때 그 참된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다.
성춘복은 70년대에 시작되어 80년대로 이어진 기나긴 유랑의 길에서 지친 몸으로 서천행을 감행하며 스승의 고향 그 서쪽 바다에 쉴 섬 하나를 묻으려고 한다. 그 섬은 시인 성춘복이 비로소 발견한 ‘안식의 처소 혹은 미래이며 보람이고 삶의 값’인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그는 또 한 분의 스승인 목월의 고향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곳에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신이 평생을 좇아 도달하려 했던 서정의 시정신이 여전히 순수의 궁극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시정신은 ‘영원한 현재를 추구코자 하는 그리움이고 약속된 길’이었기 때문이다.
성춘복은 석초에게서 시인으로의 삶의 자세와 방법, 그리고 학인(學人)의 인간적 훈기와 지혜를 배웠고, 목월로부터는 서정의 근원으로의 시정신을 물려받아 가슴에 묻으며 유랑의 길을 밟아왔다. 따라서 그의 삶은 목적이나 방향도 없이 떠돌기만 하는 무가치한 것이 아닌 미래의 안식을 위해서는 꼭 가닿아야만 하는 순수의 궁극을 향한 지난한 노정이었던 것이다.
이제 시인 성춘복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가만히 그의 손끝을 응시해보자. 그러면 어느 틈에 감동의 서정 한 편이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곁에서 석초 시인이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멀리서는 목월 시인이 반갑게 손을 흔드는 찰나를 덤으로 목격하는 호사를 누릴지도 모른다.
[출처] 「문학시대」 2023년 봄호(원문의 각주와 참고문헌은 편집상 생락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