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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협회 [國民協會]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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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단체.
구분 : 친일단체
설립연도 : 1920년
소재지 : 한국 서울
설립목적 : 신일본주의 표방
주요활동 : 총독부의 시정방침 지지, 친일파 규합운동 앞장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20년 1월18일 민원식(閔元植)·김명준(金明濬)·김환(金丸) 등이 총독부 경무국 사무관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조
종 아래 친일사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들이 창설한 협성구락부를 개칭, 확대하여 설립하였다. 국민정신 함양,
사상선도, 민권신장, 자치정신 배양 등 허울좋은 구호를 내세우면서 일본과 조선의 병합으로 일본민족만의 일본
이 아니라 일본과 조선의 양민족으로 된 신일본이 되었으니 양국이 협력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신일본주
의를 주창하였다.
1920년 4월 기관지인《시사신문(時事新聞)》을 발행하여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독립운동을 부정
하고 이에 대한 저해공작을 펼쳤다. 한편 초대회장 민원식은 매년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의회에 참정권청원서를
냈는데 이는 일본의 중의원의원선거법을 조선에 실시해달라는 것으로 이를 미끼로 조선의 독립의지를 꺾으려는
정치모략이었다. 민원식은 1921년 2월 제3차 참정권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애국청년 양근환(梁槿
煥)에게 피살되고 김명준(金明濬)·윤갑병(尹甲炳)·신석린(申錫麟) 등이 그뒤를 이어 회장을 맡으면서 참전권청원
운동을 계속하였다.
1922년 5월에는 경영난으로 신문 발행이 어렵게 되자 월간지《시사평론》으로 전환하여 발간하고, 1924년에는 각
파 유지연합(有志聯合)이라는 친일파 규합운동에도 앞장섰다. 참정권청원건은 9회의 의회청원, 17회의 건의서 제
출을 하였으나 일본정부가 허락할 의사가 없던 것으로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중현 [權重顯, 1854 ~ 1934]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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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의 친일파 관리.
본관 : 안동
호 : 경농
별칭 : 초명 재형
출생지 : 충북 영동
주요저서 : 《태사권공실기》 《국재선생실기》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안동. 호 경농(經農). 초명 재형(在衡). 충북 영동(永同) 출생. 1884년(고종 21) 부산감리서 서기관(釜山監
理署書記官)에 이어, 주일공사(駐日公使) ·한성부윤 ·참찬 등을 거쳐 법부대신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
임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으로 규탄받았다.
1910년 국권침탈 후 일본 자작(子爵)이 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편저에는 《태사권공실기(太師權公實記)》 《국재선생실기(菊齋先生實記)》 등이 있다.
김대우 [金大羽, 1900 ~ ?]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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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 고위관료를 지낸 친일파.
출생지 : 평남 강동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평안남도 강동 출생. 1937년 한민족을 일제의 충성스런 국민으로 만들기 위하여 제정되었던 '황국신민서사(皇國
臣民誓詞)'를 기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25년 일본의 규슈[九州]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곧바로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임야조사위원회 서기라는 말단직으로 출발하였으나, 일제로부터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받아 3년 만에 평
북 박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고시 출신자들을 앞지르는 데 성공, 1936년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이라는 고위직에 등용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이른바 교학쇄신(敎學刷新)과 국민정신 함양을 명분 삼아 황국신민화 교육을 담당하던
부서였다. 바로 이 무렵인 1937년 10월 그는 일제가 온 국민으로 하여금 외우도록 한 황국신민서사 제정을 입안
하였다. 이 공로 덕분에 1943년 전북도지사로 승진하였고, 1945년 6월 경북도지사로 일제의 의도대로 동족을 무
마, 회유,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자리를 옮겼다. 해방 전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 이양문제에 대하여 한국인 지도자들과 막후교섭을 벌이라
는 지시를 받아, 여운형·송진우 등과 접촉했을 정도로 일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1949년 친일파로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니, 해방 후 민족의 숙원이었던 친일파 처리문제가 얼마나 불철저했는가
를 알 수 있다.
동아찬영회 [東亞讚英會]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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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친일단체.
구분 : 친일단체
설립연도 : 1909년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적극적 친일운동
주요활동 :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세우기 위한 기부금 모금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09년(융희 3) 민영우(閔泳雨)·이민영(李敏英)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대표적인 친일단체이다. 조선 침략의 원흉
으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동상을 세우기 위한 기부금과 의연금품을 대한제국의
대신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등 국권피탈 전후에 굴욕적인 친일매국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민원식 [閔元植, ? ~ 1921]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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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의 친일파.
활동분야 : 정치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08년 친일파 거두 이지용(李址鎔)과 함께 친일단체 대한실업협회(大韓實業協會)를 조직했고, 1920년 신일본주
의(新日本主義)를 표방하는 국민협회를 조직하는 한편 《시사신문(時事新聞)》을 발행, 사장이 되어 민족지 《동
아일보(東亞日報)》 등을 탄압하다가, 이듬해 도쿄[東京]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민족주의자 양근환(梁槿煥)에
게 살해되었다.
박흥식 [朴興植, 1903 ~ 1988]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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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활동분야 : 경제
출생지 : 평남 용강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평남 용강 출생. 일찍부터 상업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1926년 선일지물주식회사(鮮一紙物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종이와 신문용지 판매에 주력하였고, 이를 계기로 자본을 축적하여 1930년대 중반 화신(和信)의 총수로
성장하였다. 일찍이 금융업에 진출한 귀족가문이나 1920년을 전후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지주가문과는 달리 상업
자본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에는 면직물 수입이 급증하고 고무신 등의 소비재가 대량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과 수요는 여전히
전통적인 장시(場市)나 지방상점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4년 화신연쇄점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전국적 유통체계의 구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의 상업분야는 일본의 자본과 조직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예외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 화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근본 원인은 총독부 지배권력과의 결합에 의한 매판성에 있었다.
그는 총독부 정책 및 경제여건에 재빠르게 적응하는가 하면, 총독부 관료 및 일본인 기업인들과의 유대관계 형성
에 노력하였다. 1938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1942년에는 일
왕(日王)을 만나 ‘대동아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발판으로 일제로부터 대폭
적인 금융지원을 받는가 하면, 태평양전쟁 이후에도 전혀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친일행위로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의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 죄로 최초의 구속자가 되었다. 1955년에는 신신백화점, 1956년에는 화신백화점을 열었으며, 1957년 미국의 웨
스팅하우스와 대리점계약을 체결하고 원자력발전소 건립계획안을 제출할 정도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무산
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송도해수욕장 개발권과 화학섬유공장 설립권을 얻었다. 그러나 막대한 외자를 투입한 흥한화섬(
원진레이온)이 1969년 한국산업은행 소유로 넘어가면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72년 설립, 1973년 일본의
소니사와 합작한 화신산업(지금의 아남정밀산업)이 부도를 내면서 경제활동은 끝났다. 화신그룹의 총수로서 상업
자본가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시중회 [時中會]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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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4년 일선융합(日鮮融合)을 표방하며 한일 합동으로 조직한 친일단체.
구분 : 정치단체
설립연도 : 1934년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친일활동
주요활동 : 자치운동 전개, 실천강령 제정, 친일행위
규모 : 회원 5만 명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34년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제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 및 일선융합을 강조하며,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장 우시지마[牛島省三]와 경무국장 이케다[地田淸]의 주도로 조직된 단체로서, 한국 쪽에서
는 중추원 참의 최린(崔麟), 동양척식회사의 감사를 맡았던 박영철(朴榮喆) 등이 주도했다.
최린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손병희(孫秉熙) 사후 천도교의 실질적인 1인자에 올랐으나
, 세 차례에 걸쳐 자치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미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이탈했는데, 시중회를 조직할 때 천도교
신파인 정광조·조기간 등을 끌어들였다. 이밖에도 김사연·장직상 등 친일파 인사가 동참했고, 친일관료 김대우(
金大羽)가 총독부와의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한일 민간 유력자들이 총망라된 조직으로서 회원은 5만 명에 이르
렀다.
실천강령으로서 신생활의 수립, 신인생관의 확립, 일선일가(日鮮一家)의 결성, 근로신성(勤勞神聖)의 체행(體行
), 성(誠)·경(敬)·신(信)의 실천 등 5개항을 내세웠는데, 주로 정신적인 친일을 강조했다. 1938년 12월 국민정신
총동원조선연맹에 합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애국금차회 [愛國金釵會]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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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7년에 결성된 친일단체.
설립연도 : 1937
구분 : 친일단체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중일전쟁시 일제군수물자 조달
주요활동 : 금제품 헌납,국방비 헌납, 황군 환송 등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고 군수물자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일제는 군수물자의 조달을 위하여 금의 채취와 금
제품의 헌납을 강요하였다. 이에 1937년, 금제 장신구의 헌납, 국방비 헌납, 황군 환송, 총후(銃後) 가정의 위문
·격려 ·조문 등을 목적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애국금차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권유로 귀족, 친일관료들의 부인과 여류명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회장에
김복완(金福緩), 간사에 김활란(金活蘭) ·민채덕(閔彩德) ·심경섭(沈卿燮) ·홍선경(洪善卿) 등을 선출하였다.
사무실을 경성부청에 두었고, 결성식 석상에서 금비녀 ·금반지 ·금귀걸이 등을 헌납하였다.
윤덕영 [尹德榮, 1873 ~ 1940?]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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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 문신 ·친일파.
본관 : 해평(海平)
활동분야 : 정치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해평(海平).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비서감우비서랑(書
監右書郞)이 되었다. 총리대신비서관 겸 참서관(參書官) ·시독관 ·비서승(書丞) ·농상공부참서관 ·내부(內部)지
방국장 등을 거쳐, 1901년(광무 5) 경기도관찰사가되었다. 이어 궁내부(宮內府)특진관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전
임하였으며, 이듬해 철도원 부총재로 경부선(京釜線) 철도부설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지계아문(地契衙門) 부총재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 ·비서원경(書院卿) ·의정부참찬 ·홍문관학사 겸 평리원(平理院)재판장 ·의정부찬성을
지냈다. 1908년(융희 2)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고, 1910년 국권피탈 때 순종에게 강요, 합방조약에 옥새를 찍
게 하였다. 그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았다.
이근택 [李根澤, 1865 ~ 1919]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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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후기 ·한말의 대신 ·친일파.
본관 : 전주
별칭 : 초명 근용
활동분야 : 정치
출생지 : 충북 충주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전주(全州). 초명 근용(根). 충북 충주(忠州) 출생.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다. 1884년 무과에 급
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단천부사(端川府使) ·희천군수(熙川郡守)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냈다. 충청도 수
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전라도 수군절도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병조참판(兵曹參判) ·우부승지(右副承旨)
등을 역임하고, 1897년 친위연대(親衛聯隊) 제3대대장이 되어 장윤선(張允善) ·한선회(韓善會) 등과 모의, 정부
전복을 꾀하다가 탄로나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경무사(警務使)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육군참장(陸軍參將) ·육군
부장(副將)을 역임하였다. 후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을 거쳐 법부대신(法部大臣
)으로 승진하였다. 1905년 군부대신(軍部大臣) 때 을사조약의 체결을 찬성하여 5적신(賊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
을 받았다. 1910년 일본으로부터 국권침탈의 공으로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두황 [李斗璜, 1858 ~ 1916]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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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민족반역자.
본관 : 인천
별칭 : 자 공칠·설악
활동분야 : 정치
출생지 : 서울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인천(仁川). 자 공칠(公七)·설악(雪岳). 서울 출생.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뒤 무과에 급제, 친군좌영초
관(親軍左營哨官)을 시작으로 수문장 등의 무관직을 거쳐 1889년 흥해군수를 지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
어나자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동학군과 많은 전투를 하였다.
특히 북접(北接)들이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기습을 하였고,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하였으며,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노성·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륙
하였고, 전주에 재집결한 동학군을 대패시켰다.
이듬해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명성황후시해에 가담하여 광화문경비를 맡았다가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주
하였다.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
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이성근 [李聖根, 1886 ~ ?]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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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친일파.
별칭 : 창씨명 가네카와
활동분야 : 반민족행위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창씨명(創氏名) 가네카와[金川聖]. 전주(全州) 육영학교를 졸업하고, 황해감찰부 순검(巡檢)으로 있으면서 일본
에 적극 협력, 각처에서 의병들을 토벌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당한 뒤 경부(警部)로 승진하여
1919년 3 ·1운동 때부터 평북 경찰부 고등과장(高等課長)에 발탁되어 6년 동안 근무하면서 압록강 일대에서 활약
하던 오동진(吳東振) 휘하의 독립군을 거의 전멸시켰으며, 재직 중 3백여 명에 달하는 애국동포들을 체포, 송치
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이 공로로 충남도지사를 지낸 후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의 제2
대 사장에 취임, 총독정책을 찬양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친일행위에 더욱 열을 올려, 1943년 12월 김연수(金秊洙) ·이광수(李
光洙)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재일(在日)유학생들의 학병(學兵)자원 권고 협의차 도쿄[東京]에 가서 강연회
를 열었다. 그 후에도 조선인처우개선감사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등을 순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등 광복 직전까지 일제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위원회가 해산되자 풀려났다.
이완용 [李完用, 1858 ~ 1926]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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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의 정치가.
본관 : 우봉
호 : 일당
별칭 : 자 경덕
주요저서 : 《황후폐하 치사문》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우봉(牛峰). 자 경덕(敬德). 호 일당(一堂).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 ·검교(檢校) ·수찬(修撰) ·동학교수(東學敎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1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
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8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 ·교환서총판(交換署總
辦)을 역임하였다. 18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18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
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
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
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
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 1920년 후작(
侯爵)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
》이 있다.
이용구 [李容九, 1868 ~ 1912] 인쇄용 화면
카테고리
·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조선시대
· 인물 > 정치 > 한국정치 > 조선시대
· 지역 > 아시아 > 한국 > 경상북도 > 상주시
개요
친일파의 거두.
호 : 해산
본명 : 대유
별칭 : 일명 상옥, 초명 우필
활동분야 : 반민족행위
출생지 : 경북 상주
주요수상 : 훈 1등 서보장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호 해산(海山). 본명 대유(大有). 일명 상옥(祥玉). 초명 우필(愚弼), 만식(萬植). 경북 상주(尙州) 출생. 아버
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농사일을 돕다가 1890년 동학(東學)에 입교, 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에게 사사(師事
),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최시형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함께
투옥되었으나 사형은 면하였다. 그후 동학당을 진보회(進步會)로 고쳤다가, 1904년 송병준(宋秉畯)의 권고로 일
진회(一進會)에 합병하였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고,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정통(正統)을 이어 천도교(天道敎)를 재편, 이
용구 등 친일세력 62명에 대한 출교(黜敎)처분을 내리자 이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조가 되었다. 한편
윤시병(尹始炳)의 뒤를 이어 일진회 총위원장 ·회장에 선임되어 국민에게 친일사상을 고취하며 고종황제, 총리대
신 이완용(李完用), 일본의 조선통감(朝鮮統監) 등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올리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자
행하였다. 사망 후 일본으로부터 훈(動) 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이윤용 [李允用, 1854 ~ 1939]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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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친일파 ·민족반역자.
본관 : 우봉
본명 : 경중
활동분야 : 반민족행위
출생지 : 평양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우봉(牛峰). 본명 경중(景中). 평양(平壤) 출생. 1869년 돈령부(敦寧府) 참봉(參奉)이 되어 대원군에게 인
정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대원군이 몰락한 후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총애를 받아 1881년 양덕현감(陽德縣
監)을 거쳐 1886년 병조참판(兵曹參判), 1889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1894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그 해 경무사(警務使)가 되었는데, 이준용(李埈鎔)의 왕위찬탈음모사건을 다스림으로써 대원군과 반목, 한때 파
면되었다.
1896년 이범진(李範晉) 등과 모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공시키고,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
후 경상도관찰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지내고, 1908년 영친왕(英親王)의 일본유학 때는 배종(陪從)하였
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동생 완용(完用)과 함께 일본의 앞잡이로서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하였고, 그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이지용 [李址鎔, 1870 ~ ?]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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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말의 친일파 대신.
본관 : 전주
호 : 향운
별칭 : 자 경천, 초명 은용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본관 전주(全州). 자 경천(景天). 호 향운(響雲). 초명 은용(垠鎔). 1887년(고종 2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요직을 거쳐 황해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900년(광무 4) 궁내부협판(宮內府協辦), 이듬해 주일전권
공사(駐日全權公使)를 지내고 1904년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와 외부대신 서리로서 한일의정서(韓日議
定書)에 조인했다.
후에 법부대신 ·규장각학사 ·돈령부판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 때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함으로
써 을사5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7년(융희 1)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이 되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일본 정부가 주는 백작(伯爵) 칭호를 받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일진회 [一進會]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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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 말에 일본의 한국 병탄정책(倂呑政策)에 적극 호응하여 그 실현에 앞선 친일단체(1904∼1910).
설립연도 : 1904년
구분 : 친일단체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친일적 민의의 필요
주요활동 : 대한제국 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 제출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04년 일본이 고문정치만으로 한국정부를 간섭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다고 생각하
여 조직한 단체이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과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 ·유학
주(兪鶴柱) 등이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
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 왕실의 존중, ② 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 시정(施政)의
개선, ④ 군정(軍政) ·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처음에는 서울 지역만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에는 그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으나 지방세력으로서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
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에 개최된 총회에서는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
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洪肯燮)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와 함께 적극적인 친
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10여 일 앞두고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위임함으
로써 국가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국채보상운동(國
債報償運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인 1907년 5월 2일에는 정부탄핵문제(政府彈劾問題)를 제출하여 국채보
상운동으로 야기된 모든 사태가 구한국 정부의 잘못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18일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양위하게 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일진회원들을 토살(討殺)시키
고 일진회 지부 및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 파괴하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哈爾
濱]에서 암살된 이후부터 일진회의 매국행위는 더욱 가열되어 국권피탈안을 순종에게 몇 번씩 상주하기도 했다.
이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등은 송병준 ·이용구 등의 처형을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진회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된 후 9월 26일 친일적 소임을 다하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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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7년에 결성한 친일문예단체.
구분 : 친일문예단체
설립연도 : 1937년 5월 2일
설립목적 : 문예·연예 방면의 친일 사회풍교의 정화
주요활동 : 건전가요운동, 친일 가곡·시 편찬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총독일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종용으로 김영환(金泳煥)·최남선(崔南善)·이광수(
李光洙)와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카기[高木市之助] 등이 중심이 되어 문인·음악가·학자·방송관계자 등 30여 명이
단합하여 1937년 5월 2일 발족하였다. 레코드·영화·연극·라디오 등을 통하여 문예와 연예 방면의 친일 사회풍교
의 정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직은 2개의 부로 나누어 제1부는 한국어 부문에 속하는 문예 및 무악(舞樂), 제2부는 일본어 부문에 속하는 문
예 및 무악으로 구분되었다. 1937년 7월 11일 제1회 신작가요발표회를 개최하였고, 같은 해 8월 24일 시국가요와
《총후풍경가(銃後風景歌)》 《황군격려가》 등의 가사를 제작할 것을 결의, 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에
헌납하기로 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창립 직후부터 전개했던 건전가요운동을 총후보국(銃後報國)의 애국가요운동으
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종군간호부의 노래》(김안서 작사, 이면상 작곡), 《정의의 개가》(최남선 작사
, 홍난파 작곡), 《장성(長城)의 파수》(최남선 작사, 현제명 작곡) 등의 가요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9월 15일 김대우·최남선 등이 작사·작곡한 5편의 한국어 가곡과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신국일본(
神國日本)》 외 16편의 일어 가곡을 대상으로 시국가요 발표회를 개최하였다. 또 9월 30일에는 《매일신보》 주
최, 조선문예회 후원으로 20여 편의 신작가요를 한데 묶어 '총후 반도의 애국가요대회'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
하였다.
또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가곡 《내일》 《동산》 등을 지어 취입하였으며, 북지(北支: 중국 북부) 장병 위문 등
일련의 친일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6월 22일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으로 총회에 참가하여
그 산하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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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 제국주의 황도문학(皇道文學)의 수립을 목적으로 결성한 반민족적 친일문학단체.
구분 : 친일문학단체
설립연도 : 1943년 4월 17일
설립목적 : 황도문학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친일문학단체의 통합
주요활동 : 친일문학 강연회, 찬양시 낭독회, 출진학도 격려대회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 4월 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성하였다. 기존의 조선문인협회, 조선하이쿠작가협회[朝
鮮俳句作家協會], 조선센류협회[朝鮮川柳協會], 국민시가연맹(國民詩歌聯盟) 등 4개 단체의 해산에 따라 조직되
어 1945년 8월 15일까지 존속하였다.
한국에서 일본의 황도문학을 수립하고 문학자의 총력을 태평양전쟁에 집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회장에 야나베[
矢鍋永三郞], 이사장 카라시마[辛島驍], 상무이사 테라다[寺田瑛], 사토[佐藤武雄], 유진오(兪鎭午), 테라모토[
寺本喜一], 이사 이광수(李光洙), 유치진(柳致眞), 최재서(崔載瑞), 사이토[齋藤淸衛], 니시무라[西村公鳳], 사
무국장 테라다[寺田瑛], 총무국장 박영희(朴英熙), 출판부장 기쿠치[菊池武夫], 사업부장 토키우[道久良], 심사
부장 히로야마[白山靑樹], 소설·희곡부 회장 유치진, 평론·수필부 회장 최재서(崔載瑞), 시부 회장 주요한(朱耀
翰), 단가부 회장 히로세[百瀨千尋], 하이쿠부 회장 야마다[山田凡二], 센류부 회장 테라다[寺田五柳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3년 4월 28일부터 5월 8일까지 종군작가강연회, 1943년 4월 29일 일본작가환영간담회, 1943년 5월 4일부터 5
월 9일까지 문예전, 1943년 5월 26일 내선작가교환회, 1943년 5월 27일 해군을 찬양하는 시 낭독회, 1943년 5월
30일 작가들의 조선군 보도연습 훈련, 1943년 11월 5일 출진학도격려대회 등의 친일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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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39년에 결성한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문학단체.
구분 : 문학단체
설립연도 : 1939년 10월 29일
설립목적 : 한국어문의 말살
주요활동 : 친일·반민족적 행사 주관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939년 10월 29일 경성 부민관에서 250여 명의 문인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일본인 가라시마[辛島驍]와 쓰다[
津田剛]의 조종하에 변절한 친일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일본인 쓰다는 녹기연맹(綠旗聯盟)의 주관자로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부장이었고, 가라시마는 경성제국대학
교수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결성 직후부터 위문대(慰問袋) 모집, '문예의 밤' 행사 등 갖가
지 친일·반민족적 행사를 주관하였다.
발기인에는 정인섭(鄭寅燮), 이태준(李泰俊), 사토[佐藤淸],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 김억(金億), 유진
오(兪鎭午), 이태준(李泰俊) 등이 참여하였다. 회장은 이광수, 간사는 박영희(朴英熙), 이기영(李箕永), 유진오,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朱耀翰) 등과 3명의 일본인이 선출되었다.
1943년 4월 조선하이쿠작가협회[朝鮮俳句作家協會], 조선천류협회(朝鮮川柳協會), 국민시가연맹(國民詩歌聯盟)
등과 함께 해체되어 조선문인보국회에 흡수·통합되었다.
일제의 문화정책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국민문학의 건설, 내선일체의 구현, 총력전 수행을 위한 적극협력 등의 구
호 아래 많은 문인들이 친일과 변절의 길을 걷게 되고 한국어문학에 대한 말살정책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최린 [崔麟, 1878 ~ 1958]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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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독립운동가, 친일파.
호 : 고우(古友)
별칭 :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활동분야 : 독립운동, 반민족행위
출생지 : 함남 함흥(咸興)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호 고우(古友). 도호(道號) 여암(如庵) .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함남 함흥(咸興) 출생.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
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9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
하였다. 이어 보성(普城)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
신하였다. 19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19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19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
院參議)가 되었고,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조선임전
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 ·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 ·25전쟁 중 납
북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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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의 침략정책 협력을 위해 조직된 한일합동 친일단체.
구분 : 친일단체
설립연도 : 1938년 7월 7일
소재지 : 한국 서울
설립목적 : 황국신민화와 전쟁협력 선전·선동
주요활동 : 전시 경제정책 협력, 공출 독려, 일본어강습회 등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중일전쟁 중 전시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일본에 설립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운동에 호응하여 1938년 7월 7일
조직되었다. 일본과 한국의 59개 사회단체와 56명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한국측에서는 국민협회·
시중회·계명구락부·조선불교중앙총리원·조선기독교연합회 ·천도교중앙총리원·조선문예회·조선상공회의소 등 25개
단체와
윤치호(尹致昊)·최린(崔麟)·김활란(金活蘭)·박흥식(朴興植)·방응모(方應模) 등 27명이 이에 가담하였다.
조직은 제7대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총재로 총독부 학무국이 중앙조직을 관리하고 행정단위별로 지역연맹을 두
었으며, 그 아래 10호 단위로 '애국반'이란 세포조직체를 운영하였다. 《애국반》《총동원》등의 선전책자도 간
행하였다.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으로 개편되었는데 일본제국주의 정책협력을 가장 큰 업무로 삼
고 내선일체를 내세워 증산운동·공출·학도병 지원·폐품수집·일본어강습 등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인에게 대륙침략
정책을 선전, 선동하고 민중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등 반민족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김태석 [金泰錫, 1883 ~ ?]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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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 아시아 > 북한 > 평안남도 > 양덕군
개요
반민족행위자.
활동분야 : 반민족행위
출생지 : 평남 양덕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평남 양덕 출생. 1909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을 2년 마친 후 귀국, 충남공
립보통학교·평양공립보통학교 교원을 하던 중 12년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을 맡았다. 1918년 경무총감부 고등경
찰과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자를 고문, 반민족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으며, 1919년 경기 경찰부 고등계 형사,
1923년 형사과장으로 승진한 뒤 퇴직하였다. 1924년 경기 가평군수로 출발, 함남 참여관, 경남 참여관 등을 지내
면서 친일한 대가로 종4위 훈4등을 받고, 1944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친일경찰로 ‘고문왕’의 별명을 들
었는데,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사이토[齋藤實]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姜宇奎)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
투사들을 고문하였다. 1949년 체포되어 무기징역과 50만원의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복역하다 1950년에 석방되었
다.
김덕기 [金悳基, 1890 ~ 1950] 인쇄용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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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지리 > 역사 > 한국사 > 일제강점기
· 인물 > 정치 > 한국정치 > 일제강점기
· 지역 > 아시아 > 한국 > 강원도 > 강원도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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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반민족행위자.
활동분야 : 반민족행위
출생지 : 강원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강원 출생. 16년간 평북 경찰부 주임, 고등과장을 거쳐 1942년 평북 참여관 겸 산업부장, 이듬해 참여관 겸 농상
부장을 역임하고 친일 공로로 칙임관 훈4등을 받았다. 친일경찰로 광복군 사령부 총영장 오동진(吳東振), 창의단
(倡義團) 단장 편강렬(片康烈) 등을 체포 또는 옥사케 하여 항일무장독립투쟁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1922년
의열단(義烈團)의 제2차 거사를 좌절시켜 경찰공로기장을 받았다. 그의 자백에 따르면, 16년간 그의 손을 거쳐간
사상범이 1,000명에 달했고, 그 중 사형이 1할, 무기징역 1할, 10년 이상의 체형을 받은 사람이 1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9년 체포되어 최초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6·25전쟁 직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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