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이 불법인가요?
박태식 신부 / 신약학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2).
마르코복음서 10장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친 예수가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다룬다. 이른바 ‘예루살렘 상경기’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상경 길에 오른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행정구역에 따라 북으로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래아와 남으로는 로마 총독이 다스리는 사마리아와 유대로 나뉘어졌다. 따라서 갈릴래아에서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하지만 여행객은 굳이 요르단 강 동쪽 건너편으로 경로를 잡았는데, 이는 이방의 땅 사마리아를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물론 예수가 그런 식의 편견을 갖고 있을 리 만무니(요한복음 4장 참조), 1ㄱ절은 그저 복음서 작가 마르코가 당시 풍습대로 일반적인 여행 루트를 옮겨 적은 데 불과하다.
주변에 군중이 몰려들자 예수는 늘 하시던 대로 그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1절은 흔히 복음서 작가가 만들어 넣은 요약문으로 분류된다. 특정한 시점에 발생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독자들을 위해 중간 중간에 내용 요약을 해줌으로써 글의 흐름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려는 편집 작업이다. 간단히 말해, 예수는 가는 곳 어디서나 인기 최고였다는 사실과 교사로서의 예수 모습을 강조하려는 복음서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구절이다.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에게 이혼에 관해 난처한 질문을 던진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사실 이 질문은 당시 정황을 미루어볼 때 그리 적절치 않다. 율법에 따르면 결혼을 얼마든지 무효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명기 24장 1절에 다음 규정이 나온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장을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그리고 비단 이 규정 뿐 아니라 ‘아내가 남편의 음식을 태우기만 했어도 소박할 수 있다.’(힐렐 율사)나 ‘자기 부인보다 아름다운 부인을 발견하기만 해도 소박할 수 있다.’(아키바 율사) 등의 규정 해설도 있었다. 율법 규정과 그에 대한 율사들의 황당한 해설까지 감안하면 결혼과 이혼은 유대인의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새삼스레 예수에게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물어본 것은, 질문 속에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려는 의도가 이미 강하게 들어있는 셈이다.
바리사이들은 아마 평소부터 예수가 주장했던 바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는 곧잘 이혼 불가 선언을 하셨는데 그 단편들이 여기저기 실려 있다(마태 5,31-32; 루카16,18; 1코린 7,10-11). 따라서 예수의 입장을 잘 알고 있던 자라면 얼마든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남편이 아내를 절대 버리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 하셨는데 저희로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버릴 수 있다면 율법을 우리에게 직접 주신 하느님을 부정하는 꼴 아닙니까? 하느님도 실수를 하시나요? 한 번 진지하게 이 문제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요? 도대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딱히 그 자리에 있진 않았지만 질문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네, 혹은 아니오’로 대답 할 수 있는 성질의 질문이 아닌 것이다.
예수는 난처한 질문을 피해가기는커녕 오히려 맞 질문을 던진다. 즉 이혼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이 어떠한지 물어본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을지 모른다. 안 그래도 이혼에 관한 율법 규정(신명 24,1)을 거론해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던 참인데 스스로 물어보다니! 그들의 귀엔 ‘철컥’하고 예수가 자신들이 쳐놓은 덫에 정통으로 걸려드는 소리가 들렸을 터이다.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했습니다.” 일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물론 예수는 바리사이들의 교활한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덫에 걸린 게 아니라, 이를테면 정공법으로 맞섰다고 할 수 있다.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의 대답엔 실로 굉장한 자신감이 들어있다. 우선 모세의 권위에 대한 예수의 입장이 눈에 띈다. 이스라엘에서 모세는 독보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냈고,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해 하느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율법을 시나이 산에서 직접 받아 전달한 인물이다(출애 20장). 이것만 보아도 하느님과 세상을 매개하는 이로서, 모세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아무려면 율법의 다른 이름이 ‘모세오경’일까! 모세라는 중개자를 제외시킨 채 율법을 거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모세가 그 계명(신명 24,1)을 남겨놓았다고 말씀한다(5절).
여기서 ‘완고한 마음’은 헬라어 ‘스클레로카르디아’의 번역으로 ‘불순종’을 뜻하고, ‘남겨놓다’는 삼인칭 단수 과거 동사형 ‘에그랍센’, 즉 ‘그가 썼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모세가 임의로 이 법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혼’ 문제에 관해서는 모세가 추가한 규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래 의도로 돌아가 마땅하다. 예수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거론한 이유이다(6-9절).
창세기 1,27과 2,24에 따르면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을 만드셨고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된다. 비단 혼배 미사뿐 아니라 일반 주례사에서도 익히 들을 수 있는 구절이다. 신명기 24장1절에 대해 예수가 내린 해석의 독특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예수는 한 가지 율법조항에 다른 율법조항으로 맞섰으며, 그 둘 사이에 놓인 간격을 적절하게 좁혀놓았다.
율사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모세오경’은 하느님께서 통합적으로 이스라엘에 한 번 선사하신 것이기에 자체적인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출애 20,8-11)와 ‘돼지를 먹지 말라’는 부정한 동물 규정(레위 11,7)을 비교해 보면 언뜻 안식일 법이 중요해보이나 둘 다 하느님이 주신 계명이기에(출애 20,1; 레위 11,1) 경중을 따지는 짓은 불경스럽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직접 주신 율법 규정 하나하나를 동등한 의무감으로 지켜야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절대 권위에 손상이 갈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명령에 인간의 가치 판단을 더할 수 있는 여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달랐다. 예수는 율법 조항들 사이에도 경중을 따질 줄 아는 분이었다. 이혼이 가능하게 된 것은 결혼 제도를 농락하는 인간의 가증스런 형태를 보고 모세가 내린 해석에 불과하다. 비록 ‘모세오경’의 권위를 더하기 위해 마치 하느님의 말씀처럼 써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모세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상위법과 하위법
예수의 한 마디로 철옹성 같던 모세의 권위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율법은 문자로 써진 규정이 중요하지 않다. 그리되면 자칫 문자에 얽매여 율법이 주어졌던 처음 정신을 놓치게 된다(문자만능주의).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를 따질 게 아니라, 인간을 남녀로 만들고 그 둘이 하나 됨으로써 세상을 완성해나가는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이 맺어준 짝을 인간이 가를 수 없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마르코복음서 10,1-12는 신명기 24,1의 이혼규정을 주제로 삼아 벌어진 논쟁사화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이혼규정뿐 아니라 율법 전체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알려주는 가늠자 구실을 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율사들의 문자만능주의 법해석에선 발견하기 힘든 상위법/하위법 개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율법조항을 하나로 통합하는 조항을 찾아보려 노력을 기울여 보았으나(마르 12,28-34 참조) 모세의 권위를 희생시키는 모험까지 감행할 용기는 없었다. 예수의 법 해석이 갖는 장점은 ‘끝까지 간다’에 있다.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창조질서’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제도나 교리나 권위도 무용지물이다. 논쟁은 원래 거기까지다.
복음서작가 마르코는 한 발 더 나아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그와 간음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11-12절)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아마 자신의 공동체에 아내나 남편을 버리고 재혼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동체 전체에 보다 분명한 선을 그어주기 위해 11-12절을 추가했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제멋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수의 논쟁사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