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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6일 일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물 0.9 + 수프 0.9 + 숙소 6유로 + 기부 1유로= 9.5유로
오늘 걸은 길 : 에스테야(Estella) -로스 아르코스(Los Arcos) 21km
다섯 시에 일어나 복숭아 두 알과 율무차로 아침을 먹었다. 다섯 시 사십오 분에 출발. 날은 이제 밝아오고 있다.
오른쪽 무릎의 통증은 여전한데다 이제는 왼쪽 복숭아뼈까지 부어올랐다. 거의 달팽이의 속도로 걷는다.
30분쯤 걸었을까. 이라체(Irache) 수도원의 전설적인 수도꼭지가 나온다. 이 수도원의 수도꼭지는 왼쪽을 틀면 붉은 와인이 나오고, 오른쪽을 틀면 물이 나오는 걸로 유명하다. 역시 길 가던 순례자들이 다들 신기해하며 왼쪽 꼭지에 입을 댄다.
▲ 순례자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라체 수도원의 수도꼭지. 왼쪽은 와인, 오른쪽은 물이 나온다(왼쪽). 붉은 와인이 줄줄 흐르는 수도꼭지를 보며 즐거워하는 순례자. 이라체 ⓒ2005 김남희
일곱 시쯤 잠시 휴식. 아픈 다리만 아니라면 나는 얼마나 상쾌한 기분으로 이 아침을 즐기고 있을까? 인터넷도, 우체국도, 내 몸도, 아무것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스페인. 나는 지금 시험에 든 걸까?
"난 지금 지팡이가 필요해. 정말 필요하다구. 오늘따라 길가에 나무토막 하나 보이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중얼거리며 걷는 길.
아께스따라에서 만난 '산신령'
아께스따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 입구에 러닝셔츠에 파란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인사를 건넨다.
"부에노스 디아스(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 산티아고 가는 길인가?"
"씨(네)."
(여기까지는 완벽하게 알아듣고 스페인어로 답했다.)
"어디서 왔나? 중국 사람?"
"아니, 한국 사람이에요."
"북한? 남한?"
"남한요."
"내 인생에 여길 지나가는 한국 사람은 처음 봐. 근데 에스파냐어는 할 줄 알아?"
"아니요."
"아니, 스페인어도 못 하면서 스페인을 여행해? 욕 보네, 욕 봐. 근데, 다리는 왜 절어? 무릎 다쳤어?"
"예."
"지팡이가 하나 있어야겠네. 요로코롬 따라와 봐. 지팡이 하나 마련해줄테니."
"네."
(여기까지는 추리력과 상상력을 발휘했다.)
할아버지를 따라 좁은 골목을 지나 정원을 지나 창고 앞에 다다르니, 세상에, 지팡이용 나뭇단이 가득 쌓여 있다.
날씬하고 가벼운 놈을 고르더니 내 키에 맞춰 톱질까지 해주신다. 그런 후에는 손잡는 부분에 사포질까지 해주시는 할아버지. 그 모습은 완전히 산신령 그대로다.
걷는 법까지 시법으로 보여주시는 할아버지.
"요렇게 땅을 디딘 다음에 네 발을 띄는 거야. 그 다음에 다시 또 요놈으로 땅을 디디고. 알겄제?"
"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걸어. 어여 가."
아무래도 이 길에는 신이 지켜보고 계신 게 아닐까?
지팡이가 생기고 나니 그래도 힘이 좀 난다. 이제 주린 배를 채우는 일만 남았다.
9시가 다 되어 빌라 마요르(Villamayor)에 도착. 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섰다. 카페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알베르게였다.
아줌마가 내 배낭을 내려놓더니 "앉아서 밥 좀 먹고 가" 하신다. 하늘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내가 무릎을 핑계 대며 중도하차할 것 같아 이렇게 기적을 마련해놓은 걸까?
뜨거운 차에 잼과 버터를 바른 바게트를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주인아줌마는 영국에서 20년을 산 브라질 아줌마. 산티아고를 걷고 난 후 이 길에 매료돼 스페인에 정착, 이렇게 작은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을 돕고 있었다.
이제는 배까지 든든하겠다, 걷는 일만 남았다. 오늘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로 가는 남은 여정. 마지막 한 시간은 정말 주저앉고 싶었다. 그늘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땡볕에, 다리는 아프지, 물도 떨어졌지….
▲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이 저녁을 함께 나눈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아나 ⓒ2005 김남희
내가 만난 '최고의 프랑스인들'과 저녁 한 끼
겨우 겨우 마을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알베르게를 지나 두 번째 알베르게로 오니 손님은 아직 한 명도 없다.
6유로라는 조금 비싼 가격 때문인가? 씻고, 빨래하고 난 후 슈퍼에서 아스파라거스 크림스프를 사다가 끓여먹었다.
두 시간쯤 자다가 온 몸의 통증과 열로 깼다. 아직 저녁 7시 반. 올케가 보내준 잣죽을 꺼내 끓여 먹었다. 심심하다. 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해보니 국토종단 할 땐 얼마나 천국이었던가. 배낭도 너무나 가벼웠지, 다리도 안 아팠고, 방은 늘 독방이었지. 무엇보다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됐었고, 말도 너무나 잘 통했고, 태양도 훨씬 순했으니. 그땐 전화도 있었는데, 여기선 인터넷조차 안 되고….
조금 서러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백발의 할아버지가 인사를 건넨다.
"나는 프랑스에온 온 대니. 넌 어디서 왔니?"
"한국요."
"대단한데! 여기까지 오다니. 오늘 저녁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는 영광을 베풀 수 있는지?"
"감사하지만 저 이미 밥 먹었는데요."
"그건 밥이 아니지. 겨우 수프 한 그릇 먹었잖아. 그러지 말고 이 길에서 그대가 만난 최고의 프랑스인들과 저녁 한 끼 하는 게 어때?"
할아버지의 정중한 태도와 유머가 재미있어서 결국 초대에 응했다.
식탁의 일행은 나까지 네 명. 대니와 조엘 할아버지는 알제리 전쟁에서 만난 50년 친구이자 원수라고 한다. 조제트 아줌마는 산티아고를 걷던 중에 만난 인연. 아줌마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시작해 지난 한 달간 이미 800km를 걸었다.
샐러드와 파스타, 과일, 맥주와 토속주 로즈와인 한 잔. 할아버지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밤이 내리고 있다.
▲ 순례자들의 길 이정표가 되는 조개껍질 문양. ⓒ2005 김남희
2005년 6월 27일 월요일 흐림
오늘 걸은 길 :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비아나(Viana) 19km
오늘 쓴 돈 : 귤 1.1 + 진료비 50 + 인터넷 2 + 과일 1.62 + 전화 1 + 숙소 5 = 60.72유로
새벽 5시에 기상. 5시 40분에 숙소를 나선다. 밥도 안 먹고 출발했는데 한 시간 동안 길을 못 찾고 헤맸다. 알베르게로 향하는 표지를 길안내 표지라 착각하고 따라 들어가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니 벌써 무릎이 아파온다.
절룩거리는 무릎을 끌고 걷는 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쳐간다. 나보다 느린 사람, 내 뒤에 오는 사람은 없다.
달팽이보다 느린 속도. 달팽이는 제 곁을 스쳐 달아나는 존재를 보며 슬펐을까. 화도 났을까. 제 존재에 절망하기도 했을까. 아니, 달팽이는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제 갈 길을 갔을 거야.
약해지는 스스로를 추스르며 걷는 길. 얼마나 느린 속도로 걸으면서, 얼마나 자주 쉬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다리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무릎 뒤로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러워서, 무릎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 걷다가 멈춰 서서 울었다.
나는 과연 이 길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이렇게 가다가 심하게 무릎을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 오늘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비아나 성당 입구의 조각. 13세기. ⓒ2005 김남희
'열흘 휴식' 처방...한 일주일 쉬어버려?
8시 40분. 산돌(Sandon)에 도착.
먼저 와 계시던 조엘과 대니 할아버지가 무릎에 약을 바른 후 무릎보호대로 감아주셨다. 벨기에인 아저씨 애디도 먹는 약과 빵, 치즈를 나눠주셔서 배를 채우고 알약을 삼켰다.
산돌을 떠난 지 네 시간 만에 비아나(Viana)에 도착했다. 11km를 걷는데 네 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교회 옆 알베르게는 침대도 없이 매트리스만 깔려 있는 작은 곳이었지만 자원 봉사하는 아저씨 아르뚜로의 친절은 '홍보대사'급이다.
절룩거리며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내 배낭을 받고, 의자를 내주며 쉬라고 하신다. 그리고 음식을 내주며 이걸 먹고 병원에 가보자고 한다. 아저씨가 요리한 파스타를 먹고 함께 병원에 갔다.
50유로라는 엄청난 진료비를 내고 만난 의사는 열 마디도 안 했다. 십자인대가 늘어났다는 것, 최소 열흘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 무리하면 파열할 수 있다는 것, 알약 아침 저녁에 두 번씩 먹으라는 것. 그게 다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 이틀 쉬고 배낭을 택시에 배달시키고 하루 10km씩 걸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 기회에 바르셀로나에 내려가 까를로스와 페드로도 만나고 시내관광이나 즐기며 한 일주일 쉬어야 하는 걸까?
마음이 어지럽고, 생각의 갈피는 잡히지 않는다.
거센 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고 나니 바람이 한결 서늘해졌다. 광장의 바에서 조엘, 대니 할아버지, 조제트 아줌마를 만나 레모네이드를 탄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리아를 만나 잠시 수다.
마리아는 땅콩버터 병을 들고 다니던 미국인 아줌마의 뒷이야기를 해준다. 마침내 그녀는 뭔가 교훈을 얻었는지 짐의 상당부분을 알베르게에 기증하고, 지금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교회순례'로 목적을 바꾸었단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까를로스에게 전화했다. 의사로부터 열흘 휴식이라는 처방을 받았다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럼, 바르셀로나로 와. 우리 집에서 쉬면 되잖아. 당장 내려와"라고 한다.
결국 바르셀로나로 가기로 했다. 페드로도 만나고, 지영이가 부탁한 가우디 건축물 사진도 찍고, 푹 쉬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수밖에!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로마까지 2000km 걷는다는 아르뚜르 할아버지
이곳 알베르게는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게 전통이다. 9시에 다들 둘러앉아 아르뚜르가 직접 준비한 식사를 함께 나눴다. 목사들은 식탁에서 '6명에 와인 한 병'을 적정량으로 권하지만 난 목사가 아니니까 더 마시자며 와인을 연달아 내놓는 아르뚜르.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돕고 광장에 앉아 아르뚜르 할아버지와 수다를 떨었다. 그는 전에 선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항에도 여러 번 왔었다고 한다. 35년간 갑판 위에서 산 생활이 지겨워 이제는 땅 위를 걷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산티아고를 무려 4번이나 각기 다른 길로 걸었다. 짧게는 750km에서 길게는 1500km까지.
화장실도 치워주고, 요리도 해주는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그 길을 행복하게 걸을 수 있었기에, 이제는 그걸 갚을 때라고 생각해 1년 간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이 일이 끝나면 그의 고향인 빌바오에서부터 로마까지 2000km를 걸어갈 거라는 아르뚜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로마까지 무사히 다녀오기를 기원해본다.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너무나 좋다. 아르뚜르 할아버지 덕에 '오루호'라는 술도 맛 봤다. 포도의 껍질로 만든 38도짜리 스페인 북부지역의 전통주. 아무래도 나는 '알코홀릭'이 되어가는 것 같다. 식사에 곁들이는 술이 점점 맛있어지니.
Recuerde el alma dormida
Avive el seso y despierte
contemplando,
Como se pasa la vida
Como se viene la muerte
Tan callando
잠든 영혼을 기억하세요.
인생이 어떻게 지나가고
죽음이 어떻게 저리도 조용히 다가오는지
깨어난 의식으로 바라보면서.
비아나의 알베르게에 적혀 있던 글.
15세기 스페인 시인 호르헤 만리께의 시(Jorhe Manrique)
2005년 7월 4일 월요일 맑음.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의사로부터 '열흘간 휴식'이라는 처방을 받은 이후 일주일만에. 그 사이 바르셀로나로 내려가 산티아고를 걷다가 만난 까를로스의 집에서 머물렀다. 일주일 간의 휴식 후, 걷다가 멈춘 지점인 비아나(Viana)의 같은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르뚜르 아저씨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새로 온 대학생 봉사자 까를로스가 나를 맞는다.
“네가 그 한국인이지? 네 얘기 들어서 알고 있었어. 이제 무릎은 괜찮니?”
“응, 많이 좋아졌어.”
“얼른 올라가서 짐 풀고 내려와. 저녁 식사, 9시인 거 알고 있지?”
“응. 오늘은 뭐가 나올지 기대되는데!”
▲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오르는 순례자. 이 길에는 걷는 사람뿐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해 순례를 하는 사람도 많다. ⓒ2005 김남희
방으로 올라와 짐을 푼다. 배낭 속에 든 신라면 두 개. 바르셀로나에서 구입한 이 신라면 두 개를 보고 있자니 왜 이렇게 든든한 걸까. 만약 향수병에라도 걸린다면, 이 매운 라면 한 그릇이 조금은 나를 달래줄 수 있겠지. 바르셀로나에서 산티아고의 우체국으로 짐도 부쳤겠다(산티아고의 중앙우체국에서는 순례자들의 짐을 2개월 간 무료로 보관해준다), 이제는 한결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다시 걷는 일만 남았다.
오늘은 성당의 신부님까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성당으로 갔다. 우리 숙소의 빨래를 너는 창고가 교회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였다. 신부님이 성당 2층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동안 천천히 교회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빈 성당.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 알베르게에서 파는 티셔츠에 쓰인 그림. “고통 없이 영광 없다.” ⓒ2005 김남희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마음 속에 가득한 감사와 기쁨을 당신은 느끼고 계시겠지요? 저를 이 세상에 오게 하신 분, 건강한 몸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당신이라면, 감사드립니다. 이제 내일부터 저는 다시 길 위에 섭니다. 제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도록 허락 하소서. 끝까지 가야만 한다는 욕심에 제가 많은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소서. 이 길 위에 욕심과 미련과 어리석은 마음은 다 내려놓을 수 있기를, 그래서 길의 끝에 섰을 때 깃발처럼 가볍게 나부낄 수 있기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나눌 수 있는 여백과 용기를 허락하소서. 아멘.”
▲ 중세 시대에 건설된 로그로뇨의 다리 사이로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2005 김남희
2005년 7월 5일 화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점심 3.8 + 타파 5.6 + 숙박 10 = 19.4 유로
오늘 걸은 길 : 비아나(Viana) - 나바레떼(Navarrete) 23 킬로미터
다시 시작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걷고 싶었지만 진단서를 떼야 하는 병원이 8시에 문을 여는 덕에 6시 반에 일어났다. 부엌에 준비된 음료수와 비스켓으로 아침을 먹고, 병원에 다녀온 후, 출발.
햇살은 벌써 뜨거운데 바람은 아주 서늘하다. 아침의 이 신선한 공기 속에서 대지로 나아갈 수 있음이, 내 두 발로 걸어 세상을 만날 수 있음이 경이롭고 감사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인사하며 손 내밀고 싶은 아침. 30분 걷고 난 후 교회의 마당에서 잠시 쉬었다. 무릎은 아직 괜찮다. 조심조심 걷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고는 한다.
로그로뇨(Rogrono)로 향하던 길에 사고 발생! 내 뒤에 오던 독일 아저씨가 나무 등걸에 걸려 넘어지면서 나를 같이 걸고 넘어졌다. 예상치도 않은 순간에 너무도 어이 없이 온몸이 바닥으로 팽개쳐지는 일이 생겼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오직 오른쪽 무릎을 다져서는 안 된다는데 생각이 집중되고 있었다. 다행히 심하게 넘어지진 않았는데, 그 이후 무릎과 발목이 약간 시큰거려 걱정이다.
두 시간 후 로그로뇨 도착. 알베르게 앞에 가방을 맡아주는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처음 만나는 큰 도시. 까를로스가 이 도시의 라우렐 골목에서 타파를 꼭 먹어보고 가라고 한 데다, 아름다운 교회가 많이 남은 역사 깊은 곳이기에 천천히 마을을 둘러본다.
▲ 로그로뇨의 어여쁜 성당 이글레시아 산 바르톨로메의 입구 천장 장식 ⓒ2005 김남희
이곳의 성당들을 둘러보다가 내 마음에 쏙 드는 어여쁜 성당을 만났다. 이글레시아 산 바르톨로메(Iglesia San Bartolome). 독특한 입구와 단순하면서 기품 있는 실내 장식, 적당한 규모가 나를 매료시키는, 지금까지 만난 교회 중에 가장 어여쁜 교회이다.
시내 중심가의 성당 네 개를 모두 둘러보고, 라우렐 골목(Calle Laurel)으로 간다. 북부 스페인 지방의 대표적인 간식거리라고 할 수 있는 타파(tapas)를 파는 작은 바로 유명한 골목. 너무도 작은 골목이라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작은 골목에 대여섯 개의 아주 작은 바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집에 들어가서는 바게트 빵 위에 새우를 얹은 타파와 야채 샐러드와 절인 멸치를 얹은 타파를 먹고 나와 다시 버섯 타파 한 가지만 한다는 집으로 갔다. 올리브 오일과 마늘, 소금을 뿌려 구운 양송이 위에 새우를 얹어주는 타파가 얼마나 맛있던지 타파 두 개에 스페인 토속주인 로제 와인까지 한 잔 곁들여 마셨다.
와인과 곁들여 타파를 먹는 나에게 주인 아저씨가 “그게 바로 제대로 타파를 먹는 법이야”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준다. 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혼자 바에서, 그것도 대낮에, 와인을 즐기게 될 줄이야! 이 즐거운 변화가 산티아고로 인한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두 시간 넘게 시내를 둘러본 후 로그로냐를 떠나 다시 걷는다. 한 잔 와인으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 살짝 감겨오는 취기에 몽롱해져서 걷는 길. 잠시 후 길가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고! 열흘만 쉬면 괜찮아진다고? 꼬박 일주일이나 쉬고 왔는데 아직도 무릎이 아프잖아!”
오후 내내 무릎이 당기고 시큰거려 울고만 싶었다.
4시가 넘어서야 나바레떼(Navarrete)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부의 3유로짜리 알베르게에는 방이 없어 10유로짜리 사설 알베르게로 왔다.
▲ 로그로뇨의 타파 골목의 바에서 맛 본 버섯 타파와 로제 와인 한 잔. 의자도 없는 이렇게 작은 바에 서서 스페인 사람들은 와인 한 잔에 타파를 즐긴다 ⓒ2005 김남희
그 사이 나를 넘어뜨린 독일인 아저씨 클라우스와 잉게보르그 부부가 음료를 대접하고, 자신들이 머무는 숙소로 나를 끌고가 방을 얻어주려 하는 바람에 좀 당혹스러웠다. 그 호텔에 방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괜히 부담스런 밤을 맞을 뻔 했다. 아저씨 부부는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넘어뜨린 빚이라며 계속 뭔가를 대접하고 싶어한다. 결국 아저씨 부부의 간절한 저녁 초대에는 응하기로 했다.
“넘어뜨린 사람마다 밥 사주고 방 잡아주면 곧 파산하겠어요”라는 내 말에 아저씨는 웃으며 “네가 처음이야”라고 대답한다.
숙소에 도착한 후 씻자마자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3시간을 누워 있었다. 8시 45분에 클라우스 아저씨와 잉게보르그 아줌마가 숙소로 나를 데리러 왔다. 이 마을에서 가장 맛있다는 식당 ‘Meson El Albero’로 갔다.
식당에 들어서니 박제가 된 두 마리 황소의 머리가 걸려 있다. 소의 이름 및 족보와 함께. 투우를 사랑하는 스페인 민족답다. 자리를 잡고 앉아 요리를 주문하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스페인어 메뉴를 전혀 읽지 못하는 나를 위해 클라우스 아저씨가 메뉴를 일일이 번역해주면 그 중에서 골라야 하니까. 내가 고른 요리는 전채로 "Pimientos del piquillo a la crema de Idiazabal" 그리고 주요리로는 "Lubina al horno, plancha y sofrito". 잉게보르그 아줌마는 생선찜과 구이 사이에서 망설이는 동안, 클라우스 아저씨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Presa iberica a la brasa”를 주문한다.
“그건 무슨 요리예요?”라고 묻는 나를 돌아보며 씩 웃는 아저씨.
“나도 몰라. 모르기 때문에 한 번 주문해보는 거야.”
식탁에서 너무나 보수적이 되는 나는 아저씨의 그 용감함이 부럽다. 이곳에서 먹은 저녁 식사는 그동안 스페인에서 먹은 식사 중에 가장 맛있다. 크림 소스에 요리한 파프리카, 마늘과 올리브 오일 양념에 구운 농어 구이가 얼마나 맛있던지, 먹는 내내 행복해하며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 나를 넘어뜨린 죄로 저녁식사를 대접한 클라우스, 잉게보르그 부부 ⓒ2005 김남희
아저씨 부부는 독일의 고향마을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왔다. 한꺼번에 걸은 건 아니고 지난 3년에 걸쳐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걸어왔다고 한다. 올해에는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며 웃는다.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는 스페인의 이 작은 마을들마다 들어선 웅장하고 오래된 교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교회들의 많은 부분이(특히 15세기 이후의 교회들) 남아메리카에서 약탈해온 금과 은에 기댄 바가 컸음을 이야기하다가 아저씨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인을 세상 바깥으로 몰고 간 동력이 뭐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난 두 가지였다고 생각해. 바로 호기심과 탐욕.”
호기심과 탐욕이라. 나를 세상 밖으로 내모는 동력은 무엇일까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본다. 호기심과 열정이 아닐까. 숙소까지 바래다준 아저씨 부부와 작별하고 숙소에 들어서니 벌써 코 고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05년 7월 6일 수요일 흐림
오늘 쓴 돈 : 메론 2.23 + 숙박 5 + 점심, 저녁 장 본 비용 6.14 = 13.37 유로
오늘 걸은 길 : 나바레따(Naverreta) - 나헤라(Najera) 20 킬로미터
5시 기상. 차 끓여 마시고 짐 꾸려 나오니 5시 50분. 어젯밤 우리 방엔 정말 최악의 ‘코골이’가 있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잠을 설쳤다. 코를 곤다는 사실만으로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맹렬한 적개심을 품을 수 있다니!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나이는 실컷 자고 제일 먼저 일어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 나헤라의 알베르게 벽에 그려진 순례자 그림 ⓒ2005 김남희
오늘은 날이 흐리다. 걷기에는 좋은 날씨. 다시 양쪽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온다. 아, 정말이지 물집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10시 정각. 나헤라(Najera)의 알베르게에 도착. 이 곳 알베르게는 오후 2시에 문을 연다니 4시간을 바깥 벤치에서 기다려야 한다. 더 갈까 고민하다 무릎을 생각해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배낭을 맡기고 마을을 둘러본다. 불행히도 이 마을은 지금껏 만난 스페인의 마을 중에 가장 안 예쁘다. 아무런 개성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선 마을은 가난하고 낙후한 인상을 준다. 역시 가이드 북에도 이 마을이 가장 흉한 곳 중 하나라고 쓰여 있다.
이제 12시 45분. 아직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알베르게 앞에는 조금씩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들 몸에서 나는 진한 땀 냄새. 내 몸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진한 냄새가 풍기고 있겠지.
마침내 문을 연 알베르게. 거대한 병동 같다. 65명이 한 방에서 함께 자는 이곳.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푹 끼쳐오는 의약품 냄새. 한 사람도 어느 한 구석 멀쩡한 곳이 없다. 절뚝거리는 나를 본 이곳 알베르게의 호스텔리오(알베르게에서 자원봉사하는 분들을 이렇게 부른다) 아줌마.
약품통을 들고 나와 내 물집을 따고 정성껏 약을 발라준다. 물집 따는 집게와 반창고를 주머니에 넣어주며 나를 꼭 껴안아주는 아줌마. 내가 혼자 걷는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늘 관심의 대상이자 과도한 친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게 고맙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한민국 대표선수’라도 된 듯해 부담스럽기도 하다.
▲ 나헤라 마을의 중심부 ⓒ2005 김남희
짐을 풀다가 보니 옆자리가 일본인들이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카톨릭 신자인 마끼야마 부부와 스물 다섯 살 난 나오코. TV에서 산티아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45일 간 걸으러 온 나오코. 가이드북을 구하지 못해 그녀는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불어판 가이드북을 지도만 보며 들고 다닌다. 그래도 파리에서 영어 가이드북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나는 다행인 셈이다. 지난해 이 길을 걸은 일본인이 117명이나 있었는데 일본에 가이드북이 없다니 놀랍다.
나오코의 수첩에는 이병헌과 권상우의 사진이 가득하다. 그녀가 구사하는 몇 마디 한국말도 전부 한국 드라마에서 배운 거란다. 위대한 드라마의 힘이여.
슈퍼로 저녁거리를 사러 가던 길, 이곳 알베르게에서 마지막 도장을 받고 핀란드로 돌아간다는 아줌마들을 만났다. 그들이 “홈”이라고 말하는 순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도 집이 그리워졌다. 지금 내 머릿속은 너무나 많은 그리움과 미련과 욕망들이 뒤엉켜 있다. 실타래 풀 듯 하나씩 풀어낼 수 있을까. 보고 싶은 얼굴, 맴도는 이름 하나도 지워낼 수 있을까. 멀리 떨어져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은 깊어져 간다.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머릿속이 백지처럼 깨끗할 수 있다면 좋겠다.
2005년 7월 7일 목요일 오늘도 흐림.
오늘 쓴 돈 : 우표 21장 16.38 + 저녁 5 + 숙박 3 +인터넷 2 = 26.38유로
오늘 걸은 길 : 나헤라(Najera) -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Sto. Domingo de la Calzada) 21.5km
▲ 밀밭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쥬느비에브. 상큼한 외모 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운 스무 살 처녀 ⓒ2005 김남희
차츰 별빛이 스러지면서 새벽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멀리 부지런한 오두막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어서 간간이 방울 소리가 새벽 정적을 깨뜨린다. 무거운 몸도, 배낭의 무게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즐겁고 경쾌한 걸음을 표현할 적당한 어휘가 무엇일까.
사람이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은 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길을 더 즐기려 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에밀 자벨
오늘도 언제나처럼 5시에 눈을 떴다. 어제 사다 놓은 빵과 과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6시에 길을 나선다.
눈이 커다란 처녀가 내게 와 묻는다.
"너와 함께 걸어도 되니?"
"물론이지."
그녀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온 스무 살 처녀 쥬느비에브. 프랑스의 르 푸이(Le Puy)에서 시작해 지난 40일 동안 이미 1000km를 걸어왔다.
"전에 난 내가 가는 길에 장애가 생기면 그걸 확 치워버리거나 무시하고 무조건 앞을 향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어. 하지만 지금 이 길에서 난 다른 걸 배우고 있어.
처음에 난 하루에 몇 킬로를 걸어야 언제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걸 늘 명심하면서 거기에만 초점을 맞췄어. 그러다보니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사람들하고의 만남도, 이야기할 기회도 잃고, 이 작고 어여쁜 마을들을 둘러보는 즐거움도 잃어버리고 있었어.
산티아고에 가서 '왔노라. 봤노라. 이겼노라' 하고 휙 돌아서서 가기 위해 여기에 온 건 아니잖아. 그래서 지금은 가이드북도 시계도 다 던져버리고 그냥 천천히 걸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면서. 작고 어여쁜 마을에선 오래 멈춰 서서 쉬기도 하면서.
아마 난 산티아고까지 못 가고 캐나다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 처음에 산티아고를 포기해야 했을 땐 속상해서 좀 울기도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년에 다시 오면 되는 걸."
스무 살 나이에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니!
그래,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가느냐의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의 과정인 것을!
스무 살에 인생을 깨달은 '퀘베콰' 아가씨
쥬느비에브는 서투른 영어로나마 열심히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 애쓴다(그녀는 불어를 쓰는 퀘벡 지방에서 나고 자란 탓에 영어가 서툴다).
"내년에 난 남자친구랑 같이 산티아고에 올 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같이 하는 건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난 내 사랑을 시험해보고 싶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 어떻게 값어치 있는 걸 얻겠어?"
구구절절이 옳은 말만 하는 그녀.
▲ 태양이 나오지 않아 그래도 걸을 만했던 오늘의 밀밭길 ⓒ2005 김남희
지난 40일을 걸어오는 동안 그녀는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변했다고 한다.
"난 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이 길을 걷는 동안 내 안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 전에 난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오직 나일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여전히 나이지만 그 길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걸 믿어."
그렇게 믿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삶의 위안이 될까.
네 시간쯤 걷고 나니 다시 오른쪽 무릎이 아파온다. 언덕의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는다. 바게트와 치즈로 간식을 먹고 다시 출발. 끝없는 밀밭길. 오늘 해가 안 나왔기에 망정이지 해가 나왔으면 땡볕 사우나 할 뻔 했다.
쥬느비에브가 내게 묻는다. "Thank you"를 한국말로 자기 수첩에 써달라고.
"내 인생에서 정말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거든.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신 분들이야. 그분들께 엽서 쓸 때 감사하다는 말을 각기 다른 나라 말로 적고 싶거든."
그녀가 감사하고 싶은 분들은 6개월 간 사귀다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 헤어진 남자친구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는 그녀. 딸처럼 사랑해주셔서 고맙다는 편지를 쓸 줄 아는 어여쁜 마음. 상큼한 외모, 발랄한 성격만큼이나 속도 깊은 '퀘베콰' 아가씨이다.
산토 도밍고 성당의 유명한 닭 두 마리
11시 반, 오늘의 목적지인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 도착. 큰 알베르게를 피해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씻고, 두 시간 자고 난 후 동네를 둘러보고 슈퍼에 가서 장을 봤다. 버섯과 참치와 마늘과 양파와 고추를 넣은 파스타 아라비아타와 샐러드로 나오꼬, 마끼야마 부인, 독일인 로만 이렇게 다섯이서 저녁을 먹었다.
"와. 정말 맛있는 파스타야. 산티아고 걷기 시작한 후 최고의 파스타야"라면서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해 요리하는 일의 즐거움.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보며 갖는 기쁜 마음. 오랜만에 맛보는 일상의 행복이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산토 도밍고 성당의 유명한 닭 두 마리를 보러 갔다. 암탉과 수탉을 보러 성당에 간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이다. 나뿐 아니라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닭들을 보기 위해 성당에 온다. 과연 성당의 동쪽 벽에는 고딕 양식의 닭장이 있고, 그 안에 하얀 닭 두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다.
이 닭에는 멋진 전설이 전해져온다.
▲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의 성당 ⓒ2005 김남희
때는 14세기.
한 독일인 청년이 부모 및 하녀와 함께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가는 길이었다. 젊고 잘 생긴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하녀가 열렬하게 고백을 하며 유혹을 해왔지만, 우리의 청년, 냉담하게 모욕을 주며 응하지 않았단다.
분노와 모욕으로 제 정신을 잃은 하녀는 그의 가방에 금술잔을 넣었고, 그 이하는 뻔한 순서로 전개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을 품은 여자의 진노는 늘 이렇게 유치한 방식으로 표현된다니!).
청년은 절도죄로 붙잡혀서 교수형을 당한다(실제로 이 길을 걷다 보면 작은 마을마다 공개처형대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절망하고 좌절한 청년의 부모는 그러나, 신앙심 깊은 이들이라 그런 불행한 사고 중에도 순례를 계속 이어간다. 순례를 마치고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길, 인정 많으신 우리의 신은 이 신심 깊은 부모에게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으니! 다름 아닌, 그들의 아들이 교수대에 달린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기적을 목격하게 되는 것!
흥분한 부모는 마을의 읍장에게 달려가 기적을 이야기하고, 아들을 교수대에서 내려줄 것을 요청한다. 읍장의 반응은 우리가 예상하는 그대로이다. 경멸적인 말투를 숨기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면 이 식탁의 구운 닭 두 마리도 살아있겠구려."
그가 구운 닭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려는 바로 그 순간, 이 닭 두 마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식탁에서 뛰어내리며 요란하게 울어댄다. 결국 청년은 석방되어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 신을 섬기며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그 이후 이 마을의 성당은 매달 닭 두 마리를 새로운 닭으로 교체하며 성당 안에 감금하는 의식을 대대로 몇 백 년 동안 이어왔다. 이 닭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례자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내내 행운이 함께 한다기에 아무리 귀를 기울이며 기다려도 닭들은 울지 않는다.
▲ 산토 도밍고 델 라 칼자다 마을의 성당 외부 벽 ⓒ2005 김남희
성당의 닭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쥬느비에브는 자기가 만난 인상 깊은 순례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네덜란드인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에서 출발해 지난 4달 동안 걸어서 산티아고로 가고 있다고 한다. 올해 나이 여든 두 살인 스페인 할아버지. 벌써 산티아고를 각기 다른 길로 14번이나 걸었단다.
와인도 엄청 많이 마시고, 담배도 무진장 피워대는 할아버지. 그러면서도 젊은이보다 더 힘차게 씩씩하게 걷는다는 할아버지. 역시 젊음은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