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가 우리 문화유적전문답사가 과정 마지막 답사이다.
마지막이 뭐 어때서? 마지막 답사라고 크게 의미부여하며 괜스레 센티멘탈 해지지 말고 끝까지 냉정함(?)을 갖고 떠나보자 했다.
그나마 쉽게 느껴진 공양왕릉 해설을 류샘한테 넘겨받아 보광사를 해야 되는 괴로움을 조금은 덜었고, 답사가기 전날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하고 갔는데 늘 느끼는 거지만 준비한 것보다 항상 제대로 전달을 다 못한다는 것.
공민왕 17년인 1368년, 고려에 큰 영향을 미치던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기어 북쪽으로 밀려 나고, 공민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 등 원나라 세력을 제거하는 등 개혁에 착수 하지만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승려 ‘신돈’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왕위에 오른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인 ‘반야’사이에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므로 진짜 왕씨가 아니라고 하여 1388년 폐위시키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천을 받아 창왕을 옹립한다. 1년 후인 1389년 이성계는 창왕도 폐가입진을 내세워 폐위시키고 위화도회군으로 ‘시대의 라이벌’인 최영장군을 처형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모든 권력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에게 넘어간 그 즈음, 신종의 7세손인 “요”가 공양왕으로 옹립되었다. 그의 나이는 당시로서는 이미 노년을 바라보는 45세.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 으로 세워둔 이성계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을 거리낌 없이 추진하였고, 순차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여 1392년 공양왕의 폐위와 함께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왕으로 추대된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공양왕의 이름은 “요”, 20대 신종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 비는 창성군 “진”의 딸 순비 노씨이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웠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유약한 임금일 수밖에 없었다. 즉위 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죽이고, 1392년 조건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394년 다시 삼척부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고 만다.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과 강원도 삼척, 고성에 있다. 왜 공양왕릉은 3기가 각각 조성된 것일까? 공양왕은 원주, 간성 등으로 쫓겨 다니다가 1394년 삼척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이에 삼척에 공양왕의 첫 번째 능이 조성되었고, 이후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된 1416년 군으로 강등되었던 공양왕을 왕으로 다시 추봉하였고 이즈음에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인접한 고양시로 능을 이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공양왕이 최종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은 고양시인 것으로 판단하여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91호로 지정되었고,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홍문관 박사 함부열이 극진히 모시던 공양왕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석관에 모셔 고성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매장하여 보존하였다는 설이 있다. 함부열은 이 사실을 후손들에게만 전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최근까지도 공양왕 후손인 왕씨 종중과 함부열의 후손인 함씨 종중이 이곳에서 공동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공양왕릉 뒤로 보이는 것은 조선 사대부들의 무덤이다. 화려한 석물과 비석들이 옹색하고 허름한 공양왕릉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긴 자들의 역사 그 역사 아래서 사대부들보다 대접을 받지 못한 공양왕의 능. 참 씁쓸한 현상이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
1392년에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지금의 왕릉 근처로 도망쳐오게 된다. 마침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졌고,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 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했다. 그러나 때가 때이니 만큼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간신히 피신하게 되었는데, 인근 절의 스님들이 밤마다 몰래 공양왕에게 식사를 날라다주었다. 이러한 이유로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 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왕이 잠들었다는 의미의 어침이 마을, 왕이 머문 곳은 한낱 고개라도 대궐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대궐고개, 왕이 묻혀 있어 이름 붙여진 왕릉골 등 여러 지면이 생겨나게 되었다.
공양왕릉에서의 해설을 마치고 미션으로 삽살개가 보이도록 셀카찍어 백샘께 보내기를 주었는데 울샘들 참 잘한다...재밌어 한다...사진 받은 백샘도 즐거워 하신다. 참 재밌는 미션이었다.
다음으로 최영장군묘로 향했다. 최영장군도 고려말의 비운의 장군이었기에 공양왕릉과 함께 묶어서 답사지로 정한 것 같다.
연정샘의 수많은 야사와 내려오는 길에 본 무서운 뱀...
우왕 즉위 뒤 고려의 외교는 친명에서 친원으로 바뀌어, 고려·명나라 관계가 악화되었다.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에서 최영장군이 중심이 되어 명의 대 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③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벌할 염려가 있으며,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⑤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참고로 최영장군묘 뒤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은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직공의 묘이다.
소를 찾아 보광사로...
류샘한테 공양왕릉을 토스 받지 못했다면 헐~~ 보광사...덕분에 선옥샘이 보광사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대웅보전
대웅보전 편액: 목판에 양각으로 조각됨 영조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보광사는 신라시대인 894년(진성여왕 8년) 왕명에 따라 도선국사가 국가 비보사찰로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인 1215년(고종 2년) 원진국사가 중창을 했으며, 법민대사가 목조불보살상 5위를 조성하여 대웅보전에 봉안하였다. 1388년(우왕 14년)에는 무학왕사가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1622년(광해군 4년)에 설미, 덕인 두 스님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고 도솔암을 창건하였다. 1634년(인조 12년)에 범종(현 숭정칠년명동종) 봉안 불사가 이루어졌다. 1667년(헌종 8년) 지간, 석련 두 스님이 대웅보전, 관음전 등을 재건하는 등 절을 중수하였다.
소를 찾으라는 백샘의 지령(?)에 마침 그곳에서 어느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소를 찾는다는 것은 즉, 나를 수양하는 참선의 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개심사에서 심우도에 대한 것이 궁금하여 공부를 하던 중 검은 소 흰 소 얘기가 나오는데 검은 소가 수양을 하여 흰 소가 된 것으로 알고 있던 우리들 검은 소는 밤, 흰 소는 낮...그러므로 밤낮으로 수양하라는 뜻이라는 스님의 얘기를 듣고 헉!! 했다는...
욕심이 과했나! 이곳저곳 빠트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싶은 욕심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이때는 괜찮았는데 이것이 나중에 나를 고통에 빠트렸으니...
원통전
지장전
목어는 만세루 툇마루에 걸려 있는데 길이가 287cm, 두깨가 68cm나 되는 용두어 모양을 하고 있어서"용두어신"이라고 한다. 즉 용의머리에 몸은 물고기라는 뜻이다.
대웅보전 외부판벽화: 동측면에 용선입접도, 괴석도, 대호도, 노송도, 연화화생도등 5점, 남쪽에는 위태천도 시가문수동자도, 금강역사도등 3점, 북축면에 백의관음도, 기상동자동 등 2점을 포함해 모두 10점이 있다.
목조석가여래좌상: 대웅보전에 모셔진 다섯분의 부처님중 본존으로 높이 106cm, 어깨폭이 68cm이다.
왼쪽에 보이는 종은 "승정칠년명동종"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1634년에 의해 조성되었다.
대웅보전 내부천장별지화: 주악비처낭이 13점, 도석인물상이 7점, 화훼화 화조가 13점, 기명이 1점 이렇게 있다.
대웅보전 내부천장별지화: 주악비처낭이 13점, 도석인물상이 7점, 화훼화 화조가 13점, 기명이 1점 이렇게 있다.
대웅보전 내부천장별지화: 주악비처낭이 13점, 도석인물상이 7점, 화훼화 화조가 13점, 기명이 1점 이렇게 있다.
웅진전
어실각
범종각
만세루
힘들어 못올라가고 멀리서 찍은 석불전
마지막 인희샘의 인솔로 찾아간 용암사
정작 어느 절인지 이름은 모르고 그저 용미리 석불입상만 찾아갔다. 난 절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바위에 입상이 있는 줄 알았고, 나중에서야 절 이름이 용암사라는 것을 알았다.
삼성각
대웅보전
범종각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 된다.
불상 앞에 섰을 때 그 커다람과 위대함에 놀았고, 뒤로 돌아가니 바위에 머리만 올려놓은...해학(?)과 재치에 또 한번 놀랐다.
힘들어서 뒤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려 했는데 은정샘의 말을 백번믿고 올라가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