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집터도 원서동 74번지에 있다.
전남 담양군 금성면 태생인 그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는 중앙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3.1운동때에는 그 배후의 인물로서 이승훈(李昇薰) 민족대표로 추천하고
1년여의 옥고를 겪었다. 그는 동아일보사(2대) 사장으로 추임했고
1925년 7월 번태평양회의 한국대표로 참석 1926년 9월 재차 투옥 되었다.
출옥후 계속하여 독립정신의 고취를 위하여 투쟁을 하였으며,
8.15후에는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정부수립에 분망하던 중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 당했다.
창덕궁 담자락에 있는 원서동 빨래터다.
이곳은 청계천과 자하문 빨래터와 함께 한양의 3대 빨래터다.
옛날 동북촌의 여인네들은 이곳으로 빨래통을 이고 나와
세상사 고된 이야기, 온갖 꽃으로 피워내며
검은 빨래 검게 빨고, 흰 빨래 희게 빨아대던 곳이다.
지금은 긴 개울이 거의 복개되고,
창덕궁 개수문이 있는 이곳만 옛 흔적을 고이 간직한 채
맑은 물 졸졸 흘러보내고 있다.
고궁 옆에 다국적 형태의 이색건물이 있다.주식회사 한샘의 기술연구소 건물로 경비가 삼엄해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한국 중국 일본 미국풍의 건축물 느낌이 든다.
벽면을 유리로 처리한 건축기법은 아무래도 고궁주변에는 썩 어울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멀리 국내 굴지의 기업총수의 북촌 저택이 보인다.
노수현(盧壽鉉.1899년 ~ 1978) 집터는 원서동 75번지에 있다.
송진우의 집터 바로 옆이다.
그는 근대 미술계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의 후원으로
1944년에 화실을 마련하고 1956년 6월까지 거주하였다.
그때 화실의 신축을 축하해 준
동강 김영한(일중 김충현의 조부)의 칠언시의 글이 있었다 한다.
노수현은 1899년(광무3)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조부는 3·1운동 당시 48인중에 한사람인 노헌용이었다.
1913년 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서화미술원에서
안중식,조석진에게서 서화를 익혔다.
20세에는 동기생인 이상범과 함께 안중식의 서숙인 정묵당에 기거하며
안중식에게 사사를 받아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도안, 삽화의 일을 했으며
신문에 사단만화를 시도하여 한국 신문만화의 효시를 이루었다.